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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경쟁 - 패자 부활의 나라 스위스 특파원 보고서
맹찬형 지음 / 서해문집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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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경쟁』 맹찬형, 서해문제, 2012. 2.

 

무한 경쟁, 승자독식의 신화가 우리 사회의 지배 담론으로 자리 잡았다. 과열 경쟁의 결정 변인은 노력의 대가가 이전보다 적어졌기 때문이다. 내기물을 욕망하는 사람은 많고, 가질 수 있는 분량이 적어지면 경쟁은 가속이 붙고, 점점 치열해진다. 우리나라 자영업 비율은 24%이다. 그 비율이 어느 정도인지 감을 잡을 수 없다면, 미국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미국의 자영업 비율은 전체 국민의 7%다. 미국인 한명이 돈벌이를 하는 공간에서 우리나라는 네 사람이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인간적인 삶을 꿈꾸기에 사회 시스템이 너무 열악하다. 한국인은 남보다 더 일찍 일을 하고, 더 늦게까지 가게를 열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심각한 상황이다. 그 속에서 치열하게 살고 있지만, 현재는 미래에 저당 잡혀 있다. 대한민국 군인 숫자와 맞먹는 사람이 미용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 얼추 60만 명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자격증을 가진 사람은 충분히 많기 때문에 그들 모두에게 일자리가 주어지지 않을뿐더러, 열악한 조건도 기꺼이 감내해야 한다. 우리에게 선택지는 별로 없다.

 

과열 경쟁은 부정적인 에너지를 분출하고, 일을 성취하는 내적 추동력을 약화시킨다는 것은 이미 학문적으로 검증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이미 체험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쟁’만이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믿음은 어디에서 출발한 것일까? 바로 ‘담론’의 힘이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차가운 논리가 우리의 일상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학교, 직장과 같은 삶의 현장에서 책무성은 높아지고 사회적 보장은 약화되고 있다. 스펙을 쌓지 않으면, 자연도태 될 것이라는 공포가 우리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무수한 ‘상징 자본’이 ‘돈’으로 정량화되고 있다. ‘연봉’ 하나로 좋은 직장을 이야기한다. 경쟁하지 않는 직장을 ‘철 밥 통’이라고 비난한다. 생존을 위한 직장은 있으나, 자아성취와 성장의 꿈 터전이 되어줄 곳은 별로 없다.

 

우리는 내적 동기를 없애고, 주체를 타자화 하는 경쟁에 대해서 180도 다른 ‘성찰’을 해봐야 할 중요한 시점에 있다. 스위스 특파원 맹찬형의 『따뜻한 경쟁』은 외부자의 시선으로 스위스를 바라본다. 그는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승자독식의 우리 사회를 ‘패자 부활’의 기회를 보장하는 스위스와 비교한다. 제대로 된 복지를 경험한 적이 별로 없는 우리는 북구형 복지국가들을 교과서적으로만 알고 있다. 그 앎에는 분명 적지 않은 ‘냉소’도 깔려 있다. 한국의 비약적인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 ‘경쟁’에 있다는 신념과 대척점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경쟁이 없으면 나태해진다’는 담론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타인의 성공을 비하하는 공동체 문화를 필요악이라고 인정하거나, 개인의 인성 문제로 귀인하는 수준으로 봉합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와 더불어 - 배울 점이 있다면 토양이 다른 우리 땅에 맞게 수정하면 될텐데 - 스위스와 같은 북구형 복지국가의 사례를 이야기하면, 문화 사대주의라는 냉소적인 태도도 있다. 여행 수준에서 경험했던 주관적이고 단편적인 경험으로 그 세계를 이해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주관적인 판단은 잠시 괄호 치고 한국과 유럽을 비교 분석하여 ‘성찰’을 도출하는 저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면, 병든 우리 사회를 진단하고, 어떻게 치유해야 할지 방법을 모색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유난히 굴곡이 많았던 근현대의 역사를 가진 우리가 생존했던 방식이 ‘경쟁’이었다면, 이제는 ‘성장’ 보다는 ‘성찰’이 필요하다.

