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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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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얇은 책의 울림, 쉽고 명확한 사회학 개론서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동녘, 2013. 8.

 

뉴스를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보지 않은 상태가 꽤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주장하는 ‘경제 지상주의’가 가속화되고, 모든 가치는 자본으로 환원한다. 과정에 대한 고민 없이 결과에 대한 평가만 이루어진다. 필연적인 결과라고 회피하기에 한국의 상황은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우경화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의무만 남고 시민의 권리는 점차 사라진다. 한동안의 무관심이 만들어낼 결과가 두렵다. 세계에 대한 관심이 그저 관객의 즐거움이 아니었는지 반성하게 되는 지점이다. 아바타의 활동을 지켜보는 수동적인 자리에 놓여 있는 객체의 심정이 그러하다.

 

정량화된 데이터와 단단한 논리로 무장되어 있는 지그문트 바우만을 새롭게 읽는다. “가진 것 마저 빼앗기는 나”라는 부재가 그것을 함의하고 있듯이, 바우만은 우리가 불평등을 감수하는 원인과 사태에 대해서 치밀하게 분석한다. 세계에 대한 성찰과 방향을 제시하는 그의 저서는 동어반복일 수 있는 주제를 매번 쉽고 새롭게 변주한다. 근대 사회의 해체를 보여주는 바우만의 ‘유동성’ 개념은 자본이 기획한 마케팅에서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분석한다. 무의식을 개인 삶으로 환원하지 않고, 사회적 담론의 결과물로 가져왔다는 점에서 사회학자로서 바우만의 탁월함이 드러난다.

 

우리 안의 인종주의

 

학업성취도가 미달인 학생, 학부모와 심층 면담을 한 적이 있다. 성취도 미달 학생의 경제적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고, 부모님이 비정규직, 잠정적인 실업상태에 있는 한부모 가정의 자녀가 대부분이었다. 문제는 하층 자녀일수록 학업 성적 미달을 본인의 능력으로 귀인(歸因)한다는 것이다. 원래 부모님이 공부에 관심이 없고 못했기 때문에 자녀에 대한 기대도 크지 않다고 답변했다.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잘사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팽배했다. 같은 성취도 미달 학생 사이에서 중층과 하층의 의식 차이는 확연했다. 하층으로 갈수록 “어차피” 현재 상황을 극복할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태생이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우리 안의 인종주의는 여전히 신화로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고 있는 신념 가운데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드러내는 일이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검증되지 않은 신화

 

불평등 심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확신에 찬 계몽주의 신념이 자리하고 있다. 다수의 저소득층이 반복되는 불평등을 견뎌내는 것은 “검증되지 않은 신화들” 때문이다. 경제 성장이 최고의 관건이고, 인간의 행복은 소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어느 사회에나 불평등이 존재하기 때문에 경쟁은 자연스럽다는 확신이 존재한다. 일직선의 방향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가정을 전제하고 있는 사회 진화론은 명백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행복은 각자 다른 목적으로 나아가는 과정 중에 있다. 자기 윤리 속에서 자아를 실현하는 주체적인 삶에 있을 것이다. 그것을 방해하고 삶의 목표를 하나로 획일화한 사회가 발전한 사회라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모든 사람을 호명하는 방식이 ‘소비자’로 획일화된다면 주체는 객체로 전락하여 노예적 삶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가난이 가난을 부른다.

 

역설적으로 세계화는 세계를 둘로 분리한다. 밤의 세계지도는 세계가 어떻게 지리적으로 양극화되어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빈자들은 단지 가난하기 때문에 점점 더 가난해진다. 오늘날 불평등은 자체의 논리와 추진력에 의해 계속 심화된다.(22쪽)” 지리적으로 지역적으로 불평등은 노골적으로 심각해지고 있다.

 

 

 

 

  출처 :   http://blog.naver.com/loanbank1116?Redirect=Log&logNo=120175447906

 

개인의 도덕성은 사회의 도덕성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상황이 우리를 도덕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과 공간에서 거시적인 관점과 반복된 사고 패턴을 뒤집는 것이다. 문제를 만들어 내는 악순환의 철도에서 각을 틀어야만 불평등을 향해 달리는 기차를 멈출 수 있을 것이다. 바우만의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는 파이 키우기에 몰두해 있는 우리에게 지금부터는 키운 파이를 어떻게 나눌 것인지에 대한 방법을 모색하게 한다. 경제 성장 근본주의가 주장하는 낙수 효과 신화를 벗어나서, 누가 파이를 독차지하고 있는지를 확인하여 제 몫을 찾아야 할 때다. 번역이 즐거웠다는 저자의 이야기에 크게 공감한다. 새벽을 기다리는 자에게 가장 어둠이 짙을 때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회피하지 않고 문제에 직면하는 것에서 변화는 시작될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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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자유 - 해직기자 김종철의 젊은이를 위한 한국 현대언론사
김종철 지음 / 시사IN북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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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언론, 민중의 벗인가, 공공의 적인가?”에 관한 성찰

『폭력의 자유』 김종철 지음, 시사in북, 2013. 7.

