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만한 제국 - 하워드 진
2. 경제학의 역사 - 존 갈브레이드
3. 문명의 공존 - 하랄트 뮐러
4. 월스트리트 제국 - 존 스틸 고든
5. 자본주의·사회주의·민주주의 - 슘페터
6.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 - 브루스 커밍스
7. 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 - 송두율
8. 미국의 민주주의 - A. 토크빌
9. 세계화와 그 불만 - 조지프 스티글리츠
10. 현대 한국의 사상 흐름 - 윤건차
11. 국민은 왜 정부를 믿지 않는가? - 조셉 나이 외 다수
12. 과학혁명의 구조 - 토마스 쿤
13. 국부론 - 아담 스미스
14. 실천이성비판 - 임마누엘 칸트
15. 자유론 - 존 스튜어트 밀
16. 감시와 처벌 - 미셀 푸코
17. 부분과 전체 -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18. 엔트로피 - 제레미 리프킨
19. 객관성의 칼날 - 찰스 길리스피
20. 다산문선 - 정약용
21. 시민 정부론 - J. 로크
22. 법의정신 - 몽테스키외
23. 이기적 유전자 - 리처드 도킨스
24. 꿈의 해석 - 프로이트
25. 미디어의 이해 - 마샬 맥루한
26.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27.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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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브로노스키의 ‘인간 등정의 발자취’
과학이 인류 문명의 발전을 이끌었다
 
찰스 다윈이 1859년 ‘종의 기원’을 발간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다른 한 저작 ‘인간의 유래’ 역시 그것에 못지않은 명저라는 사실은 별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책에서 다윈은 인간이 원숭이와 가까운 혈연관계를 가지며 그 근원은 먼 옛날 공동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왔다는 사실을 여러 증거를 통해서 설명하였다. 요컨대 다윈은 인간이 다른 동물과 공동의 조상을 갖는, 결국은 생물학적 진화의 한 산물에 불과하다는 점을 설파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일개 생물종에 불과한 인간이 도대체 어떻게 다른 모든 동물과 구별되는 특별한 지성을 가지게 되었으며 마침내 찬란한 현대문명의 꽃을 피워낼 수 있었을까?

여기 한 탁월한 석학의 설명이 있다. “우리 주변의 모든 동물 가운데서 유독 인간만이 자기 환경에 갇혀 있지 않은 유일한 존재다. 상상력, 이성, 정서적 예민성과 강인성으로 인해 인간은 환경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변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인간이 일련의 발명을 통해 자기 환경을 개조해온 것은 일종의 다른 종류의 진화, 즉 생물학적 진화가 아니라 문화적인 진화인 것이다. 나는 그 문화적인 산봉우리의 연속을 ‘인간의 등정’이라 부른다.” 
 
제이콥 브로노스키(Jacob Bronowski)의 ‘인간 등정의 발자취(The Ascent of Man)’는 다윈의 ‘인간의 유래(The Descent of Man)’와 크게 대조적이다. 다윈이 생물학적 인간의 근원을 밝혀서 ‘겸손한 인간’의 면모를 제시했다고 한다면 브로노스키는 문화적 인간의 역사를 설파해서 ‘인간의 성공’을 자축하고자 했던 것이리라.

한 인물이 어느 한 분야에서 탁월한 기량을 보여주는 경우는 사실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과학과 인문학을 동시에 섭렵했던 사람을 꼽으라면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겠다. 더욱이 수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물리학으로 옮겼다가 다시 생물학으로 전공을 바꾸는 등 다방면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동시에 시인이자 극작가로도 활동했고 또한 계관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연구가로서도 탁월했던 그런 인물이라면 그는 ‘석학 중의 석학’으로 불려도 별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브로노스키가 바로 그런 사람으로서 1908년 태생의 그를 사람들은 ‘20세기의 르네상스인’으로 칭송하였다. 그는 과학의 대중화에도 힘을 기울여서 여러 권의 명저를 남기고 텔레비전에도 자주 출연하였다.

하지만 브로노스키를 정녕 유명하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이 한 권의 책 ‘인간 등정의 발자취’ 때문이었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원래 그가 같은 제목으로 제작했던 13부작 BBC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다시 글로 정리한 것이다. 이 TV 프로그램은 1973년 전 세계적으로 절찬을 받으며 방영되었는데 이듬해 다시 책으로 발간되어 더욱 유명해졌다. 하지만 이 작업에 너무 열정을 쏟았던 나머지 그는 책이 간행된 그 해에 66세의 일기로 사망하였다.