   

『따뜻한 경쟁』은 서문부터 한없이 따뜻하다. 글밭을 일구는 사람은 알고 있다. 인쇄 활자로 박혀 나오는 ‘글’은 말과 달리 누군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다. 자신의 글에서 발견될 오류와 비약에 따른 비판이 두렵지만, 해야 할 말은 반듯하게 해야 하는 숙명을 가진 사람, 그들이 작가다. 기자 출신인 맹찬형의 글쓰기 방식은 독자의 접근을 편안하게 이끈다. 어디에서 펼쳐 들어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책이다. ‘스위스 패러독스’, 높은 대학 진학률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일자리를 가진 우리와 비교해서 쓰이는 말이다. 대학 진학률은 낮더라도 평생 배울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추어진 나라, 가정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 엄마의 행복을 보장하는 나라, 학생들이 가고 싶은 학교, 불편해지더라도 마트 연장을 반대하는 시민, 반려동물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시민의 참여로 명품 국가가 탄생한다. 그런 나라가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가능 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 복지 국가는 관념이 만들어낸 이데아가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에 생각에서 한걸음 더 나가고 싶은 나에게 수용할 수 없는 부분 역시 상당 부분 존재한다. 그는 ‘나가수’와 같은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경쟁에 대한 반성과 전환을 가져왔다고 이야기하지만, 동의하기 어려운 말이다. “등수 매기기 보다 더 재미있는 게 경쟁의 내용이라는 깨달음”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경쟁’을 통한 내용일 뿐이다. 경쟁은 ‘나가수’라는 프로그램과 비슷한 수많은 이란성 쌍둥이를 만들어냈다. 물론 언더에서 자신의 음악 세계를 지켜왔던 가수를 프라임 시간대에 만날 수 있는 기쁨이 컸고, 그들이 노래할 수 있는 영역을 확보한 것은 바람직하지만, 출연했던 가수들이 감내했던 긴장과 강박의 후일담을 듣다 보면, 멀미가 날 지경이다. 당시 그들의 콘서트에 가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나가수’가 고공행진을 하던 초기에 출연 가수의 공연을 몇 차례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노래 사이사이 브릿지 마다 ‘나가수’에 대한 이야기만 했다. ‘나가수’가 없었다면 오늘의 공연도 없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와 ‘나가수’ 출연의 후일담이 대부분이었다. 콘서트에서는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까지 이어졌다. ‘나가수’ 사전 녹화가 바로 있기 때문이란다. 공연 보고 난 후의 뒷맛은 참으로 썼다. 경쟁을 순화했다고 해서, 경쟁의 문제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영국의 ‘생산적 복지’가 유사 신자유주의인 것처럼, ‘따뜻한 경쟁’이 경쟁의 다른 이름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상승을 꿈꾸는 사람들의 사다리에는 위계에 있으나, 아무리 올라가도 끝은 없다. 경쟁은 또 다른 경쟁으로 이어지며, 우리의 삶을 피폐화한다. 패러다임의 전환 없이 개인이 사다리를 걷어찰 용기를 실천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경쟁은 나쁠 뿐 아니라, 비효율적이라는 맹찬형의 글을 읽고도 미진함은 남는다. 『따뜻한 경쟁』의 한계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독자에게 - 오래전에 출판된 - 알피콘의 『경쟁을 넘어서』를 추천한다. 교육심리학자인 알피콘은 인간이 원래 경쟁적이고, 경쟁을 통해서 생산성을 증진할 수 있다는 믿음이 얼마나 잘못된 신화인지를 조목조목 반박한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자존(自存)은 경쟁을 통해서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협력은 모두의 성장을 담보하고, 인간을 중심에 세우는 일이 될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와 실패를 한다. 실수는 배움으로 남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성장한다. 안철수는 실패를 용납하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여러 차례 언급했다. 단 한 번의 실패로 벤처 기업들이 사라졌다. 부도가 나면, 재기의 기회가 쉽사리 주어지지 않는다. 값비싼 비용을 지불한 실패는 재도전하여 성공의 동력으로 쓰여야 한다. ‘경쟁’의 비효율성과 문제점을 고민하는 사람이 하나 둘 늘어나고, 협력의 신화를 새로 쓴다면, 우리는 적은 비용과 노동으로도 인간다운 삶이 담보하는 행복을 현실화할 수 있을 것이다. 열심히 살아가는 누구도 패자가 되지 않는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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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2-04-01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다운 리뷰를 쓰셨네요.,,좋은 리뷰에요,,^^
전 마감 10여분을 남기고 후다닥 한 권을 마무리 했네요,
뭘 썼는지 모르겠어요...ㅡ.ㅡ
하지만 한 권을 마무리 했다는 이 홀가분함을 아시는지요?ㅎㅎㅎ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책을 읽고 리뷰 적는 일은
아주 뜸하니까 나름 고통스럽긴해도 즐겁네요...
숲님도 잠시 나타나셨다가 사라지는 걸로 봐서는 리뷰보다는 책 자체에 애정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건 아닌건지..
저 역시 그렇지만...

