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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기담 - 고전이 감춰둔 은밀하고 오싹한 가족의 진실
유광수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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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 옛 이야기의 표피 속에 깊게 박혀 있는 숨은 의도 해독하기

 『가족 기담 - 고전이 감춰둔 은밀하고 오싹한 가족의 진실』유광수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2012. 7.

 

가족은 “신(神)이 주신 선물”이라는 축복의 말이 있다면, “남들이 보지 않으면 버리고 싶은 것”(기타노 다케시)이라는 반대의 표현도 있다. 고립무원 같은 세상에서 우리를 위로하고 어루만져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가족이지만, 서로에 대해서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는 것도 가족이다. 인연으로 엉킨 실타래는 풀기도 어렵지만, 최악의 사태에서 가위로 잘라낸다 해도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유전인자와 환경 조건이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무수한 감정과 행동은 ‘인간다움’이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을 이끈다. 존재론적 고민의 끝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 바로 인생은 우아한 세계에서 만들어지는 고결한 관념의 총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근대 이성에 반기를 들고, 무의식의 엄청난 힘을 인식하게 했던 프로이드(Freud)의 정신분석학은 가족 관계, 특히 부모와 아들의 관계에 집중한다. 3자 관계 속에서 성(性) 충동을 일으키는 에너지가 히스테리와 강박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푸코(M. Foucault) 역시 가시적인 권력만큼이나 우리 일상 도처에 퍼져있는 미시권력을 분석하기 위해서 정신분석학의 메스를 가족 안으로 가져간다. 자율은 감시와 처벌 과정에서 훈련된 타율의 다른 이름이다. 가족 안에서 이루어지는 권력은 침실에서 시작하여 사소한 양치질까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가족은 우리 각자 형성하고 있는 정체성의 출발이자, 끝이다. 그 안에서 세계와 나에 대한 정의가 이루어지고, 아름다움과 올바름에 대한 가치가 형성된다.

 

언어 이면의 상징을 듣고 보기 위해서 철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무의식의 분석에 매달리던 시절이 있었다. 의식 저편에서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는 비이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무렵 만났던 브루노 베텔하임의 『옛 이야기의 매력』은 정신 분석을 활용하여 익숙한 옛 이야기를 전복시킨다. 무의식에 억압되어 있는 사회적으로 금기되어 있는 감정이 옛 이야기를 통해서 건강하게 해결되었다는 것이 베텔하임의 견해다. 과거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옛 이야기를 활용하고 있는지 촘촘하게 분석하여 에피소드와 전형이 된 등장인물의 해체한다.

 

개인적으로 우리의 옛이야기도 『옛 이야기의 매력』처럼 구조적으로 분석하는 책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오랜 바람이 있었다. 그 기대 속에서 읽게 된 책이 바로 『가족 기담』이다. 익숙한 이야기들은 앉은 자리에서 통독이 가능 할 만큼 흥미롭게 구성되어 있다. 가족 잔혹사(殘酷史)를 통하여 근대 이전 사회의 시스템과 사회 담론에 대한 인문학적 분석이라는 보는 것이 타당한 책이다. 때문에 부제인 “고전이 감춰둔 은밀하고 오싹한 가족의 진실”이라는 자극적인 표현은 무의미할 것으로 보인다. 국문학자인 유광수는 우리 조상들이 담론으로 유통했던 미담의 아름다운 포장지를 벗기고 이야기와 겹치는 사회시스템을 해부하여 현미경 위에 올려놓고 세포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분석한다.

 

옛 이야기는 시대와 무관하게 오늘날 세태를 읽어내는 단서를 제공한다. 새어머니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장화와 홍련>의 숨겨진 사연은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차마 말해질 수 없는 근친상간의 혐의를 함의한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의 어머니와 <여우 누이> 설화는 맹목적으로 자녀 교육에 헌신하는 한국형 어머니의 모태로 볼 수 있다. 자식을 위해서 간, 쓸개까지 모두 내어주는 어머니, 과잉된 사랑으로 사람 새끼를 여우 새끼로 만드는 부모들에게 준엄한 메시지를 전한다. 명문대 진학을 인생 최고의 목표로 생각하는 부모는 세상이 자기 자식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실제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실용지(實用知)는 무용한 것으로 취급하면서, 지혜는 고사하고 정보 수준의 지식에 연연해하는 이 시대 부모의 모습이 그대로 읽혀지는 대목이다.

 

반면, 시대가 달라지면서 이야기에 담긴 가치가 전복되어 정반대 좌표에 놓이는 경우도 많이 있다. 효도가 사회를 유지하는 가장 지배적인 담론이었던 조선에서는 부모를 위해서 자식의 목숨까지 내놓는 것을 최고의 효(孝)라고 칭송했다. 반면 보험료를 타기 위해서 아들의 손가락을 자르게 한 현대의 아버지는 “짐승만도 못하다." 는 사회적 비난을 피해갈 수 없다. 자식의 생사여탈권을 부모가 소유하였던 폭력 사회를 읽어낼 수 있는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 학생 인권 조례 통과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더디게 권리를 인식하고 인정해 가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가족기담』에서 가장 많은 지분을 할애하고 있는 분석은 ‘성(性) 차별’의 시대 윤리다. <홍길동전>은 적서차별을 극복하기 위한 급진적인 소설이었지만, 처첩의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 사회를 비판적으로 보는 한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극에 달한 상황은 기녀에게 요구되었던 순결이다.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가 빚어낸 ‘지조 높은 기녀’는 <춘향전>에서 잘 볼 수 있다. “19세기에 창작된 한 소설을 보면 입이 떡 벌어진다. 남자들은 이젠 기녀들에게 절개가 아니라 순결을 요구한다. 그녀들의 처녀성을 요구한다. 기녀와 처녀성. 근본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그것을 이야기의 중요한 핵심으로 사용한다. 남자들의 꿈과 환상은 이제 로망을 넘어 ‘노망’ 수준으로 치닫는다(94쪽). 정절과 포로노그피를 동시에 꿈꾸는 남성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인 여성의 삶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했음을 가늠할 수 있다.

