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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Ida (이다)(지역코드1)(한글무자막)(DVD)
Music Box Films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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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기억과의 조우 <이다>(Ida>, 2013) & <그을린 사랑>(Incendies, 2010)

 

이미 죽어버린 은유지만, 인생은 여행길이다. 어떤 사태에 직면하게 될지는 예측불허, 그래서 삶은 의미를 갖는다. 봄과 눈의 결합이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듯, 평범한 일상과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불운을 가져오는) 진실과의 조우는 이전과 이후의 삶을 분절하는 명확한 기준점이 된다. 로드무비는 공간 이동의 과정에서 시간을 회귀한다. 사람과 사태에 직면하여 자신의 내면을 깊게 들여다보는 여정의 틀을 무한 변주한다. 이번에 소개할 두 편의 영화는 현재를 위태롭게 지탱하고 있는 잃어버린 과거에 관한 이야기다.

 

<이다>(Ida, 2013) 감독 : 파벨 포리코브스키 주연 : 아가타 트르제부초우스카(안나), 아가타 쿠레샤(완다 루즈), 조안나 쿠릭

 

<이다>1960년대 폴란드를 배경으로 한다. 가톨릭 수녀원에서 자란 고아 소녀 안나는 정식 수녀로서 인정받는 서원식을 위하여 이전까지 알지 못했던 유일한 혈육인 이모 완다를 만나게 되면서 자신의 근원을 알게 된다. 본명은 이다 레벤슈타인, 부모는 2차 세계대전에서 살해당한 유태인. 탈속과 세속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두 사람의 삶은 극과 극의 대척점에 위치한다. 고아로 자란 이다는 대부분의 시간을 신과 함께하며 금욕적으로 살아왔다. 격리된 채 잘 짜인 공간에서 생활한 이다와 달리, ‘피의 완다라고 불렸던 이모는 공산정권이었던 폴란드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사형으로 내몰았던 검사 출신으로 굴곡 많은 삶을 살았다. 과거를 잊기 위해 퇴폐적으로 살아가는 이모 완다에게 불현 듯 나타난 이다는 과거를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하는 동기가 된다. 이다 역시 완다가 묻는 결정적인 질문으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위태로운 상태에 놓이게 된 두 사람은 상반되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은 축에 위치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러닝타임 82, 단순한 서사 구조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감당해야 하는 감정은 만만치가 않다. 관객은 신기한 콤비가 된 두 사람이 이다의 부모가 묻힌 곳을 찾아가는 여정을 함께한다. 부모의 시신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처음으로 수녀원을 벗어나 폴란드 구석구석을 여행하는 이다는 자신이 수녀원에서 쌓아올려 왔던 존재와 세계에 대하여 의문을 갖는다. 이다는 혼란 속에서 그동안 구축해 왔던 세계를 무너뜨린다. 이모를 만나고 온 후, 이다는 수녀원 식사 중에 갑자기 웃음을 터트린다. 수녀원의 경계를 넘는 순간 그녀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폴란드 현대사를 통하여 우리가 만나는 것은 이다와 완다의 실존이다.

 

사랑을 나눈 침대에서 섹소폰을 부는 남자와 이다가 나눈 대화는 이다 자문자답이기도 하다. 함께 바다를 보고,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낳고앞으로 이어지게 될 예측 가능한 삶의 끝에서 이다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리고 나선?”

 

<이다>를 한편의 시로 만든 것은 흑백 영화 특유의 절제미와 최소한의 대사에 있다. 감독은 (우리가 익숙한 1.86 : 1 비율 대신 1.37:1의 화면 비율을 고수하는) 작은 화면 비율과 흑백 톤의 영상에 절제된 인물들의 행동과 표정을 담는다. 카메라는 인물을 화면 정면에 담지 않고, 클로즈업조차 차창과 같은 여과 장치를 투과하여 간접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관객의 몰입을 방해한다. 앵글 중심에서 비켜 있는 인물은 여백의 미를 살리는 효과를 충분히 발휘한다. 인물이 스크린의 측면에 놓이거나 걸쳐 있을 경우, 영상은 인물의 드러나지 않는 내면과 위태로워 보이는 상태를 표현하는데 적합하다. 완다의 상실감이 극에 달했을 때, 카메라는 턱선 위쪽만 담아낸다. 롱테이크와 고정된 카메라는 고요함과 공허함을 표현한다. 이와 같은 낯선 연출은 관객과 화면 사이에 거리를 만들어 관객의 몰입을 방해한다. 엔딩 씬의 유일한 핸드 헬드 촬영은 이다의 확고함을 표현하는데 최선의 선택이다. 그녀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앵글에 위태롭게 갇혀 있던 이다가 세상 밖으로 튕겨져 나온 느낌이 배가된다. <이다>는 영상으로 캐릭터를 완성해 가면서, 어떻게 내면을 시각화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영화다.

