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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을 위한 철학 - 세상에 단 하나뿐인
브랑코 미트로비치 지음, 이충호 옮김 / 컬처그라퍼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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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건축에 관한 책이 아니다. 철학에 관한 입문서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건축을 위한 철학』 브랑콩 미트로비치 지음, 이충호 옮김

 

이 책을 읽기 전 나의 접근법은 다음과 같았다.

 

철학이 건축과 만났다. 이 책은 사적 공간으로써 거주 수단을 넘어 서서 공공재로 일상을 담아내는 사회적 공간이 되고 있는 건축을 철학적으로 사유한다. 건축은 인문학의 기초 위해 세워져서 문화적, 역사적, 환경적 중요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공공 건축에 한 평생을 바친 ‘말하는 건축가’ 정기용 선생님의 마지막 전시회와 다큐를 보고 난 이후, 건축에 철학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건축가는 ‘자기 언어를 지닌’ 철학자여야 한다. 철학이 언어로 집을 짓는다면, 건축은 벽돌로 철학을 쌓는다. 『건축을 위한 철학- 세상에 단 하나뿐인』은 건축물이 제작된 사회적 맥락을 철학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세심하게 읽고 나면, 이 책이 건축에 관한 책이 아니라, 철학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는 점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그 간극이 즐거운 독서를 방해하지만, 얇고 넓게 건축으로 달콤하게 코팅된 철학사의 기록을 읽는 재미는 쏠쏠하다. 건축가인 저자는 참과 거짓을 논증하는 기능에서 출발하여 선험과 경험이라는 철학의 가장 원초적인 질문을 던진다. 언어가 우리의 사고를 지배한다는 관점에서 비켜나서 철학의 한계를 지적한다. 저자는 철학은 시각적 상상에 대하여 탐색해야 한다고 본다. “시각적 이미지와 문장은 둘 다 사물의 존재하는 방식을 표현하지만, 각기 다른 방법으로 표현한다.”(25쪽)

 

고대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근대의 칸트, 낭만주의, 역사주의, 현상학, 해석학에서 분석철학까지 각각의 시대를 지배했던 철학 담론을 흥미롭게 기술하고 있다. 물론 철학과 건축을 연결하기 위한 고민은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올곧게 이어진다. “건축 작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플라톤의 존재론을 병치하고, 플라톤의 이데아의 영원성과 건축을 연결한다. 참과 거짓의 논증은 - 절대적인 참이나 거짓이 없고, 오로지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믿음을 강조한 - 소피스트의 극단적 상대주의에서, 우리가 지각하거나 생각하는 사물의 작은 모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심상과 연결한다. 역사와 정신의 제도공인지, 시대정신과 무관하게 설계의 주인인지 유명론과 실재론에서 건축가의 위치를 묻기도 한다.

 

특히 칸트의 세 가지 순수이성 비판, 실천 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 중에서 미학을 다루고 있는 『판단력 비판』을 중심으로 건축과의 깊은 연관성을 다룬다. 칸트는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생각하는 주체에서 출발한다. 그는 “인간의 추론 능력이 개인이 속한 집단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인간의 추론 능력은 보편적이며, 가능한 경험의 필요조건은 개인의 문화적·민족적·인종적 배경과 상관없이 모든 개인에게 동일하다고 가정한다.”(113쪽) 반면 계몽주의에 반기를 든 낭만주의는 합리적인 측면 보다는 감정을 강조하였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노골적으로 낭만주의자들이 과학을 신뢰하지 못했고, 수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언급한다.(129쪽) 역사주의자 헤겔은 -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 역사가 발전하듯이 - 건축 또한 역사발전의 단계로 설명한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는 상징적 건축, 그리스는 고전적 건축, 낭만주의 건축과 고딕은 낭만적 건축에 해당한다. 이는 신(神)의 생각과 사고의 순서와 동일하다.

