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

역시 한 걸음 물러서서 보면 더욱 명쾌하게 보이나 보다. 독일 괴팅겐대학에서 사회학·철학·역사·과학을 공부하고 카셀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치고 있는 김덕영 교수가 쓴 〈입시 공화국의 종말〉(인물과사상)은 대한민국이라는 계급사회의 본질을 단도직입적으로 까발린다.

“서울대를 비롯한 이른바 명문 사립대들이 논술고사의 도입을 통해 진정으로 추구하는 바는, 한국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고착시키고 심화시키면서 그 지배적 패권집단을 공고히 유지하며 확대재생산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만 할 수 있다면 어떠한 희생을 치러도 전혀 상관없다. 학생의 정신이 병들고 정서가 메마르고 육체가 성장하지 못해도, 가정의 살림이 거덜나도, 국가경제가 왜곡돼도, 그리고 사회가 분열되어도 알 바 아니다. 바로 그것이 학생들의 사고력과 창의력과 같은 고등정신의 측정이라는 그럴싸한 허울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학생을 속이고 학부모를 속이며, 종내에는 사회 전체를 속이기 위한 허위의식이요 이데올로기다.”

문제의 핵심은 서울대를 정점으로 한 대학의 서열화, 이를 굳히기 위한 논술고사와 거기서 요구하는 ‘정답’ 찾기. 이제 이들 한국 사회 ‘엘리트’ 지배장치를 항구화하는 ‘입시 공화국’이 종말을 고하지 않으면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 종말을 고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논술고사는 프랑스의 바칼로레아나 독일의 아비투어를 흉내낸 것이긴 하지만 전혀 번지수가 틀렸다. 한국 논술은 “말이 주관식 서술형 또는 논술형이지 사실은 객관식이다. 아니면 주관식의 형태를 띠고 있는 객관식이다.” 왜냐? 바칼로레아나 아비투어처럼 자유롭고 주관적인 사유를 함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강의시간에 적은 내용을 달달 외어서 주어진 시간에 얼마나 충실히 요령있게 베껴내느냐를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칼로레아나 아비투어에는 ‘정답’이 없다.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얼마나 창의적·합리적으로 펼쳐가느냐를 살피는 평가방식에 정해진 답이 있을 리 없다.
 
서울대 등 이른바 한국 ‘명문대학’들이 생각하는 논술시험은 ‘정답’을 설정하고 소수점 아래 수치까지 점수를 매겨 눈곱만한 차이라도 만들어내 등수를 매기는 것이다. 대단한 듯 얘기하는 ‘변별력’이라는 것도 결국 그 눈곱 차이를 근거로 줄을 세우는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초·중·고교 수업은 객관식 외우기로 일관해놓고 대학입시는 갑자기 대학생에게도 가르치지 않는 ‘고담준론’을 주관식으로 써내라는, 양자간의 비유기적 이행이 초래한 현저한 간극을 메우는 것이 바로 사교육이다. 밤낮 입시만을 생각하고 기법을 개발해내는 학원강사가 프로라면 학교 교사는 아마추어다. 남을 죽이고라도 먼저 윗자리에 올라서야 하는 사회에서 평생을 결정해 버리는 대입에 목을 거는 수험생과 그 부모들이 프로를 더 신뢰하는 건 당연지사. 사교육이 번성하는 사회심리적 배경이다. 더 비싼 강사를 살수록 명문대 진학률은 높아진다. 공교육은 오히려 방해물이다. 개천에선 이제 용이 나올 수 없다.

그렇게 해서 대입시험이 끝나면 고교까지의 교육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대학교육도 끝이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이 존재하는 가치나 의미는 진리탐구도 전문교육도 아니다. 대학에 합격하는 것, 그것도 가능한 한 서열 피라미드 상층부에 속하는 대학에 합격하는 것 자체가 가치요 의미다. 대학에 입학함과 동시에 게임과 경쟁은 이미 끝났다. 그 결과 대학에서는 더 이상 공부할 필요가 없다.”

기득권층은 왜 망하는가? 예컨대 이런 모순구조에 대해 의문을 갖거나 본질을 간파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서열화 피라미드의 정점 서울대와 사립‘명문’대 진학은 포기해야 한다. 그런 일에 한눈팔아서는 ‘위험분자’로 낙인찍힐뿐더러 변별력 사다리에서 한치의 의심도 없이 돌진하는 학생들을 앞서기 어렵다. 그렇게 해서 기득권층은 오직 그들과 체제에 순응하는 자들로 재생산 구조를 짜겠지만 그렇게 해서는 누구도 문제를 지적하지 않고 모순은 심화될 뿐이다.