 

쟁점 당사자의 이야기를 좌우 경계 없이 들을 수 있었던 ‘손석희 시선집중’이 지난 5월 방송에서 사라졌다. “십 삼년 간 새벽을 쉼 없이 달려왔다.”는 진행자 손석희. 정론의 장으로 제 기능을 하면서 이른 새벽 서민들의 살아있는 목소리로 삶을 위무해주는 시선집중은 온전히 신뢰 프로세스 손석희라는 주춧돌 위에 세워졌다. 그가 떠난 빈자리가 의외로 컸다. 새벽마다 바른 방식으로 옳은 이야기가 전달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었던 벗을 잃은 기분으로 한동안 지냈다.

 

그가 선택한 곳이 JTBC 보도 담당 사장이었기 때문에 큰 충격은 깊은 상처가 되었다. ‘손석희’ 존재 자체가 함의하고 있는 신뢰 이미지가 그대로 종편으로 넘어가는 듯했기 때문이다. 선택의 깊은 속내와 사정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종편의 태생 자체가 상업성과 선정성 짙은 ‘자본’ 논리라는 것은 이미 상식이다. YTN, KBS, MBC 방송 3사의 공동파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종편 4사는 신문사를 등에 업고 엄청난 특혜 속에서 방송으로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거대 자본과 결탁되어 있는 신문사의 자본 논리 속에서 정론을 펼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공영방송을 지켜보겠다던 언론인들의 최선의 선택이 종편인가?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는 하워드 진의 말처럼 편향되지 않는 객관적인 주장이 결과적으로는 누군가의 입장을 지지하는 결과로 작용할 때가 많다. ‘나는 꼼수다’와 같은 팟 캐스트를 들으며 연대 의식을 느끼는 사람들과 조선일보(TV 조선)가 가장 공정한 방송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함께 듣고 볼 수 있는 언론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태생적으로 좌편향과 우편향은 만날 수 있는 접점을 만들 수 없다. 그들의 관점은 산소처럼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동일한 사건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게 만들 것이다. (좌우가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그나마 걸 수 있는 미디어는 그나마 공중파 3사라는 MBC PD 수첩의 최승호 PD의 주장에 공감한다.)

 

제대로 된 눈과 귀를 가질 수 없는 2013년 대한민국에서 발행된 김종철의 『폭력의 역사』는 지난 언론의 역사를 되짚어봄으로써 앞으로 언론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고민을 이끌어낸다. 객관적인 사실을 기자 출신다운 건조한 문체로 담백하게 기술한다. 한국 언론사라기보다는 한국 근현대사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근현대의 역사적인 사건들이 함께 녹아 있다. 때로는 자본과 결탁한 ‘극악한 압제의 도구’이기도 하고, 때로는 독재 정권에 맞서 투쟁했던 언론의 양면성을 함께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언론인으로서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는 저자의 이야기처럼 독자 역시 자신의 미시사 몇 조각을 함께 포개어 볼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한다. 삼사십 대 독자는 일제강점기, 이승만·박정희 정권을 지나는 어느 시점에서 각자의 사적 경험과 중첩되는 사건의 맥락을 발견하게 된다.

 

한겨레신문 창간에서부터 김종철 논설위원의 글을 꼼꼼히 읽어오던 독자였기에 나에게는 더욱 반가운 책이다. 1975년 동아일보 해직기자로 언론 민주화를 위해서 노력해왔던 언론인으로서 저자의 46년 삶이 곳곳에 투영되어 있다. 87년 6월 항쟁 동안 전 국민의 아름다운 투쟁의 시간이 지나고 난 뒤 그 열기를 투영해서 창간된 국민주주 신문이 한겨레였다. “권력이나 대자본과 하나가 되거나 스스로 권력이 되어 민중을 억압하는 언론은 그 자체가 반사회적이다. 가난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언론이야말로 민중의 진정한 벗이다.” 는 평생에 걸친 그의 신념을 반추해볼 수 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함께 움직이는 데 조그만 힘이나마 보태려고 하던 시절의 이야기”라는 저자 서문에 기대어 읽는다면 오독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일제강점기부터 미군정까지를 제외하고는 정권과 언론의 정책으로 기술하고 있다.

