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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닦고 스피노자 - 마음을 위로하는 에티카 새로 읽기
신승철 지음 / 동녘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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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닦고 스피노자』 신승철 지음, 동녘, 2012. 11.

 

21세기 대한민국의 83만원 세대, 김철수의 고민을 해결해주기 위해서 스피노자, 그가 왔다.

 

고시원의 공동 화장실의 깨진 거울을 사이에 두고, 중세와 근대의 경계에서 ‘철학자의 철학자'가 될(된) 스피노자가 백수 청년 철수의 고민을 들어주기 시작한다. 신간 『눈물 닦고 스피노자』는 그들의 불가능한 만남에서 출발한다. 스피노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십대 백수, 입시지옥을 통과해야 하는 여고생 주변에서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철학적 통찰을 제공한다. 불안증, 우울증, 피해망상증, 신경증, 강박증, 과대망상증, 도착증, 공황 장애, 중독, 경계선 인격 장애, 조울증, 관계망상, 분열증, 공포증을 각각의 챕터로 한 스피노자의 철학 강의는 상담과 치유의 시간으로 전환한다.

 

스피노자는 철학 상담 처음부터 답을 제시한다. 정신질환은 이성으로 치유되는 것이 아니다. 무의식이 자리한 곳의 배치를 바꾸고, 궤도를 수정할 수 있도록 “관계망에 대한 사유” 능력을 키울 때 우리는 정신질환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욕망으로 존재와 세계를 재구성할 것을 권유한다. 무의식적 욕망을 기꺼이 수용하고, 욕망의 주인이 될 것을 간절하게 요청한다. “스스로 창발(創發)한 욕망은 삶을 구성하고 세계를 재창조하는 활동력”이 된다. 나의 무의식을 ‘알아차림’에서 우리는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주변과 두려움 없이 접촉하고, 횡단하며, 변용하는 것, 그때 비로소 우리는 구조적 예속에서 벗어나 경계를 넘나들며 자유로운 트랜스포머가 될 수 있다.

 

‘철학공방 별난’에서의 삶

 

『눈물 닦고 스피노자』를 생산한 신승철 선생의 철학연구소 이름이 ‘별난’이란다. 욕망(desire)의 어원 “별에서 떨어져 나온 마음”에서 가져온 공방의 이름이 인상적이다. 그 명칭에서 저자의 삶이 이미 스피노자적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6~17세기 가장 코스모폴리탄이었던 경제 중심지 네델란드의 암스텔담에 살았던 스피노자는 부유함을 포기하고 겸손한 삶을 선택하는 것으로 한평생 철학을 했다. 도시는 익명성을, 소박함은 자유와 고독을 선취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별난’의 삶은 스피노자의 철학이 실천되는 공동체다. 별에서 떨어져 나온 마음들의 집합소에 넘쳐나는 관계지향의 삶, 함께 사랑하고 기뻐하며 외부에 대해 열려있는 일상 속에서 경계가 허물어지는 변용을 경험할 것이다. 고립된 섬처럼 파편화된 사람들은 타인의 신체와 결합하여 무수히 다양한 자아를 생성한다.

 

http://goham20.com/2021

 

철학하기를 가능하게 하는 책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어렵지 않게 우리를 철학으로 유도한다는 점이다.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소피의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난해한 개념으로 넘쳐나 미리 질리게 하는 철학책들과 달리 철학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입문서였다. 발신인 없는 의문의 편지는 “너는 누구니?”, “세계는 어디에서 생겨났을까?”와 같은 한 줄의 물음으로 시작된다. 퍼즐을 맞추듯 자연스럽게 철학적 질문에 하나하나 답하게 한다. 청소년이 철학에 접근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던 『소피의 선택』처럼 『눈물 닦고 스피노자』역시 접근성이 뛰어난 철학서다. 삶이 힘겨운 이 시대 젊은이들이 인문학에서 치유 할 수 있도록 소설의 형식으로 구성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두 사람의 언어의 불일치, 시대의 이해를 어설픈 매듭으로 연결하는 한계가 있지만, 아픔을 치유하는 공감할 수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책이다. 책은 또 다른 책으로 연결된다.『눈물 닦고 스피노자』는 스피노자의 『에티카』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우리를 에티카의 세계로 초대한다.

 

