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 참교육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 윤숙자 회장 인터뷰 중 일부 발췌)

- 무엇 때문에 온 국민이 영어에 매달려야 하나. 정말 우리나라 국민들이 영어를 잘 못해서 국가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인지 생각해 볼 문제다.

- 우리 현실에서는 입시와 직결될 경우 아무리 취지가 좋은 정책이라도 왜곡될 수밖에 없다.

- 대학을 쉽게 세울 수 있도록 해 대학 수를 늘렸다. 그런데 지금 명문대 경쟁은 오히려 강화됐다. 자사고가 대폭 늘어나면 중상위권 아이들도 사교육 대열에 합류하게 될 것이다.

- 근본적인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경쟁 강화는 사교육 강화로 이어진다. 학벌주의를 해결하지 않으면 사교육비 절감 정책은 먹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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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는 어떨 때 남자를 떠나는가. 그 남자와 내가 꼭 닮은 영혼이라는 실감에 진저리 날 때는 아닐까.

- 화려한 폐허를 딛고 가까스로 버티던 여자는 결단을 내린다. 헌신적인 그 남자를 버리고, 맞선 본 상대와 결혼식을 올려버린 거다. 학교를 졸업하면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여자는 술회한다. 별안간 닥친 헤어짐 앞에서 남자는 울고 여자도 따라 운다. 이별은 슬픈 것이니까. ‘나의 눈물에 거짓은 없었다. 그러나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

- 정지용, 한하운의 시를 읊고 독일 가곡 <보리수>를 들려주는 남자와 보내는 시간은, 현실의 것이 아니기에 더욱 아슬아슬한 도취의 순간이다. 여자는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대칭점처럼 꼭 닮은 사람, 상처 없이 해사하던 서로의 맨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 지상에 남은 마지막 사람인 그 남자와 함께 ‘생활’을 꾸려갈 자신이. 여자를 진정 불안케하는 남자는 바람둥이나 난봉꾼이 아니라, 허공에 반 발짝 떠 있는 ‘흔들리는 영혼’이다.

- 오십년 뒤, 여자는 옛날 그 남자네 집을 찾아간다. 그렇지만 다시 청춘으로 돌아간대도 여자는 여전히 불안한 남자로부터 도망칠 것이다. 씁쓸한 후회 뒤에 뒷맛처럼 남는 달곰한 추억의 여운. 떠나온 첫사랑의 남자란 여자에게 그런 존재다.

(정이현 한겨레 칼럼「그 남자 집에서의 회한」중에서, 일부 발췌 순서 임의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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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에 들어서면서 인간은 신분 질서 등과 같은 속박에서 벗어나 ‘개인’, ‘자유’ 등의 관념을 자각하게 된다. 하지만 새롭게 얻게 된 이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는 ‘무엇에로의 자유’로 곧바로 이어지지 않았다. 근대 이전까지는 자신의 신분에 맞는 삶을 영위하면서 나름대로 안정감과 소속감을 느끼던 인간들은 자신을 둘러싼 외부 세계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작용한다는 것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조차도 적대적이 되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자유는 얻었지만 그로 인한 불안감과 고독감은 더욱 증대된 것이다.

근대 이후 인간들은 이러한 불안과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로부터 도피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 중 하나가 복종을 전제로 하는 권위주의적인 양태이다.

이는 개인적 자아의 독립을 포기하고 자기 이외의 어떤 존재에 종속되고자 하는 것으로, 사라진 제1차적인 속박 대신에 새로운 제2차적 속박을 추구하는 양상을 띤다. 이것은 때로 상대방을 자신에게 복종시킴으로써 심리적 안정과 만족을 얻으려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일견 대립적으로 보이는 이 두 형태는 불안과 고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권위주의적 양상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한 것이다.

도피의 또 다른 심리 과정은 외부 세계에 의해서 그에게 부여된 인격을 전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스스로 중지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되고,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기대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 된다. 나와 외부 세계 간의 모순은 사라지고 그와 함께 고독과 무력감을 두려워하는 의식도 사라지게 된다. 개인적 자아를 포기해버린 자동인형이 되어 주위의 다른 자동인형과 동일하게 된 인간은 더 이상 고독과 불안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는 자아의 상실이라는 매우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는 부단히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 행위를 함으로써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불안한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의 속성상 인간은 불가피하게 새로운 속박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는가? 개인이 하나의 독립된 자아로서 존재하면서도 외부 세계와 합치되는 적극적인 자유의 상태는 없는가?
‘자발성’은 이에 대한 하나의 해답이 된다. 사람은 자발적으로 자아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외부 세계에 새롭게 결부시키기 때문에, 자아의 완전성을 희생시키지 않고 고독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소극적인 자유는 개인을 고독한 존재로 만들며 개인과 세계와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고 자아를 약화시켜 끊임없는 위협을 느끼게 한다.

자발성에 바탕을 둔 적극적 자유에는 다음과 같은 원리가 내포되어 있다. 개인적 자아보다 더 높은 힘은 존재하지 않고 인간은 그의 생활의 중심이자 목적이라는 원리와 인간의 개성의 성장과 실현은 그 어떤 목표보다 우선한다는 원리가 그것이다. 이러한 심리적인 측면에 더하여 인간이 사회를 지배하고 사회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갖추어질 때 근대 이후 인간을 괴롭히던 고독감과 무력감은 극복될 수 있다.

(출처: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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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인간이 유년 시절 겪은 트라우마(정신적 상처)가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다가 특정한 계기를 통해 변형된 형태로 전의식을 거쳐 의식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이때 트라우마가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전이되는 과정에는 이를 가로막는 방어기제가 작동하고, 그 결과 트라우마는 꿈, 증상, 실수, 문학작품 등으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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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것은 바로 그 개차반 인생이 그런 이야기로 작가가 되고, 그리하여 당당하게 세상에 끼어들었다는 점이었다. 문학이 그런 식이라면 나도 얼마든지 자신이 있었다. 당시 내가 이해한 문학은 내가 세상에 끼어들 수 있는 일종의 문 같은 것이었다.

친척의 서가에서 앤솔러지를 발견하고, 그리하여 차츰 시를 알기 시작했을 때, 나는 소설보다는 시를 쓰기로 작정을 하였다. 아무리 영악한 체하지만 역시 어렸던 나로서는 자신의 치부를 낱낱이 세상에 까 보일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치부는 전혀 건드리지 않으면서 무엇인가 있는 듯 없는 듯 잘도 꼬리를 감추는 시 쪽이 훨씬 매력적이었다. 내가 똘마니 시절에 배운 세상을 속이는 방법과 시가 지닌 상징이나 은유 따위의 애매모호한 기교는 신기하게도 서로 통하는 부분이 많았다.

- 얼마 후 그 여학생에게서 편지를 받았을 때 나는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그것을 화장실에 버렸다. 여학생의 편지를 화장실에 버린 행위는, 단순하고 유치한 심리와는 달리, 나의 일생을 통해 두고두고 영향을 끼쳤다. 물론 당시의 나로서는 까마득히 몰랐지만 그것이 일테면 나의 위악(僞惡)의 시초였던 셈이다. 훗날 대학 시절을 거치면서 이 위악이야말로 나에게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살찌우는 자양분이 되어 있었다.

돌이켜보면, 대학 시절, 세상에 대한 나의 무기는 바로 위악이었을 터이다. 사회과학 식으로 말한다면 위악이 나의 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 이 위악은 자연스럽게 죽음이라거나 탐미주의 혹은 허무주의 등과 뒤섞여 세상에 대하여 깊게 병든 한 청년의 문학이 되어 갔다.

(송기원, <아름다운 얼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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