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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과학자로 살다
타까기 진자부로오 지음, 김원식 옮김 / 녹색평론사 / 200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마지막 책장을 덮고나서, 다소 벅찬 나머지 책을 가슴에 꼭 안고 있었습니다.
누렇게 뜬 속지와 단정한 표지가 더욱 정겹게 느껴집니다. '녹색평론사'의 책을 더 구해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생태주의에 대한 호기심
세살 터울의 누나가 한명 있습니다. 누나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조경을 공부했죠.
그녀의 석사시절, 밤낮 없이 연구실에 매여 얼굴 보기도 힘들더니만, 졸업과 함께 엄청난 양의 책과 논문, 보고서, 팜플렛, 등을 가져왔습니다. 그것도 잠시 자리를 비운 제 방에.
떡 하니 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으니 신경이 쓰이는 것은 당연지사.
게다가, 그림이나 사진이 많은 자료들이라 가끔 들춰보는데, 지난 번엔 꽤 마음에 드는 책을 찾아냈습니다.
<시민과학자로 살다>
내용을 확인했을리 만무하고, 이번에도 제목에만 눈독을 들인 셈입니다. 고질병이죠.
누렇게 뜬 속지와 꾸밈이 많지 않은 책 표지에는, 책의 저자 타까기 진자부로오의 활동사진이 있습니다. 그가 반핵집회에서 연설을 하는 장면이죠.
사실, 환경문제, 혹은 생태주의에 대한 제 문제의식은 대략 이랬습니다.
" 흔히, '환경'이라 하면 꽤나 가치중립적이라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것 역시도 경제논리 - 정확히, 경제개발논리 - 와의 한판 싸움에 분명 얽혀있는데, 경제논리를 비껴갈 수 없는 환경이 제시하는 카드가 바로 '반(反)개발' 혹은 '생태주의' 이다. "
뭐 대충 이런 식이었죠. 정말 대충.
그런데, '생태주의'는 경제라는 괴물과 싸우기에는 너무 약해보였습니다.
그래서, 전역한 민관이 친구가 올렸던,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오래된 미래> - 나중에 알았지만, '녹색평론사'에서 낸 책이더군요. - 독서후기에도, 맥빠진 코멘트(comment)를 주절거렸던겁니다.
더구나, 생태주의에 대한 비관에는,
'생태주의'가 제게 하나의 이미지(image) 혹은 선입견으로만 존재한다는 챙피함까지 섞여 늘 제 자신을 불편하게 했습니다.
이만하면, <시민과학자로 살다>는 눈독을 들일만 했던거죠.
정작 중요한 소개가 늦었는데,
이 책은, 97년 '바른생활상(RLA)'를 수상한 일본의 반핵활동가 - 그는 스스로를 '시민과학자'라고 부릅니다. - 타까기 진자부로오씨(이하 타까기)의 자서전입니다.
당연하게도 그의 자서전에서 원자력, 혹은 반(反)핵에 대한 얘기를 빼놓을 수 없겠지만, 제가 제목을 그리 선택한 데에는, '반핵'보다 '시민과학자 타까기'의 삶에 더 깊이 감명한 탓이겠지요.
# 과학자가 세상을 만나다
그의 성장기는 일본의 2차 세계대전 패망과 함께 시작됩니다. 소위 '전후(戰後) 민주주의' 시기죠.
얼마 전 어떤 칼럼니스트는 독도 문제에 대해 얘기하면서, 일본의 민주주의 - 이는 전후 민주주의와 같습니다. - 가 '제 스스로 이루어 낸 성과가 아니기 때문에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것이다' 라고 논평했는데, 타까기씨가 바로 그 시대에 성장했습니다.
" 나의 체험적 인상에서 말하면 국가나 공권력, 제도 등이 교육의 전면에 거의 나타나지 않던 시대에 선생들도 신헌법 하의 민주교육에 대해서 당혹스러워하면서 학생들과 함께 시행착오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게 오히려 학생들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 묘한 시기였을지도 모른다. "
책이 그의 자서전이니 만큼, 성장기에 대한 언급은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것이지만,
그의 성장기는 유독, 이후 그의 삶의 우여곡절을 대변하는 인상을 주고있습니다.