세상을 바꾸기는 어려워도 마음 바꾸기는 쉽다는 말이 있다. 그럼에도 마음을 바꾸는 것은 위대한 혁명이다. 삶을 전복하는 일, 욕망의 배치를 바꾸는 것은 개인에게 우주의 빅뱅에 비견할만한 일이다. 욕망을 읽고 배치를 바꾸며 변용하는 것, 그 속에서 우리는 슬픔을 기쁨으로 전환할 수 있다. 우선해야 할 일은 당연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것, 그 순간 우리는 파편화된 자아에서 벗어난다. 마주침에서 두려움 없이 기쁨과 슬픔을 느끼고, 경계를 허물어 지평을 넓혀가면서 우리는 서로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을 것이다. 일상의 욕망을 함께 나눌 ‘별난 공방’이 도처에 넘쳐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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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3-01-28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접근성이 뛰어난 철학서..맞아요..^^
욕망의 재 발견....저는 이제 욕망하려합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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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
대리언 리더 지음, 배성민 옮김 / 까치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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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보다 자유롭지 못한 정신병원을 다룬 영화 <뻐꾸기 둥지로 날아간 새>(1975)는 정신병자로 호명되는 순간, 주체적 결단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가 되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보여준다. 권위 있는 의사는 정상과 비정상의 판별 기준을 제공하고, 그들을 일상생활에서 격리하고, 치료라는 미명하에 죽은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존재를 만들어간다. ‘정상인’으로 만들겠다고 끊임없이 주입되는 주사와 알약, 뇌수술은 그들이 정신병자임을 각인하는 도구가 되고, 정신병원이라는 공간을 벗어나는 것이 오히려 공포가 되는 상황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 주인공 맥머피(잭 니콜슨)가 요구하듯 - 정신병원을 탈출하기 위한 “산처럼 큰 자신감”과 친구들과 함께하는 낚시 여행이다. <뻐꾸기 둥지로 날아간 새>는 정신병자에게 가장 해악한 곳이 어쩌면 정신병원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미셸 푸코(M. Foucault)는 그의 책 『감시와 처벌 : 감옥의 역사』에서 근대 권력이 어떻게 사회를 통제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분법의 가치 기준은 ‘이성’이라는 기준에 대립 항으로 ‘비이성’을 세우고 이성에 위배된다고 생각하는 모든 가치를 배제하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가치 기준을 적용한다. 정신병원은 감옥과 마찬가지로 보다 효율적으로 사회를 통제하기 위한 유용한 공간이다. 광인을 추방하고 감금해온 장소인 병원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억압적 수단의 필연적 산물이다. 정신병원은 감옥과 별로 다르지 않은 시스템으로 작동한다. 수형자(정신병자)의 신체는 처벌을 통해서 유순하고 순종하는 신체가 된다. 끊임없는 감시와 규범화 된 제재를 요구하는 훈육 방법이 동원되고, 얼마나 정상(!!)적인 생각으로 변화하였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인터뷰와 시험이 계속된다.

 

 

 

 

 

꽃니, 박사, 그리고 박대령 아저씨.

 

개그콘서트 한 꼭지인 허경환의 <거지의 품격>을 보고 있으면 많은 생각이 든다. 우선 개그우먼 김지민이 정상인이 거지들을 대하는 태도다. 예의와 염치를 모르는 거지들을 향해서 “거지 주제에...”라는 말을 던지며 화를 내지만, 그들을 배제하지 않고, 호기심을 가지고 거지들을 대하며, 궁금함에 대한 답을 요구하는 대가로 “500원”을 내준다. 참 낯선 풍경이지만, 이십여 전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내가 처음 시나리오를 쓰겠다고 덤볐던 작품 제목이 <꽃니와 박사>였다.

우리 마을에 5일 장이 서는 날이면, 어김없이 ‘꽃니’라는 실성한 여자가 구걸을 하기 위해서 장에 나왔다. 십 원짜리 동전 하나에 순하게 웃던 얼굴이 지금도 기억난다. 친구들과 함께 “화천리 꽃니”라고 외치며 뒤쫓아 다녔고, 다리를 절던 그녀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거기에 도덕이라는 판단 기준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우리는 어쩌다 꽃니가 5일장에 나타나지 않으면, 오히려 그녀가 궁금하고 걱정되었다. 그녀의 이름이 왜 꽃니인지 훗날에야 알았다. 꽃니가 살던 동네가 화천리, 우리말로 꽃 내, 꽃처럼 아름다운 시냇물이 흐르는 마을이다. “꽃 내에 사는 여자” 는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면서 꽃니가 되었다. 내 나이 스물이 넘어서 글 밥을 벌어야겠다고 작정했을 때도, 어릴 때 친구처럼 놀았던 꽃니에 대한 기억이 떠나지 않았다. 친구들이 예쁜 옷을 사 입고 오면, 나는 “꽃니 같다.”고 말해준다. 친구들은 꽃니가 누구냐고 묻고, 나는 우리 동네에 살았던 사람만 아는 여자라고 답한다. 유년의 기억에서 절대 기울 수 없는 그녀가 자주 그립다.

 

겨울 장은 짧은 해 때문에 일찍 파했다. 장꾼들이 다음 장으로 떠나면서 5일 후에 필요한 물건들을 비밀 포대와 천막으로 묶어 놓은 짐들이 장에 놓여 있다. 그 사이에 구덩이를 파고 동사(凍死)를 면하려는 거지들이 모여 들었다. 겨우 내 한 곳으로 찾아드는 거지들 중에는 아는 것이 너무 많아서 ‘박사’라는 호칭으로 불린 남자가 있다. 냄새나고 더럽고 무섭기도 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이번 겨울에 얼어 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밥을 챙겨주었다. 저렇게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왜 미쳤을까, 분명 애잔한 사연이 있을 거라는 기대감 비슷한 마음으로 경외감까지 생겼다. 정말 공부를 많이 했을 거라는 믿음도 있었고, 영화 의 수학자 내쉬처럼, 박사에게도 그런 천재성이 깃들여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우리와 다른 그의 정신세계는 신비화되면서 아름답거나 혹은 안타까운 사연들을 만들어냈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정신병자 중에는 박대령 아저씨가 있다. 종대 아저씨라고 불리기보다는 ‘박대령’으로 불렸다. 군대 가기 전까지 홀어머니와 둘이 사는 효자 아들이었는데, 60년대 말에 군대에 가서 매를 맞고 미쳤다고 한다. 화장실 밖에 모자를 벗어 두고 볼일을 보고 있던 종대 아저씨는 비상 점호 사이렌이 울리자 급하게 나왔고, 자신의 모자가 없다는 것을 알고 급하게 아무 모자나 쓰고 점호에 섰는데, 하필 대령 모자였다고 한다. 그 때문에 선임들에게 많이 맞았고, 결국은 조기 제대를 했다. 사람들은 그때부터 박종대라는 이름 대신 그를 박대령이라고 불렀다. 한동네에서 나고 자랐던 마을 사람들은 꽃니, 박사와 종대아저씨를 다르게 느끼게 했다. 아저씨는 친인척처럼 이집 저집 돌아다니면서 밥을 먹었고, 돌아가실 때까지 기세등등했다.