 

의식과 무의식 두 소리를 모두 들을 수 있는 통찰을 얻는 것이 ‘나’를 제대로 아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통찰의 과정에 조상 대대로 내려온 이야기가 매력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 국문학자인 저자는 가족 이야기를 정신분석학에만 국한하여 분석하지 않는다. 담론을 생산하여 사회시스템을 유지하는 중요한 기제로 작동하였음을 밝히는 동시에,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가족 안에서 겪고 있는 상황을 빗대어 위무한다. 무능한 가장으로서 가족 안에서 타자화 된 이시대 아버지의 무기력을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두 이야기가 <흥부전>과 <효녀 심청>이다. “할 수 있는 것은 새끼 내지르는 일 뿐”인 흥부 이야기는 우애(友愛)를 주제로 다루고 있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무능한 남편, 동생, 아버지가 어떤 모습인지를 절절히 보여준다. ‘사람은 좋다.’ 는 말이 있듯이 무능한 사람의 인간성 좋음 만큼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것도 없다. 무능한 아버지의 대명사는 역시나 심청이의 아버지 심봉사일 것이다. 눈 뜨겠다고 자신의 딸이 바다 한가운데 던져지는 상황을 만든 아버지는 과연 어떤 존재일까? 효의 대표적인 이야기로 미화되기에는 허술한 측면이 있다.

 

국문학자가 분석한 “옛 이야기”를 읽었으니, 다음은 심리학자가 분석하는 ‘옛 이야기”의 해설서를 읽어보고 싶다. 옛 이야기의 표피 속에 깊게 박혀 있는 숨은 의도는 맥락과 맥락 사이의 빈 공간까지 촘촘히 읽어야만 해독 가능한 암호들이다. 『가족 기담』은 무의식을 찾아내기 위한 과도한 비약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이야기의 숨겨진 주제를 탐색하기에 충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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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2-09-21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숲님 리뷰를 읽으면서,내가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정말 잘 쓰고자 했다면 이렇게 썼을 거야....하고 생각하게 하는 리뷰에요.. ^^ 딱 내스탈이야~~~ㅎㅎ
그리고 늦었지만 '이달의 당선작'에 당선된 거 축하드려욤,..^^


2012-09-25 15: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9-25 1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더불어숲 2012-09-25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힘을 주는 나의 서재 친구, 꽃도둑님!
같은 '스탈'이라는... 기쁜 말씀, 선물로 받습니다.
감사해요~!! 힘나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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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배신 - '긍정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워킹 푸어 생존기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최희봉 옮김 / 부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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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식을 넘어 선 수치심과 만나다

『노동의 배신』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최희봉 옮김, 2012. 6. 부케

 

얼마 전 삶에 대한 성찰이 부족한 사람들의 기사를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들었다. 배달사원의 승강기 이용 금지와 관련한 것이었다. “반드시 계단을 이용해서 배달해야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강력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것이 강남 대형 아파트의 각 동마다 붙었다고 한다. 주민 이용의 불편도 있고, 승강기 이용이 공용 전기세의 부담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라는데, 그들의 경제력을 고려한다면, 전기세보다는 엘리베이터를 자유롭게 이용하지 못하는 불편함이 물론 컸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의 품격 상 - 한 공간에서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두 인간 종의 마주침이 불편했을 수도 있을 터이니 - 막아야 할 상황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더 기막힌 일은 십년 이상, 하루 열 시간 강남에서 배달사원으로 일 했다는 어느 익명의 인터뷰이(interviewee)가 말하는 생활상이었다. 이렇게 기사화되기 전에도 주민들의 눈치가 보여서 되도록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앞으로 일하기가 더 어려워졌다고 하소연했다. 동료 중에서 무릎 성한 사람이 없는데, 그 중에서도 자신은 괜찮은 편이라고 한다. 이주일에 한번 무릎에서 피를 뽑는 그녀의 삶이 괜찮다면, 그 외의 배달사원이 겪고 있을 통증의 강도는 짐작키 쉽지 않다. 새벽에 일하기 때문에 주부들이 선호하는 일, 투 잡(two job)을 할 수 있어서 이 일을 선택한다는 그들에게, 자신의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가? 치통 한번이면, 독감 한번이면 쉽게 무너지는 것이 우리가 꿈꾸는 관념으로서의 고상한 삶의 실체다. 그 위태한 삶에서 자신만만하게 기득권을 주장할 수 있는 뻔뻔함을 가능하게 하는 시대 담론이 그대로 읽히는 에피소드다.