그는 이런 혼란상 속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데에 익숙해지고, 동시에 약간의 반골기질을 보이게 되는데,
이는 공교롭게도 그를 수학에 - 혼자서 몰두할 수 있는 - 빠지게 합니다. 그리고, 후에 수학을 포기하고 화학을 선택한 그는, 대학원에 진학하는 친구들과는 다르게 '일본원자력사업 주식회사'에 취직하면서 다시 한번 청개구리 성향 - 전적으로 그의 표현을 빌릴 때 - 을 보이게 되는데,
'일본원자력사업 주식회사'는,
그에게 여러 면에 있어서 실험실의 핵이 아닌, 현실의 핵과의 만남을 주선하게 됩니다.
뭐 저도 잘 알고있는 것은 아니고 대략적인 밑그림을 그리는 수준입니다만,
여기서 일본의 원자력산업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익히 알려져있다시피, 일본은 45년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두 차례 원폭을 당하면서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국가이죠.
일본인들에게 '핵'이란 어떤 것일지 대략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 일본에서 원자력 산업, 즉 에너지로서의 원자력 이용이란, '에너지' 보다는 '원자력'에 강조점이 찍혀있었을 겁니다.
타까기씨가 '일본원자력산업 주식회사'에 취직한 61년은,
일본이 전후에 원자력산업을 막 시작하고 있을 즈음이었죠. 그리고, 동아시아의 개발모델에서 흔히 보여지듯, 게발시기 산업이란 정치적 의도나 금융자본의 의도가 앞서가며 시작하기 마련입니다.
평범한 과학도의 갈등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그의 흥미는 방사성물질의 방출이나 오염에 관한 것이었고, 그 결과 역시도 "방사성물질의 거동은 복잡해서 아직 모르는 게 많다. 더욱 기초 연구를 충실히 하지 않으면 않된다." 뭐 이런 류의 것이었는데, 전후 개발의 에너지원을 구상하고 있는 회사의 입장은 그와 달랐던 겁니다.
# 과학자가 세상과 갈등하다
후에 언급되지만, 그는 이 때 까지만 해도 '원자력 반대'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다만, 회사 - 그것도 익히 알려진 일본형 기업 - 와의 갈등을 참지 못했고, 결국 전직을 하게 되는데, 그는 좀 더 학문 중심적인 대학의 부속 연구소로 자리를 옮기게 됩니다.
그는 토오꼬오대학 부속기관인 원자핵연구소로 자리를 옮겨 마음껏 연구를 하는데,
다시 한번 갈등에 부딪히게 됩니다. 연구를 위해 바다와 산의 고암석을 찾는 도중, 진흙과 암석 일부에서 세슘-137 이라는 '죽음의 재' 성분을 검출한 것입니다.
그가 직접 발견한 '죽음의 재'는, 당시 일본 사회를 두드리던 공해문제 - 미나마따병, 이따이이따이병, 요까이찌 천식 - 와 함께 그의 마음을 두드립니다.
" 특히 나에게 인상이 깊었던 것은 기업측이 데이터를 감추고 있었다는 사실과 미나마따병을 비롯한 많은 공해 문제의 원인조사에 참가한 과학자들이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풍토병이나 바이러스설 같은 가설을 세워 기업측을 옹호하려고 했다는 점이었다. (중략) 이 일이 자기의 문제가 되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중략) 내가 과학자이기 때문에 갖게 된 이해관계를 이미 무자각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과학자 집단에 귀속되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이해관계에 서있었다면, 원체험에 입각하여 어디까지난 자립된 개인의 입장을 관철하기로 했던 너의 의지는 도대체 어디로 가버렸는가. "
그는 피난처와 같았던 원자핵연구소를 떠나, 토오꼬오 도립대학 이학부의 조교수로 자리를 옮기게 됩니다.
- 여담이지만, 조교수 승진에 대한 욕심도 있었다고 고백하네요.
잠시 숨을 돌리며 말씀드리자면, 일전에 구입했던 <일본 근대의 풍경>을 미리 읽어두지 않은 것이 몹시 애석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지형을 풍자하는 '386세대' 라는 조어가 30대, 80년대 학번, 60년생과 같이 시대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듯이,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 세대라는 타까기씨를 이해하기에는 그가 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60년대 일본의 시대상을 이해하는게 필요했습니다.