 

감독 파벨 파블리코브스키는 십 때 이후 영국에서 성장하며 영국 영화를 만들어왔다. 대표작인 <사랑이 찾아온 여름>에서도 국적이 드러나지 않지만, 오랫동안 고국에서 폴란드에서 영화를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 기획의 성과가 영화 <이다>이다. 영화 속에서 이다와 완다는 극명하게 엇갈리는 경험과 성격을 드러내지만, 실제 배우로서의 커리어 역시 극명하게 엇갈린다. 이다를 연기한 아가타 트르체부코브스카는 우연히 캐스팅 된 대학생이다. 반면 완다 역의 아가카 쿨레샤는 20년 경력의 폰란드를 대표하는 여배우다. 세상을 경험하지 못한 이다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는 완다 역으로 더없이 적절했다.

 

<그을린 사랑>(Incendies, 2010) 감독 :드니 빌뇌브 주연 : 루브나 아자발(나왈 마르완)

 

<그을린 사랑>은 필연적으로 비극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전쟁 이야기다. “세상을 등질 수 있게 시신을 엎어 놓아 달라는 말을 남기고, 한 여인이 죽었다. 비밀스런 여인 나왈 마르완(루브나 아자발)의 평탄치 않았을 삶을 짐작케 하는 유언이다. 영화의 열쇠는 이 세상과 영원히 작별하고 싶은 그녀의 서사다. 나왈의 상사이자 공증인인 르벨은 쌍둥이 자녀 잔느(멜리사 드소르모-풀랭)와 시몽(막심 고데트)에게 유언장을 공개한다.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 존재조차 몰랐던 형제를 찾으라는 어머니 나왈의 유언에 잔느와 시몽은 당황한다. “침묵이 깨지고 약속이 지켜질 때 무덤에 비석을 세워다오.”라는 말속에서 남매가 만나야 할 가족사가 만만치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래된 여권과 흑백 사진 한 장을 단서로 - 캐나다에서 거주하던 - 남매는 중동 출신 어머니의 흔적을 따라 낯선 지형을 통과하는 긴 여행에서 어머니의 진실과 직면한다.

 

이 영화는 분노, 진실, 사랑에 관한 영화다. 잔인한 운명은 매순간 강한 두려움과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분노 혹은 침묵 이면의 어두운 진실과 상처를 깊게 응시하게 한다. 수학공식처럼 난해하여 해답을 구할 수 없는 이 여정을 지탱하는 사람은 공증인 르벨이다. 그는 죽은 나왈을 대신하여 남매가 여행길에 올라야 하는 당위를 부여한다. 전혀 몰랐던 어머니의 과거는 마주할수록 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지게 한다. 르벨은 잔느와 시몽이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과거로의 회귀를 포기하지 않도록 격려한다. “공증인의 임무 중 하나는 고인의 유지와 그들의 성스러운 비밀을 돌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증인은 마치 스틱스 강을 건너는 배의 사공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르벨은 죽은 나왈과 살아있는 남매를 연결하는 고리다.

 

퀘벡에서 명성을 쌓아올린 캐나다 출신 드니 빌뇌브 감독은 칸 영화제에서 단편 <Next Floor>와 장편 <폴리테크닉>으로 주목 받았다. <폴리테크닉>은 평화롭기만 한 몬트리올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폴리테크닉 학살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198912월 몬트리올의 에콜 폴리테크닉 공대에서 마크 르팽이라는 기계공학도가 여대생만을 대상으로 무차별 총격전을 벌였고, 결국 14명의 소녀가 목숨을 잃었다. 드니 빌뇌브는 아이러니한 흑백의 아름다운 화면을 통해 이 사건을 돌아봤고, 캐나다의 권위 있는 영화상 지니 어워드에서 최우수영화상을 비롯해 9개 부문의 상을 받았다. <폴리테크닉>에서 살인자로 분한 배우 맥심 고데트는 <그을린 사랑>에서 쌍둥이 중 시몽으로 출연했다. 그에 이어 1년 만에 메가폰을 잡은 <그을린 사랑>은 베니스, 토론토 등 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수상하였고, 2010년 부산영화제 화제작이기도 했다. 중동 내전으로 고통 받는 한 여인의 역사를 지극히 영화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주제를 깊이 있게 담아냈다.