 

언론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던 언론인의 발자취를 되짚는 것 또한 의미 있다. 해직된 언론인들이 ‘민주·민족·민중언론의 디딤돌’이 되었던 <말>지의 송건호 선생님의 이름을 곳곳에서 발견하며 반갑기 그지없다. 독재 정권기의 정경유착, 사법살인, 언론의 합법화 과정이 꾸준히 이어져왔지만, 그 안에서 진보 언론의 자기반성과 개혁을 위한 실천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언론의 사표였던 송건호 선생님께서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신지 십여년이 흘렀으나, 민주주의는 과거로 우회하는 느낌마져 든다. 반면에 기억하고 싶지 않은 - 분신하는 젊은이들을 향해서 신체선호증이라고 호명했던 - 김지하 시인의 생명 논쟁, 노무현에 대한 언론의 사상공세, 노무현 대통령 죽음 전후의 언론의 태도 등은 현재시점에서 다시 살펴보게 되는 지점이다.

 

위키리크스가 일으킨 언론혁명이 우리가 이끌어내야 할 언론 풍토와 어느 정도 근접 거리에 와 있는지 모르겠다. 다만 국정원 부정선거 개입 의혹, 통진당 이석기 내란 혐의, 채동욱 검찰총장 사퇴 등 일련의 사건을 보면서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나의 삶은 언제까지 안전할지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이 모든 사태는 내 삶과 그물망처럼 얽혀 있으리라. 새삼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가 떠오른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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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편 (반양장)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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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 포머 진중권이 제공한 튼실한 사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현대 미술사

미적 가상의 영역을 아예 벗어나 사물의 영역으로 진입한 현대 미술

 

『진중권의 서양미술사-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편』진중권 지음, 휴머니스트, 2013. 4.

 

미학이 세상에 내려와 대중과 소통할 수 있게 한 단초에는 ‘진. 중 .권’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십 수 년 동안 많은 독자들이 『미학 오딧세이』시리즈를 통해서 미학에 입문했다. 번역서 일색이던 미학 서적들 사이에서 진중권의 글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가장 명료한 어법으로 난삽한 미술사의 세계의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헨델과 그레텔의 돌멩이처럼 이정표가 되어 주었던 그의 글은 변증법적으로도 명료한 논리를 갖추었다. 글을 쓸 때마다 매번 소리 내어 읽는다는 인터뷰 기사를 접한 이후에 왜 진중권의 글이 - 난해한 미학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 쉽게 읽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림을 보듯 거리를 두고 진중권의 글을 보다 보면 하나의 문단 문단이 완벽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족 : 학생들의 논술 글쓰기 지도에 더없이 좋은 전례가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번 4월에 출판된 『진중권의 서양미술사-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편』은 2008년 출판된 『고전 예술 편』, 2011년 『모더니즘 편』에 이은 세 번째 책으로 서양미술사의 완결판에 해당한다. 짐작하겠지만, 책 세권에 서양미술사 전체를 담는다는 것은 아무리 해박한 미학자라 할지라도 ‘과욕’이었을 것이다. (이는 진중권이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장담할 수 있다.^^) 단 난해한 서양미술사의 골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책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한다면 나처럼 낯선 미학의 세계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독자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책이 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을 경계로 ‘선언문’을 통해서 미적 가치를 담보했던 예술은 평론을 통해서 인정 투쟁을 벌인다. 무수한 작품 속에서 의미 있는 작품을 발견하고 가치를 부여한 것은 작품 그 자체가 아니라, 평론가들의 몫이었다. 작품은 본연의 미적 가치로 평가되는 ‘작품’이 아니라, 어디에 존재하는지에 따라서 달라지는 ‘사물’이 되었다. 고전과 근대에 비하면 더욱 복잡해지고 다채로워진 현대 미술의 족보를 세우고 지형도를 그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이 책을 읽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복잡해진 현대 철학의 언어는 그대로 미술 작품을 해석하는 연장이 된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철학, 데리다를 비롯한 해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언어를 알지 못한다면 같은 지점에서 반복하는 악몽만 꾸다가 책을 덮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팍스 아메리카나’는 문화에서도 예외가 아니었고, 미국 주도 속에서 예술은 ‘탈정치화’하기 시작한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 된다.’는 포스트 모던이 자리 잡으면서 예술가의 실존은 철저히 개인주의적인 것(18쪽)이 된다. “현대적임을 과시하면 등장한 추상 표현주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대립각을 세운다. “교훈적인 예술에 대한 반발, 예술을 위한 예술, 무기로서의 예술에 대한 대극으로 발생한 비정치적 예술이 주요한 정치적 무기가 된 것이야말로 추상표현주의의 가장 비극적인 역설일 것이다.(21쪽)”

