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고전문학 에세이
김영숙 지음 / 파든(FARDEN)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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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의 변화를 실감했던 여름의 권태가 끝날 즈음, 가을과 함께 찾아온 철학자의 고전문학 에세이가 우리를 시간 여행자로 만든다. 아니 추억 여행자라고 해야 더 적합하겠다. 시공을 초월한 친구가 있다면 고전문학이라 답할 수밖에 없다. 세계에 대한 호기심 가득한 앎의 욕망, 자신을 조금 더 알고 이해하고 싶은 욕구가 철학이라면 고전을 다시 보는 것이 가장 좋은 해법이 될 것이다. 인간의 삶에 보편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나의 고통과 불안은 시간을 초월한 인간 존재의 필연임을 새삼 확인한다.


가을 휴가차 나흘 동안 강원도 차박 여행을 떠나면서 이 책을 배낭에 넣어 갔다. 비 내리는 강릉 해안가 카페에서 책을 펼친 오후, 이어지는 밝음이 사위어 가는 내내 책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 책에 다루는 열두 편의 작품을 복기하는 동안, 그 책을 읽고 있던 여러 명의 와 조우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저자가 작품 속에서 사이사이 풀어내는 사적 삶이 작품과 연결 고리가 되어 페이스츄리나 바움쿠헨처럼 다양한 서사와 서정 사이를 산책하게 된다.


SNSOTT, 쇼츠가 이끄는 대로 흘러가다 보면 시간은 순삭이고, 열패감 비슷한 정서가 마음에 스밀 때, 이 상황을 불어일으킨 것이 자본의 욕망인지, 주체의 선택인지 혼란스럽다. 그때 고전 리라이팅을 읽는다면 자신과 세계를 메타적으로 바라보는 힘을 얻게 된다. 철학자의 고전문학 에세이를 읽음으로써 성인이 추억 여행자가 된다면 십 대, 이십 대를 통과하는 독자는 시간 여행자로, ‘about time’의 세계로 이끌어줄 것이다. 철학자의 고전문학 에세이는 청소년과 청춘들에게 일독을 강력하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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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듯한 세영 씨
김영숙 지음 / 문학여행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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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듯한 세영씨’가 가지는 힘, 한 단어로 표현하면 흡.입.력. 


책을 잡은 순간부터 읽기를 멈추지 못했다.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와 제목만 닮은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전혀 다른 서사이듯, 61년생 <반듯한 세영씨>는 베스트셀러 <82년생 김지영>과 결이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그럼에도 역설적이게 세영씨는 시공을 초월하여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여성의 삶이기도 하다. 


독일 박사, 사회학을 전공한, 자기 철학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관념과 현실의 괴리는 모든 여성의 삶에 존재한다. 82년생 김지영이 성장하는 동안 가정과 직장에서 겪었던 삶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여전히 변주하고 있다. 그녀에겐 세영씨와 같은 전세대가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니체적 질문이 머릿속을 맴돈다. 

반듯함이란, 사랑이란, 실수란,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

동년배에겐 위로를, 다음 세대에게는 자기다운 선택을 해도 된다는 용기를 선물하는 책이다. 실수가 아닌 최고의 선물, 세영씨의 딸 수지, 두 모녀가 생물학적 관계를 떠나서 여성과 여성으로 연대할 근미래를 독자로서 간절히 바란다. 


책을 덮는 마지막 장에서, 다시 표지와 목차를 다시 살폈다. 열린 결말을 넘어서서 세영씨의 인생 2부가 다큐처럼 알고 싶어진다. stop motion이라니, 얼음처럼 쨍하다. 


자기답게 살아간 세영씨의 다음 선택이 궁금하고, 온 마음으로 응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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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 - 그람시 산문선
안토니오 그람시 지음, 김종법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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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지성 깨어 있는 시민의 자발적 참여 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

안토니오 그람시 지음, 김종법 옮김, 바다출판사, 2016. 3.