 

영화의 원제는 Incendies, 불어로 화재, 큰불, 넓게 퍼진 붉은 광채, 공란, 전란의 뜻을 담고 있다. 전쟁의 참상에 현미경을 들이대어 밀도 있게 보여주지만, 통곡에 젖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그을린 사랑이라고 옮긴 우리식의 표현 또한 적절하다. 영화에 등장하는 지명은 지구상에 실재하지 않는다. 감독은 구체적인 지명이나 나라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가상의 지명을 사용했다. 전쟁의 잔인함을 이야기하지만,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고 비난하지 않는다. 필연적으로 비극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전쟁 자체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강한 설득력을 유지한다. 이는 캐나다와 중동의 지역 색을 강조하지 않는 감독의 의도에서도 알 수 있다. 캐나다의 회색빛 겨울과 뜨거운 중동의 갈색 풍경을 매우 중립적인 채도로 설정하였다. 카메라 프레임의 여백은 대사보다는 공간과 인물의 감정이 흘러가는 분위기가 훨씬 더 격렬함을 사유하도록 한다. 폭력은 한결같이 고요한방식으로 이루어지며 보편성을 획득한다.

 

두 편의 영화 모두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다. 모르는 기억과 만난다는 면에서 닮아 있다. 사건의 비밀을 찾아가는 미스터리 형식에서 동일하다. 세상 어디에서나 존재할 수 있는 전쟁을 다루고 있다는 면에서도 비슷하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불운한 과거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다>는 폴란드에서 흔하게 불리는 이름인 이다와 완다를 사용한다. <그을린 사랑>은 세상에 없는 지명을 사용하여 특정 지역에 고정하지 않고 사태의 보편성을 획득한다. 두 편의 영화 모두 우리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반면 <그을린 사랑>이 플래시백을 주로 사용하여 과거를 끌어온다면, <이다>는 플래시백 없이도 과거와 현재를 접합한다. 플래시백으로 과거를 표현하는 직접적인 연출은 없지만 끝없이 과거와 현재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간결하고 시적인 <이다>와 달리 <그을린 사랑>은 무겁고 독하다. 이미 봄은 왔으나, 꽃샘추위도 다녀가고, 한번쯤 더 늦은 봄눈이 다녀갈지도 모른다. 평범해 보이는 일상 사이사이 어떤 독한 사건이 일어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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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나무 아래
아이미 지음, 이원주 옮김 / 포레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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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이 엠 러브>(I Am Love, 2009) 감독 : 루카 구아다니노, 주연 : 틸타 스윈튼

<산사나무 아래>(Hawthorne Tree Forever, 2010) 감독: 장이모우(張藝謀)

 

 

“나는 사랑이다, 나는 오로지 사랑으로 존재한다.”

- 순수한 사랑<산사나무 아래> VS 욕망하는 사랑 <아이 엠 러브>

 

햇빛이 창호지를 투과해 방안 깊숙이 들어오는 가을 오후, 빛을 따라 먼지가 춤을 추는 시간은 익숙한 사물이 다른 기호로 말을 건다. 손때 묻은 가구와 책장의 책들은 마치 벽에 걸린 정물화처럼 차원이 달라진다. 그때 느껴지는 시적(詩的) 슬픔, 그와 유사한 느낌을 담아낸 영화들이 있다. 영화는 사랑을 무한 변주하며 단조로운 일상을 낯선 에너지로 가득 채운다.

 

영원한 노스텔지어, 순수의 사랑 <산사나무 아래>

 

<산사나무 아래>는 항일전쟁에서 학살당한 선열의 붉은 피 때문에 흰꽃이 붉게 핀다는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장이모우 감독은 혁명정신을 촉구하는 문화혁명 당시를 배경으로 거대담론에 묻혀 있는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섬세하게 복원했다. 시대의 아픔을 상징하는 산사나무를 매개로 한 순수한 사랑은 한편의 동화와 같다. 다정하고 친절한 이 영화는 관객의 마음에 애잔함을 꽃피운다. 혁명의 의지가 붉은 꽃 전설의 기원이라면, 남녀의 지고지순한 사랑은 다시 인간 본연의 심성으로 돌아가서 흰꽃을 피운다. 사회적 제약 안에서 이별을 알고 가는 사랑은 헌신적일 수밖에 없다. 장이모우는 문화혁명을 밑그림으로 사용하면서도 정치적 논쟁을 비켜감으로써 온전히 사랑, 그 자체에 집중한다. 문화대혁명, 계급, 농촌, 빈부 갈등이 배경이지만, 영화는 느린 속도로 조용히 제 길만을 향하여 간다.

