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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노동시장의 정치 사회학
정이환 지음 / 후마니타스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 지은이는 “자본주의의 다양성”에 대한 이론적 논의의 연장으로서 지구화라는 맥락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대 노동시장 유연화 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고찰한다. 2부에서는 자본주의의 다양성을 주장하는 이들이 했던 방식대로 북구 사민주의(4장), 독일(5장), 미국(6장)의 노동시장제도를 살펴본 후, 일본, 한국, 대만 동아시아 3국의 노사관계(7장)와 고용안정성(8장)의 변화를 통계방법을 통해 비교 검토하고 있다. 3부에서는 한국의 노동시장체제의 변동을 미국과의 비교를 통해서(9장), 분단노동시장의 현실과 연대의 고취를 통해 이를 극복하고자 했던 사례들을 통해 살펴보고(10장), 11장에서는 한국노동시장체제 개혁의 대략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론적 논의와 그 이론적 논의에 바탕이 된 서구의 사례들에 대한 문헌 리뷰를 한 후, 통계를 통해 한국과 일본, 대만, 미국 노동시장을 비교 검토하고, 또 한국 내의 단위 사업장들에서 어떻게 비정규직 투쟁이 조직되어 왔는 지 살펴본 후, 향후의 대안을 모색하고 있는데, 책 전체의 짜임새가 참 훌륭하다고 생각하였다. 책이 다루는 내용의 범위가 방대하면서도 상당히 전문적이므로 이 서평에서는 한국 노동시장이 관련되어 있는 7장부터 11장까지의 내용에 집중해 저자가 강조하고 있는 점들을 간략히 짚어보고자 한다.
지은이는 동아시아 노동시장이 구미국가와 대조되는 특징(기업내부노동시장의 발달, 상대적으로 평등한 소득과 비교적 낮은 실업률 간의 양립 등)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의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각국이 서로 다른 변화 과정을 거침에 따라, 일부의 주장과 달리 “동아시아 복지 모델”이나 “동아시아형 노동체제”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261, 292). 지은이에 따르면, 한국, 일본, 대만의 상이한 노사관계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266 ff, 322).
한국 일본 대만
전체 노사관계 분권적 교섭형 (약한) 조율된 교섭형 시장형
기업내 노사관계 대립적 노사관계 협조적 노사관계 종속적 노사관계
전체 노사관계를 보면, 일본은 조율된 교섭형을, 대만은 시장형을 유지한 데에 반해, 한국은 1980년대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서 시장형에서 분권적 교섭형으로 이행하였다 (269). “시장형은 임금과 노동조건이 시장 원리에 의해 결정되는 유형”으로서, “노동조합이나 단체교섭이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노동시장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근로 조건은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며 노동시장은 '제도화되지 않은' 시장이 된다.” “분권적 교섭형은 단체교섭이 기업별 또는 산업별로 행해지면서 기업 또는 산업 간에 조율이 이루어지지 않는 유형”인데, “임금인상이나 임금평준화라는 목표는 교섭 단위 내에 국한되어 추구되며, 교섭 단위 밖에 있는 기업이나 부문과의 형평성은 별로 고려되지 않는다” (267). 박동(2005: 165)은 이 분권적 교섭 유형을 “파편화되고 조정되지 않은 임금결정제도”라고 표현한 바 있다. 지은이는 한국의 전체적 임금불평등도가 “1980년대 이후 감소하다가 1990년대 후반 이후 다시 증가”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283).
이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과 1997-98년 경제 위기가 이러한 추세의 변동에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지은이는 “기업 규모별 임금 격차라는 측면에서 한국 노동시장은 1980년대 말에 통합노동시장에서 분절노동시장으로 변화되었으며, 1990년대 말 이후 그런 성격이 더욱 강화되었다”(283)고 진단하면서, “'1987년 노동체제' 개념은 노동시장 분석에도 유용하다”고 본다 (391): “노동시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1987년 노동체제는 기업별 교섭, 기업내부노동시장, 그리고 노동시장 분절을 주요 특징으로 하는 체제이다.” 그러나 90년대 중반까지는 높은 경제성장률과 낮은 실업률로 초래된 인력난 때문에 기업 규모별 임금 격차를 비롯한 전반적 임금 격차는 축소되어 왔다. 당시까지는 대기업의 임금인상은 전체 중소기업으로 파급되어 전체 임금노동자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는 한국이 임금 상승과 함께 전반적 대중시장의 비약적 성장으로 유혈적 테일러주의에서 주변부 포드주의로 이행했다고 주장했던 리피에츠의 논의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1997년의 경제위기는 전체 임금노동자의 생활수준이 향상될 수 없는 상황으로의 급반전을 동반하며, 기업규모간 임금격차를 확대시킴으로써 노동시장 분절을 심화시킨다.
