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 이영미 '야!한국사회' 중에서 일부 편집) 
 
- 몇 해 전 제주도의 교사단체에서 주최하는 자리에서 남북 문화교류와 관련된 특강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 이 질문이 나왔다. 분단 반세기 동안 심화된 남북 언어의 이질성에 대한 의견을 묻는 것이었다. 내 대답은 이러했다. “어느 정도의 이질화는 당연한 것이며, 교류와 접촉이 늘어나면 자연히 동질화될 것입니다. 사실 남한의 말들도 모두 동질적이지 않은데도 별 문제가 없지 않습니까. 저에게는 북한말보다 제주도 방언이 훨씬 어렵습니다. 제주에서 이런 질문을 받으니 참 흥미롭네요.” 제주어와 표준어의 이중언어 교육을 받는다고 할 만한 제주도민들이 하는 이런 질문은, 언론 등에 의해 학습된 질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 이는 다른 문화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북한 문화를 접하면서 느끼는 심각한 이질감은, 동질성에 대한 욕구가 지나치게 커서 생기는 현상이다. 우리는 반세기 갈라진 만큼 이질화되었고, 그 이전 수천 년을 함께 살아온 만큼 엄청나게 큰 동질성을 지니고 있다.

- 과연 남북문화 동질화가 정말 시급히 필요한가 하는 것도 의문이다. 문화란 지역·계층·세대·성에 따라 이질적이기 마련이다. 이질성은 시급히 바로잡아야 할 오류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세대 사이, 종족 사이에 다른 문화를 지니고 있다고 그것을 꼭 하나로 통일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단지 그들이 서로의 문화에 대해 너그러이 인정하는 것, 더 나아가 다른 문화와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곧 지금 남북 문화교류에서 필요한 사고는, 동질성 회복이 아니라, 문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아가 다양한 문화와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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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우효경 칼럼 '2050 여성살이' 중에서)

즐겁게 수다를 떨며 돌아오던 중 갑자기 그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효경씨, K선생님 있잖아, 영어 때문에 외국인(?) 남자 사귄대. 순전히 영어 배우려고. 저렇게 예쁘고 날씬한 여자가 못생긴 영국 남자 사귀면 의심해 봐야 되는 거지’라고 하셨다. 자, 그 자리에서 상대방의 체면과 앞으로의 관계를 생각해서 꾹 참은 내 질문을 이제 한번 물어보자. 영어 때문에 영국인 사귀면 무슨 큰일이 나는데?

연애를 시작하는 데는 누구나 목적이 있다. 당장 그 선생님도 조건 맞춰서 선보고 결혼하지 않았던가. 거기 대체 어디 ‘순수한 사랑’이 있단 말인가. 그놈의 순수한 사랑은 드라마에 있고 영화에 있고 소설에 있지만, 유일하게 현실에만 없는 것이다. 동포 사회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여전히 젊은 여자들이 외국 사람과 돌아다니거나 사귀는 걸 보면 양놈에게 안기는 ‘걸레’라느니, 목적이 있어서 그렇다느니,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 저속한 말을 뒤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한심하다.

당신들의 연애는 얼마나 지고지순하고 아름답기에? 원래 연애란 상대방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발견하는 것이다. 조건 따져 선을 보는 것은 순수한 사랑이고 외국인과 사귀는 것은 흑심이라는 그 잣대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왜 외국까지 나와서 죽어도 한국밥, 한국사람 고집하며 남의 연애에 간섭하며 판단하려 하는지 이해하기가 힘들다. 솔직히 나는 한국 남자 뒷바라지하러 여기까지 온 그 선생님이 영국 남자 잘 만나 연애하는 다른 선생님보다 훨씬 불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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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우리로 하여금 곤고함을 견디게 하는 희망의 동의어가 되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꿈은 발밑의 땅과 자기 자신의 현실에 눈멀게 합니다. 오늘에 쏟아야 할 노력을 모욕합니다. 나는 이것이 가장 경계해야 할 꿈의 위험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우리 세기가 경영해 온 꿈이 재부와 명성과 지위와 승리로 그 내용을 채우고 있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꿈의 유무에 앞서 꿈의 내용을 물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신영복, <아메리카 드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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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잘 쓰는 사람은 결코 독자를 저버리지 않는다. 글을 잘 읽는 사람 또한 작자를 저버리지 않는다. 여기에 작자와 독자 사이에 애틋한 사랑이 맺어진다. 그 사랑이란 무엇인가. 시대의 공민이요, 사회의 공분이요, 인생의 공명인 것이다.