더불어숲 2012-04-01 0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암만 생각해도 '문자적 인간'인듯 합니다.ㅎㅎ
읽고, 쓰고, 생각을 나누는 일이 즐겁습니다.
꽃도둑님 말씀처럼.. 고통스럽지만, 즐거운 역설이 존재하지요.
<뿌리깊은 글쓰기>를 읽으며, 글과 말이 곧 '저'라는 생각을 곱씹었지요.
언젠가 저도 최종규님처럼, 헌책방의 주인장이 되어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래묵은 책의 냄새가 그립습니다.
 
[왜 분노하지 않는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왜 분노하지 않는가 - 2048, 공존을 위한 21세기 인권운동
존 커크 보이드 지음, 최선영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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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48, 공존을 위한 21세기 인권운동Together

『왜 분노하지 않는가』

존 커크 보이드(지은이), 최선영(옮긴이), 중앙books(중앙북스), 2011. 12

 

원초적 입장과 무지의 베일에서 출발하기

 

한번 상상을 해보자.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 누구도 어떤 조건을 가진 존재로 태어나게 될지 알지 못한 채, 너희들이 태어날 세상을 만들어보라는 절대자의 요청을 받았다면 우리는 어떤 세상을 만들 것인가? 우리는 아직 지구의 어느 지역에서, 어떤 부모 밑에서, 어떤 재능을 가지고, 어떤 외모를 가지고 세상과 만나게 될지 모르는 상태다. 만일 인간이 합리적인 ‘이성’을 가진 존재라면 가장 바람직한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미국에 태어나거나, 다양한 자본을 소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세상이 어떤 모습이든 괜찮을 것이다. 반대로 부모의 능력이 없는데 외모까지 추한 상태로 태어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세상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겠는가? 당연히 가진 것이 가장 적은 최소 수혜자에게 가장 많은 혜택이 돌아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홈리스처럼 소외된 이들에게 가장 이로운 세상이라면, 내가 무엇으로 태어난다고 해도 괜찮은 조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간단한 상상력에서 천부인권을 이야기하는 정치철학자가 바로 롤즈(John Rawls)다. 그는 『정의론』에서 무지의 베일에서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의 혜택이 돌아가야 한다는 가정을 설득하기 위해서 위와 같은 상상력을 발휘한다. 사회계약설이 논리적으로 전제하는 ‘자연 상태’를 롤즈는 ‘원초적 입장’으로 전환한다. 원초적 입장은 계약을 맺는 당사자들이 합리적이면서 동시에 이기적인 존재로서 도덕적 인격과 권리, 기회, 협동 등과 같은 사회적 기본가치를 알고 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계약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를 최소화하는 원리를 담게 된다. 이 원리는 모든 사람이 자유에 대한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자유 우선성의 원칙과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한의 이익을 보장하고 불평등의 원인이 모든 사람에게 균등하게 열려 있어야 한다는 차등의 원칙이 도출된다. 이로써 국가는 모든 국민에게 평등한 자유와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다섯 가지 자유를 누릴 권리 - 저절로 외우기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다섯 가지 권리를 손가락으로 설명하는 방식이다. 우리 모두 잊지 않을 수 있도록 손가락과 각각의 인권을 연결함으로써 잊지 않도록 돕는다. 손을 원해서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태어난다는 방식으로 천부인권 개념을 이해하게 하는 방식이 탁월했다. 엄지손가락의 강한 힘은 언론의 자유, 집게손가락은 삶의 이정표를 제시하는 종교의 자유, 가운데 손가락은 가장 길기 때문에 풍족함으로, 넷째손가락은 심장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생명을 연상하게 하는 환경에 대한 자유로, 새끼손가락은 가장 유약하기 때문에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이는 인권을 기억해야 할 모든 사람에게 적절한 비유가 될 것이다. 세계화가 끌고 들어온 부와 권력의 집중으로 인권은 더욱 위협받고 있다. 역으로 이제 인권은 한 국가나 지역의 문제가 아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인권이 동등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인권은 감수성으로 출발하고 완성된다.