 


 

 

   '그람시 읽기'의 무게를 가늠하기에 앞서, 그람시를 읽고 싶은 욕망이 앞섰던 청춘의 시절이 있었다. 앎과 사유가 어렸던 나는 그람시의 사상보다 그의 아우라에 경도되어 있었다. 그람시의 삶 자체가 로쟈 룩셈부르크와 겹쳐지면서, 삶과 사상에 매료되었다. 한걸음 다가가지도 못한 채, 이십 여 년이 흘러버렸다. 그리고 다시 그람시라니.

 

그를 따르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안토니오 그람시는 말을 많이 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으로 묘사된다(22).

 

시간과 공간이 확연히 다름에도, 그람시의 글은 21세기 한국의 정세를 분석하는데 잘 맞아 떨어진다. 민주주의는 과정일 뿐,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반대로 파시즘은 조건이 만들어지면 언제든지 새로운 형태로 등장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파시즘의 등장은 몇몇 권력자의 의지로 될 수 없다.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먹고 사는 경제문제만 해결해준다면, 어떤 정권이든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일 때, 파시즘은 슬그머니 자리를 꿰차고 들어온다. 지난 대선에서 대한민국의 선택에서 가장 큰 변수는 경제적 효용이었다. 선택은 권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선택지를 쥐고 있는 시민이 어떤 가치로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다. 깨어 있는 시민만이 민주주의를 수호할 수 있다.

 

세상의 가치가 경제를 바탕으로 할 때, 인간관계가 어떻게 파괴되는지, 우리 모두 목도하고 있다. 먹고사는 일이 투표의 방향을 결정하는 21세기 한국의 현실과 1920년대 전후 이탈리아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먹고사는 문제'의 해결을 기대하는 것이 파시즘을 불러 왔다.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최우선일 때, 이것이 파시즘을 가능하게 하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할 수 있다. 혁명 역시 현재가 최악의 상황이라고 믿는 민중에게 극한을 넘어설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할 때만 가능할 것이다.

 

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옥중수고이전, 1917~ 18년 동안 그람시가 쓴 산문을 모은 책이다. 그가 초기 사회 혁명가와 하원 의원으로 활동했던 시기의 정치 평론집(10)’이다. <1. 무엇보다 먼저, 2. 정치와 정치인, 3. 교육에 관하여, 4. 자유와 법, 5. 국가이 병폐들, 6. 전쟁에 반대한다>로 구성되어 있다. 체계를 갖춘 논문으로서의 글이 아니기 때문에, 정독 보다는 자신이 당면한 문제 의식에서 출발하면 좋을 듯하다. 여기에 1차 세계 대전 전후의 이탈리아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건 사실이다. 뭇소리니와의 의사진행발언을 포함해서 25개의 평론이 실린 이 책의 제목을 출판사와 편집인이 무관심의 증오로 잡은 것은, 그만큼 그람시가 지성, 참여, 실천에서 무관심만큼 독이 되는 것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리리라.

 

산다는 것은 지지자(혹은 참여자)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라는 말을 믿는다. 무관심은 무기력이고 기생적인 것이며 비겁함일 뿐 진정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무관심한 사람들을 증오한다(27). 나는 살아 있고 참여하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나는 삶에 참여하지 낳는 사람들을 증오하며, 무관심한 사람을 증오한다(32).

 

여타 평론의 제목에서도 그람시의 단호함이 묻어난다. “구호는 권리이지, 선물이 아니다.”에서 다루는 병원 관료제의 문제점, “경솔한 언동에는 어떠한 인내도 없다.”에서는 비타협-관용불관용-타협이라는 조합을 기준으로 삼아 행동(73)하기, “통제 밖의 자본주의가 가지는 착취의 본질, 전쟁은 경제적 이익 산출의 중요한 수단임에 대해서 확고한 신념으로 글을 쓴다. 글의 소재도 전횡무진 한다. 경제적 투기를 하는 사립학교들의 학위 장사, 예술과 무관하게 귀부인 침실에 넘쳐나는 연애 소설과 같은 사회 현상에 대해서도 관심 있게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압권은 그람시가 무솔리니를 상대로 하원에서 의사 진행 발언한 파시즘에 대적한 녹취문이다. 수백 번에 걸쳐 반복할 필요는 없다는 의장의 말에 그람시는 그것을 혐오스러워할 때까지 계속해서 들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밝히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 짧은 녹취문에서 우리는 그람시라는 하나의 위대한 인격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람시의 정치 평론은 문학처럼 읽히기도 하다. 현란한 언어로 독자를 현혹하지 않는다. 글을 쓰는 행위는 자기 과시적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있는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진실함이 베어난다. 현란한 언어보다는 평이한 언어로 진실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최대한 가공을 덜 해서 원재료의 풍미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자연주의 요리를 먹는 기분이 든다.

