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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리좀적 주체, 부정과 긍정의 詩人

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강신주 지음, 천년의상상, 2012.

 

6월은 뜨거운 태양을 위무하는 바람이 있다. 혁명의 기운을 품었던 한국 근현대의 5월과 6월은 그 뜨거움으로 어지럽게 들뜬다. 그 역사의 한 지점에 태양 아래 고결한 한 줄기 선명한 바람결 같은 시인, 김수영이 있다. 삶에 직면하여 자기 길을 개척한 시인은 자기 초월을 통해서 영원회귀의 길로 나아갔다. 그는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매너리즘에 빠진 일상이 아니라, 불모지를 개척하여 자신만의 길을 내어 당당하게 걸어갔다.

 

1921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1968년 세상을 등질 때까지 그의 삶은 격정으로 가득했다. 초기 김수영은 현대문명과 도시 생활을 비판하는 모더니스트로 주목을 끌었다. 교편, 잡지사, 신문사를 오가며 시작(詩作)과 번역에 전념하던 그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반공포로의 한계 상황에서 사랑을 잃었고, 4·19혁명으로 현실비판의식과 저항정신을 바탕으로 한 참여 시인이 되었다. 그가 경험한 포로수용소라는 극단적 공간은 실존적 고민과 맞닿아 있다. 바닥을 내려가 본 사람은 관념으로 시를 쓸 수 없다. ‘반공 포로’가 가지는 정신적 혼란과 고뇌가 그의 시를 다른 시인의 것과 차별화한다. 그의 삶은 더 이상 연애시를, 서정시를 쓸 수 없는 의식과 체험으로 가득했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1930년대 이후 서정주·박목월 등에서 볼 수 있었던 재래적 서정의 틀과 김춘수 등에서 보이던 내면의식 추구의 경향에서 벗어나 시의 난삽성을 깊이 있게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던 공로자”라고 했다.

 

몇 편의 시로 ‘김수영’을 알고 있다고 자만하던 나를 반성하게 한 책이 바로 강신주의 『김수영을 위하여』이다. 김수영을 통해 한 뼘은 성장했다는 강신주는 자신의 마음 키를 높여준 “김수영을 위하여” 고단했을 10주의 강의를 녹취하고, 정성들여 편집하여 한권의 책으로 박제했다. 아마도 기념비를 세우는 심정이었으리라. 김수영과 함께 기억해야 할 연도, 김수영의 나이를 자신의 것과 비교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전제한다. 그것은 외부적 압력에 주눅 들어 위축된 삶을 사는 ‘독자들을 위하여’ 준비된 선물이기도 하다. 삶, 사랑, 시 쓰기의 매뉴얼을 필요로 하는 우리에게 - 참조할만한 매뉴얼은 없으나 - 당당하게 자기의 길을 참아서 유목할 용기를 주기 위해서 어깨를 토닥여준다.

 

“방법을 아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많은 부모들은 자식의 삶을 기획하고 안전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자신이 경험했던 청춘의 시행착오를 최소화하여 효율적으로 살아가도록 모든 자원을 집중 투입하는 설계사와 투자자 역할을 자청한다. 자식을 통해서 자신의 성공적인 삶은 과시하고 싶은 욕망과 자신의 노후의 안정된 삶을 지키려는 무의식이 일정정도 작정한 것이겠으나, 그 표면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다. 인생은 - 불행인지, 다행인지 - 단 한번으로 완성된다. 동일한 전제를 이유로 - 모험하지 않는 - 안정적인 매끈한 길을 갈수도 있고, 예측할 수 없는 길에서 타자와 부딪히고 어긋나면서 고단한 창조의 삶을 살 수도 있다. 리스크를 최소화한 삶, 정해진 길을 가는 삶은 타자와의 충돌로 미끄러져 가는 새로운 길을 만날 수 없다.

 

시대를 앞서 온 시인은 詩를 통해서 새로운 물결을 만든다. 시대의 요구에 반하는 시인은 시대와 불화할 수밖에 없다. 체제에 맞춰 순응하며 살아갈 수 없는 세포로 구성된 이질적 생물체가 된다. 체제의 억압은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려는 주체만이 자각할 수 있다. “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 / 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이다. 자각하는 사람만이 창조하는 삶을 산다. 그때 진정한 사랑이 가능하다.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상처 가득하지만, 일정한 거리를 확보한 사랑을 한다. 너와 내가 분리되지 않는 서로 안에 갇힌 사랑이 아니라, 서로를 참조한 자기 세계를 깨트리는 사랑을 한다.