 

인권은 우리의 삶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진보교육감의 등장은 교문 앞에서 멈춘 인권을 상기시켰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뒤집어 보고, 타인의 관점으로 나의 감수성을 이입시키는 일은 존재 기반을 바꾸는 일이기 때문에 쉽지 않다. ‘학생인권조례’ 통과에서 부딪히는 여러 보수 단체와 교육청의 갈등이 그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교권과 학생인권이 충돌한다는 논리를 당연시하는 분위기에는 논거가 부족하다. 교권은 학생인권을 억압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사의 상징자본을 존중하고 경제의 논리를 교육으로 끌어들이지 않을 때 지켜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생과 교사의 권리를 반비례로 보는 것은 둘 모두를 소외시키는 왜곡된 교육 논리를 빚어낼 뿐이다. 인권과 이슈들이 논쟁화될 때 감수성 또한 발전할 것이다.

 

『왜 분노하지 않는가』는 인권을 감수성으로 접근하는 개론서로서 아주 훌륭하다. 난해한 이론의 토대 없이도 우리가 내딛는 한 걸음의 의미를 명확하게 전달한다. 사고(思考)의 각을 1도만 바꿔도 어떤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한다. 인권을 사유한다는 것은 인권을 실현시키기 위한 기본 전제이다. 이 책은 2048 프로젝트가 제기하는 질문을 함께 공유하고, 성문화된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대화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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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의 탄생
송호근 지음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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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현안 쟁점에 대한 고민과 성과 『인민의 탄생』 송호근, 민음사, 2011

 

 

자본주의 시스템은 ‘현재’에 집중한 삶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조장하고, 그 불안 때문에 사회 구성원들은 - 지금, 여기를 벗어나 - 생산과 재산 증식에 매달립니다. 자본주의의 미덕은 필요 이상의 가치를 생산하기 위하여 쉼 없이 일하고, 치열하게 경쟁하는데 있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를 잠식하고 있는 ‘심각한 집단 불안’ 역시 이러한 메커니즘에서 기인하는데요, 이것이 가진 자, 부르주아지를 넘어서서 모두의 신념체계가 될 수 밖에 없는 까닭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경제 담론이 - 모든 사회 영역에 침투하여 - 헤게모니를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조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왜소한 ‘개인적’ 존재를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지배적인 힘을 갖는 사회 담론은 이를 위반하는 ‘개인적 선택’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물론 객체이면서 주체인 개인의 상대적 자율성을 간과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구조와 단절되어 형성되는 개인의 출현 가능성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더불어 객관적으로 정량화하여 분석하고, 확률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역사를 전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에 대한 성찰은 근시안적인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예측불허의 삶을 살고 있고, 그것이 또한 살아가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불안한 한국사회를 분석하기 위한 사회학자의 조선 탐구 여행

 

 

평범한 소시민의 고민과 성찰이 이러한데, 사회학자의 고뇌와 소명은 얼마나 깊어야 할까요? 한 사회학자의 회고와 뼈아픈 자기반성으로 출발하는 『인민의 탄생』은 사회구조와 왜소해진 개인에 대한 저의 오랜 화두를 다시 고민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책은 중견 사회학자이자 대표적인 칼럼리스트 송호근 교수가 한국 사회의 현안과 주요 쟁점에 대한 고민과 성과를 엮어 낸 책입니다. 저자는 ‘단절과 비약’으로 분석에서 자주 이탈하는 한국사회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기 위하여 기꺼이 조선으로 우회하는 긴 여행을 감행합니다. 근대 시민의 탄생 이전으로의 학문적 여정을 위하여 조선이라는 시공간을 선택한 것이지요. 그는 한문을 사용하는 양반 유교 사회의 붕괴가 바로 근대의 시작이고, 인민의 탄생이라고 주장합니다.

 

 

인민 - 민족과 민중을 대신하여

 

 

송호근 교수는 푸코(M. Foucault)가 그랬던 것처럼 조선시대 지식의 계보를 탐사하겠다는 야심으로 조선 사대부의 성리학이라는 강력한 지식권력을 분석하였습니다. 조선시대 평민과 천민을 합쳐 일컬은 '인민'은 통치의 객체이자 대상에서, 새로운 인민으로 재탄생합니다. 저자는 민중이라는 호명이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가 부재한 한국의 특수성을 간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민족은 국사학계의 목적론적 역사관이기 때문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역사학자들이 분절적인 좁은 시야로 역사를 보기 때문에 미시적 접근을 할 뿐, 거시적인 구조를 간과하여 역사를 제대로 조망하지 못했다고 봅니다.

