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 창비시선 343
문태준 지음 / 창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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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마음의 갈피를 접어둔다. 소리를 내지 않는 생각은 산꼭대기에 올라 바다를 굽어본다. 사람의 마음 밭에 살고 있는 천사 혹은 악마들은 오늘도 식탁에 마주 앉아 거짓 웃음을 흘리고 있다. 서로 다른 생각들 -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욕망, 타인에 대한 뒷담화, 들키고 싶지 않은 불안 그리고 버리지 못하는 습관 때문에 빈집에 갇혀 울고 있다. 시는 그 모든 내면의 어린아이를 호출한다. 눈물은 이내 증오로 불타오르기도 하지만 나그네로 살아가는 우리 생의 이면을 맑게 투영하기도 한다.

 

문태준의 시는 명징하게 사물의 본질을 드러낸다.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구차하게 변명하지도 않는다. 언어의 이면은 생각보다 때묻지 않은 맑은 얼굴로 빛난다. 의미를 덧칠하고 생각을 왜곡하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세치 혀에 불과하다. 순교적인 자세로 언어를 숭배하자는 말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간파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에 대한 반성적 태도가 시를 시답게 한다.

 

세상에 대한 깊이, 정서에 대한 호들갑스럽지 않은 반응, 사물에 대한 진지한 자세가 읽을 만한 시를 낳고 그 시는 늘 먼 곳을 응시한다. 그 먼 곳에는 늘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모든 소멸하는 것은 아름답다. 일회적인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줄 아는 시인의 시를 우리는 여전히 경건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빈 집

 

주인도

내객(內客)도 없다

겨울 아침

오늘의 첫 햇살이

흘러오는

찬 마루

쪽창 낸 듯

볕 드는 한쪽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린

들고양이

여객(旅客)처럼

지나가고

지나가는

 

망인에 대한 두려움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우리를 더욱 애닯게 한다. 기억 속에 사라지는 인간은 진짜 죽음을 맞이한다는 낭만적인 잠언은 우리를 슬프게 할 뿐이다.

 

망인(亡人)

 

관을 들어 그를 산속으로 옮긴 후 돌아와 집에 가만히 있었다

 

또 하나의 객지(客地)가 저문다

 

흰 종이에 떨구고 간 눈물자국 같은 흐릿한 빛이 사그라진다

 

인생이든 여행이든 한 번 떠나면 돌아올 수 없는 길이다. 사람들은 이내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낭만적으로 전망하지만 이별의 말은 오늘도 공중을 떠돈다. 그것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그리고 글로 쓰지 않아도 시간이 빚어내는 바람의 물결 같은 것이다. 보이지 않아 다행인 것도 있지만 볼 수 없어 안타까운 것들이 더 많을 때도 있다. 있는 그대로만 볼 수 있는 것도 때로는 아무나 가질 수 없는 힘이 된다.

 

먼 곳

 

오늘은 이별의 말이 공중에 꽉 차 있다

나는 이별의 말을 한움큼, 한움큼, 호흡한다

먼 곳이 생겨난다

나를 조금조금 밀어내면 먼 곳이 생겨난다

새로 돋은 첫 잎과 그 입술과 부끄러워하는 붉은 뺨과 눈웃음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대기는 살얼음판 같은 가슴을 세워들고 내 앞을 지나간다

나목은 다 벗고 다 벗고 바위는 돌 그림자의 먹빛을 거느리고

갈 데 없는 벤치는 종일 누구도 앉힌 적이 없는 몸으로 한곳에 앉아 있다

손은 떨리고 눈언저리는 젖고 말문은 막혔다

모두가 이별을 말할 때

먼 곳은 생겨난다

헤아려 내다볼 수 없는 곳

 

그래서 많은 시인들은 을 노래한다. 절대 고독의 경지에 오른 섬은 그 고독조차 사치라고 말한다. 사랑할수록 외로워지는 사람들의 아이러니는 오늘도 건재한 신화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조용하여라

