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일기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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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 작가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단상.

∎ 경험의 공유와 기억을 현재와 미래로 살아내기 
∎ 단정한 문장과 심연으로 가라앉는 깊은 사유 
∎ 타자의 고통을 내 몸으로 앓아내는 체현된 절망의 통증
 - “희망을 버리고 힘을 내는” 우리
∎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필코 살아내는 ‘삶’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 유기체뿐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에 스미는 연민과 사랑


체계바라처럼 "불가능한 꿈을 꾸는 리얼리스트" 황.정.은. 

작가의 첫 번째 에세이 『일기』를 읽고, 4년만 다시 숨 고르며 그녀의 공개 일기를 읽는다. 
12월 3일 계엄 이후, 탄핵까지의 시간이 일기에 담겨 있다. 

‘작지만 큰 일기’ 『작은 일기』


개인의 경험이라면 작지만, 
집단 경험과 연대가 함께 한 시간의 기록은 ‘큰 일기’다. 
줌파 라히리의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처럼,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탄핵 이후에도 '안도감'과 ‘기쁨’은 현재 우리 마음을 담지 못한다.
일상에 집중하며 살 수 없었음을 매일 아침, 다시 확인한다.
계엄 – 산불 – 싱크홀 – 파면으로 이어진 겨울과 봄 사이
국가 폭력으로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위안은 사치다. 
우리는 욕망을 중립으로 포장한 이들에 대한 자괴감까지 포함하여
공권력이 시민을 향했던 시간 동안 가져야 했던 공포와 불안으로부터 
오랫동안 자유로울 수 없다. 

이번 주말 청송, 울진, 삼척 피해 지역을 다녀올 일이 있었는데, 
광범위한 상흔이 전후 회복이 요원한 상태로,
여전히 화재가 진행 중인 느낌이었다. 
31명이 생명을 잃고, 50여 명이 부상을 당했던 2025. 산불.
흑백영화 한 장면 같은 잿빛 산림 위로 푸른 하늘이 낯설게 처연하다.

하림의 <별에게>를 들으며 『작은 일기』를 읽는다. 
사람의 악함과 약함을 생각한다. 
부당함을 겪고도 발화, 발설하지 못하는 존재를 떠올린다. 
삶과 죽음을 변주하는 책과 영화를 찾아본다.

신간 평가단, 오랜만이다. 



꾸준히 해오던 신간 평가단을 수년 전 멈춘 이유는 책이 흔해졌고,
책이 우리 삶보다 더 커지지 않는 것, 
글과 삶이 유리된 채 제법 잘 쓰인 매끈한 글들이 넘쳤기 때문이다. 
물론 단단한 내면과 올곧은 태도의 작가님 작품은 무조건 사야 한다. 
반복 읽기와 선물 소비를 멈추지는 않는다.
- 누군가 내어준 일기를 읽는 것만 한 - 선물이 없다.
좋은 글은 계속 생산하여 읽는 선순환 만들기.

'작은 일기'는 행간 사이, 단락 사이, 길고 깊은 한숨을 채우며 오래 읽게 된다. 
about time. ‘다시 읽음’으로 타임머신이 되어 시공초월의 경험을 한다. 
글은 여전히 힘이 세다. 
연대가 필요한 순간, 마법을 불러온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에브리싱,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우리는 어디든, 무엇이든 될 수 있다. 
환원될 수 없는 '모든 것'으로 트랜스포머하며, 
이 세계 어디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황정은 작가의 책은 한 번만 읽은 적은 없다. 
작가님은 내가 경험한 세계를 여러 번 다시 살게 한다.
복기해서 읽고, 필사와 메모를 반복하며 
경험의 핍진성을 믿는 황정은 작가의 세계로 들어가 내 세계를 오버랩한다. 
너와 내가 따로 있지 않다. 
고요함의 표피 속에서 나, 그녀,
물질로 환원하는 없는 환대와 연대를 만든다. 
다중이 만드는 오버 사운드로 얽히며 독서로 연대하는 집회장이 된다. 