 

과거와의 연속선상에서 추상표현주의를 가장 급진적인 형태로 위치시켰던 클레멘트 그린버그와 달리, 회화는 이제 단순히 회화이기를 거부한다. 미국의 회화는 “순수성과 평면성을 향하는 미적 가상의 영역을 아예 벗어나 사물의 영역으로 진입하다. 환영주의를 떨쳐버리려면, 회화가 미적 가상이기를 포기하고 그 자체가 사물이 되는 수밖에 없기 때문(24쪽)”에 형식주의 비평을 넘어 서게 된다. 사물성의 회화는 연극처럼 현전하고, 관객의 참여가 요구되면서 회화의 공간성은 시간성을 획득한다. 단선적인 진보를 전제한 모더니즘의 종언에 따라서 회화에서 역사성이 사라진다. 정치적 연대를 표명한 예술이 사라지면서, ‘미학적 위반’이 ‘예술의 규칙’이 되었다. 대중문화는 고급예술을 위협하는 상황이 되었고, 팝 아트가 오히려 체제 순응적이라는 역설이 발생했다. 반면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에 지친 대중은 복고적인 재현의 방식을 환영하기도 한다.

 

잭슨 폴록의 드립 페인팅과 더불어 시작된 후기 모더니즘에서 형체와 배경은 제각각으로 해체된다. 형체에서 물질로 환원하는 것은 (저자는 과잉 해석이라고 언급했으나) 폴록의 죽음 충동이라는 무의식의 표상으로 분석되기도 한다. 하나의 사건으로 발생했다 사라지는 폴록의 액션 페인팅은 이제 후기 모던의 준거가 되었다. 유럽 또한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의 짝패로 ‘앵포르멜’이 등장한다. 이는 “조형의 원점으로 돌아가 물질에 잠재한 형상의 가능성을 발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전후 모더니즘을 이어간 것은 바넷 뉴먼과 마크 로스코의 색면추상이다. 폴록 보다 훨씬 평면적이었으나, “숭고의 체험”을 주제로 내포했다. 1960년대에는 추상표현주의의 대안으로 팝아트가 등장한다. 그림으로 벽에 걸리는 것을 거부한 회화는 이제 퍼포먼스의 형태로 관객 참여를 유도한다. 미셸 푸코가 저자의 죽음을 선언했듯, 이제 예술 작품에서 작가가 사라진다. 또 모더니즘과 대립되는 또 다른 방식으로 개념 미술이 등장한다. 이제 회화는 ‘미술관에 전시되는 것이 아니라 잡지에 기고“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자신의 작업실이 공장(factory)이기를 바랬던 앤디 워홀(영화 <팩토리 걸>을 보면 예술가 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앤디 워홀을 엿볼 수 있다.)은 예술의 독창성에 문제 제기한다. 반면 전후의 유일한 혁명적인 아방가르드로 상황주의가 등장한다. 해프닝과 다다이즘, 복고적인 형태의 신표현주의까지 후기 모더니즘은 방대하고 난삽한 길을 가고 있다.

 

모던과 포스트 모던의 경계에서

 

후기 모더니즘이 근대와의 연속인가, 단절인가의 논쟁 속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다 보니 “네가 본 것은 네가 본 것이다.”는 명제가 새삼 화두로 떠오른다. 『진중권의 서양미술사-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편』이 다채로운 현대 미술을 이해하기 위해 참조해야 하는 책인 것은 분명하다. 단 저자의 주관적인 평가는 적고, 지극히 사실과 예술가 각자의 주장으로 가득 차 있으니, 저자의 특허가 되어 있는 ‘독설’은 기대하지 마시길.

 

다양한 페르소나를 가지고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트랜스 포머 ‘진중권’이지만, 그는 역시 미학자일 때 가장 숭고한 재능을 발산한다. 사회적 쟁점의 태풍의 눈에 위치해서 구경꾼조차 피로할 정도의 논쟁을 해나가거나, 케이블 채널의 오락 프로에 깜짝 등장해서 시뮬라시옹 진중권인지 시뮬라르크 진중권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을 만큼 방대한 활동량을 자랑하는 에너자이저지만, 역시 그는 최첨단의 사이버 미학까지 섭렵한 현재와 미래를 수렴해나가는 진정한 미학자다. 저자 서문에 “지붕에 올라갔거든 (진중권의) 이 사다리를 치워버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인용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붕위에서도 진중권이라는 사다리를 치울 생각이 없다. 아직은 그를 통해서 미학을 관망하는 태연한, 맹목적인 독자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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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젠의 로마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몸젠의 로마사 1 - 로마 왕정의 철폐까지 몸젠의 로마사 1
테오도르 몸젠 지음, 김남우.김동훈.성중모 옮김 / 푸른역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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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과 문학, 실증주의와 구성주의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한

