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로 글목을 돌다 - 2011년 제35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공지영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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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어스름 골목길을 돌아 친구의 집을 찾아 간 적이 있다. 익숙하지 않은데다 담에 막혀 다음 골목의 모양과 방향이 알 수 없어 답답했던 기억이 난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그렇게 방향을 바꿔야 할 때마다 고민한다. 그 끝을 알 수 없고 목적지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과정과 결과를 예측할 수 없고 가끔은 상상하지도 않았던 운명에게 허를 찔린다.

인류의 역사는 피의 역사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잔혹한 동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증거는 너무 많다. 잔혹한 종교와 이념 전쟁, 세계대전과 아우슈비츠로 대표되는 대량 학살 등이 그것이다. 프레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인류의 악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 아니어도, 80년 광주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잔인한 폭력 앞에서 수많은 예술가들은 ‘인간’의 존재를 성찰한다. 우리는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가.

35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맨발로 글목을 돌다』는 공지영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지난한 세월을 견뎌낸 작가에게 각종 문학상은 걸어온 길에 대한 평가이고 걸어갈 길에 대한 채찍이다. 그렇다면 공지영의 수상은 전자일까 후자일까. 아마도 전자쪽에 무게를 둔 것이 아닌가 싶다. 블라인드 테스트로 수상작을 결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지난 1년간 발표된 소설 중 가장 탁월한 성취를 이뤘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였을까.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인간에 대한 예의』를 읽으면서 부터였는지 한참 후에 『별들의 들판』,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도가니』를 읽고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공지영 소설은 불편하다. 그 불편함은 공감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한 불편이나 외면하고 싶은 진실에 대한 불편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과잉 때문이다. 후일담이나 사소설에 가깝기 때문이 아니라 말하고 싶지 않은 부분까지 드러내려는 섬세함 때문이다. 그것은 소설적 평가 이전의 문제일수도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재미있다, 감동적이다의 차원을 넘어 숨김과 거리의 차원을 말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대중적 감응력과 조우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해부실 불빛에 드러난 장기처럼 낱낱의 것들을 고스란히 드러내려는 것 같은 문장은 아름답기보다 불편하다. 이상문학상을 수상하기에 충분한 역량과 활동을 보여온 공지영에게 갈채를 보낼 수는 있으나 그의 소설을 이 시대 최고의 소설이라고 인정하기 싫은 이유를 나도 알 수가 없다.

수상작에 대한 찬사와 기대 다양한 해석은 ‘글목’에 모아진다. 치열한 개인적 삶은 결국 세계와 대결을 의미한다. 소설은 이것이 보여주는 다양한 양상을 드러낼 뿐이다. 작가마다 독특한 시선과 개성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우리는 그 찬란한 스펙트럼을 즐긴다. 켜켜이 먼지 묻은 세월의 두께와 발랄하고 신선한 감수성들이 충돌하고 과거와 현재가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그래서 소설은 여전히 우리 삶의 총체성을 짐작할 수 있는 최고의 고전이다. 하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얼마나 잘 담아낼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다. 그것이 문학의 다양성이 사라진 시대라면 더더욱.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읽는 이유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에 대한 경외감 때문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문학적 감수성에 대한 흐름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독자마다 그 이유가 다르겠으나 대상 수상작 뿐만 아니라 우수상 수상작들이 바로 이 시대의 문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지아, 김경욱, 전성태, 김숨, 김언수, 김태용, 황정은 등이 바로 다음 수상 후보자이며 그들의 소설이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물리적인 폭력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고통에 대한 통찰이 문학의 바탕은 아닐까. 공지영의 소설은 시대의 아픔을 넘어 이제 인간의 보편적 고통에 대한 불가해함을 통찰한다. 문장과 표현을 넘어 행간의 의미를 읽어내는 방식은 공지영의 소설을 읽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작가가 지금까지 지켜온 인간에 대한 애정과 세상의 폭력에 대한 저항은 앞으로도 애정을 가지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연민을 느끼게 한다. 물론 이 연민은 작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과 우리 사회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누구나 ‘평범성이 주는 온갖 열락을 향한 은밀하고 애타는 동경’을 가지고 있다. 다만 ‘인간이 성장해가는 것은 운명이다!’