그들 속에서 10만명 100만명을 먹여살릴 기술자는 나올 수 있을지 몰라도 국가나 사회를 살리는 ‘인재’는 나오지 않는다. 진짜 인재를 기르려면 지금까지의 잘못된 ‘인재 이데올로기’를 버려야 한다. “한국 사회는 이제 ‘국가(사회)의 개인들’에서 ‘개인들의 국가(사회)’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 국가나 사회가 해야 할 일은 교육을 통해 각 개인이 타고난 다양한 관심이나 개성과 특성 및 적성을 마음껏 발휘하고 발전시키도록 ‘산파’ 구실을 하는 것이고, 다채로운 능력과 역량을 갖춘 개인들을 조화롭게 조직하는 것이다. 바로 이들이 ‘인적자원’이 되는 것이고 ‘인재’가 되는 것이며, 국제경쟁력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이게 바로 김 교수가 지향하는 “조직화된 개인주의”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사진 이종찬 기자 rhee@hani.co.k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출처: 한겨레)
 
(앞부분 생략) 이건 단순히 영화가 재미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재미없는 영화는 세상을 해치지 않는다. 물론 그 영화를 보려고 2시간 정도를 낭비한 사람들에게는 재앙일 수도 있지만 2시간 정도의 시간을 낭비하는 더 나쁜 일들은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이렇게 반복되는 소재나 이야기가 현실과는 격리된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들이 아무리 충실하게 현실을 반영해도 그 영화 속의 현실은 실제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을 넘어서고 만다.

이건 꼭 퀴어 영화만의 경우도 아니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이윤기의 <여자, 정혜>의 결말에 만족하지 못하는 건, 어린 시절 겪었던 성폭력의 경험이라는 진상이 지나치게 고루한 클리셰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은 현실세계에서도 클리셰인가? 현실세계에서는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종류의 폭력은 겪는 사람들에겐 똑같이 아프다. 하지만 스크린이나 활자로 수백번 반복되며 관습이 되어버린 이야기 재료들은 지겨워진 관객들과 독자들을 충분히 자극하지 못한다. 결국 모두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해버리고 끝나 버리는데, 그러는 과정 중 현실 세계의 부조리와 폭력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영화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고 사람들을 자극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그런 영화들을 처음부터 보지도 않고, 본다고 해도 그런 주제들이 계속 반복되는 동안 그냥 그 모든 것들에 익숙해져버리고 만다. 아마 따지고 보면 메시지 영화들도 일종의 도피처일 것이다. 세상에 우리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가 실제로 겪는 것 이상으로 많다는 환상을 주는 도피처.

(듀나 '퀴어 영화라도 뻔해지면 유죄'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출처: 한겨레)
 
당신은 지금 연애가 아니라 결혼이 하고 싶은 거라. 근데 왜 당신이 그 나이에 벌써 연애하는 족족 결혼에 안달인지 알고 있나. 그거 결혼을 불확실한 당신 삶에 대한 보장자산으로 간주해 그런 거거든. 타박하려는 게 아니라, 스스로 그 이유는 알고나 안달하라고.

불확실성은 삶의 본질이야. 당신만 불안한 게 아냐. 그걸 스스로 감당하는 어느 순간부터 아이는 어른이 돼. 그게 무서워 질질 짜는 것까진 괜찮아. 다들 그러니까. 하지만 그걸 남이 대신 해결해 주길 바라진 말라고. 남자가 능력 없는데 그 집이 능력 된다는 게 어떻게 당장 결혼의 조건이 되나. 그 집과 결혼하나. 그건 성장지체를 넘어 노예근성이야.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야 행복하다는 거, 일종의 신화야. 사랑으로 결혼해도 불행해지는 커플 부지기수고, 조건 맞춰 결혼해도 잘 사는 이들 적지 않아. 중요한 건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 당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게 어떤 것인가에 있는 거야. 돈과 외양이 훨씬 중요한 사람도 있고 생의 불확실성과 흥분을 함께 누리는 게 더 중요한 사람도 있다고. 결혼에서 가장 먼저 할 질문은 ‘누구랑’이 아냐. ‘나는 언제 행복한가’라고. 사랑이냐 조건이냐, 따지는 게 잘못된 게 아니라 지가 어떤 놈년인지도 모르면서 엉뚱한 것만 따지고 자빠진 거, 그게 멍청한 거라고.