 

생산적이지 않은 방식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

 

이제 노골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야 할 때다. 그렇게 우리와 함께 살았던 정신병자들은 이제 모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모든 정신병이 배제되고 분리될 만큼 정신병은 끔찍한 폭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오랜 세월 동안 ‘조용한 광기’는 환경에 적응하는 방식으로 우리와 같은 공간에서 함께했다. 이처럼 은근한 형태로 우리 주변에 내재해 있는 대부분의 정신병에 대하여 문제 제기를 하고 있는 책이 바로 대리언 리더(Darian Leader)가 쓴 『광기』다. 정신분석가인 대리언 리더는 프로이트 분석연구 센터의 일원으로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기대어 정신병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에 깊이 있는 성찰을 제공한다. 그는 에메, 늑대인간, 해럴드 시프먼의 사례를 통해서 정신병을 어떻게 진단하고, 작업하는지의 전 과정을 보여준다.

 

대리언 리더는 정신병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선택한 방식이라고 본다. 정신병이 발병 원인은 문화적 분위기에 따라서 달라진다. 따라서 생물학적인 기질만을 정신병의 원인으로 규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일례로 우리는 부모에게 유전되는 생물학적 기질만을 물려 받지 않는다. 부모의 양육 방식이 정신병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결정적인 변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요인이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것이다. 부모의 양육 방식을 결정하는 요인은 아이가 가지고 있는 ‘생물학적 결함’일 수 있다. 또한 히스테리, 강박과 같은 억압의 기제는 방어의 형태이다. 기억상실과 대체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기제다. 편집증과 정신분열 역시 생존을 위한 무의식적 선택이다. “편집증자는 타자를 온전하게 만들려는 열망을 품고, 정신분열증자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계획을 세운다(125쪽). 정신병자에게 타자는 너무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위협적인 외부이다.

 

치료자는 “소외된 주체의 비서”

 

“정신병을 대하는 태도가 정신병을 다루는 방식을 형성했다.”는 대리언의 말처럼, ‘최신’이라고 믿는 정신병 치료법은 우리가 정신병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기인한다. 다름을 용인하지 않는 방식은 정신병자를 우리와 다른 대상으로 보기 보다는 치료해야 할 질환을 가진 비정상인으로 규정한다. 정신병을 치료하는데 사용할만한 간단한 기법이나 공식이 없고 case by case로 접근해야함에도 정신병을 대하는 ‘유일한’ 방식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된다. 그럼에도 성공적인 치료의 기저에는 환자와 같은 수준에 서려는 치료자의 노력의 있다. 환자와 함께 생활하려고 노력하는 치료자는 권위를 부리지 않고, 환자를 몰아세우지 않는다. 주체와 객체의 이분화된 위치를 거부하고, 정상인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환자의 상태를 개선한다. 이러한 결과를 토대로 치료자에게 요구되는 태도의 숨은 의도를 지적한 것도 매우 유의미하다. 치료자는 남을 돕고 치유한다는 자기 환상을 점검해야 한다. “인간을 돕는다.”는 말은 세 개의 동기를 숨기면서도 지시할 수 있다. 첫째, 환자보다 자신이 더 우월하다고 말하려는 동기를 숨기면서도 지시할 수 있다. 둘째, 환자를 지배하고 조종하여 미리 규정된 행동방식에 따르게 하려는 동기를 숨기면서도 지시할 수 있다. 셋째,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를 벌함으로써 자신은 환자와 다르다고 생각하려는 동기를 숨기면서도 지시할 수 있다.”(393쪽) 문제는 이러한 치료자 자신도 이성적으로 잘 모르는 이러한 의도를 정신병자는 너무나 빠르고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치료자는 “소외된 주체의 비서”라는 라캉의 표현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지점이다.

 

이 책은 ‘광기’ 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성찰하게 한다. “미친 것과 미치는 것이 다르다면, 우리는 광인으로 분류되지 않는 선에서 미치는 과정으로 살아가는지도 모를 일이다. “많은 사람이 정신병적 구조를 가지지만, 정신병이 생기지 않은 채 살아간다. 아마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219쪽) “구멍이 열린다.”는 지점까지 가지 않을 때, 우리는 미치기 전의 잠재 상태를 유지한다. 『광기』는 - 마치 다른 세계의 언어처럼 - 이해의 지점에 닿았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수십 걸음 앞으로 달아나 있는 라캉을 이해하기 곤혹스런 독자들에게 제법 유용하다. 라캉의 정신분석으로 가기 위해서, 또한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확장하는데 일독을 권할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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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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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배제와 과잉, 그 역설의 세계에 관한 사회학 보고서,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지그문트 바우만, 동녘, 2012. 8.