 

짧고 빠르게 읽으면 이해불가의 책

 

『세상에 단 하나뿐인 건축을 위한 철학』이 건축 이야기가 가미된 철학 개론서라고는 하지만, 한번으로 짧게 읽고 이해될 내용의 책은 아니다. 훗설, 하이데거, 니체, 소쉬르, 바르트, 데리다, 푸코, 들뢰즈, 가타리로 이어지면서 현대 철학을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한 독자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현상학과 해석학, 후기 구조주의로 들어서면 현대철학의 현란한 언어에 갇히게 된다. “언어 속에 거주”하는 하이데거는 “구체적인 상황과 사회로 내던져진” 현존재로서 인간이 어떻게 하면 객관적 세계와 독립적인 세계관을 기술하고자 한다. 그는 건축과 무관하지 않은 함의를 담고 있는 <짓기, 거주하기, 사고하기>(1951)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기도 한다. 후기구조주의의 영향은 건축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친다. ‘저자의 죽음’은 “기능을 하지 않는” 건축으로 기능적 고려를 거부하는 피터 아이젠만과 같은 건축가에게 영향을 미친다.

 

앨런 소칼의 통쾌한 실험에서 얻어낸 통찰

 

난해함 속에서 위로와 웃음을 제공하는 것은 뉴욕 대학 물리학자 앨런 소칼의 정치적 행위다. 좌파인 소칼은 1996년 후기 구조주의자와 포스트모더니스트에 큰 타격을 준 ‘가짜 논문 사건’을 일으킨다. 저명한 후기구조의 학술지에 그가 발표한 “‘양자 중력’이라는 물리 이론의 자유주의 정치적 의미에 대한 논문”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가짜 논문이었다. 그가 대항하고자 했던 것은 합리적 사고와 논리적 분석이 불평등을 유지하는 신비화전략으로 보았다. 이 가짜 논문 사건은 현란한 언어가 얼마나 정치적이고 권력적인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다. 의도하든 의도치 않았든 이 책이 ‘건축 이전에 철학’을 강조하고 있음에 대한 역설이기도 하다. 이 책은 교양서 보다는 건축학을 비롯한 이공계 학생을 위한 ‘철학입문서’로 기획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때문에 저자는 언어 속에 갇혀 있는 철학의 표피를 걷어내고 디지털 기술에 따른 시각성이 부상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나는 아직 후기구조주의가 하향세에 접어들었다는 것에 쉽게 동의하지는 못하겠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2441X

 

  

덧붙여 : 저자가 ‘건축’을 전공한 이공계 학자여서 그랬는지, 아니면 원전과 다르게 출판사의 의도가 그런 것인지 모르겠으나, 책의 핵심 부분을 다른 색으로 도드라지게 표시해주는 ‘과잉 친절’이 몹시 거슬렸다. 내 심장 스스로 밑줄 긋게 하는 부분을 만났을 때 독자가 누려야 할 자유와 새로운 창작의 기쁨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수험생이 아니라면, 우리가 만나야 할 고딕 글자는 각자 다른 법이거늘, 꼭 동일한 부분에서 포인트를 찾아야하는지 모르겠다. 책은 text가 아니라 context다. 독자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주체적 참여를 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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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3-04-25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숲님, 빠르게 두 편을 다 올리셨네요..저는 아직 읽고 있는 중이랍니다..
책은 매력 있는데...암튼 진도를 빼야겠어요...^^
철학가와 건축의 만남,,
짓기, 거주하기, 사고하기!!!!

4월,행복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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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전집 4 - 국가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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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인 정체(正體)에서 이루어지는 이데아를 모방하는 삶, 플라톤의 『『Politeia 국가』

천병희 역, 숲, 2013. 2.

 

플라톤의 4주덕을 공부하던 고등학교 윤리 수업의 시작으로 해서, 정치 사상사를 배우던 스무 살,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비교하는 에세이를 쓰던 시절까지 거치다보니 『국가』를 읽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천병희 역의 『Politeia』를 읽고 보니, 오랜 시간 다이제스트만을 읽었을 뿐 원전을 접하지 않았음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기시감과 같은 친숙함이 느껴지지만, 읽은 이가 드문 책이 바로 플라톤의 『국가』이다. 고전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절대 읽지 않은 책”이라는 말이 저절로 생각나는 지점이다.