 

실화에 토대를 둔 <산사나무 아래>는 실제 인물인 여주인공 징치우가 썼던 회고록에서 이야기를 가져왔다. 장치우의 친구 아미(艾米)의 원작소설을 영상화한 작품이다. 문화대혁명 기, 교재편찬을 위해 항일 운동의 역사를 간직한 시골 마을로 내려간 징치우는 그곳에서 지질탐사대원 라오산을 만난다. 라오산은 당 간부의 아들이지만, 징치우는 사상이 더 무장되어야 할 학생 신분으로 자신의 당성(黨性)을 보여주어야 할 과업을 안고 살아간다. 징치우의 집은 아버지가 정치적인 이유로 투옥되고, 가세가 몰락한 상황이다. 하지만 무조건적이고 헌신적인 라오산의 사랑은 책임감으로 괴로워하는 징치우의 마음을 천천히 열어간다. 그들의 사랑은 세월의 무게나 변화된 환경 속에서도 굳건하게 본연의 모습을 지켜나간다. 그 '순수함'은 남성 감독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섬세하고 정감 어린 연출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이야기는 만남, 사랑 그리고 이별로 이어지는 단순한 플롯이다. 이 단조로운 이야기를 안받침하고 있는 토대는 ‘진정성’이다. 주동우(징치우 역), 두효(라오산 역) 두 신인 배우가 엮어내는 담백하고 자연스런 연기를 통해서 진정성을 형상화한다. 그간 장이모우 감독의 영화가 주윤발, 유덕화, 장쯔이, 공리 등 이름난 스타들과 함께 빛이 났다면, 이 영화는 신예를 기용하여 순수함을 부각시킨다. 장이모우 감독은 초기에 <산사나무 아래>와 같이 역사 주변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드라마를 많이 다루기도 했다. 다시 보통 사람의 일상에 현미경을 들이댔다는 점에서 장이모우 감독에게 이 영화는 십년만의 귀향과도 같다. 헌신적이고 순수한 사랑 이야기는 <책상서랍 속의 동화>, <집으로 가는 길> 등과 같은 초기작을 돌아보게 한다. 대작에서 소박한 사랑 이야기로 돌아온 장이모우 감독의 행보는, 감독으로서의 자기 자신 역시 초창기의 순수한 작가정신을 잃지 않았음을 항변하는 듯하다.

 

온전히 순수한 사랑에 집중한다는 점은 이 영화의 치명적인 단점이기도 하다. 지나치게 단조로운 스토리는 제작 당시부터 감독의 염려를 낳았던 부분이기도 하다. 때문에 진부한 사랑 이야기로 읽혀질 수도 있고, 지나치게 상투적인 표현이 거슬리기도 한다. 그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배경의 아픔이 더해진 순수한 남녀의 사랑은 과장 없는 연출로 빛이 난다. 자칫 진부할 수 있는 이야기는 연출뿐 아니라 제작을 맡은 장이모우 감독의 자신감으로 재탄생했다. 장이모우는 <영웅>, <연인> 등 스케일이 큰 영화로 거장의 반열에 올랐고, 정형화된 리얼리즘에 충실했던 중국 5세대 감독이기도 하다. 블록버스터에서 베이징 올림픽 공연까지 스펙터클한 연출로 정평이 나 있는 장이모우 감독은 제15회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된 이 작품으로 다시 한번 잔잔하면서도 소박한 연출력을 보여주었다.

 

존재를 뒤흔드는 욕망하는 사랑, <아이 엠 러브>

 

밀라노를 배경으로 한 <아이 엠 러브>는 이탈리아의 명문 레키가(家)의 일원인 엠마가 가식의 굴레를 벗어나서, 자신의 욕망과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일상에 균열을 일으키는 두 가지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엠마는 외적으로 재력가 시부모, 명망 있는 남편, 잘 성장해준 자녀를 둔 성공적인 삶을 살아간다. 이 평온한 일상의 파국은 아들의 친구, 안토니오와의 급격한 사랑과 딸의 레즈비언 선언으로 시작한다. 엠마는 안토니오가 요리한 음식을 먹고 그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기고, 딸의 레즈비언이라는 고백을 통해서 자신의 욕망과 사랑을 성찰한다.

 

<아이 엠 러브>는 한 여성의 선택을 통해서 여성의 자유와 상류층의 몰락을 한꺼번에 폭로한다. 남편과 안토니오 모두 그녀에게 문제적 상황에 직면하게 만든다는 측면에서 완벽한 타자이다. 남편은 떠나는 엠마에게 “넌 존재하지도 않았어.”라고 말한다. 그 말은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남편과 엠마 사이에는 ‘사랑'이 부재하였고, 엠마는 오직 사랑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외적 스토리 내부에서 자본주의 상류층의 붕괴를 포착한다. 외적 삶과 내부 갈등을 중첩함으로써, 두 공간이 비틀려 균열하는 과정을 탁월하게 영상화한다. 가면을 쓴 얼굴로 피상적인 관계를 이어가는 재벌들의 파티에서 엠마는 - 같은 공간에 있어도 - 항상 고립되어 있다.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하고 있지만, 귀족의 몸에 밴 습성은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고 있어서 늘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식사 시간조차 팽팽한 긴장이 이어져 누구도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지 못한다.