『몸젠의 로마사 1 - 로마 왕정의 철폐까지』

 

테오도르 몸젠 지음, 김남우.김동훈.성중모 옮김 / 푸른역사 / 2013년 3월

 

역사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구성주의는 역사는 해석을 통해서 끊임없이 재구성되면서 새롭게 쓰인다고 보는 반면, 실증주의는 역사는 영구불변의 객관적 사실로 존재는 것으로 본다. 영국의 역사학자 카(E. H. Carr)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역사는 text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해석을 통해서 새롭게 구성되는 context임을 강조한 말이다. 동일한 시공간을 갖는 역사가 무수한 역사학자에 의해 다시 쓰이는 것을 보면 충분히 납득할만한 주장이다. 반면 “근대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독일의 역사학자 랑케(1795~1886)는 실증적인 역사 서술을 강조했다. 사료(史料)에 충실한 객관적 서술이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선입견과 편견에 치우치면 안된다고 보았다. 상반된 두 입장이 모두 충분한 타당성을 갖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의 입장만을 고수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둘 중 어느 하나의 관점을 취사선택해야 한다면,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유용하게 활용할 수도 없을 것이다. 역사는 text로 존재하지만, 각각의 시대적 담론에 따라서 얼마든지 재해석되고 새로운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단 text가 가지고 있는 실증적인 측면을 간과한다면 역사는 fiction과 다르지 않다.

 

현미경과 망원경의 적절한 활용

 

구성주의와 실증주의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일관된 기술을 해나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역사서가 숱하게 쏟아져 나오지만, 스테디셀러로 사랑받는 책이 흔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때 장편 역사서가 날개 돋듯이 팔려나간 적이 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크리스티앙 자칼의 『람세스』의 흥행으로 역사도 소설처럼 읽을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동시에 역사는 기술하는 사람이 어떤 관점과 취향을 갖고 있는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역사적 사실의 어떤 부분을 현미경에 올리고, 어떤 지점을 망원경으로 바라볼 것인지는 온전히 저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어떤 장비를 가지고 어디에 시선을 두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실루엣의 역사를 만날 수 있다.

 

앞서 역사관을 장황하게 서술한 까닭은 『몸젠의 로마사 1』을 소개하기 위해서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역사학자 테오로드 몸젠(Theodor Mommsen, 1817~1903)의 『로마사 1』이 번역되어 새 봄부터 독자와 만나고 있다. 몸젠의 첫 책을 읽다보면, 역사 기술의 객관성을 담보한 문체의 감수성이 탁월하고, 역사를 바라보는 적절한 무게감을 유지하고 있음을 담박에 알 수 있다. 방대한 사료 속에서 어디에 중심을 둘 것인지를 심사숙고하게 선택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단언컨대 로마사를 다룬 책 중에서 몸젠의 책만큼 균형감을 가진 책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인물과 사건을 중심으로 역동성 있게 구성하지 않았지만, 각각의 문헌에서 주제에 합당한 사료를 적절하게 배합하여 로마사를 구성하였다. 고전문학자인 만큼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의미 있는 자료를 취사선택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역자들의 번역 또한 훌륭하다. 역자들(김남우, 김동훈, 성중모 옮김)이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몸젠의 로마사를 번역하게 된 계기와 번역을 위한 별도의 인터넷 공간을 만들고 번역의 과정을 기록하고 개방하는 것을 보면, 몸젠처럼 협업이 역사학자에게 필수적임을 이미 관통하고 계신 분들임을 알 수 있다. 몸젠의 로마사를 읽다 보면 아무리 뛰어난 역사학자라 할지라도 혼자서 해낼 수 없는 방대한 작업이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각 민족의 언어 체계,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유지하고 발전시킨 시스템을 한명의 위대한 역사학자 혼자서 분석하여 기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몸젠 역시 협업을 통해서 이 위대한 책을 인류의 유산으로 남겨 주었다.