 

진정한 자유인은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 “나를 버리고 사이가 되는 것. 너 또한 사이가 된다면 나를 만나리라” “시나 사랑이 가능하려면 타자나 자신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한다.” 우리는 사랑을 하면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다. “시는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격렬한 사랑의 끝에서, 한 세계를 무너뜨린 시인은 사랑을 잃고 시를 쓴다. 더 이상 서정의 시대는 없다. 우주를 뒤흔들었던 창조의 여진은 시를 창조하는 원동력이 된다.

 

블루에서 레드로

 

김수영은 나에게 ‘블루’였는데, 저자 강신주와 편집자 김서연에서는 ‘레드’였나 보다. 표지와 간지를 채운 빨간색을 보며, 열정에 비례하여 고단한 삶을 살았을 김수영의 모습이 엿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퀭한 눈빛의 김수영은 이른 새벽의 창백한 블루다. 그의 눈을 스치면 사물은 다른 존재가 된다. 비, 거미, 팽이가 시인 김수영의 처지를 함의하고 있었듯이 사물은 시인 그 자신이 된다.

 

시인 김수영은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자기만의 삶을 단독적으로 살다 갔다. 중심을 해체한 리좀적 주체로 끊임없이 새로운 자아를 창조했다. 한번으로 해독되지 않는 글, 얇은 반투명 껍질 속에 내밀한 고통이 알알이 박혀 있는 시 세계를 창조했다. 답을 주지 않지만, 길을 보여주는 그는 현란한 언어로 모자이크하지 않았으나 충분히 매혹적이다. 김수영은 각자의 삶을 꿈꾸게 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불멸의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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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2-06-18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앙으앙 어떻게 이렇게 리뷰를 맛깔나에 쓰셨는지요?....
숲님을 위하여~~ 추천을 열 번이라도 누르고 싶어요.
리뷰를 어느 관점에서 쓰는가에 따라 책의 내용이 풍성해 지는가 하면 또 쫀쫀해진단 말입니다
블루에서 레드로 는 압권입니다. 공감합니다...^^

더불어숲 2012-06-18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수가 하수에게 분발하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주시는데요..ㅎ
칭찬은... 고래만 춤추게 하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감사합니다.^^*

꽃도둑 2012-06-26 23:37   좋아요 0 | URL
이 무슨 해괴한...^^
같은 하수끼리 왜 이러십니까?,,,,ㅋㅋㅋ
제가 오프라인 모임 중 하나가 '주류와 떨거지 사이에서'인데요...어떤가요?
이제 고수라는 말 못하겠죠?,,,ㅋㅋ
아, 오늘 김수영을 위하여 드뎌~ 올렸어요, 얼마나 홀가분한지 몰라요..
좋은 밤, 웃긴 꿈 꾸세요..(저는 잘 꾸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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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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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정의의 정치 철학자가 펼치는 도덕 논쟁 - 돈과 시장의 역할에 대하여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와이즈베리, 2012.

 

2005년 센델 교수의 한국 방문 시 특강을 들었던 적이 있다. 당시 나는 롤즈의 『정의론』을 가지고 스터디를 하던 학구적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하버드 최고의 교수’로 유명한 샌델의 명강의를 듣고 싶었던 열망도 컸다. 그는 롤즈의 『정의론』을 비판한 것으로 유명했다. 롤즈는 개별적인 원리를 적용하여 보편적인 정의의 원리를 발견하고자 했다. 롤즈의 『정의론』에 대한 센델의 비판은 그가 한동안 롤즈가 강조한 ‘무지의 베일’과 ‘무연고적 자아’라는 게임적 실험에 천착했음을 의미한다. 깊은 생각 끝에서 끊어 나오는 샌델의 강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침착하고 엄중했으며 강렬했다.