 

커피 전문점에서 커피를 사이에 두고 두 남녀가 앉아서 스마트 폰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다. 한 사람이 커피를 가지러 간 사이에도 남은 한 사람은 기척이 없다. 고속도로 휴게소의 식당에 어린 아이 세 명이 앉아 있다 부모님이 음식을 가지러 간 사이에도 세 아이는 색색의 닌텐도 기기를 들고 게임에 집중해 있다. 부모가 운전하는 차의 뒷좌석에 앉아서 아이들은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겼으리라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나는 지난 주 금요일 출장을 갔다가 세미나실 서랍에 핸드폰을 두고 왔다. 주말과 주일의 스케줄은 하나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만나기로 한 약속이 취소되었다는 문자를 받지 못해서 두 시간을 약속 장소에서 기다렸고, 누구도 만나지 못한 채 급한 연락이 올까 염려스러워서 조바심으로 이틀을 보냈다. 앞서 이야기한 이 모든 사례가 모두에게 낯설지 않으리라. 우리를 연결하는 접점이 사람과 사람이었다면, 이제는 사람과 기기를 사이에 무수한 (익명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반유대 캠페인의 여파로 국적을 박탈당한 채, 영국에 정착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Zygmunt Bauman)은 “무료함 속에서 결실을 일구는 법”을 잃어버리고, 지루함과 지속적인 것을 참지 못하는 현대인에게 지극한 마음으로 마흔 네 통의 편지를 보낸다. 몇 년 후면 구순이 되는 노학자는 여전히 촌철살인의 언어로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모순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저마다 개성 있는 삶을 살고 꿈꾸지만, 경쟁은 평준화를 조장한다. 전 지구적인 자본의 낚시질에서 자기 세계를 주장하며 주체로 살아남기에 개인은 너무도 무력하다. 현대인은 가볍게 공간을 넘나들며 유목하며 살아가는 듯하지만, 그것은 자본이 기획하는 마케팅에서 한 발작도 나아가지 못한 선택일 때가 대부분이다. 홈 패인 공간을 벗어난다는 것은 비행기에 탐승해서 국경을 넘나들며 세계 곳곳에 발자국을 찍는 일이 아니다. 시대를 지배하는 에피스테메(epistēmē),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담론을 위반하며 자기 길을 가는 것이다.

 

감정 소모 없이 외로움을 극복하는 필살기 - <인 디 에어>(Up In The Air, 2009)

 

제이슨 라이트먼트가 연출한 영화 <인 디 에어>(Up In The Air, 2009)에서 주인공 라이언 빙햄(조지 클루니)은 1년 365일 중에서 43일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공항에서 보낸다. 미국 전역을 여행하는 미국 최고의 베테랑 해고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양육하기 위해서 한 곳에 정착하는 것은 그의 인생 설계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다. 지상에 천척하지 않은 채 그가 가진 유일한 목표는 항공사에서 발급하는 탑승 시간 마일리지 카드의 천만을 채우고, 세계에서 일곱 번째 - 금으로 만든 - 플래티넘 카드를 받는 것이다. 허공을 딛고 사는 듯한 이 황당한 삶의 목표를 가진 라이언의 모습은 유동하는 현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메타포다. 뜨겁게 부딪히는 핫(hot)한 구체적인 삶을 거부하고, 감정 소비를 비난하는 태도를 비난하는 쿨(cool)한 삶을 추구한다. 철저하게 보여줄 것과 감출 것을 구별하고, 감정 소비 없이 인스턴트 관계와 방법으로 외로움과 고독을 잊고자 하는 유동하는 사회의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다.

 

 

정치가 점유했던 권력이 자본으로 이동하면서, 국가는 감시와 처벌 평가 기구로 전락했다. 1997년 IMF와 이후 ‘88만원 세대’의 성장을 우리 사회가 경험했듯이 국가가 감당해야 할 책임은 개인에게 전가되었고, 모든 실패의 책임이 개인의 어깨에 떨어지고 있다. 바우만은 액체 근대는 삶의 실제에서 시간과 공간이 분리된다고 본다. ‘가속’의 개념으로 공간과 공간 사이를 가로 지르며 둘 사이의 거리감이 사라진다. 시간이 공간 보다 우위를 점하면서, 공간에 따라서 경계를 이루었던 견고한 삶은 무너지고, 이동의 속도와 이동의 수단은 권력과 지배의 가장 주요한 도구로 격상되었다. 더 값싼 노동력을 있는 - 권리 주장을 덜 하는 - 지역으로 이주하려는 다국적 기업과 자본은 국경의 경계를 넘어 가볍게 돌아다니는 것이 힘의 자산이 되었다. 이윤 창출은 견고한 관계 속에서 오랫동안 유지했던 신뢰가 아니라, ‘생산품의 순환과 재활용, 노화와 폐기와 대체 과정에서의 경탄할 만한 속도“에 있다. 오래된 것은 혐오의 대상이 되었고, 신상(품) 소비는 능력을 입증하는 중요한 의례가 되었다.

 

불확실성으로 유동하는 사회

 

사랑이 넘실거리던 자리에는 욕망이 자리를 잡았다. 인터넷이 매개가 되면서 욕망을 해소하는 일회성 만남이 잦아진다. 신용카드는 소비의 자유를 가능하게 만들었고, 여성의 몸은 성형외과 의사의 경작지가 되었으며, 의사들은 질병의 치료자가 아니라 - 약을 필요로 하도록 잠정적 환자를 만드는 - 질병 홍보 역할을 맡게 되었다. 건강은 복지 정책이 아니라, 부의 소유 여부와 비례 관계를 형성했으며, 문화는 백화점의 상품처럼 소비재로 취급되었다. 배우는 일은 즐거움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의 생존방식이 되었다. 교육은 급속한 변화에 뒤처지면 안 될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책상 앞에 앉아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사무직원이 화장실을 청소하는 미화원 보다 거의 열배 가까운 임금을 받고, 키보드를 만드는 제3세계 노동자보다 “백배나 많은 임금”(194쪽)을 받고 있다. 공동체의 버팀목이었던 탄탄한 유대는 전지구적인 자본의 힘으로 해체되고 있다. 유동의 시대는 과잉이기도 하지만, 배제이기도 하다. 새로운 직업과 일자리가 창출 되고 있으나 실업이 급증하고, 영세 기업은 사람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SNS는 국경을 해체하고 세계를 단일 공간의 무정부주의로 만들었으나, 바로 옆에 살고 있는 이웃과의 관계를 단절시켰다. 프리랜서 고소득자가 가시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반면, 많은 사람들이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고 있다.