행복할 때보다 고립, 고통, 억울함이 일기를 쓰게 한다. 
유년시절, 일기 읽기의 시작은 『안네의 일기』였다. 
게슈타포를 피해 은신한 안네가 겪는 시간이
현재형으로 내 삶과 하나가 되었다. 
이후 작가의 에세이 또한 ‘보여주기 위한 일기’임을 알게 되었고,
소설, 시와 다른 체감을 주는 애서가 되었다. 

아니 에르노의 『바깥 일기』와 최현숙의 『작별 일기』를 다시 꺼내 읽는다. 
<작은 일기>의 목차를 앞뒤 이어 붙여 만든 한 문장을 만들어 본다. 

이 세계를 사랑하는, “너무 고마운 사람”과 함께 “알아보고 눈치채는 마음”으로 

“세상의 모든 아침”을 맞이하자. 

삶은 그렇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분절하며 흘러갈 것이다. 

그 추운 밤을 그 자리에서 보낸 사람들도 놀랍고, 그들에게 난방 버스며 음식이며, 바람 넘는 고개에서 버티는데 도움이 되는 물품들을 즉시 보낸 사람들도 놀랍다. 그건 나라에서 받은 것도 없어도 위기가 닥치면 들불같이 일어난다는 어느 민족의 성격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남의 곤경과 고립을 모르는 척 내버려두거나 차마 두고 갈 수 없는 마음이 아닐까. 남의 고통을 돌아보고, 서로 돌볼 줄 아는 마음들. - P57

오래전 어느 북토크 자리에서 "사람들의 악함은 약함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을 나는 한다.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라는 질문을 받고 엉뚱한 대답을 한 적이 있는데, 그 질문도 자주 생각한다.
실은 몇해째하고 있다.
사람들의 악함을 마음에 들여 되짚고 생각해보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내게도 그 싹이 무성하게 있으니까. 그런 것이 자신에겐 없을 거라고 믿는 얼굴 앞(65)에 서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내게는 그런 입장 역시 악함의 기반이 되는 약함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람들의 약함에 내가 얼마나 분노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약함은 어느 정도 그의 탓일까. 그리고 권력 가진 이들의 혼돈 그 자체인 악함도 약함에서 그 탓을 찾을 수 있을까.
- P64

우리 가족은 1992년에 살던 집을 경매로 빼앗긴 뒤 그 집 그 방에 들어갔다가 1995년 1월 어느 새벽에 다급히 짐을 꾸려 떠났다. 월세가 밀렸기 때문은 아니었다. 아직은 어디에도 말하거나 기록할 수 없는 그 일 때문에, 그 밤에 나는 몹시 겁을 먹었고 부당하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슬펐다. - P68

가급적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이번 한번뿐이니까. 올 엣 원스.
삶의 목적과 의미를 ‘목격’에 두고 산 지 꽤 되었다. 태어나 보고 듣고 겪는다. 이걸 하러 나는 여기에 왔다. 아주 작은 무수한 입자들로 흩어져 있다가 어느 날 인간이라는 물리적 형태로 세상에 출현해, 기적적으로 출아해, 세상을 겪고 세상의 때가 묻은 채 다시 입자로 돌아갈 것이다. 세상을 관통한, 그리고 세상이 관통한 더러운 경험체로서.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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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고전문학 에세이
김영숙 지음 / 파든(FARDEN)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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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의 변화를 실감했던 여름의 권태가 끝날 즈음, 가을과 함께 찾아온 철학자의 고전문학 에세이가 우리를 시간 여행자로 만든다. 아니 추억 여행자라고 해야 더 적합하겠다. 시공을 초월한 친구가 있다면 고전문학이라 답할 수밖에 없다. 세계에 대한 호기심 가득한 앎의 욕망, 자신을 조금 더 알고 이해하고 싶은 욕구가 철학이라면 고전을 다시 보는 것이 가장 좋은 해법이 될 것이다. 인간의 삶에 보편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나의 고통과 불안은 시간을 초월한 인간 존재의 필연임을 새삼 확인한다.