110313-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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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러본다 - 제10회 최계락문학상 수상작 문학과지성 시인선 380
최영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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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멀리 바라보려 해도 인간의 눈은 한계가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마주치는 모든 인연과 무수한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때때로 길을 잃는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사람마다 살아가는 이유와 삶의 목표가 다르겠지만 일상의 갈피 사이에서 사람들은 서로 다른 감동에 휩싸이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한다. 가장 큰 행복이 사람인 것처럼 가장 큰 절망도 사람에서 비롯된다는 자명한 사실.

시를 읽는 행위는 무의식으로 억눌린 감정선의 피복을 벗겨내는 일처럼 조심스럽고 아프다. 타인의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상상의 즐거움을 넘어 확인할 수 없었던 미세한 생의 감각을 일깨우고 타인과의 관계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해주는 것이 시 읽기의 즐거움이다. 최영철의 『찔러본다』는 긴 호흡의 문장에서 만난 쉼표처럼 반갑다.

자연과 일상을 바라보는 개성적인 언어는 공감의 목소리로 잔잔하게 들려오고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특별하지만 낯설지 않다. 시간이 마련해준 듯한 특유의 가락과 리듬은 시 읽는 즐거움을 더해준다.

노을

한 열흘 대장장이가 두드려 만든
초승달 칼날이
만사 다 빗장 지르고 터벅터벅 돌아가는
내 가슴살을 스윽 벤다
누구든 함부로 기울면 이렇게 된다고
피 닦은 수건을 우리 집 뒷산에 걸었다


서시에 해당하는 노을은 시인의 나이를 짐작케 한다. 책날개를 슬며시 열어본다. 1956년생. 누구나 한번쯤 기울지 않고 살 수는 없는 법이다. ‘함부로’가 아니라 ‘선택’과 ‘열정’이었음을 모르지 않을 텐데 시인은 가슴살을 스윽 베인 듯 서늘한 초승달을 바라본다. 차갑고 냉정한 이미지가 전해주는 달의 목소리가 아니라 주관적 시선으로 빚어낸 시인의 목소리에 공감할 수 있어 아슴찮다.

개인적 자아와 사회적 존재의 갈등은 인간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꽃을 기르고 산에 오르고 바다를 바라보는 것은 존재의 시원을 향한 인간의 몸부림이다. 때로는 가슴 벅찬 웃음으로 행복해하지만 눈물과 한숨으로 절망하기도 하는 것이 우리들의 생이다. 그 생의 감각을 오롯이 전해 줄 수 있다면 좋은 시가 아닐까.

눈꽃

이다지 얼어붙은 자리에도
몇 송이 꽃 피울 수 있다니
가타부타 언약 없이 떠난 것들
완고하게 묻고 말았던
땅의 노여움 풀릴 수 있으려나
속삭이다 안 되면 노래하고
노래하다 안 되면 꺼이꺼이 느껴 울던
뜨내기 새의 부리에도 물오를 수 있으려나
삭풍에 묻고 말았던 그날의 맹세, 노여움, 후회
네가 문득 되짚어주었네
글쎄 그 간절한 빛깔이 이 뜨거움이었다는 듯
이 서늘함이었다는 듯
나무의 체온에 기대어서도 녹을 줄 모르는
눈물 한 방울, 두 방울


한 권의 시집을 읽고 가슴에 닿는 시 몇 편을 적어보는 것은 ‘그날의 맹세, 노여움, 후회’처럼 아련한 추억으로 남기도 한다. 그 간절함과 뜨거움 그리고 서늘함을 잊지 않기 위하여 때때로 또 다른 시집을 뒤적이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렇게 아프게 시에 찔린다. 햇살과 비와 바람에 찔려본다. 찔릴 수 없는 것들에 찔리는 것, 찌를 수 없는 것들로 찌르는 것. 그것이 어쩌면 우리 삶의 숙명이 아닌가. 단 한 순간도 기다려주지 않고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시간 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인간의 숙명이 아닌가. 묵묵히 제 길을 걸어갈 뿐. 높은 목소리와 큰 기대는 실망을 가져올 뿐이다. 사소함을 넘어선 모든 순간에 감사하며,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싶어 너를 쿡쿡 찔러본다.