 

철학과 등 돌리고 사는 사람일지라도 플라톤의 동굴과 그림자, 이데아, 철인정치, 지혜·용기·절제·정의의 4주덕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개념을 가지고 살아간다. 28세의 플라톤은 민주주의자들에 의한 스승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중우정치와 다수결의 한계를 뼈저리게 통감했다. 철학자가 통치자가 되거나, 통치자가 철학을 공부하지 않고서는 사회의 개선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로마에서도 군주정이 민주정보다 더 발전된 정체(正體)였다. 각 시대의 상황에서 요청되는 정치 형태가 다르다는 관점은 매우 중요하다. 정체는 일관된 방향으로 진화하는 것이 아니고, 시공간의 제약 속에서 새롭게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대와 철학자를 떼어내어 오늘날의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플라톤을 논할 수 없다. 플라톤 철학은 BC 400년경의 아테네의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이상 국가를 꿈꾸었던 플라톤의 『국가』는 총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등장 시켜서 스승의 견해를 제시하고 자신의 부연을 덧붙이기도 하며, 이데아와 같은 자신만의 철학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 책에 관한 대부분의 리뷰들이 언급하듯이 원전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읽기 좋은 우리말로 해석한 역자 천병희 선생님의 공이 큰 책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국가』는 4주덕(主德)을 세세하게 예를 들어가며 설명한다. 지혜로운 것은 최소한의 치자 집단의 지식 덕분이다. 본성상 가장 적을 수밖에 없는 그들만이 유일하게 이 지혜를 가지고 있다. “용기는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지 법이 승인한 소신을 어떤 경우에도 보전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스승 소크라테스를 그대로 보여준다.) “절제는 일종의 질서이며, 특정 쾌락과 욕구의 억제다. 자신의 주인이 절제를 암시한다. 국가 탐구의 목적인 정의는 “앞으로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그 자체 때문에도 그 결과 때문에도 좋아해야 하는 가장 아름다운 부류”에 속한다.(87쪽)

 

 

왜 철인정치여야 하는가?

 

“수호자들에게 못난 자식이 태어나면 다른 계급으로 강등해야 하고, 다른 계급들에서 탁월한 자식이 태어나면 수호자 계급으로 승진시켜야 한다. 그런 말을 한 의도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자기 적성에 맞는 한 가지 일에 전념해야만 개인은 여러 사람이 아닌 한 사람이 되고, 나라는 여러 나라가 아닌 한 나라가 되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216쪽)

 

“만약 수호자들이 잘 교육받아 분별 있는 사람이 된다면 우리가 그들에게 요구한 이 모든 것은 물론이요, 그에 더하여 아내의 소유, 결혼, 출산 등 우리가 방금 빠뜨린 것들도 쉽게 꿰뚫어볼 수 있을 것이네. 그리고 이런 문제들은 ‘친구들은 모든 것을 공유한다.’ss 속담에 따라 처리되어야 한다.(216쪽)

 

모방적인 시(詩)는 왜 이상 국가에서 추방되어야 하는가?

 

플라톤은 급진적인 개혁을 거부하고 가능한 한 현상을 유지해야 한다고 보았다. 시(詩)가 갖는 새로운 양식의 음악을 경계했다. 음악 양식의 변화가 정치적인 변혁을 수반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시가 거짓된 진리를 전하고, 인간의 감정을 격하게 만들어서 사람들을 매혹하며, 저급한 시민으로 만든다고 비판한다.

 

여전히 수용하기 어려운 플라톤의 이분법적 세계관 

 

21세기의 한국을 살아가는 나에게 플라톤의 철인정치는 그 한계를 간과하여 읽는 일이 쉽지 않다. 플라톤의 철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시대적 담론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로 이해하고 각기 자신이 맡은 역할에 충실할 때 선순환이 이루어진다는 플라톤의 견해를 그대로 우리 삶으로 가져 온다면 누군가는 심장과 머리의 역할을 하고, 누군가는 손과 발이 되어 일을 해야 한다. 그 근거가 타고난 능력에 따른 것이라고 백번 양보한다 할지라도, 그렇게 크기를 넓게 만든 파이를 공평하게 나누어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다. 또한 자신의 지력을 사용하고 삶을 기획하는 주체로서 살아야 할 ‘자격’을 갖춘 이가 따로 있고, 그들이 극소수의 철학자라는 부분에도 동의할 수 없다. 플라톤이 주장하는 이분법적인 세상은 반드시 누군가의 희생을 토대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일단 좋은 정체가 산뜻하게 출발하면 일종의 선순환이 이루어지고, 좋은 양육과 교육 체계를 유지할 수 있으면 좋은 성격이 태어나고, 좋은 성격들이 좋은 교육을 받으면 더 낳은 자식을 낳는다.”(216쪽) 그러한 선순환이 노예와 여성에게는 악순환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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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배꼽, 그리스 - 인간의 탁월함, 그 근원을 찾아서 박경철 그리스 기행 1
박경철 지음 / 리더스북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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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배꼽, 그리스』박경철 지음, 리더스북, 2013. 1.