한국의 60년대 역시도 4ㆍ19 와 함께 시작되었지만,
일본의 60년대 역시도, 베트남전 반대, 오끼나와 반환과 같은 사회적 사건 뿐만 아니라, 미나마따병, 이따이이따이병과 같은 공해문제, 학생운동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 중 나리따 공항 건설에 반대했던 농민들의 운동이었던 '산리즈까 투쟁'은, 위에서 언급한 '죽음의 재'사건, 문필 미야자와 켄지와 더불어 타까기씨의 원체험을 이루는 세가지로 꼽히고 있습니다.
" 그것은 그야말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거대한 입을 벌리고 덤벼드는 불도저는 문자 그대로 국가권력 자체였고, 그 앞에 맨몸으로 자기 농토를 지키려고 싸우는 농민들이 있었다. 그리고, 속수무책으로 서있는 나 자신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어느 편에 서있는가. 심정적으로는 농민들 편이었지만, 실제로 나는 국가권력이라는 거대 시스템 측에 속해있는 게 아닌가. "
"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과학을 우리의 과학으로 만들 수 있는가?' 이 말을 읽고 나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문제가 아닌가. 이 말은 1926년 켄지가 시작했던 라스찌진협회에서 만든 모임 안내서에 들어있는 말로서, 켄지가 농민들에게 한 강연의 제목이었다. "
# 과학자가 시민과학자가 되다.
세상과 갈등하는 과학자 타까기는 잠시 독일 막스-프랑크 핵물리연구소에 외래연구원으로 재직하며 자기 자신을 돌보는데,
이때 호르크하이머, 하버마스와 같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저작을 탐독하고, 독일의 신학ㆍ철학자 출신의 활동가들과 여러차례 토론을 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 '비판'이라고 하면 우리 자연과학자들을 무엇보다 논문의 계산착오나 기껏해야 논리적 정합성을 확인하는 정도밖에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근원적인 비판은 우선 인간의 관심을 어디에다 두어야 하는가를 문제 삼고, 그러한 관심을 전제로 인식이 나아가는 과정을 성찰하는 것이다. 그러한 성찰 없이 객관성이라는 명분만 가지고 측정 데이터 등을 절대적인 진리라고 강요하는 것은 자연과학의 전형적인 이데올로기이다. "
그가 깊은 도움을 받았다고 회고하는 하버마스의 <인식과 관심>은 역사학자 에리히 프롬의 <역사란 무엇인가>와 맥을 같이 합니다. - 후에 알게된 일이지만, 에리히 프롬 역시도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일원이었습니다.
과학의 객관성 내지는 과학자로서 가치중립적인 위치를 지킬 수 있는가 하는 점은,
그가 독일생활을 정리하고 '원자력자료정보실(이하 자료실)'을 세우며, 소위 '시민과학자'로 자신을 정립한 이후에도 그에게 끊임없이 던져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자료실은 타까기씨가 이후 일본의 원전 연구자들과 함께 설립한 단체인데, 이후 반핵운동 과정에 정보실이 역할을 맡으면서, 그는 이 단체를 공동으로 설립한 과학자들과 '단체의 중립성'에 대해 갈등하게 되는거죠.
자료실의 원로인 다께따니 선생은,
" 과학자에게는 과학자의 역할이 있고 주민운동에는 운동이 해야 할 역할이 있다. 자네, 시계를 쇠망치 대신으로 쓰다가는 시계만 망가뜨리게 되고 결국 시계도 쇠망치도 안된다. " 라고,
타까기씨는,
" 자료실은 어떻든간에, 저 개인은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기를 거부합니다. 적어도 쇠망치가 될 수 있는 시계가 되고 싶습니다. 시계가 망가지더라도 최소한 쇠못의 역할만이라도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 라고 입장을 밝히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후 <반원발신문> 이라는 일본의 반핵운동 소식지 편집에 그가 깊이 관여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하지만, 타까기씨는 자료실과 반원발신문 모두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건강을 몹시 해치게됩니다.
# 과학자는 과학자가 아니었다.
또 잠깐 숨을 돌려보죠.
일전에 옛 친구들이 그리워 싸이월드에서 사람찾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박OO'를 검색하니 백명이 넘는 사람이 나왔지만, 한명한명의 미니홈피를 둘러보며 그 친구를 찾아봤습니다.
