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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전과 영원 - 푸코.라캉.르장드르
사사키 아타루 지음, 안천 옮김 / 자음과모음 / 2015년 11월
평점 :
읽고 쓰는 모든 행위에 대한 성찰
『야전과 영원』, 사사키 아타루 저, 안천 옮김, 2015. 11. 자음과모음.
‘집필하는 동안 직면하는 기댈 곳 없음(15쪽)’
안다면, 쓸 필요가 없다는 저자 사사키 아타루의 태도가 리뷰를 쓰게 한다. 아타루의 저작은 - 학문의 결과물이 아니라 그 자체 - 학문하는 과정 그 자체다. 읽는 행위는 저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과정일 텐데, 쓴다는 것은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내는 과정이다. “계획 없이 써나간 글”이기 때문에, 이 책의 쓰기 전 계획은 쓰는 과정에서 무너진다. 쓴다는 것은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저자에게 ‘타자’라고 간주되는 글들은 독자와 접속하며 영원한 생성의 과정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푸코, 라캉, 르장드르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사사키 아타르가 푸코, 라캉, 르장드르를 통하여 바라보는 인간의 삶’이다.
독자는 사사키 아타루가 수없이 많은 밤을 밝혔을 9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영원한 야전’에 참전한다. 사사키 아타루는 친절하다. 라캉, 르장드르, 푸코에게 적절한 지면을 안배 후, 각각의 철학자의 사상과 생애를 브리핑한다. 그리고 나서 세 사람이 만나는 지점을 상정한다. 하지만 푸코, 라캉, 르장드르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어도 충분하다는 역자의 말은 다소 무리가 있다. 라캉의 철학은 내게서 계속 미끄러졌고, 푸코를 읽는데도 수년이 걸렸다. 정신분석은 프로이드에 머물러 있다. 라캉으로 넘어가는 것은 항상 미끄러진다. 에메모호함, 라캉식 언어를 이해하는 일은 늘 좌절이다. 텍스트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어서, 독서모임과 세미나를 돌고 돌아서야 푸코 언저리를 서성일 수 있었다. 르장드르에 대한 지식은 아예 없다. 당연히 읽는 내내 곤혹스러웠다.
각각의 철학자 사이에, 철학자 자신의 생애에는 계보학적 단절이 존재한다. 푸코는 정신분석학을 비판하면서 라캉과 대립한다. 라캉학파를 이탈한 르강드르는 푸코와 라캉의 공명을 가능하게 한다. 라캉의 거울, 팔루스, 주이상스(대타자의 향락) 개념을 르장드르는 법·종교·제도의 물음을 받아 안는다. 르장드르는 라카의 개념을 계보학적 질문으로 재정립(20쪽)하면서 푸코와 공명한다. 그렇게 세 사람의 철학자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저자는 만년의 푸코가 걸었던 이로에서 도출한 결론이 라캉, 르장드르와 함께 공명(21)한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제1부 자크 라캉
거울 단계의 말을 모르는 어린 아이(인판스)는 자기 자신의 모습에 매료되면서 자신을 인지한다. 자기 모습에 상상적으로 동일화되면서, 최초의 자아가 형성된다. 자아는 이미지고, 전적으로 대상이다. 거울은 말과 이미지가 상호 침투하는 장치다. 겨울은 말과 이미지의 불균질적인 침투 상태로 구성된 장치이고, 이 장치는 말과 이미지 사이에 있는 그 무엇을 생산한다. 즉 표상을 생산한다. 주체라는 표상을, 자아라는 표상을, 타자라는 표상을 생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표상은 욕망을 표상하고, 광란한다(221). 이미지 주체는 말을 통해서 주체가 되고, 대문자 A 타자 역시 말하는 타자가 된다. 진리는 말씀의 형태도 존재한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라캉 개념은 원초적으로 알 수 없는 개념이다. 거울, 팔루스, 대타자의 향락은 늘 잉여성을 지닌다. 이미지이면서, 언어이다. 그 언어는 늘 미끄러진다. 개념은 이해를 위해 끝없이 자기증식을 한다. 라캉은 향락과 쾌락을 구분한다. 라캉의 관심은 금지되어온 향락에 있다. 향락은 근본적으로 법, 금지,윤리, 즉 계율에 관계된 것으로, 발화하는 자에게 금지되어 있다(143쪽). 하지만, 주체는 상상계에서도, 상징계에서도, 팔루스의 향락에서도 “본래”의 “나”를 찾아내지 못했다. “이것이 나다”라는 단언은 공허(231쪽)하다.
아타루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이 기독교를 극복하지 못한 것에서 답답함을 느낀다. 여성의 향락, 대타자의 향락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우리가 행한 바는 증상이외”라는 것 이외에는 없다. 신비주의와 정신분석학은 신체, 무의식, 언어화할 수 없는 것, 욕망의 법, 결여, 해석 등 많은 어휘를 공유한다(215쪽). “사회를 창출하고 다시 짜내는” 여성의 향락, 대타자의 향락이 아니라면, 정신분석학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본다.