 

카잔차키스에 의해 탄생한 『그리스 인 조르바』는 안소니 퀸 주연의 영화로 재탄생했고, 이윤기 선생님의 탁월한 문학적 성취로 번역을 통해서 우리에게 소개되었다. 에게 해에 발을 담그는 것은 그리스인 조르바를 만나는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온전히 주체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성하고, 그 세계의 주인으로 자유롭게 살다간 남자, 니체의 위버멘쉬와 영원회귀가 구체적으로 현현하였다. 이성 보다는 본능으로, 감각 보다는 직관으로으로, 삶은 오로지 자유를 통한 욕망의 실현에 있다. 대비되는 두 인물이 중첩되면서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을 이끈다. 한 인물에 새겨진 운명을 사랑하고, 인생을 놀이로 살다간 사람들. 그리스인 조르바, 카잔차키스, 한국인 이윤기.

 

인간으로의 회귀를 위한 랜드마크

 

착륙하기 전 기내 창으로 보이는 에게 해의 작은 섬들은 상상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아테네 공항 밖으로 보이는 언덕들, 그리스 뮤지션들의 음악, 흔하게 사용되는 대리석, 자기만의 향과 맛을 가진 하우스 와인, 파르테논 신전에 걸 터 앉아 바람맞이를 하는 동안 내가 정말 그리스에 도착했다는 것을 실감했다. 연중 온난습윤, 고온건조의 기후 조건은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고 인간은 무엇인지를 성찰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이었으리라. 그리스는 인간으로의 회귀를 위한 랜드 마크로 자연적 · 문화적 필요·충분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인생의 중간 지점에서 삶의 방식을 회의하고, 자신만의 삶을 가꾸기 위한 시간으로 그리스를 여행할 수 있는 순례자는 生의 가장 큰 선물을 받은 것이다. 아마도 그리스 여행 이전과 이후의 삶은 비약하여 전혀 다른 질을 가져올 것이다. 살아가는 세속적인 선택의 순간에 그 여행의 한 장면이 결정적 단서를 제공해줄지도 모를 일이다.

 

시골 의사에서, 경제 전문가, 토크 콘서트의 MC로, 반듯한 품성과 바른 생각으로 전 국민의 멘토가 된 박경철의 그리스 여행은 아마추어인양 겸손하게 기술되어 있으나, 그 내용과 성찰의 자세는 여행 서적이 아닌 역사 철학으로 분류되어야 한다.. 여전히 인생은 구태의연하게 여행에 비유될 만큼, 우리의 삶의 과정은 여행에서 만나는 예측불허의 사건, 생사를 가르는 듯 한 결정의 순간이 지배한다. “삶은 좌절이나 권태가 아닌 고독한 투쟁이며, 그 속에서 우리는 숙명 지워진 존재가 아닌 온전히 실존하는 내가 된다(97쪽). 인류가 가장 많은 철학적 선취를 했던 시공간으로의 여행은 매 발 자욱 마다,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내면에 잔잔한 파문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관문 코린토스에서 시작된 여행은 네메아, 올림피아의 성소, 아르고스, 스파르타의 유적지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리스와 스파르타를 비교 설명하는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지는 못하지만, 의견은 존중한다. 문명의 흥망성쇠라는 지점에서 과거의 그리스와 현재의 그리스를 동일하게 바라보는 것에도 불편한 마음이 든다. 요즘 들려오는 유럽 금융 위기의 퇴락한 그리스를 2,500년 전 그리스와 동일하게 바라볼 수 없는 많은 이유들이 있다. 그리스의 부패와 재정 위기를 보면서 역사의 흥망성쇠로 바라보는 것은, 지금의 한국과 고구려를 동일한 ‘국가’ 개념으로 보면서, 역사를 상상으로 채워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자유, 관용, 인권, 직접 민주주의의 산실, 철학과 삶을 일치하고 자기 배려의 윤리가 가능했던 그리스는 인류의 자산이고, 우리에게 실현 가능한 ‘좋은 삶, 선한 삶’의 산실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바다가 연결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에서 먹는 문어와 우리나라 동해의 문어 맛이 어떻게 달랐는지를 기술한 읽다 보니, 내게도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자숙문어, 돌문어, 왜문어인지, 어디에서 삶아서 어떤 소스를 찍어 먹는지에 따라서 달라지는 맛도 있겠으나, 그리스 바닷가 노인들과 대화를 나누며 먹는 문어 맛을 어디에 비교하겠는가? 이 지점에서 아테네 바닷가에서의 내가 경험했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깊은 푸른빛의 바다에서 수영을 하겠다고 조르는 아이들, 수영복이 준비 되지 않았던 우리 일행 누구도 함께 수영해줄 방법이 없다고만 생각했다. 아이들의 이모할아버지가 낯선 이국의 바닷가에서 속옷 바람으로 아이들과 수영을 해주었다. 연세 많은 그리스 할머니들도 함께 수영을 했다. 그들 또한 수영복을 입지 않았다. 옷을 벗기 위해서 팔을 빼는 것도 어려운 할머니들을 위해서 이국의 낯선 남자의 도움이 필요했다. 해가 기우는 바닷가의 그 광경은 그리스 하면 떠오르는 첫 번째 장면이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노인들의 수영 장면은 어떤 육감적인 느낌도 끼어들지 않는다. 역사보다 더 깊은 인간들의 삶이 느껴진다.

