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그리고 저녁
욘 포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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욘 포세는 <시대의 연극(Theater der Zeit)>지와의 인터뷰(『이름/기타맨』, 지만지 고전선집)에서 하이너 뮐러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배웠다고 했다. “문화의 상황은 죽은 자와의 교류 방식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오래된 집’은 포세에게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삶을 조종하는 것은 정체성이 아니라 여러 가지 관계들”이라고 말하는 그에게 가족과 집은 사람들의 관계를 보여주는 무대이다. 『아침 그리고 저녁』에서도 그랬다.

 

 

1부는 요한네스가 태어나는 풍경이다. 2부는 늙은 요한네스가 잠에서 깨어나는 걸로 시작한다. 집은 한 인간이 세상에 속하고 속하지 않게 되는 중요한 장소다. 누군가 떠나고 또 다른 이가 그곳에 살게 되듯이 인간의 몸과 역사도 비슷하다. 사람의 삶은 비슷비슷하고 그들이 사는 바다와 일상도 반복의 연속이다. 어부 올라이와 마르타 사이에 태어난 요한네스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갖게 되었고, 아버지처럼 어부인 요한네스는 에르나와 결혼해 태어난 아이 중 하나에게 올라이라는 이름을 준다. 요한네스의 친구 페테르의 아내 이름은 마르타다. 파도에 이름을 붙일 수 없듯 이름도 사람에 잠시 머물다 간다. 그러나 이 하루는 어쩐지 모든 것이 깃털처럼 가볍고 고요하고 너무 다르다. 온통 이상한 일뿐이다. 페테르는 살아있을 때와 좀 다르고 수시로 사라졌다가 나타난다. 페테르에게 돌을 던져 몸을 통과하는 걸 봤지만 이상하게 적응이 된다. 요한네스는 친구인 페테르가 죽었다는 걸 알면서도 예전처럼 조업을 하러 바다로 가고 하루를 같이 보낸다. 예전에도 겪은 적이 있는데 낚시에서는 아무리 애를 써도 미끼가 가라앉지 않는다. 흠모했지만 주인집의 아이를 배 인연이 되지 못했던 죽은 노처녀 페테르센도 만난다. 죽은 아내 에르나도 여러 번 만난다. 기이한 하루를 보낸 뒤 마침내 요한네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석양처럼 아름답다.

 

 

「하지만 난 자네가 보이는걸, 요한네스가 말한다

몸을 잠시 되돌려받았어, 자네를 데려올 수 있도록, 페테르가 말한다

이제 고깃배를 타고 떠나자고, 그가 말한다

어디로 가는데? 요한네스가 말한다

아니 자네는 아직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구먼, 페테르가 말한다

목적지가 없나? 요한네스가 말한다

없네, 우리가 가는 곳은 어떤 장소가 아니야 그래서 이름도 없지, 페테르가 말한다

위험한가? 요한네스가 묻는다

위험하지는 않아, 페테르가 말한다

위험하다는 것도 말 아닌가, 우리가 가는 곳에는 말이란 게 없다네, 페테르가 말한다

아픈가? 요한네스가 묻는다

우리가 가는 곳엔 몸이란 게 없다네, 그러니 아플 것도 없지, 페테르가 말한다

하지만 영혼은, 영혼은 아프지 않단 말인가? 요한네스가 묻는다

우리가 가는 그곳에는 너도 나도 없다네, 페테르가 말한다

좋은가, 그곳은? 요하네스가 묻는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지만 어떤 죽음에 대해서도 전혀 대비되어 있지 않다. 또, 죽음은 어떻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일까. “진실은 구체적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욘 포세는 죽음이 삶을 말하는 방식과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 소설에서는 내용과 형식도 일치한다. 이 소설엔 마침표가 없다. 당신은 바로 위 인용에서 마침표가 없다는 걸 눈치챘는가?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걸 눈치채는 순간은 모두 다르겠지만 죽음만큼 극명한 사건이 있을까. 행간을 가득 채우는 침묵과 언어의 정제는 노르웨이 피오르 해변에서 살아온 욘 폰세의 정서에서도 기인했겠지만 누구도 삶에서 승리자일 수는 없다는 그의 멜랑콜리 사유와도 무관하지 않다. 범신론에 가까운 무신론을 드러내는 요한네스의 아버지 올라이의 마음에서도 나타난다.

 

「신이 존재하기는 하겠지, 올라이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너무 멀리 있거나 너무 가까이 있다. 그리고 그는 전지전능하지도 않다. 그리고 그 신은 홀로 이 세상과 인간들을 지배하지 않는다, 그래 여하튼 존재하기야 하지만, 창조과정에서 방해를 받은 거지, 올라이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기에 그는 아마도 무신론자인 것이다, 그는 믿음의 서약을 지킬 수 없다, 아니 그럴 수가 없다, 그는 알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척할 수도 없다, 보고도 못 본 칙, 이해하고도 이해 못 한 척할 수 없다. 그리고 그가 아는 것을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의 말로 드러낼 수 없는 것이며, 말이라기보다 어떤 고민일 테니까, 굳이 말하자면, 그의 신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신이 아니다, 누군가 세상에 등 돌릴 때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 그래 이상하게, 그는 그런 식으로 한 개인은 물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올라이는 생각한다. 그리고 거리의 악사가 훌륭한 연주를 할 때, 그는 그의 신이 말하려는 바를, 조금은 들을 수 있다, 그래 그럴 때 신은 거기 있다. 좋은 음악은 세상사를 잊게 해주니까, 하지만 사탄이 이를 좋아할 리 없으니, 정말 훌륭한 악사가 연주를 하려 하면, 그는 늘 많은 잡음과 소음을 준비한다, 정말 끔찍하지, 올라이는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저 방 안에서, 어린 요한네스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다, 어린 요한네스, 그의 아들, 이제 그의 어린 아들은 이 험한 세상으로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살아가는 동안 겪는 가장 힘든 싸움 중 하나일 것이다, 자신의 근원인 어머니의 몸속에서 나와 저 밖의 험한 세상에서 제 삶을 시작해야 한다, 자애로운 신뿐만 아니라 미약한 신이나 사탄과도 연결되어 있으니, 아니, 이제 부질없는 생각들은 그만둬야지, 이게 대체 뭔가, 원 정말이지, 그래그래, 그렇게 생각하며 올라이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요한네스는 자신이 태어나는 순간도 기억하지 못했지만 자신이 죽는 순간도 알지 못했다. 딸 싱네와 마주치지만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순간은 만남인가 이별인가. 하나이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차이가 없는 삶의 리듬 속에 모든 것이 고요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욘 폰세의 언어는 압축된 닫힌 텍스트인데도 이상한 소통과 부재가 넘실거린다. 이 파도는 낯설지 않으면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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