 

여전히 미완인 근대의 기획

 

근대가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발전을 통해서 개인을 평등한 상태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근대는 아직 도달하지 않았다. 바우만은 그러한 근대를 지연하고 있는 것이 ‘유동하는 사회’라고 얘기하고 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유동하는 액체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들을 낯설게 보는 것이고, 자기 안의 또 다른 자아와 독백 형식의 대화를 나누는 일상의 회복이다. 깃털처럼 가벼운 외투를 벗고, 견고한 강철 전투복이 필요한 시간이다.

 

고독을 회복해야 할 시간

 

바우만의 편지는 테이블과 찻잔을 앞에 두고 마주 보고 앉아서, 삶의 끝자락에 더 가까이 가 있는 노(老)학자의 말씀을 듣고 있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아마도 가까운 지인을 앞에 두고 얘기하는 마음으로 글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의 사적 삶과 취향쯤으로 가볍게 지나쳐도 괜찮을 것 같은 생활 세계에 대한 심도 있는 통찰은 우리가 일상을 얼마나 섬세하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만든다. 사회학적 토대에서 만들어내는 적절한 은유가 빛이 나는 책이다. 우리와 다른 공간에서 쓰인 책이라고 볼 수 없는 깨알 같은 즐거움도 있다. 헐리웃 대중영화처럼 치부할 <블레어 워치>와 <로니의 침묵>을 유동사회의 텍스트로 가져온 점은 거장과 함께 동시대에 같은 것을 경험하는 유쾌함을 선물한다.

 

아쉬움은 편지 형식에서 필연적으로 수반할 밖에 없는 문제점이다. 2년 동안 2주마다 썼던 편지 모음이다 보니 주제가 다양할 수밖에 없다.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겪고 있는 문제와 쟁점이라는 측면에서 거대 담론이 바우만 개인의 생활 세계와 중첩하면서 간결한 글쓰기는 사실상 불가능했으리라 짐작한다. 44통의 편지는 방대한 주제에 걸쳐 있기 때문에 장과 장의 연결이 매끄럽지 않아서 구조화가 되어 있지 않다. 파편화된 글들은 ‘고독’이 필요하다는 하나의 주제로 묶이기에는 다소 산만하다. 책 제목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까닭에 결실을 생산할 수 없는 현대인의 삶에 대한 핵심 메타포로 받아들이는 것이 타당하겠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은 『액체 근대』(강, 2009)를 읽었던 독자라면,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바우만과 담소하며 사색의 길을 함께 산책할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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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
하비 리벤스테인 지음, 김지향 옮김 / 지식트리(조선북스)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불안과 공포 속에서 생산되는 음식 신화 『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

하비 리벤스테인 지음, 김지향 옮김, 지식트리, 2012 . 08.

 

환자에게 죄의식을 갖게 하는 무수한 담론들

 

몇 년 전 아빠가 위암에 걸렸다. 암에 걸리셨다는 사실 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주변 사람들이 보여주는 나름의 진단과 처방이었다. 성향 자체가 스트레스를 오래 품는 성격이 아니었고, 한평생 음주 · 흡연 · 식탐과도 거리가 멀었으며, 몸 쓰는 일을 바지런하게 해 오셨던 아빠였다. 위암 발병의 마땅한 이유를 찾지 못한 사람들은 평소 아빠가 어울렸던 친구들을 문제 삼았다. 우리가 모르는 스트레스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거나, 잠깐 실직했던 시기의 마음 고생이 암을 키웠을 것이라는 등 다채로운 원인을 찾아냈다. 식습관과 질병의 전문가인양 의도하지 않은 비난으로 환자를 힘들게 했다. 어떻게든 발병의 원인을 환자로 귀인하려는 주변인의 태도는 아픈 사람이 ‘죄책감을 갖게 하는 지름길이었고, 치유의 시간은 회한과 번뇌의 눈물겨운 갱생의 과정이었다.

 

처방은 당연히 그동안 즐겁게 먹었던 식사 패턴을 뒤집는 일이었다. 일상생활의 섭식을 바꾸는 한 인간의 혁명 같은 시간이 수년 동안 이어졌다. 모든 음식은 미각을 자극하는 취향과 멀어졌고, 음식은 ‘약’과 동의어가 되었다. 절식과 절제만이 생존의 조건이었다. 절제는 미덕이 아니라, 도덕이 되었다. 음식과의 투쟁은 지루하고 길게 이어졌다. 위암에 걸린 만화가 이현세씨가 몇 년 후에 마실 '소주 한잔‘을 위해서 금주하고 건강을 관리한다는 기사를 접했던 적이 있다. 풍요는 숨은 굶주림과 짝패를 이루면서, 먹고 싶은 것을 먹기 위해서 몇 년쯤은 참아야 한다는 역설이 지배하기 시작했다.