 

감각적이고 퇴폐적인 이야기는 감독의 연출력과 배우의 연기를 통해서 고전적이고 우아한 예술로 창조되었다. 진부하고 도식적인 서사를 끌어안고 가면서도, 다양한 영화적 방식을 동원하여 강렬하고 뜨거운 에너지를 생산한다. 영화가 제 7의 종합영화임을 확인시켜주는 <아이 엠 러브>는 관객이 오감을 느낄 수 있도록 모든 영화 장치를 활용한다. 엠마의 일상에 균열이 생기면서 극단으로 치솟을 때, 음악과 미장센이 전환을 일으키며 드라마틱한 반전을 이룬다. 또한 시청각을 공감각적으로 교차 편집하여 자연스럽게 감각의 전이가 일어난다. 안토니오니가 만들었던 요리는 시각에서 출발하여 미각을 자극하고, 미각은 다시 청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공간을 활용한 감정의 영상화 또한 탁월하다. 엠마와 남편의 정사는 어둠 속에서 이루어진다면, 내연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안토니오와의 정사는 창문이 활짝 열려 빛이 들어오는 공간에서 시작되어, 외부 공간인 숲에서 절정을 이룬다. 아직 잔설이 쌓인 밀라노의 거리에서 시작하는 영화는 닫힌 창문을 비춤으로써, 엠마의 내면 상태를 포착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엠마가 사랑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문들은 서서히 열리기 시작하다가 결국 활짝 열리는 현관으로 빛이 쏟아진다. 또한 남편과 함께 살아가는 레키가(家)의 닫힌 문과 안토니오의 오두막집의 열린 문들은 엠마의 심적 상태를 그대로 반영한다. 두 공간의 대비는 물리적으로만 존재할 뿐 철저한 부재인 엠마의 상태를 잘 보여준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녀는 평탄한 저지대의 대저택에 살고 있고, 안토니오는 좁고 굽은 길을 한참 올라가야 하는 고지대에 살고 있다. 엠마의 감정은 그대로 공간적 높낮이로 드러난다. 인물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대신 활용한 부감 샷은 더 많은 감정을 이끌어내는데 성공적이다.

 

진부한 캐릭터일 수 있는 엠마에게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배우 틸타 스윈튼이다. <아이 앰 러브>는 틸다 스윈튼의 영화라고 해도 무방하다. 감정을 그대로 실어 나르는 드라마틱한 얼굴의 표상을 완벽하게 완성한다. 그녀는 이지적인 상류여성의 모습과 사랑으로 불타는 관능미까지 상반된 모습을 동시에 소화했다.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러시아인으로 이태리어를 써야하는 엠마 역이 영국 출신 틸타 스윈튼에게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더불어 존 아담스가 담당한 음악 또한 놓치면 안된다. 엠마가 처음 안토니오가 요리한 음식을 먹는 장면, 엠마가 집을 뛰쳐나가는 장면에서 음악은 그 자체로 엠마와 동일시된다. <아이 엠 러브>는 음악이고, 공간이며, 사랑이다.

 

순수와 욕망의 대척점에 있는 이 두 편의 영화는 사랑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껴안는다. 도처에 널려 있으나, 쉽게 발견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하여 성찰하게 한다. 안개 속을 유영하는 듯한 낮은 톤의 색감과 음악으로 가득한 <산사나무 아래>는 희미한 첫사랑의 기억과 접속하게 한다. 과거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미덕인 그리움과 만날 수 있는 한편의 서정시와 같은 영화다. 반면 아들의 친구와 사랑에 빠진 엠마의 극단적인 사랑은 관계에 균열을 일으키고 씻을 수 없는 상처로 일상의 평화를 파괴한다. 상류사회 일원으로 소비되는 사물에서 주체적 결단을 내리는 엠마는 불안하게 흔들리지만 넘실대는 생(生)의 의지로 불탄다. 색깔 다른 두 편의 영화는 우리 내면의 채워진 잠금 쇠를 열고, 순수와 욕망의 사랑을 들여다보게 하는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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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 향기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 호마윤 에르사디 외 출연 / 스타맥스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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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라는 이름의 한 남자가 있다. 생애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 군대였다는 이 남자의 시선은 황량한 거리에서 누군가를 찾는다. 그는 자신의 사후(死後)를 마무리해줄 ‘인간적인 만남’을 위해서 길을 나섰다. 부탁을 들어줄 법도 한 앳된 얼굴의 군인,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을 것 같은 젊은 신학도는 죽음의 언급을 단호하게 외면한다. 그는 일몰까지 자신을 도와 줄 적임자를 물색하며 흙, 돌, 먼지로 뒤덮인 사막 이곳저곳을 누비며 돌아다닌다.