 

고착된 홈 패인 공간에서 살짝 비켜나 새로운 길로 나아가게 하는 여행

 

여행은 일상과의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고착된 홈 패인 공간에서 살짝 비켜나 새로운 길로 나아가게 한다. 저자도 인용한 카잔차키스의 이야기는 그리스 순례가 어떤 의미인지를 알게 한다. 이 긴 여행 마지막까지 지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열정의 불씨를 꺼뜨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급습할 때 여행은 다시 살아갈 정신의 아편이 되어 준다.

 

“평생 동안 내가 간직했던 가장 큰 욕망들 가운데 하나는 여행이어서 - 미지의 나라들을 보고 만지며, 미지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지구를 돌면서 새로운 땅과 바다와 사람들을 보고 굶주린 듯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모든 사물을 보고, 천천히 오랫동안 시선을 던진 다음에 눈을 감고는 그 풍요함이 저마다 조용히, 아니면 태풍처럼 내 마음속에서 침전하다가 마친내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고운체로 걸러지게 하고, 모든 기쁨과 슬픔으로부터 본체를 짜내고 싶었다.”

 

 

『문명의 배꼽, 그리스』를 읽으면서 삶은 그저 혼돈이 아니라, 혼돈 속의 절정이라는 조금 이질적인 생각을 받아들이게 된다. 행복이 어떤 사건 또는 사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이듯, 인생의 절정 또한 지속적인 균형이 아니라, “순간적인 평정”이리라. 이 혼란스러운, 지독하게 세속적인 삶을 끌어안는 것이 우리의 숙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박경철의 여행은 아직 계속될 모양이다. 앞으로 아홉 권의 연작이 기다리고 있다. 아직 펠로폰네소스 편이 두 권 남아 있고, 아티가 편이 네권, 테살로니키 편이 한권, 마그나 그라이키아 편이 두권 이어진다고 하니, 독자인 우리는 그가 여행지에서 보내온 편지를 우정 어린 마음으로 받게 될 것이다. 언젠가 그 자리에서 누군가에 띄울 연서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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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3-03-28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숲님, 잘 지내시죠?
두 권다 올리셨네요. 사실 어제 알라딘 문자 받고 중도하차 메일을 보냈어요.
도저히 마음적 여유 시간적 여유 없어서 그만 하겠다고...(사실 읽고 쓰는 게 귀찮아서요,,^^)
그리고 조금 지나서 신간평가단 발표된 도서 보고서는 으흑~ 다시 하겠다고 메일을 보냈지요...
천병희 역[국가]가 탐이 나서요....*.*
어쩔려고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암튼 그리 됐네요...ㅋ
숲님의 리뷰를 읽으면서 늘 평상심을 유지하고 일정한 리듬을 지니고 있구나 싶었어요.
난 왜 이리 게으른지요...흑흑

더불어숲 2013-04-01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그리스를 다시 읽는 일이 즐거웠습니다.
<문명의 베꼽>에 이어 플라톤의 <국가>.
평가단이 아니면, 다시 보기 어려웠을 터...
읽고 쓰는 삶이 없다면, 행복도 없을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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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 왜 미국 민주주의는 나빠졌는가
매튜 A. 크렌슨 & 벤저민 긴스버그 지음, 서복경 옮김 / 후마니타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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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시민, 대중 민주주의에서 개인 민주주의로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메튜 A. 크레슨, 벤저민 긴스버그 지음, 후마니타스, 2013. 1.