 

먹거리에 대한 공포로 이윤을 챙기는 사람들

 

유물론적 시각에서 ‘현재의 나’는 그동안 내가 먹어왔던 음식들이라고 정의했을 때, 식탁에 올라있는 음식들에 대한 성급한 판단과 공포를 잠시 중지하고, 그 음식에 대하여 깊게 사유하고 성찰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는 한때 우리 식탁에서 사랑받았으나, 어느 시점에서는 독약으로 치부되었던 음식들의 역사를 되짚어 보게 한다. 음식 역사학자인 저자 하비 리벤스테인(Harvey Levenstein)은 음식과 자본의 역학 관계를 역사적 사실과 기록을 토대로 분석한다. 일례로써 메치니코프가 요구르트를 통해서 막고자 했던 자기 중독, 맥컬럼이 발견한 비타민 결핍에 따른 문제점이 어떻게 거대기업의 이익 창출로 이어졌는지를 분석한다. 또한 안젤키즈박사가 위험을 강조한 고지방식품의 콜레스테롤, 저지방 건강식으로 각광받기 시작한 지중해 식단을 분석한다.

 

음식에 대한 공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에서 출발했다. 과학자들에 의해서 온갖 종류의 세균들이 발견되자, 청결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고 ‘파리와의 전쟁’이 시작된다. 영유아 사망률의 주범이었던 비위생적인 우유는 캠페인의 힘으로 완전식품으로 탈바꿈한다. 장내 자가 중독 문제만 해결하면 인간 수명에는 한계가 없다고 주장했던 메치니코프는 소극적인 방법으로 요구르트를 선택했다. 71세의 나이로 메치니코프가 죽게 되자 건강식품으로 수명을 다한 것 같았던 요구르트는 편리성과 맛을 광고하며 다이어트 식품으로 부활한다. 미국 중산층 문화의 상징인 가든 그릴에서 구워지는 스테이크는 열악한 도축 환경, 가공 식품의 공포, 슈퍼 박테리아 0157, 광우병의 공포에도 불구하고, 미 농무부와 FDA의 친절한 보호막 속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엄마의 사랑 - 추억의 원기소, 비오비타, 에비오제

 

비타민의 발견은 3대 영양소인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의 전환을 가져왔다. “비타민이라는 용어의 특별함은 단어 자체에 ‘인간의 삶과 활력에 필수적인 무엇’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147쪽). 슈퍼맘은 자녀의 종합 비타민을 챙길 줄 알아야 한다. 나의 유년이 생각나는 지점이다. 온가족이 식사 전후에 챙겨먹었던 ‘강력 비타민 원기소’와 '에비오제'가 마치 엄마의 사랑과 건강의 상징처럼 느껴졌던 시절 말이다. 당시 유아의 우유병에 타주던 비오비타는 엄마가 자식에게 보여주는 사랑의 상징적 의례였다. 모유 대신 우유를 먹는 아이의 결핍될지도 모를 영양소를 보충하고, 장을 튼튼하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웬만큼 사는 집에서는 모두 복용했던 - 거의 식품에 가까운 - 영양제였다. 실험집단과 통제집단 사이에 비타민 복용의 효과 차이가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여전히 비타마니아는 백화점 지하 매장과 약국을 호황으로 만든다.

  

이제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식품으로 옮겨 왔다. 히말라야 고지대 샹그릴라의 건강한 사람들의 식사가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거기에 히피와 신좌익은 자연식품에 푹 빠지기 시작한다. 대형 식품업체의 가공식품과 거리를 두는 것은 그들의 가치관에 합당한 것이었다. 자연식품과 유기농식품은 이제 상류층의 주류 식문화를 형성한다. 사람들의 관심은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는 것으로 옮겨간다. 지방은 악마의 화신이 된다. 유방암과 심장법의 주범으로 콜레스테롤이 언급되면서, 지방과 콜레스테롤 섭취를 낮추는 것이 잘 먹고 잘 사는 법이라는 상식이 유통되고, 세계의 식탁은 지중해를 모방한다. 지중해 기후에서 재배되는 올리브, 와인, 토마토가 건강의 비법으로 유통되고, 한국 또한 와인와 올리브유 소비가 급격하게 증가한다.

 

독약과 보약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음식들

 

식품에 대한 유익성 논쟁은 수십 년에 걸친 전복의 과정을 거쳤다. 저자는 동일 식품에 대한 상반된 평가의 원인을 정부, 전문가, 식품업계의 의견이 언론을 통해서 보도된 결과라고 본다.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모순된 메시지의 결과는 ‘영양적 불협화음’ 뿐이다(291쪽). 결국 냉소주의와 회의론이 만연하고, 전문가들은 스스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기 시작한다. 전문가들이 주장을 번복하는 논문은 의학 상식이 여전히 논쟁 속에 있는 ‘잠정적 결론’ 단계임을 여실히 드러낸다. 사실 음식은 그 자체의 보편적인 성분만큼이나, 전문가의 판단에 따라서 보약과 독약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상대성을 가진다. 대중의 사랑을 받다가도 호된 비난을 받으며 무대를 떠나는 스타들처럼, 지상의 일용할 양식 또한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호시절 끝에 쓰레기통에 쳐 박히기도 한다. 그 근거를 규정하는 전문가의 발표는 불안을 추인하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쏟아지는 매체 정보에서 의학 또한 예외가 아니다. 라틴어를 독점했던 신학자처럼, 의사만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건강과 관련한 정보들이 얼마쯤은 ‘상식’으로 통용되면서, 의료 권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공중파에서도 건강 프로그램들을 아침저녁 쉬지 않고 방송한다. 종합 병원의 의사들은 대형 병원이 투자한 이윤을 회수해야 하는 영업 사원과 비슷해지기 시작했다. 미용을 위한 시술이 치료 목적으로 행해지고, 예방이 가장 빠른 치료라는 전제 아래에서 과잉 진료가 범람한다. 모든 가치를 자본으로 환원하는 사회에서 ‘슈바이처’를 만날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음식 또한 과잉 정보에서 예외가 아니다. 정보는 유익한 만큼 해로운 것들을 수반한다. 외식 소비와 다이어트, 슬로우 푸드와 페스트 푸드는 상반된 위치에 있지만, ‘자본’을 생산한다는 지점에서 어깨를 나란히 한다. 건강식과 유기농은 상류층의 식탁을 값비싸게 장식하고 있고, 값싼 정크 푸드는 입맛을 평준화하며 하층민의 식탁에 위풍당당하게 오른다. 개인의 식욕은 기획된 식품 광고에 계급과 비례하는 자동화된 무조건 반사 반응을 한다. 풍요는 그 경계 지점에서는 식욕은 자신의 욕망인지 자본의 욕망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과하게 먹는 것은 죄악인가?