 

 

우리 사회의 근대의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언문, 한글을 읽고 쓰는 인민들의 담론장 형성입니다. 인민은 1860년대 동학농민운동에 이르러서는 공익을 지향하는 시민으로 거듭나지만 일제 강점기는 시민과 공론장의 왜곡을 가져옵니다. 이 왜곡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근대 사회는 부르주아, 교양시민이 부재하게 되었고, 공론장에 균열이 생겼습니다. 따라서 저자는 ‘교양 시민’으로서의 개인주의의 확립과 공공선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공론장’의 활성화를 대안으로 제시합니다.

 

 

앞으로 연속적으로 이루어질 이 연구 주제는 후속으로 인민이 시민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을 담은 2권 <시민의 탄생>과 20세기 국내 시민 공론장의 결함을 분석한 3권을 통해 한국 시민사회의 기원을 분석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진행형의 연구라는 점을 감안하여 저를 불편하게 했던, 수용할 수 없었던 몇 가지를 언급하며 마무리 하겠습니다.

 

 

저자는 미시사를 비판하고 구조와 역사를 활용하면서, 교양시민이 되지 못하는 개인에게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서구 19세기 중산층의 확대는 사회의 기본 가치를 실현하는 교양시민의 확산이었다면, 한국의 근대는 개인주의가 정착하지 못했다고 비판합니다. 이념과 권리 투쟁에 몰입한 나머지 독립된 개인, 사회의 핵심 가치를 배양하고 내면화하는 시민이 되지 못했다는 것인데요, 저자가 지나치게 기능론적이고 수구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개인의 탄생에서 사회구조가 미치는 영향을 가볍게 보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교양 시민’은 인텔리 부르주아와 별로 다르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네그리가 이야기하는 다중과 상당한 거리가 느껴졌습니다. 공론장을 통한 사회운동으로, 사회 운동 내에서의 다양성과 개인주의의 가치 고양으로, 이러한 토양에서 자유로운 연합을 통한 참여와 반권위적이고 수평주의적인 조직화로 이어지는 다중지성의 개념과 - 송호근 교수의 교양시민 개념을 - 비교하여 논의해보는 것도 의미 있으리라 봅니다.

 

 

둘째, 저자는 미국산 사회과학을 맹신했던 한국 한계를 비판하면서 연구의 포문을 열었으나, 결국 푸코와 하버마스의 연구방법과 대안으로 한국사회를 분석합니다. 그는 서양 학문에 중독된 우리 학계에 대한 비판과 그에 따른 자신의 지적 방황의 서사를 펼쳐갑니다. “마르크스주의 발전론,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 서양산 근대화론이 맹위를 떨쳤고, 청년들의 사고를 장악” 했던 1970년대의 학문 풍토을 조선 선비들이 북경의 한서를 보물로 다루던 시대에 빗대어 설명합니다. 그러나 결국 푸코의 계보학의 방법을 차용하여 조선의 학문적 계보를 파헤친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은 하버마스의 면대면의 합리적 의사소통에 기반한 ‘공론장 이론’입니다. 저자가 과거를 회고하며 비판했던 것과 동일한 연구방법과 대안이라서 당혹스러웠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관점은 철저히 사회진화론입니다. '인민은 시민으로, 담론장은 공론장으로' 진화했다는 서구식 모델을 기준으로 중세, 근대 조선의 궤적을 분석합니다. 군주의 적자로서의 ‘인민’은 공익을 추구하는 ‘시민’으로 재탄생하고, 담론장에서 공론장으로, 시민사회로 성숙하는 과정은 유기체의 성장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서구의 근대라는 보편적 기준으로 우리 사회를 분석한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인민의 탄생』은 21세기 한국의 토양에서 숨 쉬며 살아가는 사회학자가 19세기말 조선에 입국한 비숍 여사의 관점에서 낯설게 현안 쟁점을 해독한다는 고충이 충분히 헤어려지는 책입니다. 조선 사학자의 기록을 포기하고, (목적이 분명한) 선교사의 여행기에 기대야 하는 연구자의 심정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지요.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해서 요동치는 한국 현실을 분석하고, 지금의 잘못을 지적하여 정도(正道)를 찾게 하려는 학자적 양심과 소명 또한 독자를 숙연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양한 관점 중에서, 누구의 시선으로 세상을 읽을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여행 중인 이방인의 시선일 수도 있고, 이해관계에 철저히 얽혀있는 이 땅의 사회 구성원일 수도 있습니다. 세계 밖에서 메타적으로 현실을 읽어야 되겠지만, 동시에 세계 안의 역동적인 권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개인’에서 출발하는 연구들이 쏟아지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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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 그 첫 5,000년 - 인류학자가 다시 쓴 경제의 역사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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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 그 첫 5,000년-인류학자가 다시 쓴 경제의 역사』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정명진 옮김, 2011, 부글북스

 

 

부채는 “약속의 타락”이다. 세상에 돈이 있기 전에 거기에 부채가 있었다.