 

김일란 홍지유 감독의 <두개의 문>은 우리에게 더 바짝 다가온다. 생존권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위법행위가 ‘진압’의 대상이 아니고, ‘섬멸’의 대상이 되었다. 2009년 1월 발생한 용산 사태는 꿈의 도시 서울을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라는 미명 아래, 합법적(?) 폭력이 어디까지 가능한지의 기준을 만든 희대의 사건이 되었다. 사건을 진두지휘한 경찰청장은 국회의원 후보로 세상에 나왔고, 당시 대법원 판결을 한 주심판사는 대법원장이 되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배경에는 불관용 정권을 끝없이 관용한 시민의 불감증이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는 이명박 정부를 선택한 우리시대의 모든 사람이 감당하고 가야 할 죄 몫이 있고, 그 자리에 있었던 경찰, 특공부대, 용역, 철거민의 지울 수 없는 심리적 외상이 있으며, 여섯 분의 가슴 아픈 희생이 있었다. 직접적인 가해자들이 책임지지 않는 상황에서 4년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상영 시간 동안의 어둠이 나의 부끄러움을 덮어 주는 외피가 되어 주었는데, 영화관 밖의 햇빛 탓에 세상은 너무도 역설적이었다.

 

 

남의 집을 짓느라 자기 집을 짓지 못했다는 공공건축가 ‘고(故) 정기용 건축가님’의 특강 녹화 본을 다시 보았다. 다큐 <말하는 건축가>가 다 보여주지 못해서 답답했던 건축가의 진의를 다시 배우는 기쁨이 있었다. 일민 미술관 전시회에서도 마주할 수 없는 공공건축에 대한 그의 신념은 그가 지은 - 자식과 같은 - 건축물들에 오롯이 새겨져 있다. 그 공간은 사람과 사람이 넘나들고, 사적 공간의 개별성과 자연의 조화를 함께 끌어안는 공공 삶에 대한 희구였다. 정읍, 순천의 어린이 도서관, 김제 지평선중고등학교, 무주의 공공건축물을 간간히 거닐며, 이 시대를, 이 땅을 거쳐 간 그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오래오래 간직할 것이다. 누군가는 자본축적을 위해서 건물을 상품으로 만들고, 누군가는 삶을 안받침 할 수 있는 예술로써 공공의 터전을 창조한다. 누구도 기웃거리지 못하도록 성벽처럼 쌓은 높은 담벼락과 거대한 철문 하나로 세상과 단절한 졸부들의 사적 공간이 아니라, 옆집과 내 집 담벼락 위에 널빤지를 얹고 파를 심은 화분을 함께 나누어 쓸 수 있는 소박한 삶의 공간인 주택의 가치를 소중하게 담아내야 한다. 여기에는 각 계급의 사회·문화·경제 자본이 만들어낸 아비투스를 사이에 둔 상징투쟁이 있겠으나, 그것이 누구의 승리가 될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서사가 길었던 것은 내가 이미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을 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을 밝히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대의 모든 한국인은 이 책에 공감하거나, 최소한 이해할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다. 바버라가 이야기하는 십년 전 미국 3D업종의 실태는 고스란히 현 한국 사회의 자화상이다. 누구의 추천이 없더라도 - 책상머리 글쓰기를 거부하고, 삶 전체를 이동시켜 온몸으로 경험하는 체험형 글쓰기로 유명한 - 열정적인 저널리스트이며 사회운동가인 저자의 전작을 읽었던 독자라면, 망설임 없이 부키에서 출판한 『노동의 배신』을 선택할 것이다. 적어도 독서와 독후감이 우리의 온 몸을 휘감고 있는 며칠 동안, ‘워킹 푸어’의 희생 위에 만들어진 우리의 안락하고 안정된 삶의 실체와 직면하게 될 것이다.

 

통증이 지배하는 세계

 

50대 저널리스트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워킹 푸어의 삶을 연구하기 위해서 그들의 동료가 된다. 식당 종업원, 요양원 · 호텔의 청소부, 청소 용역회사의 직원, 월마트 직원까지 몸소 체험하며 혹독한 트레이닝을 밟는다. B학점의 노동과 F 학점의 일상으로 평가받는 그 세계는 병든 신체의 통증이 지배한다. 쉴 새 없이 음식을 나르고, 다른 사람이 사용한 변기의 오물을 닦아내며, 다음 노동을 위해서 음식을 공급하는 것이 식사의 유일한 목적이다. 돈을 지불했기 때문에, 그 노동을 향한 감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의 기준에 하찮아 보이는 일에도 배우지 않고 터득할 수 있는 일은 없고, 모든 직종에는 그들만의 고유 법칙(노모스)이 존재한다. 지나치게 많이 아는 것을 피하고, 자신의 능력을 모두 보여줘서도 안되며, 내일을 위한 에너지를 반드시 비축해야 한다. 신속하게 일하지만, 동료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육체노동자들이 가져야 할 미덕이다. 그들은 혼자 벌어서 혼자 쓰는 사람이 아니다. 지금의 강도 센 노동을 얼마 후에는 멈출 수 있다는 희망 없이 부양가족을 등에 지고, 머리에 이고 산다.

 

사라진 사람들

 

쉬지 않고 일하는데도 더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면, 분명 사회시스템에 문제가 있다. 그들에게 긍정의 마인드를 요구하는 것은 노예가 되라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70년대 박정희 독재 정권의 저임금 · 저곡가 정책과 유사한 정책이 지속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인플레이션의 영향을 덜 받는 의료비와 식비, 열심히 일해도 감당할 수 없는 집세의 불일치 속에서 가난을 자기 탓하며 살아간다. 집값의 민감함을 임금이 따라잡지 못한다.