찔러본다

햇살 꽂힌다
잠득 척 엎드린 강아지 머리에
퍼붓는 화살
깼나 안 깼나
쿡쿡 찔러본다

비 온다
저기 산비탈
잔돌 무성한 다랑이논
죽었나 살았나
쿡쿡 찔러본다

바람 분다
이제 다 영글었다고
앞다퉈 꼭지에 매달린 것들
익었나 안 익었나
쿡쿡 찔러본다



110213-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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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1-02-24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인식의 힘님,
제가 처음으로 시집에 리뷰를 쓴 이승희 시인의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리뷰 위에 인식의 힘님의 리뷰가 있어서 알게 되었어요. 틈틈히 눈팅만 하다가 용기내어 덧글 달아봅니다. 그냥 열심히 글만 쓰시는 것 같아서 말 붙이기가 좀....

최영철 시인은 부산 망미동에 사시는데 가끔 이곳 저곳에 나타나시는 관계로 몇 번 뵌 적이 있지요, 문지에서 [찔러본다]가 나온 줄 모르고 있었어요. 그동안 시에 무심했나봐요..
'시를 읽는 행위는 무의식으로 억눌린 감정선의 피복을 벗겨내는 일처럼 조심스럽고 아프다' 하셨는데 공감합니다. 피복이 두꺼운 사람은 느끼지 못할테지만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sceptic 2011-02-27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이렇게 또 인연이 되어 인사를 나누고 함께 읽은 책을 공감하고 대화도 나누게 되네요. ^^

시인의 말을 듣고 싶은 마음조차 소중한 시절입니다...

반딧불이 2011-05-06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찔릴 수 없는 것들에 찔리고, 찌를 수 없는 것들로 찌르는 것' 자연을 느껴보라는 것일까요? 밖에서 소쩍새가 찌르는 밤입니다.

sceptic 2011-05-09 22:27   좋아요 0 | URL
소쩍새가 들리는 곳이 어디인지 궁금하네요. 들어본지 너무 오래됐네요.
무언가 찌를 수 있는 걸 가져야 하는 걸까요...
 
허수아비춤
조정래 지음 / 문학의문학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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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쓰는 내내 우울했다.

조정래의 『허수아비 춤』은 이렇게 시작된다. ‘작가의 말’을 앞세운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우울했다. 조정래의 2007년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삼성 비자금’ 사건은 법무팀장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으로 촉발되었다. 삼성공화국 권력의 심장부에 있던 그의 발언은 차라리 동화에 가깝다고 생각되는 이야기였다. 상식을 가진 대한민국 사람들은 ‘설마’라고 생각하며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우리시대의 우울한 자화상이었다. 2010년 2월에 출간되면서 또다시 세상을 뜨겁게 달군 책이 바로 『삼성을 생각한다』이다. 『허수아비 춤』은 『삼성을 생각한다』의 소설판으로 읽혔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람들은 잊었고 삼성그룹과 이건희 일가를 동일시하는 법의 정서는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었으며 상속문제는 말끔하게 해결됐고 이건희는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그리고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대한민국은 고요하기만하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일들이 벌어졌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고 국민들은 법의 심판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소설같은 이야기가 진짜 소설이 되어 나타났다.

피의 대가를 치러 얻은 민주주의는 ‘자본’앞에 무기력하다. 정치적인 민주주의와 달리 경제민주화는 동의를 얻기가 쉽지 않다. 정치는 멀지만 경제는 가깝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고 싶어한다. 그리고 부자를 부러워하면서도 존경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돈이 권력이고 힘이며 삶의 목표가 되어버린 천박한 자본주의의 실상이 바로 대한민국의 자화상이 되어버렸다. 새해 인사로 ‘부자 되세요’보다 좋은 덕담은 없는 듯하다. 어느 카드 회사의 광고 문구가 이제는 모든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덕담이 되어버렸으며, 그보다 더 명쾌하고 적확한 욕망을 표현한 문장을 만나기 힘들게 되었다.