백명이 넘는 사람 중에서 그 친구를 찾는 방법이란,
그 친구의 '이름'일 수는 없었던거죠. 가장 인기있는 사진을 제외한다면, 취미며 특기부터 시작해서, - 절친했다면 - 그 친구의 필체와 생각들을 기억하는 것이 그 친구를 찾는 방법일겁니다.
그 많은 '박OO' 앞에는, 사실 보이지 않는 수식어가 있는거죠.
타까기씨는, '시민'이라는 수식어를 '과학자'에 덧붙임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표현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모든 과학자들이 보이지 않는 수식어를 붙이고 다니는겁니다. 타까기씨는 그것을 드러내보였을 뿐이구요.
비약하자면, 타까기씨가 걷어내고자 했던 보이지 않는 수식어란,
'일본원자력산업 주식회사' 였고, '죽음의 재' 였으며, '산리즈까' 였을겁니다.
과학자는 과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과학자들은, 수식어를 붙인 과학자들을 싫어하는 듯 보였지만, 사실 수식어를 바꾸는 과학자들을 용납할 수 없었던겁니다.
# 이후의 문제. 그럴싸한 스펙트럼(spectrum)
그의 얘기를 좀 더 들어볼께요.
" 이미 과학자나 기술자가 되어있었던 사람들의 경우, '학문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세가지 방향의 대응을 했다. 하나는 과학자나 기술자라고 하는 전문가 자체를 특권적인 존재로 보고 그러한 특권을 스스로 버린 사람들이다. 둘째는 체제 내에 머물러 모순과 싸운다는 입장이었다. 세번째 입장은 체제 내의 지위를 버리고 자립적인 과학ㆍ기술을 지향했다. (중략) 현대의 과학기술은 연구개발을 위해서 거대한 시스템이 필요하다. 사회 비판적인 일을 하더라도 일정한 조직적 배경이 없으면 안된다고 당시는 생각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세번째 길의 가능성을 부정적으로 보았다. "
과거에 대한 회고 치고는 참으로 그럴싸한 스펙트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답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첫째는 갈등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수식어) + 대명사'를 갖게 될 것이고, 둘째는 마음고생을, 셋째는 꽤나 허약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짐작할 따름이죠.
타까기씨는 셋째를 선택했고,
마지막장에는 그가 시민과학자로서 자신을 정립한 이후의 활동들에 대한 회고가 담겨있습니다.
'돈과 생명의 싸움', '주민들에게 배우다', '무시와 유혹', '괴롭힘'과 같은 소제목들은, 셋째 역시 둘째 못지 않은 마음고생을, 아니 더한 마음고생을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 진심
" 진지한 마음으로 하면
십중팔구 이루어진다
진지한 마음으로 하면
무엇이든지 재미있다
진지한 마음으로 하면
누군가 나를 도와줄 것이다 "
타까기씨가 친구 K씨 부부로 부터 선물받아 걸어둔 액자의 한 구절이라고 합니다.
일본 나가노현의 안라꾸지 주지스님의 글이래요.
정작 눈독을 들인대로 생태주의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지는 못했지만,
'핵이 없는 사회를 반드시 실현시키고 싶다'는, 진지한 마음 하나로 살아왔다는 타까기씨.
그의 진심이,
대학생 타까기, 공무원 타까기의 가려진 수식어를 밝혀냈다면 너무 감상적인가.
# 보태어
말씀드린 '수식어' 얘기를 하느라, 놓친 부분들이 많이 있어 아쉽습니다.
우선, 원자력에 대한 부분.
책을 통해 옅본 일본의 원자력산업도 그러했지만, 한국의 원자력산업은 어떠한지요. 중앙집권적인 성격을 가진 원자력산업을 비롯해서, 거대 테크놀로지와 민주주의가 어디까지 서로를 허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그리고, '환경 인종주의'. 즉, 원자력시설 입지가 인구 과소지역에 편중되는 문제, 방사성 폐기물이 타국ㆍ타민족에게 전가되는 문제, 등은 다시 살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생태주의'에 대해서.
갈등의 대치선이 명확한 경제논리에 익숙하다보니, 자꾸 둔감해지는 것 같아요. 책을 제대로 골라 꼭 한번 읽어보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기회가 된다면,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일련의 저작도 둘러보고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