 

경제적인 소외는 문화의 소외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빈민들의 문화는 이미 오래 전부터 대중문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재벌들의 권력 다툼, 중산층의 사랑과 이혼이 드라마를 장악했고, 예능·오락 프로그램의 패널들이 보여주는 철없는 순진함은 너무 일찍 생존의 책임자로서 어른이 되어버린 그들의 품성과 동떨어져 있다. 화면에 비춰진 중상층의 라이프스타일을 보면서, 불행을 자학 탓으로 가져갈 저소득 임금노동자의 자학 모드는 당연한 일이다. 연봉 몇 억을 버는 사람들, 억만장자인 운동선수들, CF 한편으로 저임금 노동자가 십년 이상 일해야 버는 돈을 받는 사람들, 특별히 일하지 않고 부동산을 되파는 것으로 재벌이 되어 가는 사람들을 대중문화 속에서 익숙하게 본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자신의 객관적 삶의 조건을 드러내기는 쉽지 않다. ‘부자 되기’가 삶의 미덕인 천민자본주의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진통제 없이 일을 할 수 없는 지속적인 고된 노동, 유니폼은 죄수복(135쪽)에 가깝고, 긴 근무 시간과 매 작업에 전력투구해야 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다 보니 시야가 좁아진(76쪽)그들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노력하지 않으면 쉽게 보이지 않는다.

 

왜 악순환은 계속되는가?

 

이 책의 압권은 저자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위킹 푸어의 삶을 분석한 마지막 4장 “왜 악순환이 계속 되는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할수록 더욱 가난해지고, 더 나은 일이 있음에도 새로운 일을 찾지 못하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나 또한 도시 빈민들을 보면서 그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다. 시골에 내려가면, 현재의 노동으로 더 인간적으로 살 수 있는데도, 비싼 집값을 치르면서 수도권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것은 삶의 ‘관성’을 이해하지 못한 자기중심적 사고의 결과다. 모든 인간은 삶의 터전을 옮길 때 강도 높은 마찰을 경험하고,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사람은 기동력이 떨어진다. 정보 또한 권력이기 때문에 워킹 푸어가 취할 수 있는 조언 또한 새로운 선택을 할 만큼 충분하지 않다.

 

물론 근대의 인간은 과학, 정신 병리학, 자본주의의 눈부신 발전과 함께 발명된 합리적 · 이성적 존재로서 동물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그러한 특성 속에서 인간은 지속적으로 학습하고, 관계 지향 속에서 살아간다. 지배 담론의 가치를 내면화하고 갈등을 최소화 하려는 관성 법칙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세계가 유지된다. 지배 권력은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는 직접적인 억압 없이도 - 스스로를 통제하는 미시 권력의 지배를 받는 - 수동적 객체를 무수히 만들어 낼 수 있다.

 

책을 읽는 내내 - 실체인지, 주관인지 모르겠으나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믿는 - 현재의 삶이 그 사람의 인성에서 만들어졌다는 듯이 착각하는 “자기중심적인 중산층 특유의 시각을 가진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삶을 시작하는 존재 기반이 달랐다는 것을 무시하거나, 진실 바라보기를 외면하는 이율배반적인 중산층으로의 나와 대면하게 되었다. 워킹 푸어 보다 훨씬 더 사회적 발언권을 가지고 있고, 상류층보다 도덕적으로 금욕적인 삶이 가능하며, 이유 없이 억울하게 해고될 가능성이 조금은 적은 중산층의 이중성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내 삶이 위험해질까봐 암묵적으로 침묵하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가지고, 바버라가 쓴 『추락의 두려움 : 중산층의 두 얼굴』을 조만간 읽어야겠다.

 

『노동의 배신』을 읽기 전과 읽은 후의 내가 조금은 달라졌다. 안전하다고 믿었던 존재 기반이 흔들렸다. 내 내면을 살짝 금이 가게 한 도끼질을 당한 느낌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착취는 아니다. 노력 이상의 특권을 누리고 있다면, 그것은 누군가 희생한 대가다. 특권과 희생 주체의 서로 다른 연결 고리를 읽게 된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는 달라질 것이다. 저자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말한다.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한참 모자라다. 우리가 느껴 마땅한 감정은 수치심이다. 다른 사람들이 정당한 임금을 못 받으며 수고한 덕분에 우리가 편하게 살고 있다.”(296쪽) 어떤 인간도 내가 한 노동에 비해서 훨씬 적은 보상이 주어지는 노예적 삶을 한없이 수용하지 않는다. 그들이 자기 몫을 요구하는 날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도래할 것이다. 최소 수혜자가 자기 몫을 요구하는 날, 분명 지배 권력은 그동안의 복리까지 충분히 지불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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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숲 2012-08-14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만나는 도끼 같은 책...
몇권을 구입해서 이 시대 청춘들에게 권하고픈 책을 만났습니다.
이 책을 추천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읽는 순간의 떨림, 읽은 후의 만감이 여전하여..
서평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책입니다. 강추합니다.

sick 2012-08-23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실체인지, 주관인지 모르겠으나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믿는.. "자기중심적인 중산층 툭유의 시각을 가진 나 자신"
이상속에서 현실과 대면한 다는 것은 어느정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더불어숲 2012-08-25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순간 일상의 노예화를 경계하려면 용기가 필요하겠죠?
가진 것, 지킬 것이 많다면 더욱 그러하겠고...
자신에 대한 주관과 객관 사이에서 중심을 세우는 것,
그래서, 읽고, 쓰고, 보고,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혼자는 힘들기 때문에...더불어...숲.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
요아힘 나겔 지음, 정지인 옮김 / 예경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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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와 에로스를 간직한 매혹의 대상,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 요아힘 나겔 지음, 정지인 옮김, 애경, 2012. 7.