저 가슴

꽃 그림자는 물속에 내렸다

누구도 캐내지 않는 바위처럼

누구든

외로워라

매양

사랑이라 불리는

저 섬은

 

사물보다 사람 냄새나는 시를 쓰는 시인도 있다. 박성우 시인은 인간의 향기를 맡을 줄 알고 그것을 보여주는 재주가 있다. 모든 빛깔과 향기를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시인에게는 얼마나 중요한가. 게다가 우리들의 삶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들을 모아 놓은 시집이 아니라 일상적이고 편안한 순간들을 마치 풍경화처럼 떼어내고 정물화처럼 시간을 멈추게 하는 힘이 박성우의 시에서는 느껴진다.

 

옛일

 

한때 나는, 내가 살던 강마을 언덕에

별정우체국을 내고 싶은 마음 간절했으나

 

개살구 익는 강가의 아침 안개와

미루나무와 쓸어내린 초저녁 풋별 냄새와

싸락눈이 싸락싸락 치는 차고 긴 밤,

 

넣을 봉투를 구할 재간이 없어 그만둔 적이 있다

 

고즈넉한 산사의 풍경을 들여다보자.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산사

 

배롱나무 그늘 늘어진 절간

요사 마루엔 노스님이 낮잠에 빠져 있다

 

흙벽에 삐딱하게 기댄 호미와 괭이는

흙범벅이 된 몸을 건성건성 말리고 있다

 

코빼기도 없는 고무신이 삐죽

흙 묻은 코빼기를 내미는 절간,

 

연잎에 엎드린 청개구리만

목탁을 두 개나 들고 예불을 드리고 있다

 

노스님 몫까지 하느라고

울음주머니 목탁을 울퉁불퉁 두드리고 있다

 

이제 숨을 고르고 사물과 자연에서 눈을 들어 내면의 상처를 들여다보자. 밤을 새워 고열에 시달리고 멈추지 않는 발작성 기침 때문에 갈비뼈까지 울리는 날도 있는 법이다. 혼자 아프면 서럽다는 일반적인 사실 때문에 사람을 그리워하고 괴롭지는 않아야 한다.

 

허연은 보이지 않는 부분을 드러내려고 언어의 속살을 뒤집고 생각의 발길을 쫓는다. 우리가 시를 통해 확인하고 싶은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감정이 아니라 어떤 구체적인 맥락이다. 상황을 들여다보고 말과 글이 전하는 맥락을 이해하는 것은 어쩌면 시를 읽고 시인의 마음을 짐작하는 것만큼이나 헛되고 헛되다.

 

후회에 대해 적다

 

혼자 아프니까 서럽다는 낡은 문자를 받고, 남은 술을 벌컥이다가 덜 자란 개들의 주검이 널려 있는 추적추적한 거리를 걸었다. 위성도시 5일장은 비릿했다.

 

떠올려보면 세월은 더디게 갔다. 지금은 사라진 하숙촌에서 나비 떼 같은 사랑을 했었고, 누군가의 얼굴이 자동차 앞 유리창에 가득할 때도 그게 끝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아득해지지 않았으니 세월은 너무 더디다.

 

이제 어떡해야 하는 거지

 

아득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 스스로 가해자가 되어 문자로 답을 보냈다. 지금에 와서 나를 울린 건 사랑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이었을 뿐.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비를 피해 은하열차처럼 환한 전철 속으로 뛰어들었고. 나는 불행했다고 생각하며 바짓단이 다 젖도록 거리에 서 있었다.

 

그래서 지독한 슬픔이 지나간 시간을 위로하고,

 

지독한 슬픔

 

초코바를 빨며 지나가는 비만의 세월을 나는 안다. 그 지독한 슬픔을

 

버섯구름의 완벽한 구도를. 기울어진 채 녹이 슬어가는 버려진 철선의 고혹적인 빛깔을. 죽어가는 쿠르드 전사들이 불렀던 사랑 노래를. 전소된 집터에서 발견된 깨어진 변기를. 신장개업 할인 마트 앞 미친 풍선 인형을. 전나무 숲에 널려 있는 치골이 튀어나온 흰 시신들에서 느껴지던 성욕을.