가을 휴가차 나흘 동안 강원도 차박 여행을 떠나면서 이 책을 배낭에 넣어 갔다. 비 내리는 강릉 해안가 카페에서 책을 펼친 오후, 이어지는 밝음이 사위어 가는 내내 책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 책에 다루는 열두 편의 작품을 복기하는 동안, 그 책을 읽고 있던 여러 명의 와 조우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저자가 작품 속에서 사이사이 풀어내는 사적 삶이 작품과 연결 고리가 되어 페이스츄리나 바움쿠헨처럼 다양한 서사와 서정 사이를 산책하게 된다.


SNSOTT, 쇼츠가 이끄는 대로 흘러가다 보면 시간은 순삭이고, 열패감 비슷한 정서가 마음에 스밀 때, 이 상황을 불어일으킨 것이 자본의 욕망인지, 주체의 선택인지 혼란스럽다. 그때 고전 리라이팅을 읽는다면 자신과 세계를 메타적으로 바라보는 힘을 얻게 된다. 철학자의 고전문학 에세이를 읽음으로써 성인이 추억 여행자가 된다면 십 대, 이십 대를 통과하는 독자는 시간 여행자로, ‘about time’의 세계로 이끌어줄 것이다. 철학자의 고전문학 에세이는 청소년과 청춘들에게 일독을 강력하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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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듯한 세영 씨
김영숙 지음 / 문학여행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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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듯한 세영씨’가 가지는 힘, 한 단어로 표현하면 흡.입.력. 


책을 잡은 순간부터 읽기를 멈추지 못했다.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와 제목만 닮은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전혀 다른 서사이듯, 61년생 <반듯한 세영씨>는 베스트셀러 <82년생 김지영>과 결이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그럼에도 역설적이게 세영씨는 시공을 초월하여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여성의 삶이기도 하다. 


독일 박사, 사회학을 전공한, 자기 철학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관념과 현실의 괴리는 모든 여성의 삶에 존재한다. 82년생 김지영이 성장하는 동안 가정과 직장에서 겪었던 삶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여전히 변주하고 있다. 그녀에겐 세영씨와 같은 전세대가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니체적 질문이 머릿속을 맴돈다. 

반듯함이란, 사랑이란, 실수란,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

동년배에겐 위로를, 다음 세대에게는 자기다운 선택을 해도 된다는 용기를 선물하는 책이다. 실수가 아닌 최고의 선물, 세영씨의 딸 수지, 두 모녀가 생물학적 관계를 떠나서 여성과 여성으로 연대할 근미래를 독자로서 간절히 바란다. 


책을 덮는 마지막 장에서, 다시 표지와 목차를 다시 살폈다. 열린 결말을 넘어서서 세영씨의 인생 2부가 다큐처럼 알고 싶어진다. stop motion이라니, 얼음처럼 쨍하다. 


자기답게 살아간 세영씨의 다음 선택이 궁금하고, 온 마음으로 응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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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 - 그람시 산문선
안토니오 그람시 지음, 김종법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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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지성 깨어 있는 시민의 자발적 참여 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

안토니오 그람시 지음, 김종법 옮김, 바다출판사, 2016. 3.

 


 

 

   '그람시 읽기'의 무게를 가늠하기에 앞서, 그람시를 읽고 싶은 욕망이 앞섰던 청춘의 시절이 있었다. 앎과 사유가 어렸던 나는 그람시의 사상보다 그의 아우라에 경도되어 있었다. 그람시의 삶 자체가 로쟈 룩셈부르크와 겹쳐지면서, 삶과 사상에 매료되었다. 한걸음 다가가지도 못한 채, 이십 여 년이 흘러버렸다. 그리고 다시 그람시라니.

 

그를 따르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안토니오 그람시는 말을 많이 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으로 묘사된다(22).

