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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종교 이야기 -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믿음과 분쟁의 역사
홍익희 지음 / 행성B(행성비) / 2014년 8월
평점 :
‘틀림’이 아닌 ‘다름’, 반목이 아닌 평화의 관계의 가능성 『세 종교 이야기』
홍익희 지음, 행성:B 잎새, 2014. 8.
날라리 천주교 신자인 나는, 오늘 오전, 마주보고 앉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동료와 잠깐 종교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 해서는 안되는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우리 둘은 절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은 채, 팽팽한 평행선을 달렸다. 그녀의 질문은 내가 수십 년은 족히 들어 왔던 똑같은 질문이었다. 천주교는 유일신을 섬기지 않고, (마리아를 믿는 종교라는 표현까지 썼다.) 천주교의 성경은 기독교 성경과 다르다는 것이다. 중학교 세계사의 교과 지식을 곁들여 얘길 했더니, 종교는 지식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그녀는 성당 주변에 가본적도 없고, 성당의 성경을 본 적도 없다. 워낙 많은 사람들의 반응이 그래왔던지라, 맘이 상하지는 않았다. 마무리는 내가 최근에 읽는 책이 홍익희 선생님이 쓴 『세 종교 이야기』인데, 종교인이든, 아니든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내가 사주지 않는 한, 그녀가 이 책을 가능성은 일단 1% 미만인 걸로 정리하자.
종교에 관한 이야기는 매력이 없을 수밖에 없는 여러 이유들이 있다. 종교는 보편적인 세계를 바라보는 지식과 관점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같은 종교인이 아니라면,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사실 타종교의 교리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종교를 비교하는 것도 의미가 없지만, 종교 간에는 서로 다름이 존재할 뿐, 누가 맞고 틀린지를 가릴 대상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천 년 동안 얽혀있는 종교의 역사를 살펴본다면 조금 다른 태도로 타종교를 수용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세 종교의 역사에 대해서 나름 ‘상식’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렵지 않은 책이지만, 읽다보면 내 무지함을 구석구석에서 발견한다. 고전은 읽지 않았지만, 읽은 것 같은 책이라는 우스게 소리가 있듯, 이 책을 통해서 종교 또한 대체로 아는 것 같지만 실상은 정말 모르는 분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깨침이 생겼고, 세 종교에 새롭게 접근하는 계기가 되었다.
『세 종교 이야기』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간의 믿음과 분쟁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9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세 종교의 기원, 유대교의 탄생과 정착, 기독교의 탄생과 정착, 이슬람교의 탄생과 정착을 다루고 마지막으로 세종교의 공통점과 차이점, 반목과 갈등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한 가지에서 시작하여 각각의 영역을 분석하고, 다시 하나로 모아 오는 구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체계적으로 읽을 수 있는 강점이 있는 책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에서 나온 이 세 종교는 모두 동일한 구약성경을 경전으로 삼는다. 저자의 말처럼 예루살렘은 기독교인만의 성지가 아니다. 한때 평화롭게 지내기도 있던 세 종교는 성전(聖戰)이라는 미명 아래, 오래 반목과 전쟁을 지속해오고 있다. 역사적 배경을 종합적으로 살펴보고 난 연후에야 종교 간의 분쟁을 이해할 수 있다. 이해의 지점은 화해가 열리는 시발점이기도 하다.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에 대한 공명이 마음을 울린다. “역사를 보면 정치든 사상이든 관용성을 보이며 상대를 포용하면 융성했고 서로 반목하고 대립하면 어김없이 쇠퇴를 불러왔다. 종교도 마찬가지였다.”(5쪽) 종교뿐 아니라, 우리 삶의 타산지석이 될 만큼 뼈 있는 말씀이다. 세월 호 참사 이후 희망이 없는 한국을 방문하셨던 교황 프란체스코가 우리에게 보여준 모습은 종교를 초월한 서로 간의 사랑이었다. “신의 자비는 한계가 없으며 신앙이 없으면 양심에 따라 행동하면 된다.”(7쪽)는 그의 말씀은 가히 혁명적이다. 교황의 말씀은 천주교인에 한해서만 해당하지도 않았고, 천주교인만을 구원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았다. 종교를 초월하여 수용해야 하는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중 한명은 기독교인이다. 그런데도 아직 세상이 이 정도라면, 이것은 우리 기독교인의 탓이라고 (나를 세례해주신) 박중신 신부님이 말씀하셨다. 삼십년 전 들었던 이야기인데, 그 말씀은 슬프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나에게는 가끔 성당에 가서 미사를 보는 이○○ 목사님이 계신다. 나 또한 개신교 이모를 따라서 새벽 예배를 보러 가는 것에 불편함이 전혀 없다. 형식을 중시하는 성당 미사에 비해서 간소한 개신교 예배가 때론 더 좋기도 하다. 반대로 목사님은 경건한 성당 미시가 좋을 때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칠순을 넘어섰지만 워낙 진보적인 청년의 심장을 간직하고 사시는 분인지라, 그분과는 어떤 종교 이야기를 나누어도 불편함이 없다.
몇 주 전 이 책과 더불어 역사에 대하여 새롭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시민단체 특강에서 미시사학자 백승종 선생님의 ‘이순신’에 관한 역사 강의를 들었다. 그가 연구한 이순신은 이전에 내가 알던 이순신이 아니었다. “달빛만 고와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섬세한 시인이 가슴에 살고 있는 (불멸의 이순신이 아니라) 불면의 이순신”이었다. 7년 동안 스물세번의 전쟁에서 모두 승전하였지만, 전쟁이 없는 시간이 훨씬 길었고, 대부분 노비출신인 병사를 먹여살려야하는 아버지 같은 자리에 이순신이 있었다. 탁월한 문장가, 선비적 감수성을 가진 그는 “경영의 귀재”이기도 했다. 수유연구실의 고미숙 선생님을 통해 들여다보았던 연암 박지원의 모습이 예전 내가 알던 인물과 달랐듯이, 이순신 역시 광화문 동상처럼 장엄한 군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역사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하나의 사물을 다차원적으로 줌인, 줌아웃하면서 바라보는 일일 것이다.
역사 교육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우문(愚問)에 백승종 선생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역사는 우선 재미가 있고, 교훈이 있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가는데 꼭 거쳐야 하는 공부라는 것이다. 그 답변은 『세 종교 이야기』에도 그대로 해당한다. 이 책은 재미가 있고, 교훈이 있으며, 나의 종교관에 대해서 되짚어 볼 수 있는 소중한 책이었기에 일독을 권할만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