 

! 이미 아무것도 아니어서 쪼갤 수 없는 것들. 지독해서 측정할 수 없는 것들을.

 

 

고개를 들어 편지를 쓴다. 부치지 못한 편지는 여전히 낡은 서랍장에서 뒹굴고 있지만 그 세월의 두께만큼 자신의 삶에는 켜켜이 쌓인 먼지만 나풀거린다. 적지 마라, 외로우니까 쓰는 편지는 견딜 수 없을만큼 자신만 초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편지

 

적어 놓은 건

반드시 벌로 돌아온다

 

밤새 쓴 편지를

감히 다시 볼 수 있는 자는 많지 않다

세상에 모든 편지에는 죄가 많아

인간은 밤새 적은 편지에

초라해진다

 

편지를 받은 모두는 십자가에 매달린다

 

적어놓은 것이니

세상에 남는 법

적은 자들은 늘 외롭고

벌을 받는다

적어놓은 죄, 기록한 죄

편지는 오늘도 십자가에 내걸린다.

 

적은 자의 하루는 슬프고

내걸린 편지는 세상의 어느

호리병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남겨진다

편지를 쓴 죄

그리움 같은 것을 적은 죄

 

그리움 같은 것을 적은 죄를 짓지는 말자. 그것은 얼음의 온도를 재고 싶은 욕망 같은 것이다. 불의 온도, 얼음의 온도가 아니라 우리들 마음의 온도를 걱정할 일이다. 수치로 표현된 사물의 본질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아니아니 보이고 싶지 않은 그 마음의 갈피들이다.

 

얼음의 온도

 

얼음을 나르는 사람들은 얼음의 온도를 잘 잊고, 대장장이는 불의 온도를 잘 잊는다. 누군가에게 몰입하는 일. 천년을 거듭해도 온도를 잊는 일. 그런 일.

 

 

120530-053~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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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펀치 - 제5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기준영 지음 / 창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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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읽은 두 권의 소설이 머릿속에서 엉키는 이유가 무엇일까. 며칠 동안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가족이라는 소재의 공통성을 찾는 것으로는 만족스럽지 않다. 5회 창비 장편소설상 수상작인 기준영의 와일드 펀치와 제5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인 김이윤의 두려움에게 인사하는 법은 비슷한 시기에 출간되어 순서대로 읽게 되었다. 읽는 순서와 시간에 따라서도 소설은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고 서로 다른 말을 건넨다. 성인 소설인 와일드 펀치와 청소년 소설인 두려움에게 인사하는 법은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면서도 중첩되는 부분도 있다.

 

가족은 단순한 혈연 공동체가 아니다.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내밀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전통적인 가족의 개념이다. 이 관계는 천륜(天倫)이라는 유교적 도덕적 실천 윤리를 의미하는 것이며 사회를 지탱하는 최소단위의 사회구성체를 지칭하는 말이다. 근대 이후 전통적인 대가족 제도가 해체되고 가족의 양상도 다양하게 변화했지만 부모와 자녀로 구성되는 기본 단위와 그 의미는 유지되고 있다. 비혼 가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미래 사회의 가족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이혼, 사별 등의 이유로 한부모 가정이 증가하고 재혼이나 다문화 가정도 늘고 있다. 눈에 보이는 가족의 형태는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그리고 1인 가구와 다양한 형태의 가족 형태로 그 변화양상이 뚜렷하다. 하지만 본질적인 가족의 의미는 달라지지 않는다. 도대체 가족이란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 것일까.