 

다행히 마지막에 만난 단 한사람, 자연사 박물관의 박제사로 일하는 노인만이 그의 제안을 수락한다. 때를 맞추어 당도한 신(神)의 메신저와 같은 노인은 한때 자살의 문턱을 넘을 뻔 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노인은 에돌아가는 길을 선택하여 바디와 긴 이야기를 나눈다. 신(神)과의 대화는 영성을 넘어 인간을 통하여 드러난다. 노인의 이야기는 세상을 주관하는 절대자가 삶에 지친 인간에게 건내는 나지막한 말씀처럼 공명한다. 그의 이야기 속에 펼쳐지는 삶의 작은 기쁨들은 사소하지만 포기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밤이 오자 바디는 수면제를 먹고 자신이 파놓은 구덩이 안에 눕는다. 조금은 긴장된 그의 얼굴 위로 푸른 달빛이 비추더니, 어느새 폭우가 쏟아진다. 어둠 사이 번갯불이 바디의 얼굴을 드러낸다.

 

페르시아 문화의 소산인 <체리향기>는 유럽 작가주의 영화와 마찬가지로 플롯을 파괴한다. 짜여진 플롯에 따르다 보면 현실세계나 인간 내면을 표현하는데 제약을 받기 때문에, 문제의 발생에서 해결로 이어지는 네러티브를 단호히 거부한다. 감독은 막대한 자본을 투입한 화려한 세트, 각종 특수 효과, 컴퓨터 그래픽 사용을 일체 배제하고, 삶에 내재한 본질을 능숙하게 꺼내 놓는다. 카메라는 시종일관 철저하게 관객의 눈높이에 맞추어져 있다. 자동차에 고정된 두 대의 카메라로 사물과 풍경을 응시하는 이 영화의 프레임 구성은 대부분 클로즈업된 바디의 얼굴과 주변에 퍼지는 먼지가 다일뿐이다.

 

영화 종반부에서는 암전을 이용하여 프레임의 서사를 모두 허구로 만들어버린다. 사실과 허구의 경계선에서 영화 작업을 하고 있는 감독의 메타적 접근이다. 또한 카메라가 고정된 롱 테이크 촬영은 지루한 현실을 고스란히 영상에 담아 놓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키아로스타미는 촬영 내내 랜드로버의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영화가 무엇보다도 현실적이기를 바랬고, 바디가 보는 그대로를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바디의 자살하려는 의도를 끝까지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관객은 바디가 되어 스스로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할 기회를 제공받는다. 그런 면에서 <체리향기>는 관객이 채워야 할 여백이 많은 영화다. 이것이 키아로스타미식 영화적 화법의 특징으로 해답과 결론을 드러내는 것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감독이 해야 할 일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일 뿐”이라고 언급하였듯이 관객이 각자의 답을 찾아서 헤매기를 원한다. 그는 프랑스와 트뤼포의 말을 인용해 “관객에게 메시지를 주고 싶으면 차라리 우체국에 가서 전보를 쳐라”고 주장하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상상을 북돋워주는 것으로 만족하다고 역설한다.

 

<체리향기>는 1994년 <올리브 나무 사이로> 이후 3년여의 공백기 만에 발표한 작품이며, 키아로스타미가 직접 제작까지 맡은 첫 영화이다. 이 영화는 이란 정부의 출국금지 조치 상태였다가 97년 깐느 영화제 폐막 삼일 전에야 출품되어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무엇을 만들어낸다.”는 서구 평론가들의 말처럼, 서정이 불가능할 것 같은 지역에서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시네마 베리떼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는 여전히 새로운 경지에서 ‘마음의 영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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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장미
켄 로치 감독, 엘피디아 카릴로 외 출연 / 엔터원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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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장미>(Bread And Roses, 2000) 감독 : 켄 로치, 출연 : 필라 파딜라, 애드리언 브로디

 

멕시코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밀입국하는 여자들 중에 마야가 있다. 마야는 성폭력의 희생자가 될 수도 있었던 우여곡절을 겪고, LA에 살고 있는 언니 로사를 만난다. 몇 년 만에 만난 로사는 동생 마야을 위해 술집에 일자리를 마련해두었다고 한다. 언니가 마련한 자리를 거부한 마야는 청소용역업체 엔젤의 직원이 된다. 빌딩의 감독관 페레즈는 불법이민자에게 비정규직이라는 약점을 이용해서 첫 월급을 몽땅 바칠 것을 요구한다.

 

‘유니폼은 우리를 보이지 않게 만든다.’

 

마야는 빌딩 경비원에게 쫓기는 샘과 인연을 맺게 되고, 샘은 청소부들에게 노조 가입을 권한다. 노조가입은 임금인상, 의료보험의 보장을 담보하지만, 온 가족의 생존을 책임지고 있는 청소 노동자에게 해고와 블랙리스트 명단에 이름이 오르는 것은 상상초월의 고통이 될 수도 있는 선택이다. “어머니와 같았던” 테레사와 감독관의 회유정책에 넘어가지 않는 베르타가 해고되자, 청소노동자들은 점점 동요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서 연예인 변호사의 사무실 파티에 참석해 청소퍼포먼스를 벌인다.