 

『몸젠의 로마사 1』는 로마사로 국한되지 않는다. 객관적이고, 비교론적이며, 상대론적 관점에서 로마와 주변 민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몸젠의 역사에서 신화를 철저하게 배격한다. 로마의 역사라기보다는 이탈리아의 역사이고, 희랍과의 비교 속에서 이해되는 로마인의 이야기다. 희랍과 이탈리아를 바라보는 시선이 매우 객관적이어서 두 나라의 장단점을 명확하게 지적한다. 희랍과의 비교 속에서 로마가 제대로 보일 수 있도록 기술하였다. “희랍인은 구체성·구상적인 반면 로마인은 순수하고 투명한 추상성, 희랍 신화는 인물 중심, 로마 신화는 개념 중심, 희랍에 자유가 있다면 로마에는 필연성”이 주도하였다. 로마인은 홀로 존재하지 않았고, 곱트, 이집트, 아르메니아, 희랍과인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했다. 언어를 분석해보면 이탈리아의 초기 민족은 이아퓌키아, 에트루리아, 이탈리아인이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희랍 사람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애국심을 갖고 있었다. 로마인들만이 고대의 모든 문명 민족을 통틀어 유일하게 자기 통제에 기초한 국가 체제를 통해 민족 통일을 이루는데 성공한다. 민족 통일 덕분에 로마인들은 마침내 분열된 희랍 민족을 넘어 전 세계를 지배했다.”(41~43쪽)

 

사적 기억, 공유의 힘, 인류의 자산

 

책과 다소 거리가 있으나, 기록이 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몇 가지 사적 에피소드가 있다. 기억은 망각되기도 하고, 미화되기도 한다. 증거가 없다면 조작은 온전히 기억하는 자의 몫이 된다. 초등학교 6학년이 시작되면서 도시 학교로 전학을 가야했던 나는, 동시에 서울로 전학 가는 친구와 십년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다. 사춘기의 일상의 소소한 일들과 선택의 순간마다 일기장 대신 친구에게 편지를 쓰곤 했다. 지역적으로 멀기도 했고, 그 친구는 가족 전체가 서울로 이사를 갔기 때문에 방학 동안에도 시골집에서 만날 수 없었다. 오직 편지 속에서 우리는 가장 가까운 친구이고 서로의 상담자였다. 십년에 십년을 더한 어느 날, 소포 하나를 받았다. 긴 세월 내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복사본이 담겨 있었다. 내가 쓴 편지가 다시 나에게 돌아온 것이다. 이사 다니면서 편지를 챙기지 못한 나와 달리 친구는 내가 보낸 편지를 힘들 때마다 꺼내보며 소중하게 간직했고, 다시 나에게 선물해주었다. 놀라운 것은 각각의 편지를 쓸 당시 나의 심경이 그대로 느껴질 만큼 기억이 또렷해졌다는 것이다. 다소 미화되었던 유년기 나의 문학성에 대한 환상은 사라졌지만, 환상의 자리에 만만치 않은 십대를 보냈던 나의 상처와 영광이 오롯하게 문자로 기록되어 있었다.

 

영화 <엔딩 노트>(Ending Note, 2011)는 말기 암 판정을 받은 60대 한 남자가 어떻게 생을 정리하는지를 보여준다. 감정에 치우쳐 슬픔에 빠져있기 보다는 침착하게 자기의 지나온 삶의 과정을 정리한다. 지금처럼 1인 1카메라를 소장하고 다니는 스마트 월드가 아닌 20세기 후반부를 살았던 남자였지만, 사진, 동영상 등 풍성한 자료가 남아있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랐다. 단지 한 개인의 생의 기록이 이렇게 잘 남아 있다면, 일본이라는 국가는 얼마나 많은 역사적 자료를 가지고 있을까 유추해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진에서 한순간도 자유로울 수 없는 지형적 특성이 소멸에 대한 준비를 하게 하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기록하는 자는 기록으로 한생을 더 얻게 될 것이다.

 

수년 전 KBS의 젊은 기자가 한 돌이 지난 쌍둥이 중 한 아이, 아내와 여행을 떠났다가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를 보았다. 쌍둥이 중 한 아이는 기자의 부모님 댁에 남겨졌다. 그 사연을 보고 나니, 생면부지 기자의 사고와 남겨진 아이가 혼자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서 기자의 이름을 검색해 보니, 그가 운영하는 블로그가 있었다. 성실한 블로그였던 그는 자신의 기사를 스크랩해서 올리고, 사회적 쟁점에 대한 생각을 적어 놓았다. 한 집안의 책임 있고 반듯한 남편,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가득 담긴 사적 글과 사진들이 유언처럼 남겨져 있었다. 천천히 그가 남긴 아름다운 기록을 보면서, 남겨진 아이가 자라서 이 블로그를 보게 된다면 부모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간직하며 좋은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기록은 놀라운 힘을 갖는다. 객관성을 담보하는 역사는 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소통을 통해서 새롭게 재구성될 때 생생한 힘을 갖고 새로운 역사로 거듭날 것이다. 몸젠처럼 방대한 문헌 속에서 흩어진 사료들을 잘 엮어내고, 사소하게 흘려보낼 수 있는 사료에서 중요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는 역사가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겨우 『몸젠의 로마사』1권이 출간되었다. 앞으로 만나게 될 아홉 권의 책에 대한 기대감이 실로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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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3-05-25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숲님의 리뷰는 시간에 쫓기어도 급하게 쓴 흔적이 없어요.
한 땀 한 땀 정성이 들어간 걸 느끼겠어요...^^
뭐 그꺼이꺼 대충~ 이라고 자기합리화에 익숙한 저로서는 조금 부끄러워지게 하는 글이에요,,,ㅡ.ㅡ