 

1990년대 초, 연세대학교 다니던 친구에게 '그람시'를 읽고 싶다고, 졸업 논문을 써볼 생각이라고, 대학도서관에서 그람시 관련 책을 빌려 소포로 붙여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국회에서 논문 서비스를 해준다거나, 시립도서관에서 전문 서적을 충분히 보여하고 있던 시절도 아니었다. 친구는 자기 대학에 있는 그람시 관련 서적을 될 수 있는 대로 충분히 빌려서 소포로 보내주었다. 지나고 보니, 참 부끄럽다. 의욕은 넘쳤고, 앎은 일천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때가 되면 이렇게 다시 조우할 수 있다는 거다. 이제 연락도 닿지 않는 그 친구에 대한 그리움까지 더해져서, 나는 또 이렇게 그람시를 다시 만난다.

 

   현재가 최선이라고 믿는 우리의 태도는 옳은가?

    

그람시의 사상에서 순간순간 노무현 대통령을 만난다. 5월 봉하에 다녀왔다. 빛이 눈부신 5, 초록이 떨고 있었다. 난장 같은 축제 분위기에 가족 단위로 넘쳐나는 상춘객들 사이에서, 나는 오롯이 그와 독대하는 기분으로 나무 그늘에 앉아 있었다. 그가 떠난 2009년은 찬란한 슬픔의 봄이었다. 그람시의 부활처럼, 노무현은 그렇게 민주주의의 현재에 머물고 있다. 그들의 말처럼 "깨어있는 시민의 자발적 참여"없이 민주주의는 한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집단 지성의 힘없이, 세상은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지성, 그 자체가 용기다. 현실에 수동적으로 안주하기 않기 위해서 지성은 필요조건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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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계급투쟁 -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희상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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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진보를 넘어선 진보 새로운 계급투쟁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희상 옮김, 자음과모음, 2016. 3.

 

오랜만에 심장이 밑줄 긋게 하는 책을 만났다. 지젝의 사상은 강렬하다. 얇지만 깊다. ‘지젝 읽기는 불가피한 필연이라는 서평가 이현우의 서평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새로운 계급투쟁을 위한 지침서로도 충분하다. 때를 기다린 듯, 신자유주의 세계정세에 대항하기 위한 사상과 방법론을 모색하는 사람에겐 시기적절한 책이다. 지젝은 진보의 보편적인 인권에 대한 생각에서 한 걸음 크게 나아간다. 또한 모든 종교의 어두운 잠재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 지젝의 주장이다.

 

이 책에서 지젝은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이 무엇이고, 그 대안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한다. 유로파스탄이 될지도 모르지만, 유럽으로 밀려오는 가난한 난민에게 공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보편적 생각일 것이다. “인간은 누군가의 생각보다는 누군가의 고통에 훨씬 더 쉽게 공감을 느끼는 법(15)이니까. 하지만 지젝은 철저한 근본적 성찰로 사유를 전환한다. 연민보다는 어떻게 하면 본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 질문의 방향을 바꾼다.