문인들이 흔히 대단할 것도 없는 신변잡사를 즐겨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생의 편모와 생활의 정회를 새삼 느꼈기 때문이다.
속악한 시정잡사도 때로는 꺼리지 않고 쓰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인생의 모순과 사회의 부조리를 여기서 뼈아프게 느꼈기 때문이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요 내 프리즘을 통하여 재생된 자연인 까닭에 새롭고, 자신은 주관적인 자신이 아니요 응시해서 얻은 객관적인 자신일 때 하나의 인간상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감정은 여과된 감정이라야 아름답고, 사색은 발효된 사색이라야 정이 서리나니, 여기서 비로소 사소하고 잡다한 모든 것이 모두 다 글이 되는 것이다.

의지가 강렬한 남아는 과묵한 속에 정열이 넘치고, 사랑이 깊은 여인은 밤새도록 하소연하던 사연도 만나서는 말이 적으니, 진실하고 깊이 있는 문장이 장황하고 산만할 수가 없다. 사진의부진의 여운이 여기 있는 것이다.

깊은 못 위에 연꽃과 같이 뚜렷하게 나타나면서도 바닥에 찬물과 같은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물 밑의 흙과 같이 그림자 밑에 더 넓은 바닥이 있어 글의 배경을 이룸으로써 비로소 음미에 음미를 거듭할 맛이 나는 것이다. 그러고는 멀수록 맑은 향기가 은은히 퍼지며, 한 송이 뚜렷한 연꽃이 다시 우아하게 떠오르는 것이다.

(윤오영, <쓰고 싶고 읽고 싶은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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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용규의 문학 속 철학산책' 에서 발췌 및 임의 편집)

바리공주 설화에서는 바리가 서천에 가서 약수를 구해다가 죽은 부모를 살린다. 하지만 〈바리데기〉에서는 바리가 찾는 생명수가 무엇인지조차 나타나 있지 않다. 혹시 ‘눈물’이 아닐까라는 생각은 든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사람은 스스로의 구원을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물이 과연 생명수일까? 각종 끔찍한 폭력으로 희생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한줄기 연민조차 없다면야 그 어떤 대처방안도 없겠지만, 눈물만으로 굶주림, 구타, 집단강간, 죽임, 테러와 전쟁이 전염병처럼 번져가는 21세기 지구촌을 구할 수 있을까?

오래전부터 폭력에 관한 정당한 대처 방안은 비폭력이다.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면 그 역시 폭력이기 때문에 폭력의 확산과 악순환을 막을 길이 없다. ‘올바른 폭력은 없다’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그런데 ‘직접행동’이라는 용어와 함께 비폭력의 새로운 형태가 최근 주목받고 있다.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대라’는 식의 전통적인 비폭력은 ‘폭력을 가하는 자가 승리하는 사회’를 만들기 때문에 옳지 않다는 것이 이 주장의 시발점이다.

따라서 폭력을 줄이려면 적극적으로 맞서 전략적으로 싸워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직접행동이다. 그 결과 직접행동은 때로 과격해질 수도 있지만 그 목적이 비폭력에 있다는 점에서 테러와는 다르다. 대표적인 예로 ‘간디의 소금행진’을 들 수 있다.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서는 소금의 생산과 판매를 영국이 독점하는 내용의 소금세법이 실시되고 있었다. 간디는 이와 같은 영국의 폭력적 억압들을 폐기하기 위해 11개 항목의 요구안을 제출했다.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제자들과 함께 아마다바드에서 출발하여 무려 388㎞를 걸었다. 그리고 단디 해안에 도착하자 소금을 만들었다. 바로 이것이 인도 독립의 견고한 발판이 되었다. 간디는 이렇게 말했다. “직접행동이라는 표현 없이는 비폭력은 무의미합니다. 직접행동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가장 행동적인 힘입니다. 사람은 소극적으로는 비폭력적일 수 없습니다.” 오직 직접행동이라는 적극적 저항에 의해서만 폭력을 줄이고 비폭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오늘날 직접행동은 벌목을 막기 위해 나무에 자기 몸을 묶고, 핵폐기물을 실은 열차 앞에서 연좌농성을 벌이며, 유전자 조작 농산물을 뽑아버리는 등의 다양한 시민운동으로 세계 곳곳에서 전개되고 있다. 〈직접행동〉을 쓴 에이프릴 카터는 직접행동은 민주주의의 실천이며, 바로 여기에 민주주의의 미래가 달렸다고 단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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