그러면 브로노스키는 이 책에서 과연 어떤 점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일까?
그는 인류문명을 과학이 이루어 놓은 업적으로 설명하였다. 즉 문명이란 지식과 지식의 성실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데에서 출발하였다는 것이다. 과학(science)이라는 말은 원래 지식(knowledge)이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그가 바라보는 인류문명사의 근간은 곧 과학의 역사이며 그것이 바로 그가 강조했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브로노스키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과학은 가장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과학이며 자연과학이라는 의미를 넘어서서 예술·문학·종교·기술·건축 등 인간 문화의 전반을 두루 망라한다. 그는 ‘인간 등정의 발자취’에서 이런 문화와 문명의 인류역사를 과학자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다만 전문적이고 난해한 과학적인 해설로서가 아니라 유려한 문학적 비유가 곳곳에 녹아있는 휴머니스트의 필체로서 말이다.

최초의 인류는 아프리카의 삼림이 초원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하였다. 어느날 갑자기 초원에 노출된 유인원의 일부는 두 발을 딛고 일어서서 먼 곳을 바라볼 수 있게 진화하였다. 그렇게 해서 자유로워진 두 손을 사용해서 연장과 무기를 움켜쥘 수 있게 되었으며 따라서 사냥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원래 초식성이었던 식성은 점차 잡식성으로 바뀌었으며 그렇게 되자 식물만을 섭취하던 때에 비해서 여가 시간이 훨씬 늘어나게 되었다. 원시인류는 그런 남겨진 시간 동안에 협동으로 더 큰 짐승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고 그러는 과정에서 언어가 발달하고 이에 따라 두뇌의 발전도 가속화되었다.

홍욱희 세민환경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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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마틴 부버의 ‘나와 너’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인간관계 메말라가
 
‘나와 너(Ich und Du, 1923)’는 언뜻 보기에 ‘만만한’ 책같이 보인다. 책이 얄팍한 데다가 ‘나와 너’라는 제목에서는 연애소설 같은 가벼움마저 풍긴다. 하지만 산뜻한 마음으로 책을 펴든 독자라면 식겁할지도 모르겠다. 책장 가득 철학의 난해함이 시의 오묘함 속에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와 너’는 철학적 산문 시(詩)에 가깝다.

하지만 ‘나와 너’에는 마약 같은 매력이 있다. 독자는 쥐나는 머리와 먹먹한 가슴을 움켜쥐면서도 좀처럼 책을 던져버리지 못할 터다. 마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는 종교적인 절정체험을 논리와 언어로 풀어내는 재주를 지닌 철학자다. 표현을 바꾸어 집요하게 반복되는 그의 핵심 주장은 일상에서 맛보기 힘든 높은 삶의 경지를 느끼게 한다. 그렇다면 ‘나와 너’에서 부버가 말하려는 바는 무엇인가?

부버는 ‘나-너’와 ‘나-그것’이란 두 개의 근원어로 세상을 분석한다. 부버가 직접 드는 예로 근원어를 설명해 보자. 우리는 흔히 나무와 ‘나-그것’의 관계로 만난다. 생물 종(種)의 하나로 나무를 분류하기도 하고 가구 재료로 쓰기 위해 몇 그루인지 수로 표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무와 ‘나-너’ 관계로 만날 때도 있다. 나에게 나무가 단순히 감상하고 이용하는 ‘그것’이 아니라 내 전부를 바쳐 사랑하는 ‘너’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부버가 말하려는 바를 어린왕자와 장미의 관계에 빗대어 풀어보자. 어린왕자는 자기가 소중하게 가꾸던 꽃이 여느 장미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데 실망했다. 하지만 어린왕자의 장미는 자신이 쏟았던 그 정성 덕분에 그에게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존재이다.

부버는 “‘그것’은 번데기요, ‘너’는 나비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언제든 ‘너’로 내게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너’는 다시 ‘그것’으로 바뀌기도 한다. 사람 사이의 만남도 그렇다. 부버에 따르면 ‘나-그것’으로 서로를 대하는 사이에서는 진정한 ‘만남(Begegnung)’은 없다. 인사를 예로 들어보자. 일상에서 만나는 숱한 사람에게 우리는 “안녕하세요” 하고 웃으며 말을 건넨다. 하지만 우리는 상대방의 ‘안녕(安寧)’에 정말 관심을 갖고 이런 말을 하고 있을까?

…오늘날 우리네 인사는 따분하고 틀에 박혀 있다. ‘안녕!’이라는 말 속에 당연히 담아야 할 상대방의 안전과 평화를 비는 마음이 얼마나 막연하게 느껴지는가? 카피르(Kaffir) 사람이 쓰는 신선한 인사말과 비교해 보라. 그네들은 사람을 만날 때 자기 몸을 상대 몸에 꼭 붙이면서 ‘자네가 보이네!’라고 말한다. 미국 인디언은 더욱 구성지고도 고상하게 ‘그대여! 내 냄새를 맡게!’라고 말한다.