 

인터넷 방송의 시민기자로 시위 현장을 생방송했던 진중권은 자신을 네티즌의 ‘아바타’라고 표현했다. 네티즌을 대신한 누군가가 위험천만한 시위 현장을 누빈다. 그러다가 경찰의 진압에 다치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그를 위한 모금 운동이 이루어진다. 마치 게임을 하다가 자신의 아바타가 쓰러지면, 캐쉬를 지급하는 것과 흡사한 방식이다. 민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시위는 ‘민주주의’라는 득템을 위한 게임처럼 실시간 이루어진다.

 

이러한 정보 사회의 문화적 현상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분명히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강풀 원작 <26년>은 시민이 참여한 모금 운동이 없었다면 영화로 제작될 수 없었고, 선댄스 대상을 수상한 오멸 감독의 <지슬> 또한 의식있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후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대선 결과를 떠나서) 김어준, 주진우, 김용만, 정봉주의 ‘나는 꼼수다’는 전 세계 팟 캐스트 다운 순위 1위를 할 만큼 진보의 지지를 받았다. 이렇게 시민의 참여가 꾸준히,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도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라고 말할 수 있는가?

 

■ 시민에서 소비자로, 대중 민주주의에서 개인 민주주의로, 실질적 법치주의에서 형식적 법치주의로 다운사이징한 민주주의

 

저자 매튜 A. 크레슨과 벤저민 긴스버그는 개인 민주주의, 형식적 민주주의, 소비자, 고객으로서 시민의 권리는 지켜지고 있다는 대다수의 생각에 동의한다. 다만 저자들은 참여가 가능하고, 참여할 줄 아는 ‘대중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했던 공적 존재로서 시민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왜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는지에 대한 치밀한 분석한다. 저자들은 독립혁명 이후 미국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했던 민주주의가 왜 다운사이징 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한다.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는 이번 대선을 비롯한 한국의 정치 행태를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는 책이다.

 

19세기 국가와 정부는 시민들의 지지와 참여에 의존하며 대중 민주주의 시대를 열어나갔다. 엘리트는 비엘리트를 통해서 정치권력을 장악했다. 정부의 운명은 시민이 제공하는 세금 위에서, 시민의 지지에 달려 있었다. 정당은 선거 동원으로 정당성을 부여 받았다. 차티스트 운동으로 얻은 ‘보통 선거’의 역사가 아직 백년이 체 되지 않은 21기, 선거권의 피가 아직 채 마르기도 전에 투표율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고, 선거 참여를 ‘의무’로 하자는 주장까지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저자들은 정부와 정치 엘리트들이 더 이상 시민의 참여를 바라지 않고 있는데, 시민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능동적이 참여 없이도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지식과 정보를 소유한 시민 또한 정치 엘리트를 통하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찾아냈다. 문화자본과 사회관계 자본을 소유한 시민들은 정치를 통하지 않고서도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찾아냈다. 돈만 있다면 소송을 통해서 능력 있는 변호사를 선임해서 얼마든지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들에게 정치적 연합은 시간과 비용 낭비일 뿐이다. 합리적 선택 이론이 지지를 받으면서, 시민은 이제 사익을 추구하는 소비자가 되었다.

 

문제는 “정치인의 수사 속에만 존재하는 가상의 시민”이다. 정치 엘리트도 아니고, 권력을 소유하지도 않았으며,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 있는 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시민들은 점점 수동적이 되어 참여의 공간을 잃게 되었다. 중하층 시민들의 참여와 동원이 민주주의의 핵심 기제로 작동하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동원되지 않으면 참여조차 불가능한” 이들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변호사와 로비스트가 우수 고객의 권리를 챙겨주지만, 가난한 시민의 권리를 보장해주던 사회적 장치는 사라지고 있다.

 

대중민주주의와 정치적 동원은 수동적인 방식의 참여로 이해된다. 저자들은 강제적인 힘이 참여할 수 없는 가난한 시민의 권리를 지킬 수 있는 방안이라고 주장한다. 치열한 논쟁이 필요로 하는 부분이다. 스스로 자각하고 권리를 실현하기 위하여 능동적으로 결합하면서도 자신의 개인적 가치를 구현하는 ‘다중’과 비교하면 ‘대중’은 참여 보다는 동원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대중은 정치 엘리트 없이 자발적인 참여가 불가능하다. 왜곡된 정보의 편향성, 또는 생계유지의 어려움으로 정치 참여 자체가 불가능한 사람들을 ‘동원’하는 것과 자발적인 정치 참여를 동등하게 볼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엘리트주의의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듯하다.

