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실의 진화
홍성욱 지음, 박한나 그림 / 김영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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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만에 책 한 권을 본 것이 언제였는지 가물가물하다. 곰곰 생각해보니 아마도 82년생 김지영』이 마지막였던 것 같다. 그렇다. 이 책은 내가 보통 보는 종류의 책이 아니다. 20대 말부터 에세이나 소설을 잘 안 읽게 되었다. 가끔 보게 되어도 사지 않았다. 내게는 훨씬 중요한 다른 책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을 빨리 읽지 못하는 나는 책 한 권을 갖고 몇 달을 씨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다른 중요한 일이 생기거나, 다른 읽을거리가 생겨서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보통 잘 읽지 않는 주제의 책였지만, 이 책은 분명한 목적을 갖고 읽었다. 이 책 독서의 목적은 보름 동안 씨름했던 브뤼노 라투르의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를, 특히 그 책에 나오는 보일과 홉스의 논쟁과 대조에 관해 좀더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힘들게 읽었지만,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직 많은 라투르의 그 책의 배경을 좀더 알고 싶었다. 이 책 『실험실의 진화』의 5-8장은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2장의 훌륭한 입문서이다. 오늘 하루의 독서로 이 목적을 이룬 내게 이 책은 분명히 유익했다. 라투르라는 힘든 산을 오르다 쉬고 있는데, 그 산에 먼저 올랐다가 내려오는 사람이 하는 "조금만 더 힘내면 된다"는 인사 같았다. 하지만 턱까지 차는 숨을 내쉬며 산을 기다시피 오르는 사람은 그 말을 믿지 않는다. 그 말이 주는 기대가 독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쨌든 "정화", "매개" 등 라투르 특유의 낯선 개념 없이 라투르가 하고 싶었던 말을 잘 전해주고 있다. 


진공은 발견된 것인가, 발명된 것인가? 그것은 자연인가 인공인가? 이런 이분법이 무의미해지는 "만들어지고 있는 과학", 또 그 과학을 만들고 있는 공간인 실험실이 이 책의 대상이다. 곧 라투르가 "자연/사회의 대분할"이라고 칭한 것이 과학 활동의 결과이지, 그 전에 주어진 것이 아님을 아주 쉬운 언어로 밝히고 있다.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자연의 일부를 실험실로 들여왔는가, 또 이 과정에서 수많은 하이브리드들이 생산되고 증식되면서, 결국 마치 저 밖에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것 같은 "자연"이라는 결과를 생산했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두 번째 유익함은 이 책에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인물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여성의 권리 옹호』의 저자 매리 울스턴크래프트라든가 『마르크스의 생태학』에서 맑스의 물질대사 균열 이론에 영감을 주었던 유스투스 폰 리비히 같은 이들이 잠시지만 얼굴을 비춰 반가웠다.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짧아 아쉽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런 나의 관심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연금술이나 실험에 대한 약간의 호기심만을 가진 이들에게도 이 책은 매우 유익할 것 같다. 그들이 흰 가운을 입고 실험을 해본 사람이건 그렇지 않은 사람이건 말이다. 우리는 우리가 잘 모르는 사람들을 거리를 둔 채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들을 잘 알게 되면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임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인류학자의 시선일텐데, 이 책은 그 시선의 온당함과 가치를 잘 보여주고 있다.


글도 쉽게 쓰여져 있지만, 읽는 내내 재미있었는데, 세 가지 점이 좋았다. 일단 책 제본이 마음에 들었다. 실로 된 제본이 책 등에서 장이 분리될 위험 없이, 그리고 두 페이지에 걸쳐 있는 삽화의 감상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둘째, 소소한 것일 수도 있는데, 책에서 언급되는 명화들이 실리지 않고 QR 코드로 찍어 보게 되었는데, 이것도 신선한 경험이었다. 셋째, 삽화가 정말 훌륭하다. 나는 "그린이의 말"이 실려 있는 책은 처음 본 것 같은데, 거기에 실린 그린이 박한나의 꼼꼼함과 정성에 격한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래서 지은이와 그린이 두 분의 공동저작의 속편을 기대한다. 설령 그것이 아니더라도 그린이의 다음 작업들이 몹시 기대된다.