그러나 문명사회에서 모든 사람과 이렇듯 친근한 관계를 이루며 살아갈 수는 없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나-너’의 관계는 ‘나-그것’으로 점차 바뀌어 간다. 대도시 상가에서 물건을 사고 팔 때 상대와 맺는 관계는 대개 ‘나-그것’ 차원에 그친다. 서로 ‘이용’하고 ‘경험’하는 수준에서만 상대를 대한다는 뜻이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정치와 경제로 복잡하게 얽힌 거대 국가는 반드시 ‘그것’의 세계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부버는 유능한 정치가나 경제인일수록 사람을 ‘사업이나 목표를 위해서 필요한 능력을 지녔는지’로만 가늠하고 대한다고 말한다. 그들이 몰인정해서가 아니다. 사회가 원래 그렇기 때문이다. 만약 지도자들이 사람 하나하나를 ‘너’로 대하면 어떻게 될까? 사회는 “당장 그네들 머리 위에서 무너지고 말 터”이다. 하나하나의 사정을 다 봐준다면 원칙도 정의도 사라지고 만다. 그러니 사람을 모두 ‘그것’으로 보고 법과 원칙에 따라 공평하게 대할 수밖에 없다.

‘나-그것’으로 관계가 맺어지는 사회생활에서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자연과학에서 연구를 할 때와 별로 다르지 않다. 인과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원인과 결과를 따져서 성과와 책임을 나눈다는 뜻이다. 법칙과 원칙에 맞는지를 살펴서 뭐가 옳고 그른지를 가린다. 그래야 공정함을 유지할 수 있는 까닭이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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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
현대 사회의 인간은 비판적 이성을 상실해

(Herbert Marcuse, 1898~1979)는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등과 함께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표적 이론가다. 1960년대 말 서구 사회에서 학생운동이 치열하게 벌어질 때 그는 마르크스, 마오쩌둥과 함께 ‘3명의 엠(M)’으로 일컬어지며 사회변혁운동의 사상적 지주로 추앙받기도 했다. 그에게 영향을 끼친 사상가는 마르크스, 프로이트, 헤겔, 하이데거 등이다. 이를테면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혁명론·노동이론의 영향을 받았고 대중사회의 일상성에 매몰된 비본래적 실존으로서 익명의 일상인(das Man)과 그 일상성을 극복하는 본래적 실존이라는 인간 이해의 틀을 하이데거 사상으로부터 수용했다.

헤겔 철학의 이성 개념도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현실이 비이성적일 때, 이성은 그러한 현실과 긴장관계에 있는 비판적 이성이 된다. 그러한 비판적 이성의 과제는 이성적이지 못한 현실을 비판하고 부정하며 나아가 이성적인 사회를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 된다. 서양철학은 플라톤 이후 줄기차게 최선의 국가, 최선의 쾌락, 지고의 행복, 영구평화 등 현실의 모순과는 대비되는 이상적인 현실을 구상해왔다.

대부분의 인간은 현실에 적응하여 그럭저럭 살아간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모순을 타파하여 이상적인 현실을 창출하고자 노력하기도 한다. 인간은 바로 그렇듯 가능성의 존재, 이중적인 차원을 지닌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현실성과 일상성에 매몰된 차원과 해방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차원, 그러한 이중적인 차원을 분명히 자각함으로써 인간은 보다 나은 현실을 만들어 나갈 수 있게 된다. 바꿔 말하면 역사의 주체로 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 선진산업사회 속에서 인간은 그러한 가능성의 차원을 상실하고 단지 현실성의 차원으로 매몰되어 버리고 말았다. 즉 ‘일차원적 인간’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의 차원과 배부른 돼지의 차원 가운데 배부른 돼지가 되어버리고 만 셈이라 할까. 선진산업사회는 기술의 진보를 바탕으로 현실에 대한 비판을 효과적으로 억제시킨다. 비판이 마비되고 반대를 찾아 볼 수 없는 현실, 바로 ‘일차원적 사회’는 압도적인 효율성과 경제적 생활수준 향상이라는 조건 위에서 사회 모순을 은폐시킨다. 마르쿠제는 이렇게 말한다.

‘개인적 공간은 기술적 현실에 의해 침범·마멸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현상유지에 대한 저항이 뿌리를 박을 수 있는 정신의 내적 차원이 마멸되고 있다. 부정적 사유력인 이성의 비판력이 자리잡는 이차원의 상실은, 선진산업사회가 반대를 침묵시키는 바로 그 물질적 과정의 이데올로기적 대응현상이다.’