 

시간과 공간이 확연히 다름에도, 그람시의 글은 21세기 한국의 정세를 분석하는데 잘 맞아 떨어진다. 민주주의는 과정일 뿐,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반대로 파시즘은 조건이 만들어지면 언제든지 새로운 형태로 등장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파시즘의 등장은 몇몇 권력자의 의지로 될 수 없다.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먹고 사는 경제문제만 해결해준다면, 어떤 정권이든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일 때, 파시즘은 슬그머니 자리를 꿰차고 들어온다. 지난 대선에서 대한민국의 선택에서 가장 큰 변수는 경제적 효용이었다. 선택은 권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선택지를 쥐고 있는 시민이 어떤 가치로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다. 깨어 있는 시민만이 민주주의를 수호할 수 있다.

 

세상의 가치가 경제를 바탕으로 할 때, 인간관계가 어떻게 파괴되는지, 우리 모두 목도하고 있다. 먹고사는 일이 투표의 방향을 결정하는 21세기 한국의 현실과 1920년대 전후 이탈리아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먹고사는 문제'의 해결을 기대하는 것이 파시즘을 불러 왔다.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최우선일 때, 이것이 파시즘을 가능하게 하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할 수 있다. 혁명 역시 현재가 최악의 상황이라고 믿는 민중에게 극한을 넘어설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할 때만 가능할 것이다.

 

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옥중수고이전, 1917~ 18년 동안 그람시가 쓴 산문을 모은 책이다. 그가 초기 사회 혁명가와 하원 의원으로 활동했던 시기의 정치 평론집(10)’이다. <1. 무엇보다 먼저, 2. 정치와 정치인, 3. 교육에 관하여, 4. 자유와 법, 5. 국가이 병폐들, 6. 전쟁에 반대한다>로 구성되어 있다. 체계를 갖춘 논문으로서의 글이 아니기 때문에, 정독 보다는 자신이 당면한 문제 의식에서 출발하면 좋을 듯하다. 여기에 1차 세계 대전 전후의 이탈리아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건 사실이다. 뭇소리니와의 의사진행발언을 포함해서 25개의 평론이 실린 이 책의 제목을 출판사와 편집인이 무관심의 증오로 잡은 것은, 그만큼 그람시가 지성, 참여, 실천에서 무관심만큼 독이 되는 것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리리라.

 

산다는 것은 지지자(혹은 참여자)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라는 말을 믿는다. 무관심은 무기력이고 기생적인 것이며 비겁함일 뿐 진정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무관심한 사람들을 증오한다(27). 나는 살아 있고 참여하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나는 삶에 참여하지 낳는 사람들을 증오하며, 무관심한 사람을 증오한다(32).

 

여타 평론의 제목에서도 그람시의 단호함이 묻어난다. “구호는 권리이지, 선물이 아니다.”에서 다루는 병원 관료제의 문제점, “경솔한 언동에는 어떠한 인내도 없다.”에서는 비타협-관용불관용-타협이라는 조합을 기준으로 삼아 행동(73)하기, “통제 밖의 자본주의가 가지는 착취의 본질, 전쟁은 경제적 이익 산출의 중요한 수단임에 대해서 확고한 신념으로 글을 쓴다. 글의 소재도 전횡무진 한다. 경제적 투기를 하는 사립학교들의 학위 장사, 예술과 무관하게 귀부인 침실에 넘쳐나는 연애 소설과 같은 사회 현상에 대해서도 관심 있게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압권은 그람시가 무솔리니를 상대로 하원에서 의사 진행 발언한 파시즘에 대적한 녹취문이다. 수백 번에 걸쳐 반복할 필요는 없다는 의장의 말에 그람시는 그것을 혐오스러워할 때까지 계속해서 들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밝히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 짧은 녹취문에서 우리는 그람시라는 하나의 위대한 인격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람시의 정치 평론은 문학처럼 읽히기도 하다. 현란한 언어로 독자를 현혹하지 않는다. 글을 쓰는 행위는 자기 과시적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있는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진실함이 베어난다. 현란한 언어보다는 평이한 언어로 진실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최대한 가공을 덜 해서 원재료의 풍미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자연주의 요리를 먹는 기분이 든다.