 

레몬과 설탕 등 다섯 가지 이상의 음료를 섞은 펀치라는 음료와 권투 선수의 한방을 떠올리는 펀치가 동시에 연상되는 기준영 소설의 제목은 와일드하다. 하지만 소설의 내용과 의미는 마일드하다. 강수와 현자의 집에 강수의 후배 태경과 현자의 의자매 미라가 들어온다. 정가족의 의미를 묻기 전에 삶의 형식을 고민하는 것이 소설의 본질이라면 이 소설의 인물들은 그 문법에 충실하다. 저마다 가진 과거의 상처가 현재의 삶을 삐걱이게 하며 서로의 관계를 통해 그것을 확인하고 위로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러한 관계만으로 인간의 본질적인 솔리튜드solitude는 극복되지 않는다. 어떤 소설이든 마찬가지겠으나 그 관계의 양상을 들여다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가는 그 거리를 가늠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른다는 사실을 아프게 확인시켜 준다.

 

김이윤은 두려움에게 인사하는 법을 통해 상실의 아픔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자란 여여는 사진작가의 어머니가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날 때까지 혼자 살게 된다. 아버지를 찾고 사랑에 빠지고 어머니의 삶을 들여다보는 동안 여여는 혼자라는 사실보다 더 지독한 삶의 비밀을 발견하게 된다. 어머니의 부재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보다 본질적인 고독이 무엇인지 깨닫는 과정이 성장의 아픔이 아닌가. 드라마의 대본처럼 편안하게 읽히면서도 십대 소녀의 내면을 적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작가의 솜씨가 탁월한 소설이다. 이 책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든 부모의 죽음이든 삶은 만남과 이별의 연속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확인하는 평범하지만 독특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두 작품은 표면적으로 가족의 의미를 묻고 있는 것 같다. 혈연관계가 아니어도 가족이 될 수 있고 더 내밀한 관계가 형성될 수 있지만 타인이 걸어온 길과 삶의 흔적들을 오롯이 이해할 수는 없다. 강수와 현자, 태경과 미라 그리고 우영이 그러하고 여여와 시리우스, 엄마와 서이사가 그러하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이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타인에 대한 이해와 심리적 거리가 아닐까.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고민이 아닐까.

 

방문객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 정현종, 광휘의 속삭임(문학과지성사, 2008) 중에서

 

데블스 푸드 케이크를 정성스레 만들어 줄 가족이 있다는 건 얼마나 큰 행복인가. 하지만 오래 고민하고 준비해서 만든 음식을 5분 만에 먹어치운 가족들의 만족감과 달리 만든 사람의 말할 수 없는 아쉬움 같은 느낌을 떠올려 보자. 한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지만 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도 잃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지 스스로 묻지 않는다면 방문객은 잠시 머무를 뿐이다. 비극적인 세계 인식이 삶의 비의를 벗어나는 방법은 아니겠지만 어느 누구도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다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삶은 죽음을 향해 달려갈 뿐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에 공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 상실의 대상이 가족이든 아니든 타인에게 받는 상처를 극복하는 것은 또 다른 관계에서 오는 위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스스로에 대한 환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와일드하게 펀치를 날리는 인생에게 웃어주는 법과 두려움에게 인사하는 법을 알게 되는 것은 두 권의 소설을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내 곁에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 속에서이다.

 

120422-033~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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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눈을 위한 송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406
이이체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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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마약이다. 계속 살면 피폐해진다. 사랑은 이별한다고 잊거나 잊히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덮어두고 떠나는 것이다. 나는 그 안에 중독되어 독신의 처방을 얻었다. 누군가 우는 것을 보면 울게 된다. 세상에는 더 이상 반전(反轉)이 없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동안 모든 걸 그리워하게 되었다. 서로 죽이지 않고 어떻게 사랑할 수 있었을까, 반려의 몸이여. 뒤돌아서면 등지고 온 무덤들이 많았다. 진짜 생각이란 없다. 생각을 떠나면 누구나 사랑할 수 있다. 나는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잔류하는 이형(異形)의 삶이어도 삶이기에 죽지는 않는다. 이 색을 간직하겠다. 서로를 닮은 황홀경들이 착종하는, 인간의 미로. 그 주저흔의 골목길에서 우리는 재회하여 서로의 피를 확인할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헤어질 수 있을까. 어떤 참담은 아직도 종종 나를 죽인다. 아무도 나를 갖지 못해서 나는 나를 부둥켜안았다. 이번 삶을 유폐시켜서 모두 유감이다. 기필코 돌아올 것이다. 반드시 돌아오겠다. 아니다. 멀리 떠나서 돌아오지 말아라, 돌아오지 말아라.