 

키스를 부르는 관능적인 붉은 입술,

손을 닿으면 금방 깨지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피부,

살해를 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숙명을 가진 자(者)의 처연한 눈빛.

 

뱀파이어를 묘사하고 보니, 이보다 더 매혹적인 대상은 없을 듯하다. 그들 주변에는 공포를 위반하는 에로스적 탐미주의가 가득하다. 뱀파이어가 야만과 공포의 상징에 머물지 않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 적절하게 투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 없는 세계에서 영원한 젊음으로 살아가지만, 그들의 운명은 해피엔딩과 거리가 멀다. 인간이 아니면서도 인간적인 고통으로 고뇌하는 시지푸스와 같은 운명이 독자(관객)를 사로잡는다. 탐미와 비애를 아우라(aura)로 휘감고 탄생하였을지, 긴 세월을 거치면서 진화해 왔을지, 누구나 한번쯤 그(녀)의 운명에 의문을 가져봤을 것이다. 뱀파이어 문화사를 하룻밤 동안 섭렵하다 보면, 연일 계속되는 열대야의 체감 온도를 (적어도) 2도는 떨어뜨릴 수 있지 않을까?

 

■ 내가 만난 뱀파이어

 

여름마다 관객을 자극했던 뱀파이어 영화가 B급에서 장르 대중영화로 사랑 받기 시작했던 것은 닐 조던 감독이 연출한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이었다. 1994년, 한창 꽃미남으로 주가를 날리던 브레드피트, 탐 크루즈, 당시 열 살이었던 커스틴 던스크가 등장했던 이 영화는 기존의 B급 뱀파이어 영화와 구별된다. 앤 라이스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하였으나, 닐 조던 감독의 탁월한 미장센 연출로 원작 이상의 매력을 발산했다. 방송작가를 찾아와 인터뷰를 요청하는 - 이백년을 살아온 - 아름다운 청년 루이(브레드 피트), 죽음을 갈망하지만 죽을 수 없는 레스타트(톰 크루즈), 루이가 사랑하는 고아 소녀 클로디아(커스틴 던스트)의 욕망, 사랑, 복수는 전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이틴 로맨스로 각광 받았던 <트와일라잇>은 시리즈로 제작될 만큼 십대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시리즈는 각각의 작품에 따른 질적 편차가 있었으나, 원작에서 빚어진 환호성을 고스란히 이어갔다. 여주인공인 고등학생 벨라, 꽃미남 뱀파이어 에드워드, 둘 사이의 늑대인간 제이콥의 사랑 이야기를 모르면 대화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팬텀(phantom)에 기초한 목숨 걸고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는 남자,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운명적인 사랑, 온 세상이 한 여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순정 만화의 환상과 뱀파이어의 결합이었다.

 

뱀파이어를 조금 더 예술로 끌어올린 영화는 <렛미인>(Lat Den Ratte Komma In)(2008)과 <박쥐>(2009)였다. 두 편의 영화는 뱀파이어 영화의 새장을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북유럽 스웨덴의 차가운 기온을 담고 있는 <렛미인>은 뱀파이어의 숙명과 딱 들어맞는다. 못된 친구들에게 호되게 당하는 외로운 소년 오스칼, 창백한 피부의 음울한 소녀 이엘리는 이 세상의 유일무이한 친구가 된다. 이름을 알린 배우가 등장하지도 않고, 명망 높은 감독이 연출한 것도 아니었던 이 영화는 평론가와 관객의 찬사를 동시에 받았다. 슬픈 사랑은 흑백으로 이루어진 감각적인 영상으로 관객을 전율케 한다.

테레즈 라캥( Therese Raquin)에 대한 헌사이기도 했던 박찬욱 감독의 <박쥐>는 피를 탐하는 자기의 생존 욕구와 신앙심의 충돌을 잘 그려냈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뱀파이어가 된 상현이 태주라는 여성을 만나면서 인간적인 쾌락과 욕망에 빠져드는 과정이 - 사진을 배열한 것처럼 - 미학적으로 아름답다. 욕망을 억제하고, 수줍게 움츠려 있던 태주는 상현을 통해서 뱀파이어가 되면서 인성이 바뀐다. 태주가 본능대로 행동하는 생기발랄한 모습이 매력적이다. 인간다움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상현은 진지함과 코믹의 양가감정을 동시에 보여준다.

 

■ 뱀파이어의 사회·문화사

 

뱀파이어는 예술매체의 텍스트로 다양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지속적으로 문학, 영화, 음악, 만화의 소재로 변주되는 이들에 대한 궁금증으로 접근해야 하는 책이 바로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다. 저자는 문학연구가이자 문화사가로서, 예술가의 인생을 주로 다루어 온 요아힘 나겔(Joachim Nagel)이다. 이 책은 신화, 민담, 문학을 거쳐 연극, 영화, 음악, 애니메이션까지 전 방위로 활약(!!)하고 있는 뱀파이어의 역사를 주도면밀하게 추적한다. ‘뱀파이어 역사 사전’ 이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뱀파이어의 사회·문화사를 고대부터 현대까지 빈틈없이 담아내고 있다. 고대의 신화 세계, 중세의 민담과 소설, 현대의 스크린과 연극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뱀파이어를 모두 만나볼 수 있다.