이 소설은 단순한 사건 중심도 아니고 세태 비판 소설로 보기도 어렵다. 현실은 언제나 문학에 무한한 상상력과 자양분을 제공한다. 단순한 허구의 세계의 아니라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삶을 들추고 세계의 본질을 해석하는 것이 소설의 의무라면 이 소설은 그에 값하는 의미를 지닌다. 자본주의의 이면과 한국형 재벌가의 모순을 파헤치면서 그것이 과연 우리에게 그리고 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짚어보는 역할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더 나은 경제제도를 창출하기 전까지 우리는 자본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다만 제도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운영하는 방법과 인간들의 태도가 문제이다. 삶의 지향점과 가치가 무엇인가를 고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돈의 노예가 되어 인생을 낭비하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꿈꾼다. 그것에 도달하는 방법이 다양하지만 누구도 ‘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 인간의 모든 욕망이 돈으로 환산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는 대다수 사회구성원들과 더불어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보다 나은 삶과 인간다운 가치를 창출하기 힘들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대한민국의 로얄 패밀리와 골든 패밀리의 삶을 조망한다. 모든 사람이 그들과 같은 목표를 가지고 그들과 똑같은 욕망을 추구한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냉혹하게 돈에 휘둘린다. 그런 사회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재와 미래는 자라는 아이들에게 있다. 그들은 어른들의 거울이다. 직업을 선택하고 자신의 꿈을 가꾸는 과정에서 최대의 가치가 돈이 된다면 결코 행복한 삶을 꿈꾸기 어렵다. 현실을 외면하자는 말이 아니라 최소한 정상적인 사회에서 공정하게 경쟁해야 한다는 사실을 자신 있게 말해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법과 질서, 나눔과 배려 같은 정의로운 삶을 가르칠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해야 하는 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 아닐까?

소설의 의미를 따져 묻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문학’이라는 측면에서는 아쉬움도 많이 남는 작품이다. 알지 못하는 추악한 현실을 폭로하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비판적 성찰을 멈추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작가의 의무라는 측면에서는 조정래의 이 소설을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문학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모방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현상들이 초래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한숨까지도 담아내야 한다. 일명 재벌 총수를 위시한 골든 패밀리들의 혐오스런 작태를 폭로하는 데 그치지 말고 열심히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행태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고민이 아쉽다. 평생직장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가꾸어가는 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보는 심정 그리고 그곳이 일터인 사람들의 태도까지 살펴볼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섬세하고 탄탄한 문장으로 조금 더 냉정하고 차가운 시선으로 그들을 묘사했다면 보다 폭넓은 방식으로 이 문제들을 생각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미뤄두었던 소설로 시작하는 한 해가 불편하다. 앞으로도 사람들은 여전히 자본주의의 생리를 몸에 익히고 자본을 욕망하며 타인과의 경쟁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갈 것이다. 다만, 그것이 공정하고 건전한 경쟁이어야 하며, 그 결과가 많은 사람들과 함께 누릴 수 있는 행복이라면 더 좋지 않을까 싶다. 유한한 인생, 지속가능한 사회 그리고 여전히 세상의 모든 진실들을 고민하는 소설들이 읽혀지기를 희망해 본다.


110106-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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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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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가장 가혹한 올가미에 불과하다. 단 한 순간도 시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현대인에게 분절적인 개념의 시간 단위가 편리한 것만은 아니다. 시간은 자연의 흐름을 불연속적으로 잘라내고 구분짓고 규정한다. 따라서 모든 것은 측정할 수 있는 것이 되고 수량화, 계량화 된다. 우리의 삶도 그럴 수 있을까?