과학자는 자연 전체를 실험실로 들여올 수 없다. 실험실로 가지고 들어오기 위해서는 자연을 일부만 추출하거나 변형해야 한다. - P64

해킹의 <<표상하기와 개입하기>>의 핵심 주장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실험에는 (이론과 무관한) 그 자체의 삶이 있다‘는 것이다. ... 해킹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실험은 대부분 이론을 검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 해킹은 실험을 ‘자연을 새로운 방식으로 작동하게 만드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 해킹의 책이 나오면서 실험의 역할은 이론을 검증함으로써 이론의 발전을 보조하는 것에서 새로운 현상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바뀌었다.그렇지만 무시되었던 실험을 복권해 ‘실험으로의 전환‘을 촉발한 해킹도 실험이 진행되는 공간인 실험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해킹은 자신이 분석한 여러 실험을 실험실이라는 물질적이고 구체적인 공간이 아니라 마치 추상적인 공간에서 일어난 일처럼 기술했다. - P68

라투르는 ... 병역 의무 대신에 서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의 대도시 아비장에 있던 프랑스 평화봉사단 근무를 자원했다. 이때 라투르는 아비장의 프랑스 기관에서 일하던 백인 상급자를 지역의 흑인으로 대체했을 때 생길 수 잇는 문제를 연구하는 데 참여했다. ... 당시 아비장의 프랑스인 학교에서는 흑인 학생들이 ‘아프리카인의 심성‘을 가지고 있어서 기계공학에서 쓰는 3차원 제도 도형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불평하던 교사들이 있었따. ... 그런데 흑인 학생들을 인터뷰한 라투르에 따르면 이들이 제도 도형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엔진 같은 기계를 한 번도 실제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아프리카인의 심성‘과는 상관이 없었다. ... 그는 이 초기 연구에서 전문성이나 능력이라고 부르는 역량은 추상적인 지식이 아니라 일종의 네트워크, 혹은 링크와 비슷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나중에 이런 생각을 과학에도 적용한다. - P74

과학자들은 자신의 연구를 가설이나 주장 수준에서 확고한 사실 수준으로 끌어올리려고 노력한다. 반대로 다른 과학자의 연구, 특히 경쟁자의 연구는 사실 수준에서 가설 수준으로 낮추려고 한다. 라투르는 확고한 사실이 된 과학 지식을 ‘블랙박스‘라고 부른다.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가지고 있었떤 링크들이 대부분 떨어져 나가고, 사실 하나만 패키지처럼 남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물론 다른 과학자들도 그 가실을 받아들일 뿐, 블랙박스의 속을 들여다보지는 않는다. 이렇게 블랙박스가 된 사실들은 ‘만들어진 과학‘이다. 과학자가 과학철학자들이 합리적, 객관적, 보편적 지식이라고 생각하는 과학은 이런 것이다. 반면에 실험실은 ‘만들어지고 있는 과학‘을 볼 수 있는 장소이다. 만들어지고 있는 과학의 경우에는 모든 것이 불확실히다. 사실은 아직 주장이나 가설 단계에 있고, 논쟁과 토론이 오가고, 실험은 성공과 실패를 반복한다. - P81

우리는 보통 과학자가 사실을 발견한다고 생각하지만, 라투르에 의하면 과학적 사실은 이런 이종의 요소들이 얽힌 네트워크가 공고해지면서 생겨나는 것이다. 이미 ‘만들어진 과학‘에서 과학적 논쟁의 승자와 패자는 자연이라는 실재가 정한다. 승자는 자연에 잘 들어맞는 이론을 제창했꼬, 패자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승패가 갈린다. 반면에 ‘만들어지고 있는 과학‘에서는 과학 논쟁이 종결되면서 승자의 이론이 자연의 실재에 부합하는 것으로 평가되기 시작한다. 자연이 논쟁을 종결한 것은 아니지만, 선후 ㅗ간계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자연에 의해 논쟁이 종결됐다고 믿는다. 라투르에 의하면 ‘만들어진 과학‘과 ‘만들어지고 있는 과학‘이라는 과학의 두 모습은 마치 두 얼굴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야누스와 비슷하다. - P82

파스퇴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을 배양해서 페트리접시 위에서 세균 군체(colony)를 만들었다. 이렇게 세균을 눈에 보이도록 만들고 나니, 이를 약화시키기 위한 여러 방법을 도원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파스퇴르는 무서운 세균을 길들일 수 있게 됐는데, 이는 오직 그의 실험실 내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즉 파스퇴르의 실험실에서는 파스퇴르가 세균보다 강했다. 실험실은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힘의 역전이 일어나는 공간이었따. - P91