 

고대 뱀파이어의 선조는 대부분 여성이고, 신(神)의 영역에 속하였다. 중세 기독교가 지배했던 시기조차, 미신은 가장 오래된 믿음으로 모든 신앙에 뿌리 내렸다. 기독교도, 합리주의와 계몽주의도 뱀파이어를 제거하지 못했다. 오히려 이성의 배후에서 그들의 세력을 키워갔다. 신(神)의 영역에 있던 뱀파이어는 이제 귀족으로 문학사의 한 장을 차지하기에 이른다. 괴테의 『코린트의 신부』라는 담시는 검은 낭만주의의 서막이었고, 호프만의 『뱀파이어 이야기』또는 『섬뜩한 이야기』는 ‘유령 낭만주의’의 기원을 세웠다. 뱀파이어는 성(城)에서 묘지로 활동 배경을 이동했고, 혐오스런 마녀와 매력적인 여성의 이중성을 한 몸에 지니게 되었다. 그들의 공격은 더 이상 파괴가 아니라, 생의 기쁨이었다. 폴리도리의 소설 『뱀파이어』는 하인리히 마르쉬너의 오페라 <뱀파이어>로 제작되기도 했다.

 

19세기 말, 팜므 파탈 뱀파이어는 상류층 여성의 동일시 모델이었지만, 작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와 화가 롭스, 뭉크는 뱀파이어의 부정적 속성만을 부각시켰다. 이 시기에 피를 빠는 ‘드라큘라’가 등장하고, 1897년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가 출간되었다. 7년에 걸친 조사와 집필, 탐정 소설가 코난 도일과의 친분은 세부사항을 구성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작가는 공포소설·탐정소설·모험소설의 요소들을 노련하게 결합하고, 당대의 정신 병리학과 범죄학에서 얻은 최신지식을 첨가했을 뿐 아니라 실제의 것처럼 보이는 일기에 편지·전보문·신문 기사, 그리고 드라큘라가 잉글랜드로 갈 때 탄 배의 항해일지 등 다양한 기록들을 가지고 실화를 이야기하는 듯 한 서술방식을 채택했다(131쪽). 스토커가 창조한 드라큘라는 스크린 속에서 영원한 삶을 부여 받는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무르나우가 연출한 <노스페라투>(1922)는 드라큘라에게 햇빛의 치명성과 뾰족한 송곳니 두 개를 추가했다. 드라큘라의 현신이라고 느껴지는 - 검은 망토를 입은 박쥐같은 - 벨라 루고시 주연의 <드라큘라>(1931), 송곳니의 전형적인 드라큘라를 보여주었던 크리스토퍼 리 주연의 <드라큘라>(1958),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를 리메이크한 <노스페라투-밤의 유령>(1979),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블램 스토커의 드라큘라>까지 뱀파이어 영화는 지속적으로 제작되고 있다. 공포가 욕망과 쾌락으로, 쾌락은 패러디와 희화화로 변주된다. 슬랩스틱 코미디가 가미된 로만 폴란스키의 <박쥐성의 무도회>(1967), 섹시한 금발 머리 뱀파이어와 드라큘라가 만나는 <못 말리는 드라큘라>(1995), 무르나우 감독이 <노스페라투>를 만드는 과정을 픽션으로 구성한 <뱀파이어의 그림자>(2001>까지 드라큘라는 공포를 넘어 서서, 위트와 유머의 대상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 불멸의 뱀파이어

 

뱀파이어는 앞으로도 새로운 버전으로 모든 예술 영역에서 재창조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인간의 앎이 세상의 모든 부분을 드러내지 못하는 한,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는 한, 인간의 두려움은 뱀파이어와 함께할 것이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은 상상의 세계와 만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갖는다. 도덕과 질서의 범주에서 위반되는 것들이 오직 상상의 세계에서 가능하므로, 예술은 일상 밖의 것을 취함으로써 매력과 매혹을 수반할 것이다. 드라큘라의 사회·문화사를 단순 기술한 것에서 멈춘 점이 아쉬움으로 남지만, ‘영원한 젊음’과 함께 싱싱한 피를 원하는 ‘모든’ 드라큘라를 만나볼 수 있다는 점에서,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는 일독을 권할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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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2-08-11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싱싱한 피= 영원한 젊음' 이라는 공식은 뱀파이어의 생존방식이라는 건데..
그러고 보면 희생자는 항상 젊은 사람이라는 거죠.
저는 사실 뱀파이어가 나오는 책이나 영화를 거의 보지 않는 편이에요. 나름 소심해서요.
그런데 곳곳에서 인용된 문장들 보고 반했잖아요.
너무 매혹적이고 낯선 느낌이 들더군요...^^

더불어숲 2012-08-13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원히, 불행하게 살아가는 뱀파이어...
인간이 아니면서도 인간적으로 고뇌하는 그들... 매혹적이죠.
이제 저는 늙음으로 기우는지...영원한 젊음에 대한 부러움이 역시나 제일 크네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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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첫, 사랑의 화인이 마음 깊은 곳에 아프게 새겨졌던 오래전 그 밤, 더 이상 과거의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사랑은 마주침이었고, 실연은 감당키 어려운 낯선 감정이었다. 사랑은 존재를 바꾸는 몸부림이었다. 다시는 사랑 이전의 내가 될 수 없는 변혁이었다.