 

2010년 한국에서 마이클 샌델 교수가 쓴『정의란 무엇인가』가 저녁 식탁에 오르는 빵처럼 팔려 나갔다. 당시 나는 공동체주의자로 알려졌던 마이클 샌델의 책과 그의 사상이 한국에서 이처럼 주목 받는 이유가 무엇인지 의아했다. 고민의 끝에서 신자유주의 대세에 멀미를 느낀 많은 사람들의 암묵적인 의사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시장적 가치가 우리 삶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다. 물질적인 재화 뿐 아니라, 가족, 대인 관계, 시민사회까지 침투해 있다. 그의 사상에 대한 관심은 서구보다 늦게 시작되었으나, 빠르게 번지며 지배적인 정책으로 구체화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감의 결과였다. 지배 담론인 신자유주의에 대한 공적 토론에 대한 강한 열망이 한국사회에 강하게 자리 잡았다. 한때는 그 결과가 진보교육감의 당선에 영향을 미치고, 총선과 대선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기도 했다. 정치철학자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상황이 절박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공통된 합의를 이끌어내는 일은 우주를 바꾸는 것만큼 격정적인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인지, 세상은 여전히 느린 걸음으로 변화하고 있다.

 

2012년 4월, 샌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 출간되었다.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샌델의 특강에는 만사천여명이 몰려와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샌델 교수 역시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강의하는 것은 처음이라고 얘기했다. 그가 자유주의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얻게 된 ‘공동체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이처럼 과도한 에너지를 품어내는 한국의 집단 사유에 대해서는 어떠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지 궁금해지는 지점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우정, 교육, 의료, 사랑, 시민 의식

 

오 헨리의 단편소설 『황금의 신과 사랑의 신』에서, 재벌 아버지는 돈으로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반면 아들은 사랑은 순수한 것이어서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둘은 내기를 하게 되고, 아들은 자신이 사랑을 쟁취했다고 믿는다. 사실 그 사랑의 이면에는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조건을 만들어 둔 ‘돈’이 있었다. 풍자 가득한 이 이야기와 별반 다르지 않은 주장에 ‘철학’의 외피를 두른 것이 바로『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다.

 

샌델은 이 책을 통해서 돈의 역할과 가치에 대해 고민하는 철학적 틀을 제공한다. 돈으로 거래할 수 없는 영역까지 시장이 침투했을 때 ‘공정성’에 대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돈으로 모든 것을 교환할 수 있게 되면 돈을 더 많이 가진 사람이 중요해진다. 이는 상대적으로 덜 가진 사람을 소외시킨다. 결과적으로 불평등이 만연해지고, 가난한 사람은 삶을 영위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또한 ‘돈’은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면서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시장적 가치가 교육, 의료, 시민의식, 우정과 같은 비시장적인 영역까지 밀고 들어온다. 돈으로 목적을 달성하면, 달성하고자 하는 가치가 훼손되고, 우리가 갖게 된 재화의 본질이 변질된다.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고유한 가치가 모두 돈으로 수량화하면서 재화의 고유한 가치는 변질된다.

 

뛰어나지 않은 학생이 부모의 능력으로 입학하는 ‘기여입학제’, 열심히 공부한 학생에게 주어지는 ‘장학금’, 봉사활동을 점수로 환산하는 ‘학교생활기록부’, 직장인의 연수 실적을 승진의 조건으로 만드는 것, 국가대표 선수의 메달에 상응하는 연금 등은 목적과 수단의 가치전도를 야기한다. 성과금으로 노력의 댓가가 주어지는 순간,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잃게 된다. 한국사회를 비롯한 세계는 ‘지구화’의 미명 아래서 시장사회가 되고 있다. 이는 시장 사회를 넘어선 시장사회이다. 시장경제는 효율적이고, 경제 성장을 가져오기도 한다. 그러나 시장사회는 삶의 모든 영역이 거래된다. 시장 가치인 돈이 우리 삶의 거의 모든 부분을 지배한다.

 

샌델 교수가 왜 하버드 최고의 교수로 평가 받는지 알게 하는 요소가 이 책 안에 가득하다. 이론 그 자체에 천착하기 보다는 ‘게임 이론’을 적극 활용하여 시장과 도덕적 딜레마 상황에 독자를 세우고 스스로 판단하게 한다. 이때 독자는 적극적 행위자로 위치한다. 시장과 도덕이 충돌하는 딜레마 상황은 함께 고민하고 보편적 준칙을 세우는 공론장이 된다.

