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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다 - 김영하에게 듣는 삶, 문학, 글쓰기 ㅣ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글쓰기에 대하여 말하고, 말을 글로 옮겨 다시 『말하다·Talk·言』
김영하, 문학동네, 2015. 3.
1980년대 중학생 시절, 전교생이 매주 월요일마다 일기장 검사를 받았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여행이 수학여행, 재미없는 독서가 독후감 제출 독서, 재미없는 시험이 내신 시험이었다. 자발성 없이 이루어진 일은 배움은 있어도 재미는 없었다. 지나고 나면 모두 다 추억이라고 쉽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내 의지와 무관한 일들을 수없이 하면서 어른이 된다. 여수, 경주, 설악산은 의무적으로 가야하는 수학여행이 떠올라서 어른이 되어서도 오랫동안 그 근처도 가지 않았다. 교과서에 실린 소설과 시는 시험 문제가 떠올라서 오랫동안 ‘문학’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십대의 일기는 둘로 나뉘어졌다. 보여주기 위한 것과 치유 받기 위한 것. 진솔한 일기는 대부분 편지가 되어 멀리 있는 친구들에게 퍼져 나갔고, 보여주기 위한 일기는 다른 반 검사가 끝나면 검사 끝난 친구의 것을 내 일기장으로 속여서 검사 받는 식이었다. 다행이 선생님께 걸리지 않았다. 일기를 빌려준 친구의 이름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안지아. (화교학교에서 전학 왔던 영민한 그 친구는 지금도 안녕하겠지? 부디 그러하기를.) 친구에게 빌려온 일기장을 내가 그냥 돌려 주었을리 만무하다. 유사 문자 중독 증상이 농후했던 나는 친구의 일기를 읽는 첫 번째 독자로서 영광(?)을 누렸다. 지아 역시 보여주기 위한 일기를 썼겠지만, 매력적인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일은 – 일기 내용과 무관하게 – 흥미로운 경험이다.
내게는 치유의 일기장이 따로 있었다. 사춘기가 시작된 중학교 1학년은 미움도 분노도 모두 일기장에 기록했다. 기록은 언제가, 누군가에게 들키게 되어 있다. 음악실에 두고 온 일기장을 발견한 한 아이가 교실에서 큰 소리로 내 일기를 읽었다. 사소한 장난은 여러 사람의 영혼에 지워지지 않는 화인(火印)을 만들었다. 친구들에겐 비방이었고, 내게는 치유였던 글들은 다시 나를 찌르는 비수가 되어 되돌아왔다. 친구들에겐 모욕이었고, 내게는 실연이었다. 일기에 기록된 친구들은 그 날 이후 나에게 등을 돌렸다. 한동안 일기를 쓰지 않았다. 쓸 수 없었다.
일기를 쓸 수 없게 된 아이는 보고 또 보고, 읽고 또 읽기 시작한다. 당시는 시험이 끝나면 전교생이 500원을 내고 영화를 보았다.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음은 같았지만, 영화는 언제나 즐거웠다. 보고 재미있으면 동생을 데리고 가서 다시 보기도 했다. 영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할 만큼 순진했던 시절이다. 그 습관은 오래도록 남아서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시험이 끝나면 (이제는) 자발적으로 영화를 보고, 서점에서 책을 사서 귀가했다. 편안한 마음으로 밤새 읽었던 책들, 도스트예프스키, 헤르만 헷세, 헤밍웨이의 장편 소설들, 안톤 체홉, 오 헨리, 앙드레 지드의 단편들, 삼중당 문고로 만들어진 한국 근대 문학은 자발성에 기초한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자신의 일기와 같은 글들을 기꺼이 내어주는 작가에게 고마움을 느낀 것이. 그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과 지적 허영이 결합하여 책은 꼭 사서 보았다. 빌려 본 책도 서점에 가서 구입했다. 그것이 작가에 대한 최소한의 감사를 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책을 빌려보는 친구를 살짝 경멸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것은 내가 좋은 부모님 덕분에 책값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가난해도 책은 당연히 사서 읽어야 한다는 부모님의 어설픈 교육열도 한몫 했던 것이다.) 어쨌든 영화와 책은 내 성장의 팔 할을 차지했다.
김영하 작가의 신간 『말하다·Talk·言』를 읽다보니 나의 어린 시절 치유와 상처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수면 위로 올라온다. 글쓰기가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내가 쓴 글이 나를 겨냥한 칼날이 된 이후, 글을 쓸 수 없게 된 사태가 나의 존재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떠오르면서 그냥 쉽게 어른이 되어가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말라메르의 이야기처럼 “나는 종이 위에서만 – 그것도 아주 조금 – 존재할 뿐” 이었다. 쓴다는 것은 많은 인간의 존재 방식이라는 것,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는 행위였음을 새삼 깨닫는다. 우리는 누구나 당연히 말하고 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로 인해 각자의 고유한 방식으로 존재론과 인식론이 구성된다. 글을 쓰지 못하게 하는 백 가지 이유가 아니라, 내가 글을 쓰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성찰적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방법이다. 글을 쓰는 순간, 내 삶은 약간의 품격을 갖추어 간다.
『말하다·Talk·言』는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면을 지켜라.
예술가로 살아라.
엉뚱한 곳에 도착하라.
기억 없이 기억하라.
2010년 이후 여러 곳에서 말해왔던 강의의 편집·왜곡을 바로잡고 싶은 작가의 결벽의 산물이고, 말은 글보다 불완전하다는 작가의 신념이기도 하다. 강의에서 들은 그의 ‘말’도 좋았으나, 그의 육성을 가늠하며 읽을 수 있는 ‘글’은 더 좋다. 그의 글과 사유는 낯설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글은 나만 그렇게 생각하며 사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불안함을 제거해준다. 오래전 연암 박지원의 책을 읽으며, 시공을 초월하여 성(性)도 다르고, 계급도 다른 우리가 같은 감수성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 눈물겹게 감사했듯, 나와 같은 허무주의적 실존으로 살아가는 김영하 작가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사실이 한없이 감사하다. (과한 펜심이라고 해도 실제 내 마음에 비하면 지나친 표현은 아니다.) “침범당하지 않는 고독한 개인”임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키워가도록 힘을 실어주는 말들로 가득하다.
언젠가 내가 책을 쓰면 쓰고 싶은 ‘Thanks to“는 다음과 같다.
문학이 절망의 순간에 나의 무기가 될 것임을 가르쳐준 작가 김영하,
자신의 재기와 천재성을 정의(正義) 실현에 유익하게 사용하는 총수 김어준,
세상에 ‘중립’이 존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열어준 앵커 손석희,
공공 건축을 통하여 공간적 사유를 새롭게 할 수 있도록 해주신 건축가 고(故) 정기용
그들 덕분으로 지금 내가 여기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