잘 읽고 갑니다~
5월도 이제 얼마남지 않았네요..
평가단도 얼마남지 않았고,,
 
[투게더]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투게더 -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리차드 세넷 지음, 김병화 옮김 / 현암사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이원화된 세계를 극복하기 위한 해법 『투게더』

 

리차드 세넷 지음, 김병화 옮김, 현암사, 2013. 3.

 

사탕 속에 감추어진 몸에 좋은 쓴 약

 

운명처럼 내게 도달한 『투게더』는 가벼움과 녹녹함으로 대면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물론 책 제목이 주는 편안함이 있고, 독자에 대한 세심한 배려로 읽기 좋은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사탕처럼 달달해 보이지만, 몸에 좋은 쓴 약이 코팅되어 있다. 읽고 나면 되새김해야 할 주제가 명확한 이 책은 런던정경대학교 사회학 교수인 리처드 세넷의 3부작 기획의 두 번째 책에 해당한다. “손으로 생각한다.”는 장인 정신에 이어 협력은 천성이 아니라 실기(實技)임을 논증한다. 변증법적 대화가 목표를 공유하고 함께 나아가는 것이라면, 리처드 세넷이 강조하는 ‘대화적 대화’는 다름 속에서 오해를 이해의 방식으로 수용하는 단계의 협력이다. 그는 “뒤르켐의 연대, 베버의 윤리와 소명의식,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능력, 부르디외의 실천이성(9쪽)”을 ‘협력’(together)으로 새롭게(쉽게) 변주한다.

 

불평등을 영속화하는 유기체적 분업체계

 

뒤르켐은 사회분업체계를 민주주의의 바탕으로 보았으나, 실제에서 보면 민주주의에 위배된다. 유기체적 노동분업구조가 효율적이라는 관점에서 기능론은 사회 구성원은 각자의 능력에 합당한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머리를 담당한 사람이 지력(知力)을 사용하여 구상을 하면, 팔과 다리를 담당한 사람은 실행을 한다. 사회를 이분화하는 분업 체계는 자연스럽게 위계를 형성하여 계급, 지위, 권력을 계층화한다. 팔과 다리 역할을 하는 노동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한 기계적인 일, 플라톤이 언급한 노예적인 일을 하게 된다. 노예적인 활동이 사회를 위해 유용할지라도 노예는 매우 한정된 기술을 사용할 뿐, 자율적인 결정권을 가지지 못하고 자기가 하는 일의 충분한 의미를 인식하지 못한다.

 

집단의 지적 성장과 사회적 유용성

 

근대의 노동자 역시 성장의 경험을 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플라톤의 관점에서 구상하는 철학자, 실행하는 노예를 누가 담당할 것인지는 ‘천성’에 달려 있다. 문제는 이 천성이 사회구조 속에서 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노동이 왜곡되고, 노동자가 소외를 경험한다면, 인간으로서 성장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천성은 타고나는 것만은 아니다. 반복되는 좋은 습관은 취향이 되고, 취향은 제2의 천성이 된다. 타고난 조건과 관계없이 누구나 - 영혼과 육체, 흥미와 도야, 경험과 사고, 놀이와 학습, 노동과 여가의 이원화를 극복하고 - 개인의 세계의 통합 과정에서 성장해야 한다. 누가, 어떤 일을 담당하더라도 지성의 존엄이 발휘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력을 쓰는 것과 유용한 일이 통합될 때 성장과 사회적 유용성을 담보할 수 있다. 단지 기계적인 효율성을 높인다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월등이 많을 수밖에 없다.