   

샌델은 아산재단과 함께 미국과 한국사회의 사회적 인식 조사를 했다. 미국인 다수가 미국 사회가 정의롭다고 응답한 반면, 한국인은 74%가 한국사회가 정의롭지 않다고 답했다. 이것은 시민의 인식에 관한 리서치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상황에 대한 판단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인식 조사는 한국이 미국 보다 ‘공정 사회’에 대한 고민이 크다는 것을 함의한다. 또한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깊이 있는 고민과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논의는 굉장히 소중하고 중요하다. 공정성에 대해서 문제 의식을 느끼고 있는 것은 그만큼 건강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취약 계층에 대하여 어떻게 할 것인지를 활발하게 논의할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다. 좋은 사회는 ‘돈’뿐 아니라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공적 토론을 할 수 있는 사회이다. 이때 좋음은 올바름과 거리를 좁혀 나갈 수 있다. 나는 샌델을 “좋음과 옮음의 철학자”라고 평가하는 것에 동의한다. 그가 강조하는 행복은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의미하지 않는다. 행복은 “인간의 삶이 가지는 내적인 경지를 무한히 실현하는 것”이다. 정의는 “좋음이 아니라, 옮음”에서 출발한다. 샌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한국사회가 - 옳음과 좋음의 간극을 좁혀서 - 재화의 본래적 가치를 회복하고 평등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공론장의 초석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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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열에 관한 검은책
에마뉘엘 피에라 외 지음, 권지현 옮김, 김기태 감수 / 알마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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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검열의 사회 문화사, 금하거나 혹은 허하거나.

『검열에 관한 검은 책』 에마뉘엘 피에라 외 지음, 권지현 옮김, 김기태 감수

 

벤담의 판옵티콘이 떠오른다. 감시하는 자는 존재하나 보이지 않는다. 어둠 속에 위치하는 다수는 눈부신 빛 속에 자신의 존재를 감추고 있는 ‘감시자’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어느 시점이 되면 감시하는 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기 시작한다. 타자의 시선을 내면화하는 순간, 이제 다수는 스스로를 감시하고 처벌한다. 18세기 군대와 교도소의 완벽한 모형으로 디자인되었던 판옵티콘은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사회 통제 시스템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 우리는 스스로를 철저하게 검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검열은 전 방위로, 타자와 자아를 가리지 않고 도처에 존재한다.

 

‘나는 꼼수다’의 스타이자,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였던 김용민은 과거에 인터넷 방송의 발언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진보, 보수 양날의 매서운 비판을 감당해야 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검열에서 이탈하는 관계로 접기로 한다.) 김용민에 이어 방송인 김구라 또한 십년 전 인터넷 방송에서 했던 이야기가 쟁점이 되면서, 잠정적으로 방송을 접어야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공중파로 진입했지만, 언제나 인터넷 방송에서 했던 말들 때문에 제대로 기뻐하지도, 잠을 이루기도 어려웠다는 그의 고백이 과장은 아니라고 본다. “나는 지난밤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고 해도 별로 놀랄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싱가포르는 전 세계에서 CCTV가 국토 대비 가장 많이 설치한 나라로 유명하다. 치안은 줄었을지 모르지만, 사생활 침해는 심각한 상황이다. 싱가포르 사람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우리는 CCTV 주연배우다.”라고 한다.

 

『검열에 관한 검은 책』은 - 제목 자체에서 충분히 드러나듯이 다양한 전문가가 참여하여 - 검열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체계적인 책이다. 이 책은 언론, 영화, 조형예술, 서적, 연극, 음악, 게임, 대중매체 등 메시지를 금하거나 제한하는 분야를 구체적으로 다룬다. 미풍양속, 권력, 종교와 같은 전통분야와 건강, 인터넷, 시장의 법칙, 소수자 집단, 청소년의 현대분야를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다. 또한 스스로를 검열하는 자기검열까지 다루고 있으니, 검열에 관한 한 중요한 키워드를 대략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와 벨기에 출신의 철학자, 판사, 변호사, 작가 다수가 집필에 참여하였다.

 

다양한 검열을 다루고 있는 이 책에서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2장 변호사인 마갈리 로테가 쓴 <자기 검열>이다. ‘사적 삶’이 중요하다는 것은 현대의 이야기다. ‘사적 삶’은 원초적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개인’이라는 ‘주체’의 탄생과 함께 발명된 사회 현상이다. 사적인 생각을 표현하는데도 저자의 검열이라는 여과 장치를 거쳐야 한다. “자기 검열은 저자나 기자의 생각을 뿌리부터 뽑아버린다는 점에서 폭력적인 검열보다 더 나쁘다.” 다른 검열은 갈등 상황이나 법적 분쟁을 거치게 마련이지만, 자기 검열은 존재부재로 마무리되고, 여론 형성 자체를 차단한다는 점에서 해약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현대 사회를 유지하는 힘은 공권력을 앞지르는 체화된 자기검열에 있다.