철학의 제문제는 체계를 바탕으로 한다. 모든 것을 분석하고 개념화하는 것이 철학의 임무는 아니지만 세계의 본질과 인간의 삶에 대한 명쾌한 해석이 철학의 임무는 아닐까. 윤리학에서 그것이 옳고 그름을 따지고 선악의 가치 판단을 논하기 전에 인간의 문제를 명료화하려는 노력은 우리가 철학에게 기대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학은 ‘대중성’을 바탕으로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읽고 공감할 수 없다면 그것을 위대한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극단적인 예를 들어 단 한 권만 팔린, 가장 훌륭한 문학 작품은 상상하기 어렵다. 예술성과 대중성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래 사랑받는 스테디셀러가 우리 시대의 고전이 되는 것은 자명한 논리이다.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모태로 수많은 책들이 확대 재생산되었다. 프랑스의 철학적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원작을 뛰어넘을 만한 현대적 의미의 고전으로 꼽을 만하다. 문학의 보편성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비판한다. 또한 인간의 삶에 대한 폭넓은 사유와 세계를 통찰할 수 있는 눈을 제공한다. 철학적 책읽기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의 독서가 될 수 없음을 웅변하는 이 책은 단순히 고전의 재해석이나 현대적 각색이 아니라 풍부한 울림을 주는 정교한 구조물과 같다.

그것은 무인도라고 하는 본질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 사이의 갈등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환경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 자아와 타자의 문제 등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고민에 빠지는 수많은 문제들의 본질을 탐구하는 소설이기 때문에 이 소설은 읽을 만하다. 이 소설은 한 문장의 완결성과 문장과 문장 사이의 긴장감이 일반적 의미의 소설과 차이를 느끼게 한다. 사건 위주의 스토리 전개가 구성의 골격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버지니아호의 좌초로 무인도에서 깨어난 로빈슨의 사유가 이 책의 흐름을 주도하기 때문이다. 정신을 집중하고 작가의 말에 몰입하지 않으면 흐름을 놓치고 망망대해를 표류할 수도 있지만, 천천히 그의 말과 로빈슨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형언할 수 없는 삶의 본질적인 문제들과 만나게 된다. 나는 누구이며 삶이란 무엇인가.

1711년 4년 4개월 만에 태평양의 마스아티에라에서 셀커크가 발견된 후, 다이엘 디포는 1659년 9월 30일부터 1686년까지 28년 2개월 10일 동안 대서양의 카리브 해의 어느 섬에 사는 로빈슨을 탄생시킨다. 이에 비해 투르니에는 1759년 9월 30일부터 1787년까지 28년 2개월 19일 동안 태평양의 스페란차 섬에 로빈슨을 살게 한다. 원작에서 프라이데이가 이 책에서는 주인고으로 전면에 나선다. ‘방드르디’는 금요일이라는 뜻의 ‘프라이데이’의 프랑스어 이름이다. 로빈슨과 방드르디가 살아가는 스페란차의 섬의 실질적인 주인은 로빈슨이라기보다 ‘방드르디’이다. 영국 백인이며 독실한 기독교인 로빈슨에게 섬에 도착한 이후 시간은 오로지 과거만을 의미할 뿐이다.

오직 과거만이 중요한 존재와 가치를 가지는 것이었다. 현재는 추억의 샘, 과거의 생산 공장 정도의 가치밖에 없었다. 산다는 것은 오직 그 값진 과거의 자산을 늘리기 위해서만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고는 마침내 죽음이 오는 것이었다. - 49쪽

무인도가 아니더라도 인간의 삶은 과거의 자산을 늘려가는 과정일 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누구에게나 죽음의 순간이 온다. 그렇다면 인간의 삶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단초를 얻을 수 있다. 꿈과 고독 사이의 내밀한 통로를 찾아 헤매는 것이 인간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로빈슨은 피부색이 다른 원주민 방드르디를 극적으로 구해낸다. 죽음의 순간의 생명의 은인을 만난 방드르디는 로빈슨의 노예가 되지만 둘 만의 섬에서 그는 결코 노예가 아니다. 피부색과 종교, 언어와 삶의 방식이 극단적이었던 둘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시선과 해석이 이 책을 읽는 이유이다. 김화영의 해설대로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타자의 부재가 로빈슨의 행동, 사고, 지각에 끼치는 영향’이 이 작품의 철학적 주제라고 할 수 있겠다.