 

 

오랫동안 경제학에서 부(副)를 설명하는 방식이자, 상식으로 통용되는 설명은 다음과 같다. 물건과 물건의 거래가 상품을 통한 교환으로, 다시 편리한 화폐 거래로, 이어서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신용이 중요한 교환의 방식이 되었다. 화폐 이전에는 곡물, 양, 생선뼈, 조개껍데기, 향신료를 이용하여 거래의 편리함을 도모했으나, 보관의 어려움과 양(quantity)을 일치하는데 문제가 많이 발생했다. 때문에 일반적 등가물로 적합한 금/은을 활용하였다. 동양에서는 만 년 전에, 우리나라에서도 늦어도 4~5천 년 전에 이미 금/은을 통한 거래가 일반화되었다. 금/은 주화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보여주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뉴욕 주립대학교와 시카고대학교에서 인류학을 전공하였고, 2007년까지 예일대 교수였으며, 현재 런던대학교 골드스미스에 재직하고 있는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신간 『부채 그 첫 5,000년-인류학자가 다시 쓴 경제의 역사』는 위와 같은 가장 기본적인 경제 상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사회과학의 임무는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고 볼 때, 무척이나 창의적이고 급진적인 문제 제기라고 할 수 있다. 우석훈 교수가 『나와 너의 사회과학』(2011, 김영사)에서 “가장 진보적인 경제학자가 가장 보수적인 사회학자보다 덜 진보적인다.”고 언급한 것에 동의한다면, (경제학자가 아닌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주장은 자본주의 토대를 흔든다는 측면에서 거의 혁명에 가깝다. 인류 5,000년 역사를 지구 전 방위로 확대한 - 시공간을 넘나드는 - 방대한 연구를 가능하게 한 것은 앎과 삶을 일치하여 살고 있는 연구자의 신념에 기인한다. 그는 인류학자이면서 동시에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사회 정의 실천 운동가이다.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빚은 변제되어야 마땅하다.”는 상식에서 “빚은 꼭 갚아야 하는가?”라는 통념상 ‘비도덕적’일 수 있는 질문을 던지고 “모든 빚을 다 갚을 필요는 없다.”는 논거를 5천년 인류 역사에서 찾아낸다. 그는 먼저 경제 행위는 신용사회에서 출발했다고 본다. 물건을 사고팔기 위해 신용을 중시했고, 이후 화폐는 채권자와 채무자의 신용 관계를 증명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화폐를 확보하지 못한 경우 다른 물건으로 보상하기 위해서 물물교환이 등장했다. 그의 반론은 현대 경제학의 기초인 애덤 스미스의 이론 비판에서 시작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술집이나 시장에서 주화를 사용하지 않고, 외상장부를 이용했다. 주화는 왕이 자신의 군대에 급료를 지불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즉 경제의 핵심은 (차용증서이기도 한) 화폐가 아니라, 부채에서 출발한다. 때문에 부채의 계보를 파헤칠 때만이 현재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현대 경제학에서 부채의 채권·채무 관계는 시장이라는 ‘중립적인’ 공간에서 돈을 가진 이에게 돈을 빌리면 비로소 성립한다고 하지만, 실제 시장은 절대 중립적이지 않다. 힘의 역학이 작동하는 공간이다. 경제학에서 역사학과 인류학으로 옮겨진 ‘부채’는 ‘시장’이라는 중립적인 가상공간을 벗어나서 경쟁과 전쟁이 난무하는 사회적 관계에서 재해석된다. 부채에 권력이 작동하고 있다면, 모든 빚을 돌려줘야 하는 건 아니고, 빌려준 만큼 돌려받는 것이 무조건 정의로운 것도 아닐 수 있다. 이때 부채는 경제적 거래 현상이지만, 실제는 정치적 경쟁이자 지배와 약탈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관점의 전환은 -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도덕적 당위가 경제적 상식과 신념으로 굳어있는 현실에 대립 항을 만들고 - 현재의 세계 질서를 전혀 다른 관점으로 읽게 한다. 현재 우리의 노모스는 모든 관계를 시장적 관계로 환원한다. 그러나 부채가 반드시 갚아야 할 공정한 채권/채무가 아닌 당위라고 한다면, 그러한 도덕적 책무가 누구를 위해서 형성되고, 정당화되었는지를 인지하는 것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핵심 키(key)가 된다. 즉 국가와 시장의 관계라든가, 팍스 아메리카나의 세계화를 재해석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저자의 관점에서 보면, 정반대의 원칙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이는 국가와 시장은 탄생부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국가의 유지를 위해서 시장이라는 가상공간이 반드시 필요했다. 또한 채무불이행을 혹독하게 다루는 IMF(국제통화기금)와 미국의 혹독한 화페 정책은 도덕적 양심의 준수를 엄격하게 요구한다. 그에 반기를 드는 나라는 군사적, 정치적 보복 조치를 받아야 했던 선례들이 있다. 그동안의 인류 역사는 어떠한 사회 시스템도 영원할 수 없음을 적실하게 보여준다. 저자의 주장이 하나의 힘 있는 경제 담론을 형성한다면, 월가 점령이라는 전지구적 실천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세상의 존립이 ‘나’에게 달려 있다고 믿는 사람만이 세상을 바꾼다는 역사적 사실을 다시 한번 숙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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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2-01-26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폐라는 것이 만약 없다면 반드시 빚을 갚아야만 하는 건 어쩌면 도덕적 진술이 되지 않을까요?
시장경제의 핵심은 돈이죠 돈! 돈을 없애 버려야 해요...ㅎㅎ
시장경제 이후 만약 돈이 이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린다면, 우리는 원시경제로 아니면 어떤 형태로든 다른 모습의
경제활동을 통해 잘 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중요한 건 삶의 방식의 틀을 새로 짜야 하는건데
숲 님은 동참할 생각이 있으세요?..ㅎㅎ전 잃을 게 없어서 가벼웁게~ 동참할 생각입니다..^^