 

지젝은 난민에 대한 고결한 이타주의가 가난이 존재할 수 없는 기반을 만드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한다. 거듭된 물음으로 유럽의 전통 전체를 비판적으로 성찰하여 새 출발점을 찾아야 한다(19)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는 서구를 위협하는 것은 난민이 아니라, 글로벌 자본주의라는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한다, 이슬람 공포에 대한 죄책감을 반성하기보다는 얼마나 강력하게 글로벌 자본주의와 결탁되어 있는지를 직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행위는 행위로만 이해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지젝은 진보 프레임을 넘어선다. 지젝이 명명한 해석학적 유혹(48)’은 사회 이슈가 등장할 때마다 진보의 발목을 잡는다. 서울 강남 지하철 여성 살해 사건에 대한 분석 기사를 보면서 지젝의 냉철한 판단을 떠올렸다. 우리 사회는 어떤 분출에 어떤 심오한 의미나 메시지가 숨어 있는지 찾으려는 유혹(48)”이 개인의 성찰의 깊이처럼 취급되고 있다. 인과 관계를 역치할 수도 없고, 하나의 결과에 하나의 원인만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우리에게 다양한 해석을 하게 하고, 그것이 본질에서 벗어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지젝은 행위로의 이행은 단지 충동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범인의 무기력함(46)일 뿐이라고 판단한다.

 

중요한 것은 본질을 직면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바로 새로운 계급투쟁이다. 우리가 수많은 지구촌 문제가 글로벌 자본주의의 구조적 필연성에 발생하고 있다. 난민 문제는 그들을 유럽이 받아들여 줄 것인지, 말 것인지에 있지 않다. 아랍과 서구를 대결 구도로 인식하는 데 한계가 있음은 명확하다. 가령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는 서구 자본주의의 전초기지라는 점에서 아랍과 서구로 양분되지 않는다. 세계를 가로지르는 보다 명확한 기준은 바로 계급이다. 감상적 연대가 아닌 계급적 연대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지젝은 페미니즘이 이를 방해하고 있다고 한다.)

 

사회과학은 논의의 방향을 바꾸는 것, 질문의 방향을 트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패턴으로 고착 된 생각의 방향을 바꾸지 못한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홈 패인 레일을 달릴 수밖에 없다.

 

지젝의 이 문장을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다.

 

어렵고 힘들수록 인간은 절대적 유토피아를 열망한다. 그러나 난민이 배우게 될 뼈아픈 교훈은 노르웨이는 없다는 것, 심지어 노르웨이 안에도 노르웨이는 없다는 것이리라. 난민은 자신의 꿈을 검열하고 통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현실 속 꿈을 좇는 대신 현실을 바꾸는 데 집중해야한다(65~66).

    

지젝을 읽으며 새삼스레 대학 시절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친구들과 나누었던 하찮은 대화가 떠오른다. “내가 삼성 이건희와 가까울까, 미국에 살고 있는 홈리스와 더 가까운지와 같은 유의 주제였다.

 

여기에 소통에 관한 지젝의 생각에 내 생각을 포개어 본다.

 

더 많은 소통은 무엇보다도 더 많은 소동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서로 이해함이라는 태도는 서로 길을 비켜감이라는 태도로 보완되거나, 새로운 비밀 보호법에 부합하는 적절한 거리를 확보해야 한다. 생활 방식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우리에겐 어느 정도의 소외가 필수적이다. 많은 경우 소외는 문제가 아니라 해법이다(91).

 

꼰대의 특징 중 하나는 누구에게나 반말을 한다는 거다. 자식 나이니까. 오래 함께 지냈으니까. 격이 없어서 등등 참 많은 이유가 있을 법 한데, 반말은 상대를 하대하는 것이고, ‘늙음의 바로미터라는 생각은 못하는 모양이다. 가족 같은직장과 가족은 하늘과 땅 차이인데도, 사람들은 직장을 가족이라고 스스럼없이 부른다. 그 순간, 꼰대 짓이 시작된다. 이런 식의 관계는 반드시 권력을 동반하고, 거리두기에서 실패한다. 소통은 소동을 만들 것이고, 공존의 평화를 깨트린다. 권력관계가 아니라면, 누가 그런 인간들을 상대해주겠는가?