로빈슨이 아니라 방드르디가 이 책의 제목이 된 것은 단순히 원작의 전복이 아니라 ‘타자’를 중심에 놓는 방식의 삶에 대한 성찰이다. 주관적이고 배타적인 ‘자아’ 중심의 세계관이 아니라 ‘타자’를 통한 내 삶에 대한 반성을 의미한다. 유연하고 상대적인 처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 방식의 패러다임을 전환을 촉구하는 듯하다.

1장부터 12장까지 각 장들의 내용과 의미는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수수께끼로 던져 두어도 좋으리라. 책 전체의 흐름을 분석해 놓은 김화영의 해설을 꼼꼼하게 읽어보는 것은 이 책의 내용을 충분히 음미한 후에 할 일이다. 어쨌든 11장에서 ‘화이트버드호’의 등장으로 인해 마지막 반전이 일어난다. 자신의 배가 난파된 후 스페란차에 도착한 후 2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는 인간의 시간을 알게 된 로빈슨의 반응은 선장과 화이트버드호에서 식사를 한 후 느끼는 감정만큼이나 충격적이다.

로빈슨이 볼 때 악(惡)은 그보다 훨씬 더 깊은 데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그 사람들 모두가 열에 들뜬 듯이 추구하는 것으로 보이는 여러 가지 목적의 어쩔 수 없는 상대적 성격이 바로 악의 바탕이라 비판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목적을 추구하고 있었고, 그 목적이란 어떤 획득, 어떤 부(富), 어떤 만족 따위였다. - 304쪽

로빈슨과 방드르디의 선택은 반전 영화의 결말처럼 남겨두자. ‘죄디(목요일)’로 거슬러가는 시간의 역행은 무엇을 의미하며 로빈슨의 선택은 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정답은 없다. 다만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던지는 미셸 투르니에의 실존적인 질문들은 긴 여운을 남기며 ‘시간’과 ‘타자’와 ‘삶’의 의미를 성찰하게 한다.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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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12-31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준비해두었지만 아직 읽지 못하고 있는 책인데 리뷰를 보니 빨리 읽고 싶어집니다.
2010년의 마지막날이네요. 새해에도 좋은 책 많이 읽으시고 행복하세요.

sceptic 2011-01-06 22:29   좋아요 0 | URL
답이 늦었습니다. 반딧불이님도 새해 건강하시고 복 많이 지으세요.
 
프로이트, 심청을 만나다 - 마음속 상처를 치유하는 고전 속 심리여행
신동흔.고전과출판연구모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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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약 눈 먼 아버지를 두었다면 심청이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 ‘장화와 홍련이는 왜 순순히 죽음의 길을 택했을까?’ 우리 고전 소설을 읽다보면 현실에서 찾기 힘든 인물들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다. 문학은 새로운 경험과 낯선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어야 하며 동시에 개연성(probability)을 전제로 해야 한다. 하지만 초기의 소설은 그야말로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많다. 귀신과 사랑을 나누거나 염라대왕을 만나기도 한다. 흥미와 감동이 전해진다면 사실성(reality)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현대소설과 달리 고전소설은 이렇게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즐길 수 있었고,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시대정신(zeitgeist)’은 당대의 진실을 함축한다. 소설은 이러한 시대 정신의 정수라고 볼 수 있다. 그 범위가 넓고 좁음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겠지만, 인간의 삶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그 이면의 진실을 드러내는 역할을 해 온 것이 바로 소설이다. 누구나 쉽게 읽고 즐길 수 있으면서도 눈물과 웃음,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감당할 수 있는 소설이야말로 우리 고전 문학의 진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심청이, 장화와 홍련이, 길동이, 흥부와 놀부, 옹고집, 변강쇠 등 고전 문학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그리 행복한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 같다.