 

재미있는 현상은 ‘유머’에 관한 검열은 느슨하다는 점이다. 다수의 국가와 사회에서 유머는 감추고 억압한 감정을 토해내는 특권의 장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대담한 유머는 절대적인 표현의 자유를 추구하는 상징자본으로 기능한다. 유머에 정색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반응한 사람이 옹졸한 사람이 된다. 유머에 관대해야 한다는 담론이 사회적인 힘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 개그맨 최효종의 ‘국회의원’ 개그를 가지고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정색을 한 - 국회의원 강용석의 주장이 옳았다 하더라도 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유머는 “정치적 부당함이나 저질 취향이라는 단순한 차원을 넘어 정치적이든 종교적이든 ‘신성한 것’에 대한 토론을 재개시킨다.”는 다수의 믿을 때문이다.

 

“유머는 나의 힘”

 

최근 유행하는 “소셜테이너”에 대한 찬반양론이 뜨겁다. 생각 자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유리한 그들의 직업 세계를 고려한다면, 그들의 용기가 일반인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소셜테이너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자기검열의 여과 없이 소신발언을 하는 그들의 용기와 신념에 찬사를 보낸다. 일부는 엔터테이너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지 않다는 비판 또한 만만치 않다. 엔터네이너는 자신의 업에 충실해야지 사회 참여를 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다. “광대 가면”을 벗고, 영향력 있는 시민으로서 의견을 내놓는 순간, 장벽과 위협에 부딪히게 된다. 얼마 전 ‘손석희의 시선 집중’의 인터뷰에 참여한 김제동은 민간인 사찰의 대상으로 힘들었느냐는 질문에, 그들이 사찰 자체가 억압이거나 무섭지는 않았다고 했다. 문제는 ‘자기 검열’을 하게 만든다는 비슷한 언급을 했다. 검열은 결국 사회참여를 포기하게 만든다.

 

인권과 관련된 ‘민간인 사찰’ 은 쟁점으로 잠깐 반짝하더니 이제는 어느 매체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 자리를 메우고 있는 연예인 기획사 대표의 연습생 성폭행, 10년도 더 지난 B급 인터넷 방송의 막말 파동 등이다. 민간사찰을 덮은 의제로 세팅된 것이다. 사회 어디에나 검열이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스런 현상이 되는 순간, 인권은 상실된다. 10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저자가 다양하기 때문에, 독자가 관심 있는 검열에 관해서만 읽어도 큰 도움을 얻을 것이다. 검열이라는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당연하게 보지 않는 것, 그것이 나의 권리를 지키는 출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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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2-05-01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하 리뷰 쓸 때 파놉티콘에 대해 언급하려고 했었는데 숲님도?
"누가 누구를 감시하는가?".,,그러면서....^^

이 책이 조금 지루한 감이 없진 않았지만 사실 뒷목이 서늘해지는 내용들이잖아요..
특히 자기검열,, 이런 엿 같은!!!
저는 이제 리뷰쓰러 갑니다...허접하기 짝이 없을 거라고 짐작되는...^^

더불어숲 2012-05-03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망하는 일, 설래는 일... 돈이 생기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
서점에 가서 예쁘게 빠진 책을 사는 것이지요? ㅎㅎ
잘 읽히고 공감가는 꽃님의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카프카 평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카프카 평전 - 실존과 구원의 글쓰기 서강인문정신 16
이주동 지음 / 소나무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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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는 카프카다.

실존과 구원의 글쓰기『카프카 평전』이동주 지음, 소나무, 2012. 4

 

프라하는 카프카다. 내가 프라하에 갔던 이유는 오로지 카프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황금소로 22번지에 그가 집필에 몰두했던 이층집이 있다. 카프카는 이곳에서 1916년 11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치열하게 글을 썼다. 하루 스물 네 계절이 있다는 변덕스런 날씨의 프라하에서 체코 맥주를 마실 때마다 나는 현존하는 카프카를 만나는 기분이었다. 세계와 불화했던 그도 늘 고독했을 것이다. 작가의 삶이란 상식적인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이므로 나는 이미 그랬으리라 단정했다.