 

사랑이 부재한 자리에 ‘책’이 자리를 잡았다. 시공을 초월해서 마주쳤던 저자의 사상(思想)을 빠져나오는 순간, 더 이상 이전처럼 살 수 없는 ‘나’와 마주쳤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가 신의 세계로 빠져 들듯,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직감하는 순간이었다. 나이 스물에 해독 불능의 암호 같은 마르크스의 원전과 해설서를 넘나들던 혼돈의 겨울밤이 있었다. 사회생활의 문지방을 넘어서는 혼란의 시대에 미셸 푸코의 『성의 역사』에서 발견한 자기배려의 윤리로 내 삶을 지켜냈다. 주체적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했던 오만은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과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을 통해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일상을 의심하고, 반추하며 미시권력에 포섭되어 있는 종속된 자신을 도처에서 발견했던 시절이었다.

 

수줍게 ‘성장’이라고 여겼던 그 감정을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의 사사키 아타루는 ‘혁명’이라고 말한다. 현대 일본 사상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비평가이자 젊은 지식인인 사사키는 루터, 무함마드, 니체, 도스토옙스키, 프로이트, 라캉, 버지니아 울프 등 수많은 개혁가와 문학가, 철학가를 통해 ‘책이 곧 혁명’임을 주장한다.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이라는 부재에 기대어야 책이 쉽게 읽힌다. 귀 기울여 경청하듯 사사키의 글을 읽는다. 그의 글이 나와 마주치는 순간, 내 안의 개별적인 추억의 경험을 호출한다. 사사키의 추종자가 될 의사가 없었으나, 그의 책을 이미 읽어버렸으니 돌이킬 수는 없다. 사사키식으로 표현하자면, 책을 “읽었다.”가 아니라, “읽고 말았다.”이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행위는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다. 리뷰를 작성한다는 것은 언어(개념)의 차용이고, 그것은 들뢰즈의 ‘여성되기’이며, 새로운 세계를 수태(잉태)하여 생명을 낳는 과정이다. 텍스트와 텍스트는 서로를 마주하며 새롭게 창조된다. “한 단어로 소홀히 할 수 없는” 번역가의 발가벗는 책읽기 방식이 있다. 같은 책을 되풀이해서 읽는 방법도 있다. 두 방식은 모두 자연스럽게 글쓰기로 연결된다. 무의식의 검열과 억압을 떨쳐내어야만 우리는 비로소 글을 쓸 수 있다. 쓰는 행위는 혼자가 되어야 하는 고독한 싸움이다. 다행인 것은 고통을 넘어설 때 창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여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문학의 승리다. 글을 읽고 쓰는 행위는 광기를 내포하고 있는 신(神) 조차 선망하는 일이다. 정보의 명령에 따르는 노예화에 반(反)하여, 아이를 낳는 것과 같은 문학은 세계를 변혁한다. 둘째, 루터는 문학자이기에 혁명가이다. 대혁명은 성서를 읽는 운동이었다. 루터에게 독서는 기도였고, 시련이었다. 신에게 말하는 것은 행하는 것이므로, 언어는 하나의 행위다. 혁명에서 폭력은 이차적인 것일 뿐, 본체는 텍스트다. 셋째, 무함마드와 하디자의 혁명이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천사를 매개로 신(神)의 말씀을 읽는다. 대천사는 읽을 수 없는 것을 읽게 한다. 문맹에서 벗어나려는 자의 불안을 낮추도록 용기를 주는 이가 있었다. 바로 아내 하디자였다. 이슬람의 최초의 신도는 하디자와 그들의 딸들이었다. 문맹을 극복하고 무함마드는 <코란>을 잉태한다. 넷째, 우리는 이미 읽어버렸다면, 그것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렇게 살아야한다. 역사적으로 앎이 어떻게 통제되었는지를 살펴보면, 문자를 쓰는 것이 특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넓은 의미의 문학은 우리 삶을 통제하는 정보와 구별되어야 한다. 다섯째, 도처에 문학의 사망을 선언하는 말들이 넘실거린다. 이것은 책을 읽으려고 하지 않는 자들의 비겁한 변명이다. 현생인류 호모 사피엔스가 탄생한지 20만 가량이 지났다. 한 생물종의 평균 수명이 400만년이라고 한다면, 인류는 아직 돌잔치도 치르지 않았다. 인류에 의해 발명된 지 고작 5,000년인 문학은 이제 시작일 뿐이며, 380만년의 영원할 것이다.

 

기도하는 손은 책을 읽는 손이 되어서 혁명을 꿈꾼다. 책을 제대로 읽는 사람은 자신과 세계를 동시에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깊은 사유와 독특한 문체로 쓰여 진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텍스트를 읽고 쓰는 일이 얼마나 혁명적이었는지 보여준다. 일본 출판계를 뒤흔들었다던 사사키의 『야전과 영원』의 출판이 은근히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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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사회학자가되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 피터 버거의 지적 모험담
피터 L. 버거 지음, 노상미 옮김 / 책세상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글로벌 트래킹 사회학자, 피터 버거의 일생에 걸친 사회학 여행기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피터 버거의 지적 모험담』은 현존하는 사회학자 중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로 꼽히는 피터 버거의 지적인 농담을 들을 수 있는 책이다. 사회학자로 팔순을 넘긴 세계적인 사회학자가 자신의 사회학 이론과 종교사회학, 지식사회학, 현상학적 사회학에서 남긴 궤적을 회고하는 자서전이다. 『사회학에의 초대』로 피터 버거를 만났던 독자는 자신의 청춘의 한 지점을 되돌아보는 약간의 감상도 곁들이게 되는 책이다.