성격을 창조한다는 측면에서 소설 속의 인물(character)은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하거나 현실의 전형적인 인물을 보여주기도 한다. 어떤 인물 유형이든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하고 건강한 정신을 소유한 사람은 주인공이 될 자격이 없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완전할 수 없듯이 소설 속의 인물들도 무언가 부족한 사람들이다. 고전 소설에는 「사씨남정기」의 유연수와 사정옥처럼 재자가인(才子佳人)이 등장하여 우리를 기죽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어느 한 구석이 부족하다. 그 결핍이 갈등의 근원이 되고 관심의 초점이 되며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이 독자에겐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 고전문학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치 지금 우리들의 모습을 비추어보는 거울과 같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모습은 잘 들여다보면서 나의 모습은 잘 보지 못한다. 기껏해야 거울을 통해 나의 생김새와 앞모습을 왜곡된 형태로 바라볼 뿐이다. 고전문학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내 마음의 상처가 수면 위로 떠올라 함께 울고 웃으며 공감과 동정, 분노와 비난의 감정을 느낀다. 문학을 통해 우리는 이렇게 내 마음 안의 상처를 위로 받기도 하고, 상처를 치유하기도 한다.

우리 고전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시도는 계속해서 시도되고 있다. 아주 오래 전에 태어나 화석이 된 고전이 아니라 현재적 유용성을 가지고 살아 숨 쉬는 의미를 전해주는 것이 고전이다. 문학의 보편성은 삶의 보편성이며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정서적 보편성이다. 『프로이트, 심청을 만나다』는 이러한 보편성을 바탕으로 우리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고전읽기의 방법을 제시하는 책이다.

고전문학 작품에서 만나는 인물들은 유형화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짊어졌던 강박증부터 피해의식에 이르기까지 현대인들도 고스란히 겪고 있는 스트레스성 질병들을 살펴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단순하게 효녀나 영웅으로 볼 수 없는 인간적 상처가 너무 많다. 이 상처들은 고전문학의 인물들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인간은 얼마나 많은 상처와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가. 그 아픔을 극복하고 상처를 보듬고 단단하게 성장하는 과정이 우리들의 삶이 아니겠는가. 그런 면에서 고전문학은 오래된 옛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에게 오래된 미래를 보여주는 지혜의 보고(寶庫)라고 할 수 있다.

신동흔과 고전과출판연구모임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이 책은 젊은 고전문학 연구자들이 ‘문학치료’라는 주제의식을 가지고 다양한 고전 속 인물들을 분석하고 있다. 1부 내 마음 속에 귀신이 산다와 2부 상처 입은 관계의 회복을 위하여로 나누어 「장화홍련전」부터 「변강쇠가」를 거쳐 「한중록」을 더듬고 「상사뱀설화」를 통과하여 「흥보가」에 이르는 고전여행을 즐겨보자. 목적은 ‘자기 서사의 발견!’ 이 책은 고전문학을 다시 읽고 뒤집어 생각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등장인물의 심리를 분석하여 ‘나’를 발견하는 것이 목적이다. 사람마다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문학을 ‘자기서사’라고 하는데 문학치료학의 관점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각자 ‘자기서사’를 점검해 보자는 의도가 이 책을 만들었다.

몸이 아프면 금방 병원에 가는 사람들도 마음이 아플 때는 회피, 외면, 인내 등의 방법으로 일관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상처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책을 읽는 것은 자아를 발견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이다. 어떤 책이든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고전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나를 비추어보고 ‘포용의 서사, 신뢰와 성장의 서사’를 만들어 보자는 이야기다.

우리 마음속의 고전은 영원한 고향처럼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지치고 힘들 때 다시 꺼내 보고 함께 울고 웃으며 ‘자기서사’를 점검하고 또 힘을 내어 한 걸음 내디딜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고리타분하고 지겨운 고전을 생각하지 말고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고전 속의 친근한 인물들을 다시 보자. 그리고 겉으로 드러난 인물의 말과 행동이 아니라 이면에 숨은 마음의 상처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 내 안에 숨어있는 아픔과 고통일 것이다. 그리고 그 인물들과 함께 우리들의 삶은 조금 더 건강하고 행복해 질 것이라고 믿어보자. 그러면 책은 언제나 우리 곁에서 누구보다 진실한 친구가 되어 줄 것이다.


10122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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