 

연애계의 가십을 이야기하듯 정치적 사건을 파편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그 사건이 과거와 미래를 어떤 방식으로 연결 지을 것인지 고민하지 않는다. 정치는 우리의 삶과 분리된 하나의 사건처럼 도처에서 이야기될 뿐이다. 그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 정치 엘리트와 정당 정치인의 필요에 의해 동원되는 것이 아니라 - 편향되지 않은 정보를 제공 받고, 공동의 관심사를 중심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는 공동체에 참여하여 자신의 권리 뿐 아니라, 타자의 권리를 위해 ‘참여’할 수 있는 감수성을 계발해야 한다. 물론 쉽지도 않고 짧지도 않은 시간이 필요한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민주주의의 역사는 그것만이 우리가 가야할 길임을 역사에 오롯이 새겨두었다. 시민, 민중, 대중, 다중이라는 다양한 방식으로 호명될 때, 그들의 미래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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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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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삶의 방식을 선택한는 우리의 힘!!!

 

『죽음이란 무엇인가』셰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엘도라도, 2012. 11.

   

체르노빌 핵발전소(원자력 발전소)과 비교해서 네 배 이상의 피해를 입혔던 후쿠시마 사태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지리적 위치를 고려한다면, 우리나라 역시 피해 반경을 벗어나 있지 않지만, 어마어마한 대재앙 앞에서 우리는 얼마만큼의 성찰을 구체적으로 삶으로 끌어 왔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이 일본인의 삶에 미친 피해를 알기 위해서는 사태 이후, 재난 지역의 인공 유산과 심장 발작의 전후 증감률을 살피면 된다. 핵이 인체에 미치는 가장 큰 피해는 암이지만, 십년 이상 진행되어야 나타나는 질병이므로 지금 당장 파악할 수는 없다는 것이 전문가의 견해다. 일본의 보수 정부는 핵폭발의 피해를 정확히 발표하지 (않거나)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여행에서 만난 일본 현지인에게 물어보니, 이러한 사태에 대한 일본인의 변화가 의외라고 말한다. 이전에는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내수가 위축되었지만, 가장 소중한 가족을 잃어버린 엄청난 인재 앞에서, 오히려 일본 국내 소비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예기치 않은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미래가 아닌 현재를 사는 것으로 그들의 패러다임이 전환한 모양이다. 집단 죽음이라는 대재앙이 그들의 삶의 방식을 바꾸고 있다.

 

동전의 양면처럼 삶과 죽음은 서로 등을 맞대고 있지만, 많은 철학은 삶을 철학하는데 죽음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는다. 예일대학에서 17년째 최고의 명 강의를 하고 있다는 셸리 케이건 교수는 ‘죽음’을 미화하지 않고, 이성과 논리를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철학으로 끌어 온다. 형이상학과 가치론으로 죽음의 본질을 탐색하여 어떻게 삶을 살아야할지의 성찰을 이끌어낸다.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읽기 위한 단 하나의 전제는 우리는 모두 죽음과 마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죽음은 나와 내 인격의 끝”

 

형이상학자이든 유물론자든 우리는 누구나 사후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케이건은 종교 영역 밖에서 죽음을 이야기하자고 한다. 삶과 죽음, 영혼·육체와 인격, 죽음의 본질, 죽음과 삶의 가치, 죽음에 대한 태도, 자살 등에 대하여 14 강론으로 구성한다. 먼저 인간을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한다. 육체와 영혼이 따로 존재할 수 있다는 이원론과 그 둘은 함께 존재한다는 일원론(물리주의)의 두 가지 관점에서 죽음을 바라본다. 이원론자들은 육체의 사멸 이후 존재하는 영혼을 믿지만, 물리주의자는 정신과 영혼을 분리한다. 육체의 한 형태로서 정신은 존재하지만, 육체를 벗어난 영혼이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케이건은 실제로 “삶이 끝난 자리에서 삶은 시작될 수 없다.”(19쪽)고 주장한다. 그는 (죽음 이후 다시 삶이 시작된다는) 그런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죽고 나서 몸이 부활하거나 인격이 이식될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죽음은 종말이고, 인격의 끝이다. 이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이다. 죽음은 그야말로 모든 것의 끝이다(245쪽).