 

거의 한 세기를 인간과 사회에 대한 성찰로 보낸 팔순 노학자가 삶의 뒤안길에서 쏟아내는 이야기는 탐험가의 기록과 별로 다르지 않다. 인간은 누구도 ‘관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객관성을 담보하는 일은 자신의 삶의 과정을 지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피터 버거는 당파성을 부정하지 않고, 때로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펼쳐간다.

 

사회학가 되는 ‘우연의 과정’에서부터, 세상을 사회학적으로 바라보는 일에서 느꼈던 흥분을 낱낱이 보여준다.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어메리칸이 된 피터 버거는 루터파 사제가 되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막 이주한 미국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 사회학을 배우게 되었다. 우연하게 시작된 사회학과의 만남은 평생에 걸친 학자의 길로 이어졌다.

 

우연히, 실수로 사회학자가 되었다는 것은 유쾌한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마지막 페이지의 장난감 전차 에피소드를 보면 알 수 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선물해준 전차 장난감에서 피터 버거가 느낀 호기심은 기차가 레일을 달린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안에 타고 있을 승객들이었다는 점이다. 승객들과 대화를 나누는 소년은 사회학자가 되어야 할 운명을 타고났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사례 발표다.

 

피터 버거는 사회학자로서 심심할 겨를 없이 인간이 모여 살며 만드는 현상을 연구해왔다. 반대로 대다수의 사람이 사회학을 지루한 학문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정량적 연구만을 중시하는 실증주의와 이데올로기 구호로 선동의 역할에만 치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두 가지 질병과도 같은 사회학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가 선택한 연구 방법이 바로 ‘사회학적 관광’이다. 세계를 대상으로 현장에서 경험한 사례를 분석의 기초로 삼았다.

 

그가 매력적인 이유는 강단 사회학자로 머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글로벌 트레킹 사회학자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세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그는 자신의 사회학적 방법론인 ‘사회학적 관광’으로 온 세계를 탐험했다. 여행지의 풍경이 아니라, 자전적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사회학적 통찰을 제공한다. 또한 커피를 앞에 두고 대화하고, 모임을 만들고, 연구를 하고, 프로젝트를 사용하여 ‘커피 하우스’라는 방법론을 선택하였다. 이 두 가지 방법으로 그가 내린 결론 언저리에서 얻은 답은 “이 사회는 인간이 만든 세계이므로 우연적이며 유동적이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먼 존재는 ‘자기 자신’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행위가 일어나기 전의 ‘의도’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고, 방어기제가 늘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서전은 자기 변명과 옹호로 일관될 수 밖에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피터 버거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근본주의와 근대 계몽주의를 끝까지 고수하고, 종교와 사회학의 접점을 찾기 위해서 ‘방법론적 무신론’을 채택하는 버거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무리 진보적인 경제학자도 가장 보수적인 사회학자보다 덜 진보적이라는 입장을 견지하는 나의 관점에서 볼 때, 피터 버거는 지나치게 보수적인 근본주의자다. 그가 하버드신학대학원생과 런던정치경제대 학생들과 갈등을 겪는 부분을 읽으면서, 진보와 보수 사이의 긴장 보다는 보수 꼴통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그럼에도 이 책의 최고의 미덕은 독자가 느끼게 될 적당한 심리적 무게감이다. 유머가 곳곳에 녹아 있으나 경박하지 않고, 사회학 이론과 만나는 과정이 의미 있게 기록되었으나 지나치게 학구적이지 않다. 그가 사회학을 정의하는 방식 또한 신선하고 명쾌하다. “사회학은 인간 세상의 거대한 파노라마에 변함없이 끌리는 사람,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해 죽겠는 사람, 그래서 필요하다면 열쇠 구멍이라도 들여다보고 남의 편지라도 훔쳐보는 사람에게 매우 적합한 학문이다.”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 나와 만나는 관계성에 대한 성찰적 사유 없이 사회학은 존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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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2-07-30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무엇보다 피터 버거가 새로운 관점으로 접근한 점이나 시도들을 높이 샀어요.
어깨에 힘을 빼고 좀저 가까이 유머스러하게 다가섰다는 점이죠.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 나와 만나는 관계성에 대한 성찰적 사유 없이 사회학은 존재할 수 없다는 마지막 문장에 빚대어 보자면 피터 버거는 어느 정도 접근하지 않았나 싶어요.

무척 덥네요..어떻게 지내고 계세요?,,저는 숲으로 떠나고 싶어요.. 바다 가까이 살고는 있지만 바닷가 나갔다가는 쪄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마구마구 밀려오네요.
저는 본디 숲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계곡물에 탁족이나 하면서 지내고 싶어요..
맴맴맴...아 급 행복해지네요...^^

더불어숲 2012-08-04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회학자가가 보수적이기는...너무도 힘든 일인데, 피터 버거 안의 종교의 힘일까요?
그가 가지고 있는 근본주의가 사회학을 공부하는 학생들과 갈등을 겪었던 것은 필연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종교가 사라진 도처에서 종교가 되어 있는 것...
판단 중지 상태에서... 많은 생각들이 오갔던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