 

여전히 시집이 팔리는 나라에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문지의 시집은 뒤표지에 시인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시집을 다 읽고 나서 해설까지 훑은 후에 마지막으로 시인의 육성을 듣는 것 같아 표지 뒷면을 읽는 눈길은 탐욕스럽다. 질리지 않는 디자인과 판형을 유지하며 전통을 이어가는 문지의 시집을 쓰다듬다가 문득 88년생 시인의 시집이라는 사실 때문에 세월을 절감한다. 이 시인이 태어날 무렵 나는 처음 시에 눈을 뜨기 시작했었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가고 있다. 모든 것이 지나가고 있다. 이미 당도해버린 줄도 모르고 애타리게 기다리던 봄의 뒷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처럼 아쉬움만 남긴 채.

 

이이체라는 이체로운 이름의 시인은 올해 스물다섯이다. 벌써 그럴 나이는 아니지만 시집을 읽는 내내 이십대를 더듬었다. 나이가 사고를 가두지는 않지만 살아보지 않은 시간에 대해 말할 수는 없는 법이다. 죽은 눈을 위한 송가는 삶에 대한 불확실성과 규정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으로 가득하다. 그 시니컬한 눈빛과 사물에 대한 차가운 시선이 아름답다. 그것은 젊음과 자신감에 대한 반증이므로.

 

불은 무엇을 태우기 위해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 타오르기에 무엇을 태우지 타올라서 흘러버리는 물이었지”(‘배신놀이- 김승일에게중에서)라고 말하는 것은 본질과 현상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에 대한 도전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는 늘상 무언가 목적을 향해 달려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삶이 어디 그러한가. 무엇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가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것은 아닌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인연 혹은 연인을 시인은 우리는 서로의 몽타주다 나는 세계를 지우는 일을 했고 너는 세계를 구성하는 구멍에 빠졌던 가난”(‘연인중에서)이라고 말한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배운 것 같은데, 인간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보일 것 같은데 뒤돌아보면 시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죽는 것들을 표정 없이 떠나보내는 법을 터득하는 중이다. 사라지는 것과 죽는 것을 분별하기로 한다. 나는 모래 알갱이들을 하나하나 헤아릴 만큼 지루해져간다. 바다는 소금의 타향. 결말의 출신에 대해 깨닫고는 운다. 나는 나의 삶보다 오래된 내가 밉다. - ‘날짜변경선중에서

 

그래서 시인도 죽는 것 혹은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미리 염려하는 지도 모른다. 시인이라는 천형을 받아 를 토해내는 행위를 하는 동안 스물다섯 시인에게도 세월의 파도는 몰아치겠지. 그리고 내 죽음으로 평생을 슬퍼해야 할 사람을 만나겠지.

 

 

몸에 당신의 일기를 베끼고 바다로 와서 지운다. 내 죽음으로 평생을 슬퍼해야 할 사람이 한 명 필요하다. 당신은 말해진 적 없는 말. 모든 걸 씻고. 이렇게 당신이 바다에서 눈물을 흘린 게, 눈물을. 바다의 푸른 계단이 차례로 무너져 내리고, 절벽에서 하얀 고통들이 비명을 지르며 부서진다. 거품들이 분말처럼 흩어지면 당신이 흘려둔 해식애로 세워지던 안개 도시. 파도는 내 몸에 맞다. 나쁜 말들뿐이다. 나는 아직 당신에게 내 얼굴의 절반을 보여주지 않았는데. 당신은 몇 개의 얼굴을 갖고 있는가. 나는 쓴다. 쓴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쓴다. 쓴다고 생각하기 위해 쓴다. 쓴다. 지운다.