더불어숲 2012-01-29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도둑님! 저 또한 잃을게 없어서.. 잃을게 있더라도 기꺼이 동참하겠습니다.ㅎㅎ

'돈'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박사논문까지 쓴 고병권 선생님 생각이 나네요.
<화폐 마법의 사중주>... 욕망없이 존재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가장 엽기적인 기제가 화폐 아닐까요?ㅎ
상식으로 통용되는 것들을 자꾸 의심하면서.. 사회성 떨어지는 사람이 되어가는 요즘입니다. ㅋ
꽃도둑님은 어떠세요? 든든한 소통 창구, 공동체를 가지고 계신가요?
아니면 이덕무처럼 책에서 위로 받고 계신가요? (궁금하네요....)

꽃도둑 2012-01-31 13:08   좋아요 0 | URL
든든한 소통창구까지는 아니어도 숨쉴 구멍 하나는 가지고 있지요.,,ㅎㅎ
또한 이덕무처럼 책에서 위로받는 부분도 상당히 크구요,
책이 나를 만드는 데 8할을 기여한 셈이죠...ㅋㅋ 그렇다고 책만 읽는 바보는 아닙니다..
자 그럼, 숲님은 든든한 소통창구를 가지고 있나요? 더불어숲인걸로 봐서는....공동체에
몸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에여~어서 밝히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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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 일중독 미국 변호사의 유럽 복지사회 체험기
토머스 게이건 지음, 한상연 옮김 / 부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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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태어난게 잘못이야 - 일중독 미국변호사의 유럽복지사회 체험기』

토머스 게이건 저 |한상연 역 |부키 |2011.10.19

 

한국 근현대 역사와 가장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미국은 사회주의 붕괴 이후, 아메리카 드림을 ‘팍스 아메리카나’로 실현했다. 독립 혁명 이후, 미국은 민주주의 리더였고, 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 평화의 전령사 역할을 자처했다. 또한 세계 곳곳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려는 의지를 가진 많은 이에게 ‘샐러드 보울(salad bowl)로 은유되고 있다. 섞이되 각자의 맛과 향을 그대로 지켜나갈 수 있는 ‘드림’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의 땅이 미국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20세기였다.