 

죽음의 양가성

 

죽음은 삶의 축복과 선물을 누릴 수 없는 상실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가장 나쁘다. 꽃 피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는 죽음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야기한다. 싹 틔우지 못한 죽음은 주변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슬픔과 상처를 가져 온다.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죽음 역시 그렇다. 살아있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모든 가능성과 결별해야 하기 때문에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다. 반면 견딜 수 없는 고통의 도피처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할만한 측면이 있다. 삶 그 자체가 의미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삶은 각기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인간다운 삶을 포기하고, 십 수 년을 병실에서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대소변도 해결할 수 없는 환자에게 삶 그 자체가 의미라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자신 있게 답할 수가 없다. 티끌만한 희망도 없이 죽음만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삶은 죽음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 부호가 남는다.

 

죽음은 몇 가지 전제를 가진다. 우리는 누구나 반드시 죽는다. 아직까지 영생을 누리고 있는 예외를 누구도 본적이 없다. 모두 죽는다는 전제에서도 죽음이 한없이 무거운 까닭은 얼마나 살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죽음은 또한 반드시 삶의 끝에 있으면서 짝패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성찰은 삶을 바꾸는 힘을 발휘할 것이다. 다양한 자본과 다양한 층위를 이루고 있는 인간 사회에서 유일한 공통점이 있다면 우리 모두 한번 태어나서 반드시 한번은 죽게 된다는 것이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죽게 된다면 제한 상황은 어떤 삶을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한 아주 중요한 결정적 단서가 될 수 있다. 합리적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가장 가치 있고 보람 찬 일을 선택할 것이다. 적당한 목표를 설정하고 일상에서 얻는 기쁨에 집중할 수도 있고, 실패 가능성은 높지만 높은 성취 목표를 위해서 일상의 사소한 기쁨을 포기할 수도 있다. 앞의 두 가지 목표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삶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것을 선택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방향을 결정할 것이다.

 

저자는 죽음에 대한 일반 명제를 뒤집어 생각하기를 권한다. 가령 “인간은 모두 홀로 죽는다.”는 명제가 당연하지 않다. 상황이나 심리적인 면에서 무수한 예외들이 존재한다. 예견된 죽음은 임종에 앞서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에 둘러 싸여 있다. 또는 동반자살을 하는 경우도 있다. 누군가는 타인을 위해 대신 죽음을 맞이한다. <파이돈>의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셔야하는 상황을 알고도 제자들과 철학 논쟁을 벌였고, 흄은 죽음 직전까지 병상에서 사람들과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상황이나 심리적인 측면에서 누구나 홀로 죽는다는 것은 참 명제가 될 수 없다. 그는 수준 높은 철학 용어에 사로잡히지 않는 상태에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생각해보았을 법한 죽음의 주제를 가지고 대화하듯 서술해나간다.

 

『죽음이란 무엇인가』는 죽음에 대한 결론을 이야기하는 책이 아니라, 죽음에 접근하기 위한 입문서다. ‘죽음’은 철학하기 위한 수단일 뿐, 그 자체에 대한 장황한 서술이 아니다. 예일대에서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철학 강좌였음을 기억하고 책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책은 강의를 위한 강의록처럼, 책을 읽다보면 대화를 나누듯 자연스럽게 집중하게 된다. 새해를 시작하기에 앞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목표 설정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독자에게 권할만한 책이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며 죽음에 대한 일반 명제를 기각해나가는 저자의 분석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을 넘어 서서 섬세하고 유쾌하기 까지 하다. 단, 죽음에 대하여 확실한 철학적 신념을 원한다면, 미진할 것이다. 이미 죽음을 자신의 삶으로 끌어와 철학적 사유의 깊이를 더한 이들에게 이 책의 효용성은 매우 떨어진다. 다만 대학생을 대상으로 했고, 강의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좋은 철학의 기준이 참을 수 없는 ‘무거움’ 그 자체에 있지 않다면, 이 책은 죽음에 대한 철학서로써 충분한 미덕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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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3-01-28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시안에서 죽음에 대한 네 가지 시선에 대해 자리가 마련된다고 알고 있어요.
가서 듣고픈데...죽음, 이 책을 통해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 느낌이에요.
애써 피하지 않아도 되고...애써 도망 갈 필요도 없고 그렇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