 

만일 나에게 질병이 찾아온다면, 그것은 아마도 규칙적이지 못했던 식생활과 고집스럽게 ‘불량식품’을 사랑했던 내 선택의 문제였음을 최종 심급에서 판결 받게 될 것이다. 귀책사유는 결국 음식을 대함에 있어 두려움과 공포를 가질 줄 몰랐던 내 탓일 것이다. 카페인이 몸에 나쁜 것을 알면서도 커피 없이는 아침을 시작할 수 없었던 이십 여 년의 시간들, 스무 살 부터 신(神)와 인간이 유일하게 공유하는 음식이 ‘알코올’이라고 주장하며 위무 받았던 다채로운 술의 종류들, 구강기를 잘못 보낸 탓인지 슬프거나 외로울 때 지나치게 허기를 느끼며 위를 과하게 채웠던 음식들이 나를 공격했다고 믿으며 자책 속에서 죽어갈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규제되어야 할 것들

 

저자 하비 리벤스테인의 문제제기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며, 사족을 덧붙인다. 전지구적인 세계화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신토불이(身土不二)’는 가능성이 희박한 필요충분조건이 되었다. 자발적인 농부가 되어 자급자족한다 할지라도, 그 씨앗은 이미 개종을 거친 수입된 새로운 품종들이다. 세계가 한 식탁에 모여 있다. 한계 속에서 가능한 자율적인 선택의 폭을 넓혀가야 한다. 그런 제약 속에서 볼 때, 불안감을 조장해서 이윤을 챙기는 자들은 그나마 애교 수준이다. 기상천외한 독극물을 음식으로 둔갑시키는 생산자의 끔찍한 행위를 매스컴의 의제 설정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정부와 NGO의 감시와 규제 속에서 불안감 없이 마주할 수 없는 식탁이라면 충분하다. 또 하나의 사족은 『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의 역자 서문이 없음이 아쉽다는 점이다. 번역은 행간 행간에서, 텍스트 하나하나를 고르고 다듬는 역자의 섬세한 선택에 통한 새로운 탄생이고, 진화 과정이다. 이 책에 매료되어서 긴 시간 번역한 저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는 점은 독자에게는 당혹스럽고, 신뢰를 떨어뜨리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각광받았던 식품들의 역사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구슬을 꿰매어 줄 안받침의 튼튼한 실타래가 조금 느슨한 느낌을 주는 책이다.

 

한권의 책에서 모든 혜안을 구할 수는 없다. 음식에 대한 불안 조장과 이윤 추구의 관계를 메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선 하나 구한 것이면 충분하다. 사실 음식 보다 더 치명적인 보균자는 ‘빈곤’이고, 불평등한 식탁보다 위협적인 것은 없다. 식탁을 불평등하게 만드는 다양한 사례들을 살펴보는 것은 이 책을 읽은 독자의 또 다른 선택이 될 것이다. 『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를 통해서 뒤바뀐 식품에 대한 ‘전문 지식’의 발표로 누가 이익을 보게 되는지는 알았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이 책은 전 국민이 의료 생산자의 자본 증식을 위한 소비자가 되고, 일반인이 건강 염려증과 과잉 처방과 진료로 잠정적 암환자가 되도록 두려움을 조장하는 전문가의 주장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도록 단초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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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 마르크스에서 카스트로까지, 공산주의 승리와 실패의 세계사
로버트 서비스 지음, 김남섭 옮김 / 교양인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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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혁명 이후, November를 꿈꾸는

『코뮤니스트』 로버트 서비스 지음, 김남섭 옮김, 교양인, 2012. 8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김기덕은 “백해무익한 감독”이라는 어느 평론가의 평가에 대하여 “감사한다. 그렇게 평하기 위해서 적어도 내 영화를 보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코뮤니스트가 아니면서, 거의 백과사전 수준으로 공산주의 세계사를 인물 중심 연대기로 저술한 로버트 서비스를 떠올리게 하는 발화다. 『코뮤니스트』의 저자 로버트 서비스의 위대함이 거기에 있다. 비판하기 위해서 한평생 내내 가열 차게 공산주의 역사 연구에 매진할 수 있었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나만이 비판할 수 있다는 ‘독선’이 진리라고 믿는 것을 증명하는 기쁨의 상위에 있음을 미처 깨닫지 못한 나의 소견은 일단 여기서 접기로 한다. 서비스가 ‘객관’이라는 기준으로 공산주의를 관통한 것처럼, 나 또한 ‘판단 중지’하고 서비스의 위대한 업적을 관람해야 하기 때문이다.