 

‘생존과 행복 추구’

 

<빵과 장미>는 LA 빌딩 청소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 현실을 직시하고 생존과 권익을 얻기 위해 투쟁하는 이야기를 중심축으로 한다. 일자리를 찾아 불법체류자가 된 청소노동자들의 삶의 애환과 노동현장에 관한 보고서이다. 그들은 ‘빵’과 함께 ‘장미’를 원한다. 빵이 생존권이라면, 장미는 인간으로서 존엄을 누릴 권리를 의미한다. 인간은 단순한 생존을 위한 빵만이 아니라, 인간다운 존엄을 필요로 한다.

 

여기에서 장미는 특별한 메시지를 함의한다. 노동절의 기원이 된 헤이마켓 사건(Haymarket Affair) 당시, 노동자들은 사형당한 동지들에 대한 연대의 표시로 가슴에 장미꽃을 달았다. 이때부터 장미는 노동자들에게 진보와 변혁의 상징이 되었다. 유럽 사회주의 정당들이 당의 표상으로 장미를 선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감독 켄 로치는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지금 현재의 상황을 되돌아보게 하고, 자유를 얻기 위해 투쟁하는 개개인의 이야기를 영상에 담는다. 그는 역사라는 거대한 담론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과 조건을 탐색하여 작품으로 만든다. 그는 영화를 통해서 사람들이 부당한 현실에 눈뜰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의 생애는 세계시민주의자로서의 양심과 양식으로 영화를 만들어온 여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실화를 바탕으로 사회복지정책이 자본주의의 유토피아적 환상임을 비판하는 <레이디 버드, 레이디 버드>(1994), 스폐인 내전의 이면을 다룬 <랜드 앤 프리덤>(1996), 아일랜드가 영국에 대항해 투쟁하는 IRA(아일랜드공화국군, Irish Republican Army)를 다룬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1936년 출생한 켄 로치는 노동자 계급 출신으로, 옥스퍼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평생 노동자를 위한 길을 걷겠다고 결심한 그는 TV방송국에서 드라마 제작으로 잔뼈가 굵었다. 그가 1996 제작한 <캐시 집에 돌아오다>는 현실의 삶을 가장 효과적으로 그린 드라마로 평가받는다. 주로 비전문 배우가 출연하였기 때문에 즉흥연기에 의존했고, 극적 요소를 철저히 배제하였다. 이 영화에서도 유일하게 눈에 띄는 배우가 있다면 영화 <피아니스트>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에이드리언 브로디 정도다. 그는 노조의 리더지만, 무겁지 않은 캐릭터로 극의 무게를 덜어내는 역할을 한다.

 

켄 로치의 영화는 많은 탄압에 시달려야 했지만, 오히려 검열과 타협 속에서 싸우는 것이 그의 목표처럼 보이기도 한다. 검열에 대한 찬반 논쟁을 사회 쟁점으로 만들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들이고, 실제 현실에 힘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리허설을 최소화하고, 스토리보드를 만들지 않은 채 시퀀스대로 촬영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다소 암전으로 화면을 전환하고, 뉴스처럼 거친 화면으로 관객이 영화와 거리를 두도록 만들었다. 소격 효과는 실제 상황의 박진감과 감동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적극 활용되었다. 다큐멘터리 영화는 “가장 빠른 기간에 만들 수 있는 팜플렛이고, 아주 직접적으로 사회 문제를 다루는 길이기 때문에 최고를 가치를 지닌다.”

 

켄 로치는 자본주의 방식에서 출발한 예술인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비타협적인 방식으로 작업을 한다. 영화는 발언을 위한 수단이고, 현실과 싸우기 위한 무기다. 그의 카메라는 우리 시대의 첨예한 삶의 현장에서 비켜선 적이 없다.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소외된 사람들의 연대를 옹호하는 영화를 지속적으로 만들고 있다. 그가 “블루칼라(노동자)의 시인”, “좌파 로멘티스트”라고 불리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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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성 노동자가 더욱 고단한 이유... 『노동의 배신』
    from 도서출판 부키 2012-06-10 14:49 
    1908년 전 3월 8일, 미국 여성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과 노동조합 결성권, 투표권을 요구하며 시위와 파업을 벌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3월 8일은 여성의 날, 투쟁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날이 되었지요. 그로부터 1백여 년이나 지났건만 대한민국에는 ‘빵과 장미’가 필요한여성들이 많습니다. 2007년 ‘이랜드 사태’는 비단 비정규직 문제만이 아니라 비정규
 