 

약자는 연민으로 타인을 약자로 만든다. 감정에 기대면 기댈수록 본질에서 멀어진다. 난민, 가난한 사람은 선한 사람이라는 일종의 자기 최면에 걸려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하는 근거는 바로 우리 자신이 우리와 같지 않은 인간이기 때문(101)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지젝에게는 확실한 대안이 있다. ‘유럽 중심적이라는 비난이 있더라도, 모두가 의무적으로 지킬 최소한의 규범 만들기. 이 제한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생활 방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관용이다. 지구촌은 그때 비로소 공동의 문제에 대한 연대 투쟁이 가능할 것이다. 계급적 연대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지젝의 새로운 계급투쟁두고두고 다시 펼쳐야 할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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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도덕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사회평론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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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결혼으로 고민하는 이를 위한 (21세기 실천적 지식인의) 합리적 조언

 

결혼과 도덕,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사회평론, 2016. 2.

 


 

1998, 다른 번역본으로 결혼과 도덕을 읽은 적이 있다. (결혼과 도덕에 관한 10가지 철학적 성찰, 김영철 옮김, 자작나무, 1997.) 꽃도 제 때를 만나야 피듯이, 책도 시절인연인지라, 내 것이 되기 위해서는 십여 년이 시간이 필요했음을 여실히 깨닫는다. 서재에서 그 책을 꺼내보니, 밑줄이 빼곡하고, 느낌표와 물음표가 가득하지만, 실제 무엇을 배우고 느꼈는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 이번에 읽은 결혼과 도덕은 러셀의 친절한 설명뿐 아니라, 번역도 부드럽다. 이번에 다시 러셀을 처음 접하는 새로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십여 년 전, 러셀 사상을 이해했다면, 내 인생에서 사랑, 결혼, 가족은 전혀 다른 형태가 되었을 것이다.

 

개인이 어떻게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는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본다. 인간의 성()은 본능이 아니라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내가 가지고 살아가는 올바름(도덕)에 대하여 회의(懷疑)하게 된다. 결혼과 가족은 변화에 대한 이해, 새로운 도전과 적응을 필요로 한다. 인간의 성 행위는 본능이 아니라, 사회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거와 다른 성 윤리, 책임과 의무가 필요하다. 그만큼 제대로 된 성교육 역시 중요하다.

 

21세기에 우리는 러셀의 결혼과 도덕을 읽어야 하는가?

 

러셀은 올바른 성교육, 자유연애, 계약 결혼, 성적 자유화를 통해서 건강한 개인의 삶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929년 쓰인 이 책은 아직 우리가 넘어 서지 못한 구시대의 한계. 구태의연함에 대하여 혁명적인 질문을 한다. 그 당시 러셀의 주장이 얼마나 도발적이었을지 가늠해볼 수 있는 지점이다. 또한 1세기 가까이 흐른 지금, 결혼과 도덕에 관한 사회 시스템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의문이 갖게 한다.

 

러셀이 이 책을 집필한 당시와 비교해 보면, 이제는 결혼과 도덕에 관한 가치관이 많이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반전, 반핵 운동으로 구속 되었던 실천적 지식인이었던 러셀의 뉴욕시립대학교 교수 임용이 취소된 것도 결혼과 도덕때문이다. 니체는 가부장사회에서 성, 결혼이 얼마나 남성 중심으로 유지되고, 성 담론이 금기 되었는지를 (당시 시대상으로 볼 때) 아주 급진적으로 분석한다. 그는 원시 부족사회에서 기독교와 천주교, 근대까지 역사적 분석을 토대로 탄탄한 주장을 펼친다.

 

결혼과 도덕에 대한 이해는 문화 인류학적 연구가 필수다. 종교가 결혼과 가족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생물학적 아버지라는 개념을 알지 못했던 트로브리안드 군도의 주민들을 살펴보면,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사회 아버지의 권위가 실추된 것에 대해서도 새롭게 접근할 수 있다. 금욕주의는 성 관계를 왜곡한다. 성적인 피로를 느끼지 못했던 원시 부족과 달리 문명인은 성적 피로와 함께 금욕주의를 동시에 경험한다.