 

로버트 서비스는 생로병사의 생애를 간직한 유기체를 바라보듯 공산주의 역사를 차근차근 순차적으로 따라 가면서, 20세기 지정학에 맞추어 이데올로기로서의 공산주의를 세밀하게 분석한다. 즉 ‘공산주의 세계사’를 통찰할 수 있도록 구성하여 저술하였다. 저자는 서문에 “백과사전은 아니다.”라고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지만, 서술과 분석은 백과사전으로 분류하기에 전혀 손색이 없다. 마르크스주의가 등장하기 이전의 공산주의 이념,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소비에트에서 체현 과정을 겪으며 확산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2차 세계 대전 이후 공산주의의 변형과 확산, 1980년대 동유럽의 민주화 운동에서 발화한 공산주의의 종언까지를 촘촘하게 기록한다.

 

냉엄한 분석- 객관성의 한계

 

혁명사 분야에서 인정받고 있는 학자 서비스는 방대한 자료 조사를 토대로 철저히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냉정하게 분석한다. 이렇게까지 치밀하게 공산주의를 서술한 책을 완독한 경험이 없다 싶을 정도로 도제 방식의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책을 끌어안고 보낸 한 달의 시간이 아깝지 않을 만큼 배움이 클 수밖에 없는 책이다. 문제는 ‘일관성’이라는 미명 아래 객관성의 한계를 드러낸다는 점이다. 그는 공산주의와 전체주의를 동일시하는 시선으로 코뮤니스트를 평가한다. 선악의 구도로 이분화 하여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대립시키지 않았다는 점이 미덕일 수 있지만, 그만큼 세련된 방식으로 공산주의를 비판을 피하기도 어려운 방식이다.

 

관점을 넘어 서서 ‘객관적’이라는 메스를 가할 때 나타날 수 있는 사학자의 ‘주관’은 또 하나의 편향성으로 작동할 수 있다. 자본주의를 지키기 위한 미국의 ‘철의 장막’은 정당성을 선취한 반면, 소련의 영향력은 강권을 행사한 소비에트 독재로 그려진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서방국가였던 독일, 영국, 프랑스의 좌파 성향을 고려할 때, 미국이 느꼈을 고립감이 얼마나 위협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서구와 차단된 입장에서 소련이 남아메리카의 자본화를 막기 위해서 원조와 문화 산업에 전폭적 지원을 할 수 밖에 없었던 힘겨루기 상황 또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분화 된 세계의 지정학적인 힘의 역동성을 고려하지 않고, 하나의 입장만을 다룰 때 객관은 편향과 동일시될 수 있다. 미국의 메카시즘 정책과 근대화론에 따른 신식민주의 전략 또한 심각한 세계사의 한 부분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실패한 혁명, 그러나 세상의 변화들

 

공산주의가 근대의 ‘과학’이 된 것은 - 저자가 상식을 결여한 것으로 평한 - K. Marx 이후라고 할 수 있지만, 인류가 ‘평등’을 미덕으로 알았던 순간부터 공산주의는 우리의 삶에 깊이 뿌리 박혀 있었다. 마르크스가 “철학자를 위한 철학자”이고, “엄밀함이 부족한” 난해한 코뮤니스트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확신하는 것은, 마르크스 이전과 이후 인류는 전혀 다른 두 세계를 경험했다는 것이다. 소련이 연합 국가를 해체하고, 중국이 천안문 사태 이후 자본주의를 도입했으며, 유일하게 사회주의 국가로 자존심을 지키던 쿠바와 북한이 와해된다 할지라도 코뮤니스트들이 꿈꾸었던 이데올로기는 세계의 가치를 세우는 토양이 되었다. 지구상의 모든 국가들이 ‘복지’라는 이름으로 수용했던 ‘평등’ 개념은 공산주의의 수혈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자본주의를 지킨 유일한 ‘열쇠’가 공산주의였음은 역사가 증명한다. 공산주의가 사라졌다면, 전형으로써의 ‘자본주의’ 역시 이미 오래 전에 지표면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치명적인 ‘내부 모순’은 매 순간 자본주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아직 공산주의 종언을 서두르기에 인류의 밤은 새벽을 맞이할 만큼 깊지 않았다. 새벽은 가장 깊은 어둠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우리를 찾아온다. 경쟁과 양극화,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평가 국가로 전환한 신자유주의의 어둠이 극에 달하는 순간, 역사는 자본주의를 벗어나기 위한 새로운 모색을 시작할 것이다.

 

그래도 접히지 않는 희망 하나

 

『코뮤니스트』를 펼칠 때, 작은 희망 하나가 있었다. (생물학적 나이를 뛰어 넘어) 공동체 속에서 희망을 꿈꾸던 과거의 ‘나’와 만나고 싶었다. 한 달 내내 붙잡고 살았던 책을 덮는 순간, 희망은 싹을 틔우지 못하고 시들었다. 역사 속에서 공산주의가 사라졌다는 마지막 챕터를 덮을 때, 조로(早老)하게 만드는 링거 주사를 팔에 꽂은 느낌이 들었다. 세속적인 지위를 아직 성취하지 못한 청년의 곧고 반듯한 양심을 가지게 만드는 ‘영혼을 깨트리는 도끼 같은 책’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다시 움트는 새로운 희망, 이 책이 - 역자의 바램처럼 - 길을 잃은 이 시대 진보 좌파에게 미로를 빠져나오기 위한 단서를 제공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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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2-09-27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의 입장만을 다룰 때 객관은 편향과 동일시될 수 있다 는 말에 동의합니다..
역시 오랜 시간 끌어안고 읽은 숲님의 리뷰는 다르군요...저는 겉만 살짝거리고 있을 때
속살까지 건드렸군요...^^
저는 정말 재미가 없었어요..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