그래도 꼭, 지금, 해야겠다면, 이거 하나는 명심하라고. 결혼은 숙명이 아니라 제도야. 사람들이 발명, 한 거라고.

(기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출처: 한겨레)

변태는 없다. 취향이 있을 뿐. 그러니 언제나 중요한 건 합의.
- 김어준, 「그까이꺼 아나토미」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출처: 한겨레)
 
참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생각도 늘 흘러가 보았던 익숙한 길로만 가려고 한다. 사교육의 폐해 때문에 내신 위주로 전형을 바꾼다는 최근 2008학년도 특목고 전형요강에 대한 기사를 보면서 든 생각이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보자. 우리는 늘 사교육 문제를 입시 방식의 문제로 직결시키는 사고가 습관화되어 있다. 그런데 도대체 이 방식으로 사교육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일까? 내신 위주로 선발하고 학교에서 배운 범위 안에서 시험문제를 내면 된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내신을 높이기 위한 사교육과, 뻔한 시험문제라도 빠른 시간 안에 정확하게 잘 푸는 기술을 익히기 위한 사교육이 성업 중이다. 이미 학원들이 각 학교의 중간·기말고사 시험문제의 경향을 분석하여 그에 맞는 성적 향상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공교육이 효율적이지 못해서 사교육이 판을 치는 것이라고, 평준화를 없애고 공교육의 효율성을 높이면 사교육의 폐해가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하는 습관도 아주 강고하다. 그러나 이 역시 ‘천만의 말씀’이다. 사교육의 존재가 전형 방법이나 평준화 정책과 무관하다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바로 대학 이후의 사교육의 존재다.

더는 입시도 없고, 대학이 평준화된 것도 아닌데, 엄청난 수의 대학생과 대졸자들은 모두 사교육에 목을 매고 있다.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 여러 종류의 자격증을 따기 위해, 그리고 사법시험·행정고시를 비롯한 다양한 공무원 시험을 위해, 교사·기자·아나운서가 되기 위해 맞춤식 학원을 선택하여 한 달에 적게는 수십만 원, 많게는 수백만 원의 사교육비를 쓰고 있다. 심지어 사법연수원생까지도 사교육을 받는다고 한다. 연수원 성적이 좋아야만 처음부터 변호사로 밀려 버리지 않고 ‘공직’인 판검사 자리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유아 시절 방문교사를 통한 한글교육으로 사교육을 시작한 뒤 무려 30년이 넘도록(이는 일생의 거의 절반이다) 사교육 속에서 살다가 중·장년을 맞는 것이다. 이는 공교육의 문제나 입시의 문제가 아니다. 사교육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획일적 서열화의 살벌한 질서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남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는 직장에, 안정된 정규직으로 취업하기 위해, 그럼으로써 남들보다 좀더 좋은 지역의 좀더 넓은 평수의 아파트를 갖기 위해 사교육을 받는 것이다. 그러지 못하면 죽을 것처럼 불안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더욱 무서운 생각의 습관은, 사교육의 문제점을 오로지 교육 기회의 불평등의 문제로만 보는 것이다. 그러니 돈 들여서라도 좋은 인재를 키워내야 한다는 반론이 늘 제기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사교육의 문제가 그것뿐일까?

전형의 경향에 맞추어 시험 보는 훈련을 하는 것은 진정한 실력 향상의 길이 아니다. 시험 잘 보는 훈련으로는 결코 창의력이나 사고력을 향상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무살이 되도록 시험만 보면서 성장하여 대학에 들어온 학생들을 보면서 늘 드는 생각이다. 도대체 생각을 왜 해야 하는지, 스스로 문제를 어떻게 설정하며 해결해야 하는지 모르는 학생들은 다시 대학에서도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또다른 사교육을 찾게 된다. 입학시험을 통과했음에도 스스로 공부해본 적이 없으니 대학 수업을 ‘수학’할 ‘능력’이 제대로 생겼을 리가 없다. 이런 학생들은, 벌이가 좋은 전공을 선택하기 위해 대학원생들에게 과외를 받아 학점을 올린단다.

입시요강만 고치는 방식으로는 아이들을 ‘창의적 인간’이 아닌 ‘시험 보는 기계’로 만드는 사교육을 결코 멈출 수 없다. (* 이것이 사회주의적인 발상이다. 이것을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이 사회주의 운동이고, 그런 용기가 있는 사람이 사회주의자다.)

이영미/대중예술 평론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