1990년대의 긴 불황에 대한 일본 사용자의 대처와 1997년의 격렬했던 경제 위기에 대한 한국 사용자의 대처 간의 차이는 양국 노사관계의 차이에 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볼 거리를 던져준다: “일본에서는 경제 불황에도 불구하고 공세적 인력 감축이 추진되지 않았고 이것은 기존의 협조적 노사관계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이에 비해 한국의 사용자들이 추진한 인력 감축은 노사간 불신을 키우고 한국의 노사관계를 더욱 대립적으로 만들었다” (322). 이것이 단순히 긴 불황과 짧고 강력한 경제위기라는 주어진 조건의 차이일까? 아니면 단지 협조적 노사관계나 대립적 노사관계의 지속으로 설명되는 경로의존성일까? 문제가 그렇게 간단할 것 같지는 않다. 경제 위기 이후의 노동시장 체제는 노동시장의 분절이라는 1987년 노동체제의 특징의 지속, 심화로 볼 수 있는 한편, 기업내부노동시장의 확장과 같은 87년 체제 내부 추세의 역전으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다름아닌 계급 역관계의 역전 아닌가? (이렇게 단언하려면 다른 많은 조건들을 고려해야 하긴 할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1987년 노동체제의 끝은 어디까지라고 보아야 할까? 다음 몇 년 체제가 시작되어야 알 수 있는 문제인가?
이런 의문은 특히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의 갑갑한 노동계 상황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2006년 여름에 출판된 이 책에서 지은이는 영미식 탈규제와 유연화는 “현실적이지도 않거니와 규범적으로도 동의하기 어려운 일”(395)이라고 말하지만, 언제 세상이 우리가 규범적으로 동의하는 방향으로 굴러왔는가? 문제는 이 영미식 탈규제와 유연화가 자본의 공세 속에서 가능할 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뻑하면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외치고, 노동부 장관이란 자가 임금교섭은 앞으로 2년에 한번씩 하자고 하고, 비정규직 고용기한은 현행 2년에서 3년으로 늘리자고 한다. 저들만 그런가?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외치는 진보정치세력은 분열되었다. 2년 전 현실적이지도 않았고 규범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웠던 일이 벌어지는 지금,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
1987년 노동체제를 탄생시킨 87년 여름의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계급 형성의 문제는 화이트칼라든 블루칼라든, 남자든 여자든, 대졸이든 국졸이든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슬로건으로 집약되듯, 자본과 국가에 대항하여 단결투쟁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90년대 후반을 거치면서, 이제 그 슬로건은 촌빨 날리는 死語가 되어버렸다. 노동계급 형성의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이해 관계가 상이한 노동자 집단”(358) 사이에 연대를 형성하는 일이지만, 오늘날의 프레임은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말이 전했던 그 가슴벅참을 허용치 않는다. 사례 연구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처럼 비정규직 노동자가 바로 옆에서 일할수록, 또 그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이 더 안 좋을수록, 정규직은 고용불안을 느끼고 연대를 꺼려 하게 된다.
이 책이 좋은 책이라는 데에는 전문학자들 사이에서는 이견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단지 지은이 정이환 선생이 국내 박사이고 나름 좌파임에도 불구하고 통계에 빠삭하다는 지엽적 사실에서 이 책의 훌륭함을 찾는 칭찬들은 참으로 짜증난다. 내가 이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과는 좀 다를 것 같다. 이 책이 좋은 책이라는 것은 갈 길을 제시해준다는 것보다는 (물론 지은이가 끝에서 밝히는 방향 설정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날것으로 존재하는 현실의 갑갑함을 독자들에게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 아닐까 싶다. 10장에서 보여지는 작업장 내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불평등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동운동들의 좌절과 제한된 성공 사례들은 이것이 우리가 규범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세상의 모습을 현실 속에서 이루어 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지 다시 한 번 알려준다. 난 합리적 언어로 치장된 대안도, 분노의 수사로 점철된 선동도 믿지 않는다. 패배에 대한 냉정한 기록만을 신뢰한다. 염세주의적 매저키스트인가 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내게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