 

1990년대 초, 연세대학교 다니던 친구에게 '그람시'를 읽고 싶다고, 졸업 논문을 써볼 생각이라고, 대학도서관에서 그람시 관련 책을 빌려 소포로 붙여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국회에서 논문 서비스를 해준다거나, 시립도서관에서 전문 서적을 충분히 보여하고 있던 시절도 아니었다. 친구는 자기 대학에 있는 그람시 관련 서적을 될 수 있는 대로 충분히 빌려서 소포로 보내주었다. 지나고 보니, 참 부끄럽다. 의욕은 넘쳤고, 앎은 일천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때가 되면 이렇게 다시 조우할 수 있다는 거다. 이제 연락도 닿지 않는 그 친구에 대한 그리움까지 더해져서, 나는 또 이렇게 그람시를 다시 만난다.

 

   현재가 최선이라고 믿는 우리의 태도는 옳은가?

    

그람시의 사상에서 순간순간 노무현 대통령을 만난다. 5월 봉하에 다녀왔다. 빛이 눈부신 5, 초록이 떨고 있었다. 난장 같은 축제 분위기에 가족 단위로 넘쳐나는 상춘객들 사이에서, 나는 오롯이 그와 독대하는 기분으로 나무 그늘에 앉아 있었다. 그가 떠난 2009년은 찬란한 슬픔의 봄이었다. 그람시의 부활처럼, 노무현은 그렇게 민주주의의 현재에 머물고 있다. 그들의 말처럼 "깨어있는 시민의 자발적 참여"없이 민주주의는 한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집단 지성의 힘없이, 세상은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지성, 그 자체가 용기다. 현실에 수동적으로 안주하기 않기 위해서 지성은 필요조건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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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계급투쟁]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새로운 계급투쟁 -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희상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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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진보를 넘어선 진보 새로운 계급투쟁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희상 옮김, 자음과모음, 2016. 3.

 

오랜만에 심장이 밑줄 긋게 하는 책을 만났다. 지젝의 사상은 강렬하다. 얇지만 깊다. ‘지젝 읽기는 불가피한 필연이라는 서평가 이현우의 서평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새로운 계급투쟁을 위한 지침서로도 충분하다. 때를 기다린 듯, 신자유주의 세계정세에 대항하기 위한 사상과 방법론을 모색하는 사람에겐 시기적절한 책이다. 지젝은 진보의 보편적인 인권에 대한 생각에서 한 걸음 크게 나아간다. 또한 모든 종교의 어두운 잠재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 지젝의 주장이다.

 

이 책에서 지젝은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이 무엇이고, 그 대안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한다. 유로파스탄이 될지도 모르지만, 유럽으로 밀려오는 가난한 난민에게 공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보편적 생각일 것이다. “인간은 누군가의 생각보다는 누군가의 고통에 훨씬 더 쉽게 공감을 느끼는 법(15)이니까. 하지만 지젝은 철저한 근본적 성찰로 사유를 전환한다. 연민보다는 어떻게 하면 본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 질문의 방향을 바꾼다.

 

지젝은 난민에 대한 고결한 이타주의가 가난이 존재할 수 없는 기반을 만드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한다. 거듭된 물음으로 유럽의 전통 전체를 비판적으로 성찰하여 새 출발점을 찾아야 한다(19)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는 서구를 위협하는 것은 난민이 아니라, 글로벌 자본주의라는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한다, 이슬람 공포에 대한 죄책감을 반성하기보다는 얼마나 강력하게 글로벌 자본주의와 결탁되어 있는지를 직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행위는 행위로만 이해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지젝은 진보 프레임을 넘어선다. 지젝이 명명한 해석학적 유혹(48)’은 사회 이슈가 등장할 때마다 진보의 발목을 잡는다. 서울 강남 지하철 여성 살해 사건에 대한 분석 기사를 보면서 지젝의 냉철한 판단을 떠올렸다. 우리 사회는 어떤 분출에 어떤 심오한 의미나 메시지가 숨어 있는지 찾으려는 유혹(48)”이 개인의 성찰의 깊이처럼 취급되고 있다. 인과 관계를 역치할 수도 없고, 하나의 결과에 하나의 원인만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우리에게 다양한 해석을 하게 하고, 그것이 본질에서 벗어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지젝은 행위로의 이행은 단지 충동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범인의 무기력함(46)일 뿐이라고 판단한다.

