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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젠의 로마사 1 - 로마 왕정의 철폐까지 ㅣ 몸젠의 로마사 1
테오도르 몸젠 지음, 김남우.김동훈.성중모 옮김 / 푸른역사 / 2013년 3월
평점 :
사실과 문학, 실증주의와 구성주의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한
『몸젠의 로마사 1 - 로마 왕정의 철폐까지』
테오도르 몸젠 지음, 김남우.김동훈.성중모 옮김 / 푸른역사 / 2013년 3월
역사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구성주의는 역사는 해석을 통해서 끊임없이 재구성되면서 새롭게 쓰인다고 보는 반면, 실증주의는 역사는 영구불변의 객관적 사실로 존재는 것으로 본다. 영국의 역사학자 카(E. H. Carr)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역사는 text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해석을 통해서 새롭게 구성되는 context임을 강조한 말이다. 동일한 시공간을 갖는 역사가 무수한 역사학자에 의해 다시 쓰이는 것을 보면 충분히 납득할만한 주장이다. 반면 “근대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독일의 역사학자 랑케(1795~1886)는 실증적인 역사 서술을 강조했다. 사료(史料)에 충실한 객관적 서술이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선입견과 편견에 치우치면 안된다고 보았다. 상반된 두 입장이 모두 충분한 타당성을 갖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의 입장만을 고수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둘 중 어느 하나의 관점을 취사선택해야 한다면,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유용하게 활용할 수도 없을 것이다. 역사는 text로 존재하지만, 각각의 시대적 담론에 따라서 얼마든지 재해석되고 새로운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단 text가 가지고 있는 실증적인 측면을 간과한다면 역사는 fiction과 다르지 않다.
현미경과 망원경의 적절한 활용
구성주의와 실증주의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일관된 기술을 해나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역사서가 숱하게 쏟아져 나오지만, 스테디셀러로 사랑받는 책이 흔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때 장편 역사서가 날개 돋듯이 팔려나간 적이 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크리스티앙 자칼의 『람세스』의 흥행으로 역사도 소설처럼 읽을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동시에 역사는 기술하는 사람이 어떤 관점과 취향을 갖고 있는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역사적 사실의 어떤 부분을 현미경에 올리고, 어떤 지점을 망원경으로 바라볼 것인지는 온전히 저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어떤 장비를 가지고 어디에 시선을 두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실루엣의 역사를 만날 수 있다.
앞서 역사관을 장황하게 서술한 까닭은 『몸젠의 로마사 1』을 소개하기 위해서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역사학자 테오로드 몸젠(Theodor Mommsen, 1817~1903)의 『로마사 1』이 번역되어 새 봄부터 독자와 만나고 있다. 몸젠의 첫 책을 읽다보면, 역사 기술의 객관성을 담보한 문체의 감수성이 탁월하고, 역사를 바라보는 적절한 무게감을 유지하고 있음을 담박에 알 수 있다. 방대한 사료 속에서 어디에 중심을 둘 것인지를 심사숙고하게 선택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단언컨대 로마사를 다룬 책 중에서 몸젠의 책만큼 균형감을 가진 책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인물과 사건을 중심으로 역동성 있게 구성하지 않았지만, 각각의 문헌에서 주제에 합당한 사료를 적절하게 배합하여 로마사를 구성하였다. 고전문학자인 만큼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의미 있는 자료를 취사선택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역자들의 번역 또한 훌륭하다. 역자들(김남우, 김동훈, 성중모 옮김)이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몸젠의 로마사를 번역하게 된 계기와 번역을 위한 별도의 인터넷 공간을 만들고 번역의 과정을 기록하고 개방하는 것을 보면, 몸젠처럼 협업이 역사학자에게 필수적임을 이미 관통하고 계신 분들임을 알 수 있다. 몸젠의 로마사를 읽다 보면 아무리 뛰어난 역사학자라 할지라도 혼자서 해낼 수 없는 방대한 작업이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각 민족의 언어 체계,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유지하고 발전시킨 시스템을 한명의 위대한 역사학자 혼자서 분석하여 기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몸젠 역시 협업을 통해서 이 위대한 책을 인류의 유산으로 남겨 주었다.
