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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 문학과 예술로 읽는 서울의 일상
류신 지음 / 민음사 / 2013년 12월
평점 :
품절
'산다는 것'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탈주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류신, 민음사, 2014. 1.
<응답하라 1994>는 hot하고 cool한 1994년 서울을 현재 시점으로 호명하였고, 케이블 방영이었음에도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서울에 출처를 두지 않고, 이방인으로 서울에 진입한 이들의 시점과 카메라 뷰포인트를 일치시켜 낯선 서울의 일상을 추억에서 현재로 불러오는데 성공했다. 정주민에게 포착되지 않던 사물과 사건은 이방인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시청자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서울과 드라마 상황을 중첩하면서 각각의 서울을 구성했다. 시청자 각자의 체험과 동떨어져 있는 시공간을 재구성한 것에 불과했다면, 그러한 반응을 끌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나 또한 신간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읽으면서 서울과의 개인적인 접점을 생각했다. 섬세하지 못했지만, 풍부한 느낌으로 기억되는 시절이었다. 지방 출신인 나의 사소한 어투와 취향이 서울 친구들 사이에서 얘깃거리가 될 만큼 그 시절 나는 서울의 타자였다. 호남선 열차를 타고 처음 가보았던 영등포의 밤과 새벽, 잠실 주공 아파트의 산책로였던 석촌 호수에 롯데월드가 들어서면서 주변의 변화되는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서울 역사의 일부다. 늘어선 쇼 윈도우 속에서 서울은 반짝 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삼설 코엑스 쇼핑몰은 그 자체로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이해할 수 있는 범례였다.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저자 류신은 소설가 박태원에 의해 탄생한 ‘구보’와 벤야민의 산책자적 시선을 차용하여 2013년 서울을 산책한다. 객관적인 사실에 의존하기 보다는 저자가 경험한 서울 속에서 여전히 차고 넘치는 자본주의 속성을 섬세하게 호출한다. 구보와 벤야민을 향한 헌정과도 같은 이 책은 다른 시공간 속에서 벤야민, 구보, 류신 세 사람이 함께 산책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동 속도와 시선을 낮추면서 서울은 맨얼굴의 실체를 드러낸다. 도시 거주자에게 보이지 않는 것들이 도시 산책자의 눈에 게스탈트적으로 한꺼번에 속살을 드러낸다.
입체적 공간은 삶의 토대이고 결정자이기 때문에, 존재 방식을 읽어내는 확실한 단서를 제공한다. 미신 대신 과학이, 신(神)이 사라진 자리에 물신(物神)이 서울을 주관한다. 경제적 축적과 행복을 동일시하는 21세기 서울에서 소비 욕망은 그 자체로 삶의 목적이다. 소비를 위해서 일하고, 쉬고, 축적한다. 소비를 위해서 개발하고 부수고 교체하다. 소비는 무사무욕적일수록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시스템에 무소불위의 힘을 과시하는 것은 소비 능력이다. 서울은 자본주의 환등으로 넘쳐 난다.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감싸고 있는 사물들이다. 함성호의 시 “패션은 육체다”처럼 패션은 사물이 아니라 그 자체로 개인의 자아다. “모든 패션은 살아 있는 육체를 무기체의 세계와 결합시킨다. 무기체의 성적 매력에 빠져드는 행위인 페티시즘은 패션을 위한 실수적 신경계다(발터 벤야민) (117쪽).
얼마 전 80년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인사동 카페에서 주인 언니의 하소연을 들었던 적이 있다. 대학생이었던 손님이 어느덧 중년의 사회인이 되는 세월 동안 느티나무처럼 그 자리를 지켰던 주인 언니는 - 이름만 대면 알만한 - 수많은 문화 예술들의 누나이자 언니였다. 그날 밤도 처음 만난 방송국에서 일하는 한 팀과 내 일행은 오래된 지인처럼 서울의 역사를 논했고, 함께 연주를 들으며 술을 마셨다. 연배를 달리했던 사람들이 모여서 각자가 기억하는 한 시대의 서울을 퍼즐처럼 맞추어갔다. 모든 잠든 시간에 서울의 한 카페는 영화 같은 시간들이 추억의 유적을 만들고 있다. 세월이 지나도 잊지 않고 찾아오는 그들의 사랑이 돈 없는 언니의 소중한 자산이다. 조만간 언니는 삶을 일궈낸 터전인 인사동을 떠나야 할 판이다. 치솟는 땅값도 감당하기 어렵지만, 대기업 따님들이 야금야금 인사동 가게를 하나둘 사들이기 시작한지 오래되어 월세, 전세로 운영하는 가게 주인은 오래 버틸 수 없을 것이라 한다. 자본의 환등 성으로 정신적 자산이 하나 둘 사라지고 있다. 월세를 못 내는 언니를 위해서 많게는 몇 십년, 짧게는 수년의 인연을 가진 손님들이 공연을 준비중이라고 했다. 한때 스무살이었던 학생이 중년의 신사가 되어 카페의 명맥을 잊는 실날 같은 생명을 불어 넣는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인사동 카페를 생각했다. 류신이 걸으며 만난 서울의 문학과 예술 탓이리라. 벤야민의 수집가적 정신이 구보를 거쳐 류신으로 이어진다. 이 책을 쓰는 내내 행복했을 저자의 마음이 고스란히 읽히는 책이다. 저자의 스타일리쉬한 글쓰기 또한 한몫하는 책이다. 연구자와 대중작가 사이에서 접점을 찾고자 하는 수고로움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소설처럼 읽히는 재미있는 문학 평론(문화 비평)”을 쓰고 싶었다.”는 저자는“창작과 비평을 합체”하는데 일정 정도의 성과를 만들었다. 단순한 소회에 젖지 않기 위해서 문학 작품들을 재인용하는 장치를 사용한다. 문화 비평가로서 둘 사이의 경계에서 시도하는 글쓰기 방식이다. 곽재구, 김소연, 남진우, 무라카미 하루키, 김영하, 심보선, 함민복, 파묵, 배수아 등 이름을 열거하기도 벅찬 수많은 작품들이 류신에 의해서 재해석된다. 문학 작품은 서울을 해석하기 위한 도구이기도 하지만, 서울을 통해서 의미 있는 비평작업의 주체이기도 하다. 류신의 해석은 우리에게 동일하게 읽히지 않는다. 각자의 눈을 통해서 간주관성을 획득한다. 의미는 작자의 경험에서 접점을 찾아간다.
내게는 “하루 걸어서 하루를 산다.”는 걷기의 달인 이모, 이모부가 있다. “속된 도시” 서울을 탈주할 수 없는 벗들이 너무도 많다. 거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다른 해법을 찾아볼 수 있는 작은 저항을 류신에게서 발견한다. 이 책 하나로 우리는 서로 다른 시간에 함께 걷는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자본주의 물신 지배의 서울 비판만을 위해서 이 책을 쓰지 않았다. 21세기 서울이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탐색에 목적을 둔다. 사랑의 가치는 성패로 결정되지 않는다. 사랑이 없다면 이 도시는 삭막할 것이다.(258쪽) 사랑으로 은유된 이 가치를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지는 우리 각자의 몫일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