 

중요한 것은 본질을 직면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바로 새로운 계급투쟁이다. 우리가 수많은 지구촌 문제가 글로벌 자본주의의 구조적 필연성에 발생하고 있다. 난민 문제는 그들을 유럽이 받아들여 줄 것인지, 말 것인지에 있지 않다. 아랍과 서구를 대결 구도로 인식하는 데 한계가 있음은 명확하다. 가령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는 서구 자본주의의 전초기지라는 점에서 아랍과 서구로 양분되지 않는다. 세계를 가로지르는 보다 명확한 기준은 바로 계급이다. 감상적 연대가 아닌 계급적 연대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지젝은 페미니즘이 이를 방해하고 있다고 한다.)

 

사회과학은 논의의 방향을 바꾸는 것, 질문의 방향을 트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패턴으로 고착 된 생각의 방향을 바꾸지 못한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홈 패인 레일을 달릴 수밖에 없다.

 

지젝의 이 문장을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다.

 

어렵고 힘들수록 인간은 절대적 유토피아를 열망한다. 그러나 난민이 배우게 될 뼈아픈 교훈은 노르웨이는 없다는 것, 심지어 노르웨이 안에도 노르웨이는 없다는 것이리라. 난민은 자신의 꿈을 검열하고 통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현실 속 꿈을 좇는 대신 현실을 바꾸는 데 집중해야한다(65~66).

    

지젝을 읽으며 새삼스레 대학 시절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친구들과 나누었던 하찮은 대화가 떠오른다. “내가 삼성 이건희와 가까울까, 미국에 살고 있는 홈리스와 더 가까운지와 같은 유의 주제였다.

 

여기에 소통에 관한 지젝의 생각에 내 생각을 포개어 본다.

 

더 많은 소통은 무엇보다도 더 많은 소동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서로 이해함이라는 태도는 서로 길을 비켜감이라는 태도로 보완되거나, 새로운 비밀 보호법에 부합하는 적절한 거리를 확보해야 한다. 생활 방식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우리에겐 어느 정도의 소외가 필수적이다. 많은 경우 소외는 문제가 아니라 해법이다(91).

 

꼰대의 특징 중 하나는 누구에게나 반말을 한다는 거다. 자식 나이니까. 오래 함께 지냈으니까. 격이 없어서 등등 참 많은 이유가 있을 법 한데, 반말은 상대를 하대하는 것이고, ‘늙음의 바로미터라는 생각은 못하는 모양이다. 가족 같은직장과 가족은 하늘과 땅 차이인데도, 사람들은 직장을 가족이라고 스스럼없이 부른다. 그 순간, 꼰대 짓이 시작된다. 이런 식의 관계는 반드시 권력을 동반하고, 거리두기에서 실패한다. 소통은 소동을 만들 것이고, 공존의 평화를 깨트린다. 권력관계가 아니라면, 누가 그런 인간들을 상대해주겠는가?

 

약자는 연민으로 타인을 약자로 만든다. 감정에 기대면 기댈수록 본질에서 멀어진다. 난민, 가난한 사람은 선한 사람이라는 일종의 자기 최면에 걸려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하는 근거는 바로 우리 자신이 우리와 같지 않은 인간이기 때문(101)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지젝에게는 확실한 대안이 있다. ‘유럽 중심적이라는 비난이 있더라도, 모두가 의무적으로 지킬 최소한의 규범 만들기. 이 제한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생활 방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관용이다. 지구촌은 그때 비로소 공동의 문제에 대한 연대 투쟁이 가능할 것이다. 계급적 연대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지젝의 새로운 계급투쟁두고두고 다시 펼쳐야 할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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