 

프라하에 머무는 매일 밤, 나는 그곳의 감흥을 오래오래 잊지 않기 위해서 프라하 하늘의 처연한 달을 맥주에 담아 마셨다.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은 바램이었다. 불운해도 좋으니 ‘유사 작가’의 삶을 살게 해달라고 기원했던 것도 같다. 관념을 머리에 이고 살던 나의 청춘의 밤에 카프카가 있었다. 빵을 벌기 위한 직업과 밤의 글쓰기를 규칙적으로 지킨 작가, 프라하를 떠나본 경험이 별로 없지만,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 지독하게 글쓰기에 매달렸던 그의 삶에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졌다. “군대의 ‘기동 연습’ 같은 엄격한 시간표”가 없었다면 그의 작품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글쓰기를 밥벌이와 분리하는 순간, 그에게 글쓰기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인 신성한 행위가 되었다.

 

카프카는 나의 청춘이었다. 낮과 밤의 다른 삶을 살았던 그처럼 - 한계를 초연하게 업으로 받들되 - 창작을 생명수로 받아 마시고 싶었다. 언젠가 나도 “카프카처럼” 그의 삶을 흉내 내는 ‘어른’이 되리라 다짐하며 미래를 그려가던 날들이었다. 황금소로 시절 카프카는 프라하성에서 모티브를 얻어 대표작인 『성(城)』을 완성했다. 전 세계 코스모폴리턴(cosmopolitan)을 만날 수 있는 그곳에서, 카프카는 오로지 실존과 구원을 위한 글쓰기로 마흔 한해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이동주의 『카프카 평전』을 통해서 다시 카프카를 만난다. 다시 프라하에 간다면 - 부피가 매우 부담스럽지만 - 이동주의 『카프카 평전』을 들고 가고 싶다. 이 책은 불멸의 작가인 카프카 뿐 아니라, 인간 카프카를 만날 수 있는 장대한 연구 결과물이다. 프라하의 해지는 벤치에서, 카페에서, 게스트하우스에서 그의 삶과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도구가 되어 줄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신경증과 우유부단함 사이에서 격렬하게 진동하는 카프카와 함께 여행하며 그의 위로를 받을 수 있고, 자유롭고 주체적이며 창조적인 작가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가늠하다 보면 그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 싶어질 것이다.

 

이동주 선생님의 『카프카 평전』은 카프카의 난해함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그와 결별한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카프카 전집을 번역하고, 주석을 달고, 논문을 썼던 이동주 선생님의 필생의 작업이 단단한 도끼로 탄생했다. 오독이라면, 모든 독자가 오독일 것이고, 해석이라면 모두 합당한 해석이겠으나, 그간의 카프카의 연구는 그를 이해하는데 혼란만 가중시켰다. 이전의 평전과 달리 『카프카 평전』은 카프카가 공식적으로 썼던 글보다는 주로 자전적인 작품에 의미를 부여한다. 일기, 편지, 미완성 작품, 유고(遺稿), 공무 증명 기록들은 ‘인간’ 카프카에 방점을 찍으며 그의 삶에 뿌리를 두고 있는 문학세계를 이해하도록 돕는다. 자전적 증거와 논증을 통해서 저자의 주관에 몰입하지 않도록 경계를 지킨다. 또한 창작 과정을 연대기적으로 추적하며 기술하는 사이사이에 중요한 주제와 해설을 가미시켜 - 삶과 예술의 - 상보적인 형태의 전기(傳記)로 구성하였다.

 

재담하기 좋아했던 까마귀, Kavka. 모든 것이 지나쳤던 - 지나치게 친절하고, 지나치게 겸손하고, 지나치게 고독해하면서도 수다스러웠던 Kavka. 빵만으로는 절대 살 수 없다는 것을 일찍 알았던 Kavka. 그는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었지만, 최종심급의 아버지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긴장 상태를 유지하되, 주어진 ‘지위’를 자신의 것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쓰는 만큼 읽는 것 또한 멈출 수 없었던 카프카는 “독서하고 싶은 마음과 책에 대한 갈망을 자신의 고유한 특성으로 간주”했다. 그것은 카프카에게 있어서 중요한 의례였다. 그는 독서 행위를 “나로부터 벗어나 어떤 다른 객관적인 것으로 충동의 위치를 변경시키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독서가 문학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그가 가지고 있는 누구보다 뛰어났던 “모방능력과 유희”였을 것이다.