 

결혼과 도덕이 한 사람의 인생 발목을 잡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시스템으로 통제하려고 할 때, 성 문제의 발생은 필연적이다. 얼마 전, 강신주 철학자의 전 부인이 인터넷에 올린 글 때문에 지인과 언쟁(not 논쟁)을 벌였다. 강신주가 쓴 책이 문광부의 청소년 권장 도서로 선정된 것에 대하여 철학자의 전 부인이 수년 전에 도서 추천을 취소해달라는 요청 글이었다. 진위여부는 잘 모르겠고, 개인적으로는 관심도 없다. 그 글은 강신주의 아들이 일탈한 것에 대한 구구절절한 나열과, 자기 아들 하나 제대로 키우지 못한 철학자의 책을 추천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제도권 교육에 적응하고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정답인지도 의문이고, 자기 자식을 사회에 잘 적응하는 사람으로 교육한 사람만이 철학자나 교육자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행복과 불행의 경계에서 자기다움을 지키며 잡스럽게살기를 자처한 철학자에게 규범화된 바른 삶을 요구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결혼과 도덕에 대한 논쟁은 자연스럽게 사랑에 대한 논의를 불러온다. “인생에서 사랑의 지위에 대한 러셀의 주장은 사랑의 힘과 방식에 대한 고민을 불러일으킨다. (“사랑이 반드시 반이성적인 것은 아니다. / 출세를 위해 사랑을 희생하는 것은 어리석다. / 사랑을 통해서만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 / 성교는 사랑을 목적으로 한 실험이다.”) 십대, 이십대에 러셀을 읽는다면 사랑을 긍정하며 - 훨씬 더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을 만큼 - 합리적인 제안으로 가득하다. 아이 없는 부부의 계약 결혼, 간통에 대한 법적 대응보다는 개인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유연한 태도, 억압적이지 않은 성교육, 국가가 아버지를 대신하는 모계 사회, 성의 개방과 피임 등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해 본 다음, 자기의 성()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다면 지금보다 건강한 사회가 될 것이다.

 

수능을 마친 학생들에게, 사랑과 결혼에 대해서 고뇌하는 청춘에게, 결혼을 보험이나 적금으로 생각하는 결혼 정령기의 젊은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결혼이 자기 인생을 불행의 늪으로 만들고 있는 이들에게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열어줄 것이라고도 확신한다. 이 책을 보면서, 밴쿠버 챕터 서점에서 러셀의 행복의 정복문고판을 사서 읽던 오래 전 겨울도 떠올랐다. 이 책을 추천하며 썼던 글을 다시 옮겨 본다. - 영어가 안 되는 내가 단기 어학연수를 가서, 끼고 살았던 책은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었다. 얇은 책이니,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읽고 해석하리라 목표도 세웠다. 어려운 건 영어가 아니라, 러셀의 사상이다. 내겐 노동으로 부터의 소외가 빼앗아 간 여가를 되찾아야 한다는 정도로 이해되었다. 자기계발의 시대에 자발적 게으름은 가능한가? (이번에 본 영화 <풍푸 팬더>에서 무술을 가르칠 줄 모르는 아버지가 아들 팬더에게 요구하는 것이 늦게 일어나기, 오래 자기 등등이다. 아이들은 여기에서 웃음이 터진다. 사실 우리가 꿈꾸는 삶이 그렇지 않은가?) 니체 방식으로 사유하자면, 결혼과 도덕은 시대의 담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에 대한 통찰을 위해서 다시 또 고전이다. 읽어야 할 책 목록에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올린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결혼과 도덕

 

앞으로 우리는 어떤 방식의 결혼과 도덕으로 자기 배려를 실천할 수 있을까? 더 이상 성에 대한 무지가 미덕도 아니고, 성을 금기하는 것이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것도 아니다. 정신과 육체가 어떻게 균형을 이루어 갈 것인지는 매우 중요하다. 리비도는 예술의 근원이다. 우리는 자기 인식과 자기 배려를 통한 미학적 삶의 실현하기 위한 삶의 기획이 필요하다.

 

 

덧붙임 : 철학자 강신주는 김수영을 위하여에서 편집자를 저자와 함께 위치시켰다. 역자 역시 창작자다. 왜 이 책은 역자의 흔적과 에필로그를 찾을 수 없을까? 행간의 의미 하나하나까지 사려 깊게 고민했을 역자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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