사회학자들은 권력이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이나 권력 기관, 규율 같은 것에서 나온다고 생각한 데 반해 라투르는 백신이나 표준저항 같은 인공물에 주목한 것이다. 인간은 백신과 연합하면서 과거에는 없었던 인간, 즉 특정한 세균에 항체를 가진 인간으로 변한다. 세균은 백신이 되면서 인간을 죽이는 존재에서 인간을 살리는 존재로 탈바꿈한다. 이렇게 인간과 세균의 새로운 연합을 만들어내는 곳이 바로 실험실이었다. 파스퇴르는 백신으로 프랑스를 실험실화하면서, 스스로 모든 프랑스인이 거쳐가야 하는 존재로 거듭났다.
실험실은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혼종 네트워크가 생겨나는 곳이다. 실험실에서 생긴 네트워크는 보통은 인공물 형태로 실험실 밖으로 나온다. 이것은 또 다른 인간-비인간 네트워크를 만들어낸다. 성장하던 네트워크의 일부는 인공물 같은 형태로 블랙박스화된다. 이런 블랙박스는 사람들이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의무통과점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네트워크는 계속 성장한다. - P96

보일은 집에 있는 실험실에서 얻은 결과를 책이나 논문으로 발표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의 실험을 직접 보지 않았떤 다른 과학자들도 그 결과를 믿을 수 있었을까? ... 실험은 사적인 공간에서 보일이알는 개인이 수행한 작업이다. 반면에 그 결과는 공적인 공간에서, 과학자들이라는 집단을 대상으로 발표된다. 실험하고 결과를 발표하던 보일도 어느 시점에 이런 딜레마를 느꼈던 듯하다. ... 우선 그가 채택한 방법은 많은 사람이 자신의 실험을 지켜보았다고 기록하는 것이었따. 진공펌프의 유리구 속에 새를 넣고 공기를 빼자 새가 점차 기운을 잃다 죽는 것을 발견하고 그는 이 실험을 여러 번 반복했다. 왜 새가 죽는지가 분명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기록할 때 숙녀와 신사들, 의사와 수학자들이 이 실험을 목격했다고 썼다. ... 보일은 독자에게 자신은 물론 이런 목격자들 모두가 젠틀맨이고, 따라서 거짓말을 할 사람들이 아니라는 믿음을 심어주려고 한 것이다. - P106

실패한 실험에 대한 이런 보고는 성공한 실험에 대한 설득력을 높여주었다. ... 보일의 진공 실험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분석한 과학사학자 스티븐 셰이핀은 보일의 스타일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셰이핀은 보일이 자신의 실험을 목격했던 사람을 언급하고, 실험의 시시콜콜한 세부사항을 모두 적고, 실패한 실험까지 기록한 것은 자신의 실험이 믿을 만한 것이라는 인상을 독자에게 심어주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동료 과학자들은 보일의 논문이나 책을 읽다 보면 마치 보일이 했던 실험이 눈앞에 펼쳐지면서 이 실험을 스스로 재현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셰이핀은 이를 "가상의 목격"이라고 불렀다. 즉 보일의 산만한 스타일은 사적인 공간인 자신의 실험실에서 했던 실험 결과를 공적인 공간인 과학자 공동체가 수용하도록 만들기 위한 장치라는 것이다. 셰이핀은 이런 장치를 "문필적 기술"이라고 불렀다. - P110

홉스는 보일이 철학적인 사유 없이 실험 결과를 곧이곧대로 믿은 점을 비판했다. 보일의 펌프는 명백하게 공기가 새고 있었고, 그런 펌프를 가지고 진공을 만든 뒤에 진공 때문에 새가 숨을 쉬지 못해서 죽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했다. 홉스는 진공펌프의 틈으로 공기가 급격하게 빨려 들어와서 유리구 속에 소용돌이를 일으켰고, 새가 이 공기의 소용돌이에 맞아서 죽었다는 새로운 설명을 제시했다. 홉스는 실험이 과학적 사실을 만들어낸다는 주장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한 철학자였다. 그에게 확실한 진리는 실험이 아니라 깊은 철학적 사유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보일은 다시 실험을 통해 홉스를 논박했다. 보일은 새를 넣은 유리구 속에 작은 깃털 하나를 매달았다. 그리고 공기를 빼서 진공을 만들기 시작했다. 새는 괴로워서 헉헉대는데, 깃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홉스의 말대로 공기의 강한 소용돌이가 새를 죽인 것이었다면 깃털은 이런 소용돌이 때문에 요동을 쳤을 것이다. - P113

과학자는 자연을 실험실로 가지고 들어온다. 실험실로 들어온 자연은 단순해지고 반복 조작이 가능한 대상으로 변한다. 실험실에서 자연은 과학자의 통제하에 놓인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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