 

카프카가 체험한 시간과 공간의 협소함을 넘어 서서, 그가 살던 유럽은 세계의 심장이었고, 다양한 사상과 양식이 공존하는 교차점이었다. 카프카의 생애를 들여다보다 보면, 당시 유럽에 살고 있던 지식인 사이에서 정신분석학이 유행처럼 번졌을 것이라 미루어 짐작이 된다. 친밀한 관계에서 카프카가 보여주는 행동은 초자아로 자리 잡고 있는 아버지로부터 탈착하지 못하는 심리를 그대로 드러낸다. 그것은 성적(性的) 억압으로 나타났고, 관계 맺기의 곤혹스러움으로 드러났다. 약혼식을 앞두고도 그는 항상 결혼의 불가능성을 생각했다.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그의 삶 역시 부조리로 가득 차 있었다. 전례 없던 세계대전을 경험한 시대가 예고하는 “고통과 상실”이 가져온 고뇌와 통찰이었다. 전통적 가치와 통일된 의미가 사라진 자리에 ‘해석’의 자유가 주어졌다. “땅 위에 엎드려 있는 자”로서 주관에 충실한 카프카는 자신만의 “절대적 메타포”를 구성함으로써 무수한 해석의 여지를 열어 주었다.

 

부정적인 현실을 비판적으로 극복하는 길은 오로지 성찰적 글쓰기뿐이었다. 문학적 삶만이 유일한 실존이었던 카프카에게 문학은 삶 그 자체였다. 아무런 의무감 없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카페를 좋아했던 카프카처럼, 하루에 한 두 시간 혼자 카페를 지킬 수만 있다면, 우리는 누구나 카프카가 될 수 있다. 익명이지만, 더불어 있으니 은둔이나 소외가 아니다. 다만 제 몫의 고독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누릴 뿐이다. 카프카가 살았던 시공과 모든 것이 다르지만, 규칙적인 체험 속에서 동일하게 읽고 쓰다 보면, 성찰과 성장을 선물 받을 것이다.

 

좋은 책이 그러하듯 카프카의 글은 어려서 읽고, 어른이 되어 또 읽고, 늙어서 다시 읽어야 한다. 그 자신이 “책은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여야 한다고 했듯이, 그의 책은 우리의 뇌를 두 쪽 내는 도끼의 강렬함이 있다. 카프카의 글은 독자가 놓인 시기와 상황에 따라서 전혀 다른 책이 된다. 매번 짙어지는 농도와 질감 다른 메시지를 전달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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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2-05-01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아요.. 프라하에서 카프카를 만나고 느끼고 온 숲님의 감정들이 느껴져요..
사실 리뷰를 쓸까 싶어 들어왔다가 숲님의 리뷰를 지나칠 수 없어 먼저 읽게 되었네요..
비오는 밤, 글들이 촉촉하게 젖어들어요...^^

저는 카프카는 아직 반도 못 읽었어요...
단숨에 읽어내야 하는데 찔끔찔끔 읽어서 감흥도 떨어지고 책에게 미안해질 지경이네요..ㅡ.ㅡ
(물론 리뷰 마감일 지나서 담당자한테 더 미안하지만요..)

아무튼 숲님의 좋은 리뷰 읽고가니 기분은 좋네요..
저도 힘닿는데 까지 언능 읽어야겠어요..^^

더불어숲 2012-05-04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카프카는... 리뷰가 아니라, 논문으로 쓰고픈... 아니면 <해변의 카프카>처럼...창작품으로??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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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글쓰기 - 우리 말로 끌어안는 영어
최종규 지음 / 호미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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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 글쓰기』 최종규 씀, 호미, 2012. 1.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언어 없이 표상할 수 없는 무수한 관념이 세상에 존재한다. 사물화 되어 있지 않지만, 우리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개념은 ‘나’의 존재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이름만으로 존재를 드러내는 희망, 유토피아, 신(神)과 같은 추상의 개념은 언어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언어는 - 언어를 넘어서 - 우리의 사고와 행위를 지배한다. 관념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답을 찾아간다. 철학적 질문에 답하는 성찰의 시간 동안 사람은 성장하고, 언어와 이미지를 통해서 욕망을 형상화한다. 사람이란 본디 자신이 보고, 들었던 것을 배우고 흉내 내며 다른 사람과 관계 맺고 소통하기 때문이다.