 

자본주의의 미덕에 기초한 자유의 땅이 붕괴하는 심상치 않은 조짐은 지난 2001년 ‘911 테러’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진주만 폭격 이후 단 한 번도 본토를 침략 당한 적이 없던 미국에 대한 쌍둥이 빌딩(twin towers) 테러는 미국인들에게 공포라는 감정을 심어주었을 뿐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를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에 대한 의문을 갖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이는 여전히 미국이 해결해야 할 난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여전히 희망의 땅이다. 우리는 유럽 복지의 출발이 미국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대륙에서 진행되고 있는 복지의 싹은 (뉴딜정책과 같은) 미국 정책에서 출발했다는 것과, 미국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사회를 비판하고 내부적 모순을 드러내는 훌륭한 인적 자원을 가지고 있다. 세계화와 미국 패권의 몰락에 대하여 이성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임마누엘 월러스틴, 미국 보수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며 미국 정책을 끊임없이 비판하는 노암 촘스키와 하워드 진, 미국 교육의 지식 내용을 비판하는 마이클 애플 등 열거하기에도 벅찬 훌륭한 학자들이 내부에서 미국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철저하게 비판하고 있다. 교육 정책가 조너선 코졸은『야만적 불평등』에서 미국의 공교육 실패를 커밍아웃하고, 자신이 참여했던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에 대한 반성을 피력하기도 했다.

 

이런 관점과 일맥상통하는 입장에서 시카고의 노동 전문 변호사인 토머스 게이건은 세계의 단일적 단극체제 중심에 서 있는 미국의 실체를 확실하게 분석한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역행하는 발언으로 가득한『미국에서 태어난게 잘못이야』는 억압된 우리의 상상력이 현실로 작동하는 유럽 - 특히 독일 - 의 복지 현실과 국가 마인드를 제대로 보여준다. 자칫 딱딱한 주제가 될 수도 있음에도 그는 감독 마이클 무어(M. Moore)식의 유머로 쓴 웃음을 웃게 하는 탁월한 글쓰기 능력을 가지고 있다. 사회과학 서적으로서의 치밀함은 떨어지지만, 두 달 동안 몸소 경험한 독일 복지와 미국 복지를 비교· 분석하여 미국 정책의 허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과연 단일화된 단극체제에서 유럽복지를 지킬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하여 게이건은 분명하게 독일이 사회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한 "YES"라고 대답한다. 하버드 대학의 사무엘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영향 탓인지 미국 정부는 자국의 라이벌을 중국으로 상정하고 있지만, 게이건은 미국의 맞수는 독일이라는 지론을 펼친다. 여행에서 만난 독일인의 이야기를 토대로 세계화가 아무리 거세어도 독일식 삶의 방식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는 확신한다.

 

아직도 이 책에서 기술하고 있는 미국과 독일의 상반된 상황을 믿을 수 없다면, 실제 그 나라를 경험해보는 수밖에 없다. 아쉬운 대로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을 떠올려보기 바란다. 미국에 가 있는 한국인 유학생과 이민자들은 잠시 한국을 들릴 일이 있으면 치과 진료와 정기검진을 꼭 받고 간다는 사실만 기억해도 충분할 것이다.

 

2011년 한국은 교육복지, 무상급식, 한미 FTA가 전 국가적인 화두였다. 이 모든 이슈는 결국 하나의 그물망으로 엮인다. 또한 세계화의 대세 속에서 교육, 복지, 경제, 이념은 자국의 가치만으로 실현되는 것도 아니다. 미국의 사소한 바람 한 점에도 한국의 정치 경제는 버터플라이 이펙트로 휘청거린다. 한국과 정치·경제적으로 가장 밀접한 미국의 현재를 냉정하게 분석할 때만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와 정책이 미국과 유럽에서 각자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고,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에 대하여 구체적인 사례를 보게 될 것이다. 미국에 대한 제대로 된 분석 없이 구시대의 유물이 된 ‘근대화론’에 집착하는 한국 보수 세력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사족 1 : 미국에서 “변호사가 두 달이나 쉰다는 것은 일반인이 2년을 통째로 쉬는 것과 맞먹는다.”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두 달의 유럽 여행은 쉽지 않은 결정일 수도 있다. 몇 년 전 호주에서 만났던 미국인 여자가 생각난다. 그녀는 직장을 그만두고 6개월째 배낭여행을 하고 있었다. 골드코스트에서 배를 타고 들어갔던 (사막으로 이루어진) 프레이저 섬에서 수채화를 그리며 여유자적 하던 그녀와 같은 미국인의 삶이 이제는 불가능한 것일까?

 

사족 2 : 세계 최고의 장수 국가 ‘불가리스’의 노인 수명이 급격히 낮아지고 있다. 신자유주의 정책이 동유럽을 휩쓸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가, 아니면 그들이 즐겨먹은 요구르트, 토마토, 와인 가격이 급격하게 상승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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