마비된 비판 의식 속에서 ‘일차원적 인간’은 끊임없이 소비하기 바쁘다. 이러한 허위 욕구는 과도한 산업생산, 낭비, 실업, 소외와 억압 등의 부정적인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그러니까 해방되고자 하는 진정한 의식과 욕구를 마비시킨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선진산업사회의 뚜렷한 특징은 해방을 요구하는 욕구들을 효과적으로 질식시키는 한편, 풍요한 사회의 파괴적인 힘과 억압적인 기능을 유지·허용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회적 통제는 낭비의 생산과 소비에 대한 과도한 욕구, 이미 실제로는 필요가 없는 곳에도 감각을 마비시킬 정도의 노동에 대한 욕구, 이 마비상태를 경감·지속시키는 여러 가지 휴식에 대한 욕구, 통제된 가격 안에서의 자유경쟁, 스스로 검열하는 자유언론, 미리 조작된 광고와 상표 중에서의 자유선택과 같은 일종의 기만적인 자유를 유지하려는 욕구를 강요한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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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존 나이스비트의 ‘메가트렌드’
현대사회의 주요한 흐름 10가지 제시

우리는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말대로 ‘불확실성의 시대’에 살고 있다. 모든 것이 이전에 비해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변한다고 보면 불확실성의 정도와 범위 또한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사실 사람들에게 가장 싫어하는 단어를 꼽으라면 그 중에 불확실성은 반드시 들어갈 것이다. 이에 따라 누구나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고 그 같은 노력에 성공하는 개인과 기업이 남보다 앞서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이때 불확실성을 줄이는 노력 중의 하나가 트렌드를 찾아내고 그에 맞춰 나가는 일이다. 따라서 트렌드, 그것도 메가트렌드를 잘 읽고 있다면 남들보다 크게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메가트렌드(Megatrends)라는 말은 미래학자 존 나이스비트(John Naisbitt, 1929~)가 1982년에 내놓은 책의 제목에서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뉴욕타임스가 선정하는 베스트셀러에 2년 동안 오르면서 전 세계 57개국에서 800만부 이상이 팔려 나갔다.

당시 월스트리트저널은 “엄청나게 유익하다(triumphantly useful)”, 댈러스타임스헤럴드는 “1980년대에 가장 중요한 책 중의 하나”라고 평했다. 이와 함께 메가트렌드는 사회적·문화적 또는 경제적 흐름, 그 중에서도 거스를 수 없는 큰 흐름을 가리키는 단어로 자리잡았다. 덕분에 당시까지 별로 유명하지 않았던 나이스비트는 단번에 세계적인 미래학자로 떠올랐다.

왜 메가트렌드를 읽는 것이 당시의 메가트렌드가 된 것일까. 책에서 나이스비트는 1980년대를 이끌어 갈 메가트렌드로 10가지를 들었다. 이를 통해 대다수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미래의 트렌드를 명확하게 짚어냄으로써 불확실성을 크게 줄여줬다. 한마디로 평범한 사람이나 뛰어난 사람 모두가 가려워하는 부분을 잘 긁어주는 책이었다. 그럼 1982년에 나이스비트가 본 10가지 메가트렌드는 무엇인가.

①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②기계 위주의 단순기술에서 인간 위주의 첨단기술로
③국가 경제에서 글로벌 경제로
④단기 위주에서 장기 위주 시각으로
⑤집중화에서 분산화로
⑥정부와 같은 제도의 지원에서 자조(自助·self-help)로
⑦대표를 통한 간접 민주주의에서 직접 참여 민주주의로
⑧피라미드형 관료주의에서 네트워크형으로
⑨미국의 북동지역 위주에서 남서지역 위주로
⑩양자택일형에서 다양한 선택으로

나이스비트의 메가트렌드가 아직까지도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은 20여년 전에 읽은 흐름이면서도 대다수가 지금도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특히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국가 경제에서 글로벌 경제로, 피라미드형 관료주의에서 네트워크형으로 바뀔 것이라는 예측은 정보화, 글로벌화, 네트워크화와 같은 말의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돌이킬 수 없는 흐름으로 자리잡고 있다. 나이스비트의 ‘메가트렌드’가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 대니얼 벨의 ‘후기산업사회론’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같은 생명력 때문일 것이다.

20여년 전에 정보사회를 내다본 나이스비트가 자신의 다른 책이나 강연에서 우리에게 던진 정보와 관련된 메시지를 한번 살펴보자.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정보를 주요 자원(key resource)으로 하는 경제가 펼쳐지고 있다. 정보는 재생이 가능할 뿐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현대사회는 정보의 부족이 문제가 아니라 정보의 홍수가 문제다.” 정보가 중요한 정보사회라지만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진다면 과연 어떤 정보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한 나이스비트 자신의 해답은 다음과 같다.

최성환 대한생명 경제연구소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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