제2부 피에르 르장드르
르장드르는 ‘슬픔의 매매 시장 또는 무엇이든 해주겠다고 답해주는 독트린’이라고 정신분석학을 비판한다. 정신분석은 프로이트와 라캉을 성스러운 이름으로 받들어, 새로운 봉건제의 주교관구((主敎管區)를 생산하는 데 딱 좋은 각종 제도의 캐리커처를 정촤기 위해서 이를 대중용 엠블럼으로 개발하는 작업으로 타락하고 말았다(265쪽). “앵무새처럼 반복할 줄 밖에 모르는” 정신분석학은 자기 자신에 대한 무이해를 심화시킬 뿐(266쪽)이라고 보았다.
정신분석학에 사회를 끌어들인 르장드르는 ‘사회적 거울’과 ‘엠블럼’개념을 제시한다. 상징이고, 텍스트이고, 이미지이기도 하고, 향락을 제공하기도 하는 거울은 각각의 엠블럼이다. 그것은 사회 안에서 이루어지고, 사회 그 자체이기도 하다. 엠블럼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기 이미지를 가능하게 한다. 사회인 거울은 개인을 넘어서서 정치적인 사랑을 가능하게 한다.
아버지는 신(神)이다. 말에 의해 아버지는 절대적이 된다. ‘절대적 아버지’의 첫걸음은 말(파롤)과 언어(랑가주)의 제도적 차원을 승인하는 것(326쪽)이고, 사회 담론을 형성하는 것이 바로 사회를 세우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보면,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친자관계에서 불확실한 상태에 놓여 있다. 아버지로부터 의심받는 아이인 동시에, 내 아이인지에 대한 의심을 갖은 아버지다. 남자가 이런 불확실성을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아폴론적 시선으로 문화를 구성했다는 『성의 페르소나』의 논리가 떠오른다. 법학자인 르장드르는 언어인 법은 신을 닮은 아버지이다.
제3부 푸코
‘권력’과 푸코는 하나의 쌍을 이룬다. 르장드르와 달리 푸코는 미시 권력을 분석한다. 배분의 기술로, 활동의 통제로, 감시의 시선으로 권력은 효율적으로 개인을 통제한다. 규율은 의례나 감시가 아니다. 모든 것을 규격화하고, 타자의 시선에 대상화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통제하게 한다. 이 통제의 과정에서 정신분석은 정상과 비정상의 분류 기준이 된다. 마을에 함께 살았던 정신이상자들을 구분하고 분류하는 ‘과학’의 역할에 정신분석학이 있다.
푸코의 후기 저작은 어떻게 주체의 자기 통치가 가능한지에 집중한다. 푸코는 비역사적인 것을 역사화한다. 각자의 삶을 어떻게 미학적으로 예술작품을 만들어나갈 것인지가 바로 자기 삶이 ‘통치성’이다. 『성의 역사』에서 성이 중요한 주제라면, 『주체의 해석학』은 주체와 주체의 행위 방식을 다룬다. 주체화는 나와 내가 맺는 방식이다. 주체화는 자기 인식 뿐 아니라, 자기배려의 실천으로 외연을 확장한다. 기독교(또는 금욕주의)가 자기를 버리고 신(또는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것이라면, 그리스에서는 자기 자신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복수 개념으로 우리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재료 삼아 실존의 미학을 실천하는 것이다.
아타루는 생존 미학이 저항과 사회 변혁을 도출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후기 푸코는 마르크스주의 비판, 정신분석학 비판에 이어 자기에의 배려와 생존의 미학조차 경멸해야 할 오류로 취급(735) 하게 된다. 이란 혁명 당시 푸코는 ‘존재 방식, 타인과의 관계, 사물·영혼·신과의 관계 등이 철저히 바뀌어야 하고, 자신들의 경험이 근원적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현실의 혁명은 없을 것(709쪽)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혁명의 찰나의 섬광은 사라지고, 사형 집행이 시작되면서, 시아파의 교의가 혁명적인 힘을 갖고 있다(709쪽)고 언급한 푸코는 맹비난을 받는다.
“오늘도 다른 날들과 똑같은 하루, 다른 날들과 완전히 똑같지 않은 하루(푸코)”
이 책의 매력은 멈출 수 없다는 것이다. 도전하고 싶고, 더 길게 보고 싶고, 처음으로 다시 되돌아가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거장의 철학을 위해 무수한 밤을 밝혔을 저자에 대해서 ‘감히’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었는지, 나름의 해석을 덧붙이기 위해서 여러 날을 보내고도 아직도 부족하다는 생각뿐이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 밖이 따로 없다. 아마도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영원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야말로 지식의 숲(909쪽)이다.
책을 덮을 때쯤 되면, 우리가 읽은 것이 아타루의 철학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라캉, 르장드르, 푸코의 이명과 공명을 아우르며, 아타루 자신의 관심 영역으로 무한 확대해 나간다. 그런 의미에서 이 철학은 영원할 수밖에 없다. 서평에 이 방대한 분량의 책을 요약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한동안 책을 구입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간을 읽다보면 새로운 것은 없고, 그 책이 그 책인 느낌인지라, 사서 꽂아두고 다시 살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신간은 쏟아지는데, 서재에 두고 싶은 책은 적어졌다. 이 책은 꼼꼼히, 촘촘히 읽고 나서도, 혼란이 여전한 책이다. 당연히 여러 번, 촘촘히 읽어야 한다. 이 전쟁이 영원한 까닭이다. 철학 공부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을 끌어내고 싶은 독자라면, 이 책과 고군분투하시길.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