 

『투게더』는 집단의 ‘생각하는 손’이 민주적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는 관점에서, 협력이 형성되는 과정, 오늘날 협력이 약해진 까닭, 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선천적으로 인간 삶의 기예였던 협력이 생존을 위해 요구되었음을 에릭슨과 프로이드 이론으로 설명하고, 어떻게 협력이 삶의 기술로써 활용되었는지 역사적 사례를 분석한다. 어린 아이는 협력을 통해서 자유를 얻는다. “따로 서기 전에 함께 서는 법을 배운다(38쪽). 사회적 존재인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협력은 사회화의 선결 조건이다.

 

생존의 방식이었던 협력은 산업사회의 불평등이 확산되면서 약화되기 시작한다. 유년기 사회화 기관인 학교에서부터 협력이 사라지고, 삶의 근본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함께 생활하는 이들과의 협력과 소통 부재의 자리를 SNS를 통한 피상적인 (보여주는) 관계가 차지한다. 이 과정에서 일과 놀이, 동료와 친구, 화이트 칼라와 블루 칼라가 분리되면서 구상하는 사람과 실행하는 사람이 이원화된다. 노예적 삶에는 “손으로 생각”하는 노동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명령하는 사람과 복종하는 사람이 나뉘면서 작업장은 무례해지고 협력과 신뢰는 약해진다.

비슷한 사람과의 연대인 부족주의는 “협력의 검은 천사”이고, 또 다른 의미의 인종주의다. 불평등이 증가할수록, 계층이 분화할수록 사람들은 남보다 높이 계층의 사다리를 오르기 위해서 더 이상 협력하지 않는다. 학교든 직장이든 어디에서나 사일로 효과(silo effect)가 나타난다. 조직 내에서 유용한 정보와 자료가 서랍과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어도 절대 공유하지 않는다. 왜소해진 인간관계로 인해 조직의 풍토는 척박해진다. 다변화하는 복잡한 사회일수록 협력이 필수임에도 불구하고 협력하는 기술은 사라진다.

 

자족적인 실행으로서의 협력의 방식

 

『투게더』는 고프만의 “자족적인 실행”으로써 의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한 롤랑 바르트가 『사랑의 단상』에서 보여주듯 언어가 관계 속에서 어떻게 끊임없이 변주되는지를 떠오르게 한다. 반복을 통해서 상호작용으로 자리한 의례는 행위의 이면을 보게 한다. 악수는 단순한 신체 접촉을 넘어선 의미를 함유하고, 음식은 영양분이 아니라, 사랑이기도 하다. 출근길 부부가 주고받는 “사랑해”는 “잘 다녀오라.”는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연극처럼 시간, 공간, 함께하는 사람에 따라서 다른 배역을 요구된다.

 

리처드는 사회학이 실천적 학문임을 이 책에서 명백하게 드러낸다. 협력을 하나의 기술로서 일관되게 탐구하는 그의 자세는 독자를 배려한 글쓰기 방식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관찰하지 않는 사람은 이야기를 잘할 수 없다.”(39쪽) 협력을 위해서는 타인의 이야기에 감정을 이입해야 한다. 이것은 상대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단계를 넘어서고, 공동의 목표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변증법적 대화를 추구하지 않는다. 이는 대화를 통해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비록 공동의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더라도 서로 다른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각자의 생각의 지평을 넓히는 “대화적 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대화적 대화는 오해도 서로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필요하다.

 

아비투스와 망딸리떼는 리처드 세넷에게 ‘체화’로 구현된다. 음악가의 악기, 노동자의 연장은 사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의 일부다. 협력을 체화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한 가지 스포츠에 능숙해지거나 수준급의 연주 실력을 갖추거나 혹은 장롱을 만드는 데 숙달되려면 1만 시간을 수련해야 한다고 한다. 이는 대략 네 시간씩 5, 6년은 수련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시간만 채운다고 해서 반드시 유능한 축구선수나 음악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원래 재능이 있는 상태에서 시작한다면, 장기간 노력하여 연습하면 안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다.”(322쪽)

 

자기다운 삶을 지켜나가기 위한 고민을 시작하며

 

“19세기 역사가 야코프 부르크하르는가 근대를 ”잔혹한 단순화의 시대“(442쪽)이라고 했듯, 푸코는 근대에 기획된 인간의 얼굴이 조만간 모래밭에서 파도에 쓸려 내려갈 것이라고 했다. 플라톤 이후 인간의 삶이 얼마나 ‘인간다움’을 겸비했는지 모를 일이다. 다만 이원화된 사회에서 지력(地力)을 사용하는 노동자를 찾아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기 삶의 주체로서 나다움, 나답게 사는 일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 이에게 선물이 될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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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3-05-25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공감!공감!..^^

꽃도둑 2013-06-07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좋은 리뷰로 뽑히셨군요..
파트장님이 글을 제대로 보는 안목이 있어요...
숲님, 축하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