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설동훈 <강자의 횡포가 만든 차별의 언어 - '코시안'>

사람들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소속 집단의 대변자가 되는 경험을 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그렇게 간주하기도 한다. 특히, 특정 집단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이 작용할 경우, 개인을 집단의 성원으로 파악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은 그 대상 집단에 속한 사람들과 인간적인 만남을 할 수 없게 마련이다. 예컨대, "이슬람교도들은 과격하고 폭력적이다." 라는 부정적 선입견을 가진 사람은 특정인이 이슬람교도라는 이유로 그와의 만남 자체를 기피할 것이다. 집단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그 집단의 성원으로 인지되는 개인은, 그 선입견 속의 전체를 대변하는 하나의 사례로 환원될 뿐이다.

'죠센진' 이 편견을 담은 용어가 된 것처럼 '코시안' 도 이미 그렇게 쓰이고 있다. 정책 대상 집단을 정확히 꼬집어 지칭하는 용어는 분명히 얼마 안 되는 어휘로 많은 뜻을 포함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담고 있다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기술하는 표현은 사용하되, 적시하는 말은 만들지 않는 것이 그들을 배려하는 기본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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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호근 <이성은 더 이상 이성적이지 않다>)

동일화하는 이성과 개념은 대상의 고유한 존재들 사이의 '다른 것', 즉 '차이' 를 배제한다는 점에서 폭력을 가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떤 대상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그 대상은 두려운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그 대상이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동일화될 때, 그것은 이제 더 이상 '낯선 것'이 아닌 '알려진 것'이 되며,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지배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인간은 두 가지 차원에서 '낯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면서 세계와 교섭한다. (중략) 인식이든 노동이든 주체인 인간은 자기의 틀로서 대상을 파악하거나 변형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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