『몸젠의 로마사 1』는 로마사로 국한되지 않는다. 객관적이고, 비교론적이며, 상대론적 관점에서 로마와 주변 민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몸젠의 역사에서 신화를 철저하게 배격한다. 로마의 역사라기보다는 이탈리아의 역사이고, 희랍과의 비교 속에서 이해되는 로마인의 이야기다. 희랍과 이탈리아를 바라보는 시선이 매우 객관적이어서 두 나라의 장단점을 명확하게 지적한다. 희랍과의 비교 속에서 로마가 제대로 보일 수 있도록 기술하였다. “희랍인은 구체성·구상적인 반면 로마인은 순수하고 투명한 추상성, 희랍 신화는 인물 중심, 로마 신화는 개념 중심, 희랍에 자유가 있다면 로마에는 필연성”이 주도하였다. 로마인은 홀로 존재하지 않았고, 곱트, 이집트, 아르메니아, 희랍과인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했다. 언어를 분석해보면 이탈리아의 초기 민족은 이아퓌키아, 에트루리아, 이탈리아인이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희랍 사람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애국심을 갖고 있었다. 로마인들만이 고대의 모든 문명 민족을 통틀어 유일하게 자기 통제에 기초한 국가 체제를 통해 민족 통일을 이루는데 성공한다. 민족 통일 덕분에 로마인들은 마침내 분열된 희랍 민족을 넘어 전 세계를 지배했다.”(41~43쪽)
사적 기억, 공유의 힘, 인류의 자산
책과 다소 거리가 있으나, 기록이 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몇 가지 사적 에피소드가 있다. 기억은 망각되기도 하고, 미화되기도 한다. 증거가 없다면 조작은 온전히 기억하는 자의 몫이 된다. 초등학교 6학년이 시작되면서 도시 학교로 전학을 가야했던 나는, 동시에 서울로 전학 가는 친구와 십년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다. 사춘기의 일상의 소소한 일들과 선택의 순간마다 일기장 대신 친구에게 편지를 쓰곤 했다. 지역적으로 멀기도 했고, 그 친구는 가족 전체가 서울로 이사를 갔기 때문에 방학 동안에도 시골집에서 만날 수 없었다. 오직 편지 속에서 우리는 가장 가까운 친구이고 서로의 상담자였다. 십년에 십년을 더한 어느 날, 소포 하나를 받았다. 긴 세월 내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복사본이 담겨 있었다. 내가 쓴 편지가 다시 나에게 돌아온 것이다. 이사 다니면서 편지를 챙기지 못한 나와 달리 친구는 내가 보낸 편지를 힘들 때마다 꺼내보며 소중하게 간직했고, 다시 나에게 선물해주었다. 놀라운 것은 각각의 편지를 쓸 당시 나의 심경이 그대로 느껴질 만큼 기억이 또렷해졌다는 것이다. 다소 미화되었던 유년기 나의 문학성에 대한 환상은 사라졌지만, 환상의 자리에 만만치 않은 십대를 보냈던 나의 상처와 영광이 오롯하게 문자로 기록되어 있었다.
영화 <엔딩 노트>(Ending Note, 2011)는 말기 암 판정을 받은 60대 한 남자가 어떻게 생을 정리하는지를 보여준다. 감정에 치우쳐 슬픔에 빠져있기 보다는 침착하게 자기의 지나온 삶의 과정을 정리한다. 지금처럼 1인 1카메라를 소장하고 다니는 스마트 월드가 아닌 20세기 후반부를 살았던 남자였지만, 사진, 동영상 등 풍성한 자료가 남아있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랐다. 단지 한 개인의 생의 기록이 이렇게 잘 남아 있다면, 일본이라는 국가는 얼마나 많은 역사적 자료를 가지고 있을까 유추해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진에서 한순간도 자유로울 수 없는 지형적 특성이 소멸에 대한 준비를 하게 하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기록하는 자는 기록으로 한생을 더 얻게 될 것이다.
수년 전 KBS의 젊은 기자가 한 돌이 지난 쌍둥이 중 한 아이, 아내와 여행을 떠났다가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를 보았다. 쌍둥이 중 한 아이는 기자의 부모님 댁에 남겨졌다. 그 사연을 보고 나니, 생면부지 기자의 사고와 남겨진 아이가 혼자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서 기자의 이름을 검색해 보니, 그가 운영하는 블로그가 있었다. 성실한 블로그였던 그는 자신의 기사를 스크랩해서 올리고, 사회적 쟁점에 대한 생각을 적어 놓았다. 한 집안의 책임 있고 반듯한 남편,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가득 담긴 사적 글과 사진들이 유언처럼 남겨져 있었다. 천천히 그가 남긴 아름다운 기록을 보면서, 남겨진 아이가 자라서 이 블로그를 보게 된다면 부모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간직하며 좋은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기록은 놀라운 힘을 갖는다. 객관성을 담보하는 역사는 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소통을 통해서 새롭게 재구성될 때 생생한 힘을 갖고 새로운 역사로 거듭날 것이다. 몸젠처럼 방대한 문헌 속에서 흩어진 사료들을 잘 엮어내고, 사소하게 흘려보낼 수 있는 사료에서 중요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는 역사가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겨우 『몸젠의 로마사』1권이 출간되었다. 앞으로 만나게 될 아홉 권의 책에 대한 기대감이 실로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