 
맥거핀 2012-05-24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글 잘 읽고 갑니다. 장미가 그런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군요. 장미에 그런 역사적인 기원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시간의 춤
송일곤 감독, 디모테오 김 로드리게즈 외 출연 / 플래니스 엔터테인먼트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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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노래처럼, 혁명은 춤처럼

<시간의 춤>(2009) 감독 : 송일곤 내레이터 : 이하나, 장현성

 

지구 반대편 체계바라와 혁명의 나라, 쿠바에 뿌리를 묻고 살아가는 조선인의 후예들이 있다. 100여 년이 흐른 지금, 조선을 떠났던 그들의 후예들에게 한국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일제 강점기 천 여 명의 한인은 “4년 동안 일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멕시코 행 일포드 호에 올랐다. 이들 중 삼백 여 명이 노예의 삶을 견디지 못하고 쿠바로 가서 에네켄 농장의 일군이 되었고, 몇 년 동안 억세게 일해서 고국 땅을 밟을 것을 기약했던 이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꼬레아노(한인)들은 여전히 대를 이어가며 쿠바에 살고 있지만, 험난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조국을 잊지 않았다. 학교를 세워서 한글을 가르쳤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비밀 자금을 보냈다. 쿠바 혁명기에는 체계바라의 투쟁에 동참하기도 했다.

 

<시간의 춤>은 송일곤 감독의 다섯 번째 장편이자 첫 다큐멘터리 영화다. 이하나의 내레이션으로 이어지는 1부와, 영화배우 내레이션으로 이어지는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가 춤과 음악으로 이어지는 달콤한 낭만이라면, 2부는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지독한 사랑의 그리움을 담고 있다. 쿠바에 살고 있는 꼬레아노의 현재가 송일곤 감독의 렌즈를 통해서 노래와 춤으로 살아났다. 이 영화는 단지 고통으로 얼룩진 이민의 역사만을 기록하고 있지 않다. 한계 상황 속에서도 현실을 직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춤과 음악으로 승화시킨다.

 

현재는 과거를 투영하며 빛을 발한다. 뜨거운 쿠바의 태양처럼 정열 가득한 라틴 음악에 맞춰 춤추는 그들의 검은 눈동자는 4대에 걸친 기나긴 세월을 담고 있다. 사연 많은 삶의 자취가 검푸른 파도 속에서 반짝거린다. 에네켄 농장에서 기타를 치는 일흔 넘은 세실리오, 평생 그림의 주제를 어머니에게 찾았다는 페미니스트 화가 알리시아, 작은 키 때문에 국립발레단의 정식 단원이 되지 못했지만 춤을 너무 사랑하는 디아날리스, 토속 종교의 사제가 된 디모테오 등 꼬레아노의 삶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일생을 통한 기나긴 여정이다. 1세대, 2세대가 사라진 자리에서 그들은 자신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성찰을 통하여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천명의 사람들, 천개의 사랑, 천개의 불안, 단 하나의 희망’

 

 

폴란드에서 영화를 전공한 송일곤 감독은 <시간의 춤>에 이어 <시간의 숲> 개봉을 앞두고 있다. 그는 <꽃섬> <마법사들> <오직 그대만>과 같은 극영화로 알려졌으나, 다큐멘터리 제작에도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다큐멘터리는 극영화가 줄 수 없는 커다란 ‘울림’을 준다. “실제 하는 대상, 인물, 상황을 가지고 만드는 다큐멘터리는 자연스럽다.”는 그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다큐 작업을 하고 싶다고 한다. 촬영보다도 편집에서 오랜 작업 시간을 필요로 하는데 다큐멘터리에서도 송일곤 감독의 감성적인 연출은 여전하다. 그는 충분히 의미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시간의 춤> DVD를 가방에 싸가지고 다니면서라도 보여주고 싶다.”고 말한다. 개봉을 앞두고 있는 송일곤 감독의 두 번째 다큐 <시간의 숲>은 <시간의 춤>과 연장선상에 있다. 두 편 모두 여행을 통해서 시간과 기억을 되살린다.

 

검은 눈빛 외에는 한민족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이국적인 모습, 이해하기 어려운 한국말, 한국과 쿠바가 경기를 한다면 쿠바를 응원할 수밖에 없다는 꼬레아노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빛바랜 사진과 낡은 한복을 간직한 채 살아간다. 독특한 검은 피부를 한 꼬레아노들이 한복을 입고 ‘꼬부랑 할머니’, ‘나비야’를 부른다. 기억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사랑한 사람들이 남기고 간 “죽지 않은 시간”의 흔적을 지켜간다. ‘상자 안의 여자’는 백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카리브 해에서 열정의 춤을 춘다. 그것은 기억으로 현존하는 뿌리에서 비롯된다. 과거는 ‘죽지 않은 시간’으로 ‘현재’가 되었다. 사랑하고 있다면, 우리의 시간은 죽지 않고 현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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