 

저자 최종규님의 강직함과 올곧음이 그대로 베어나는 『뿌리깊은 글쓰기』는 모국어를 자유자재로 말하고 쓸 수 있다고 믿는 오만을 반성하게 한다. 말이 곧 글이 되는 일인 미디어 시대, 개개인의 사사로운 글들이 퇴고(推敲) 없이 네트워크에 쏟아지고 있다. 최종규님은 글밭 일구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책무성의 준엄한 자기 검열의 기준을 제시한다. 고약하다 싶을 만큼 고치고 다듬어서 우리글에 맞는 적확한 문장을 구성한다. 그는 불편함 없이 우리가 입어왔던 옷을 새롭게 고쳐서 더 편안하고 멋진 옷을 만들어내는 장인의 솜씨를 갖추었다. 그런 일을 업(業)으로 삼는 이는 고루할 것이라는 예상과 반대로 책날개에 담긴 저자 최종규님의 얼굴빛이 참으로 맑고 곱다. 갓 쓰고, 도포 입은 구태의연한 외양을 생각한다면, 그의 실체와 멀어도 한참 멀다. 올곧은 성품이 그대로 살아난다. 마음 씀과 글 씀이 그대로 형상화한 느낌이다. 그가 엮어 가는 착한 넋, 착한 말, 착한 삶이 활자로 살아난다. 인용된 글의 저자들 역시 그가 다듬어 준 새 문장에 빈정거릴 수 없는 까닭이 바로 그가 갖추고 있는 ‘진정성’과 ‘올바름’이다.

 

『뿌리깊은 글쓰기』는 오랜만에 독한 자아비판을 쏟게 한다. 글씨를 배워 읽고 쓸 줄 알게 된 이후로, 을 매개로 세상을 배웠던 나는 ‘번역서’를 창작 소설보다 먼저 읽었다. 대부분이 한자어인 우리 글, 서양의 동화책에서 출발한 책읽기, 번역서가 세상과 소통하는 통로였던 나의 글에서 뿌리를 찾기는 쉽지 않다. 고민과 퇴고의 절차 없이 썼던 글은 오문(誤文)과 비문(非文)이 가득하다. 읽은 사람과의 소통을 고려하지 않고 쓴 자기 과시의 글들도 더러 있다. 우리말 사이사이에 영어와 한자를 섞어서 현란하게 쓰는 것이 학력과 문화라는 통념의 반향이기도 하다. 이 책은 펼치는 순간 한숨에 끝까지 읽게 하는 힘이 있다. 이오덕 선생님과 권정생 선생님이 채워주셨던 한시절의 소중한 가르침이 오롯이 되살아난다. 그분들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며 살고 있는 나에게는 두 큰 어른의 부활로 느껴졌다. 최종규님은 그분들의 언덕에서 숲을 이루고 있는 가장 반듯하고 곧게 자란 한그루 나무 같다. 우리글을 향한 저자의 ‘생각’, ‘사랑’, ‘뿌리’는 언어를 통제하는 제도 권력에 비하면 미약하지만, 강인한 내공과 생명력을 담고 있다. 그는 한글을 모국어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좋은 선생님이시다.

 

누군가가 한글만을 고집한다면, 시류를 거스르는 유통성 없는 사람쯤으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우리말을 고집하는 사람을 보면, 순혈주의, 인종주의, 국수주의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언어 권력의 지배를 간과한 비판이다. 불과 19세기에도 서구 지배계급은 ‘라틴어’를 가지고 명문대 입학을 조절하며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했다. 21세기 한국은 기득권으로의 진입을 판가름하는 결정적인 변인이 바로 ‘영어’다. 듣고 말하는 영어 능력이 대학 입시, 취업, 전문대학원 입학의 당락을 결정하기 때문에 우리말은 더욱 더 경시 당한다. 언문(諺文)이라고 하여 우리말을 천시하고, 한문만을 고집했던 이조 양반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문화를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뿌리를 가진 공동체의 언어를 억압하는 방법이다. 수많은 순혈 인종주의 침략자들이 선택한 방법이었다. 일제 36년 동안 오롯이 새겨진 우리의 역사이기도 하다.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사대주의를 가지고서 자문화중심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오늘 당장 컴퓨터를 셈틀로, 다운로드를 갈무리로, 디저트를 입씻이로, 디테일을 구석구석으로 바꿀 수는 없다. 한자어를 모두 폐기하거나, 일본말과 영어식 어투의 습관을 하루아침에 바로 잡을 수는 없다. 뿌리가 잘린 꽃은 오래가지 못한다. 좋은 토양에 뿌리를 깊게 내린 글쓰기를 위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조심스럽게 글을 쓰겠다는 다짐 하나 세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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