 

때로는 그것이 간절한 거짓일지라도 말이다.

 

나는 누군가의 간절한 거짓이었다 당신, 정말 날 사랑하는 거야? 아니, 난 당신을 믿어. - 이이체, - ‘거짓말의 목소리중에서

 

떨어지고, 흔들리고 멀어지면서 상처가 없는데도 아픈 경험을 하게 된다. 너무 멀리 와버렸다고 말할 땐 이미 비가 내리고 눈 내리는 풍경이 펼쳐질 것이다. 모든 인간의 삶은 언젠가 무너진다. 폐허에서 눈 감고 꼭 안을 수 있는 사람 하나 없는 것이 생의 종착역이다. 부정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모든 사람은 겸손해지거나 혹은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몸부림치거나. 넉넉하게 오늘 하루를 온전히 살아낼 수 있었다면 시는 그저 작은 위로에 불과할 뿐이다.

 

너는 내게 손 내미는 대신 말을 내건다. 떨어지려는 것처럼 흔들리는 도토리들. 칡넝쿨이 더 세게 너를 옥죄고. 나는 너를 풀지 못한다. 아련해져 가는 너를 잡아보려고 손을 뻗으면, 선은 손에서 멀어져가고 손은 선에 닿지 않고. 바람을 지나쳐 보내며 신기루를 믿고 싶다고 말한다. 너무 멀리 와버렸어. 상처가 없는데 아프다. 눈 감은 내 눈앞에 눈 내리는 풍경이 펼쳐지고. 모든 것이 무너진 폐허에서 너를 안고 눈을 감는다. - ‘사라지는 포옹중에서

비가 내리고, 참으로 울상이다. 하늘을 가릴 우산 따윈 필요 없다. 내가 썼던 일기들로 나는 나를 지워갈 예정이다. , 암송하지 않는 일기를 보아라. - ‘친절한 세상중에서

 

120408-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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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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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원을 말하는 게 좋았다.

그 소원을 하나하나 이루다보면 어른이 되리라 생각했다.

아니면 그 반대로 어른이 되면 그 소원을 다 이룰 수 있게 되거나.

열다섯 살 무렵, 어른이 된다는 건 내게 그런 뜻이었다.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몇 가지 방어기제를 갖게 된다. 마음이 여리고 상처받기 쉬운 사람들은 달팽이처럼 연한 속살을 단단한 껍질 속에 가둔다. 낯선 사람과 쉽게 친해지기 어렵고 타인과의 지나친 친밀감은 부담스럽다. 자기만의 세계가 단단해서 혼자가 편할 때가 많다. 그래서 냉정하고 정확해 보이지만 그건 내 영역 안에 누군가 발을 들이밀 때의 두려움을 줄이기 위해서다. 운전을 하다가 왼쪽 뺨을 물들이는 저녁노을 때문에 울컥하기도 하고 금요일 오후 창밖의 안개비를 내다보다가 가슴이 먼저 젖어버리기도 한다. 예민한 감수성 때문에 스스로 생채기를 내는 타입이어서 차라리 이어폰을 꽂고 혼자 걷는 데 익숙하다. 이런 종류의 사람에게는 완벽주의 콤플렉스가 생기기 쉽다.

 

어른이 되어서도 유년시절의 정서를 잃어버리지 않은 사람은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어린왕자처럼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영혼을 가졌기 때문에 세속적인 욕심이 없고 현실적인 것들을 하찮게 여긴다. 유치하게 행동하거나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기도 한다. 상황판단이 안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세상에는 애늙은이도 있고 철없는 노인도 있는 법이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그저 시류에 휩쓸려 가는 평범한 생활인일 수도 있다. 어느 부류의 사람이든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그것에 반응하며 살아가는 패턴은 제각각이며 나름의 이유를 만들고 그 안에서 괴로워하고 즐거운 일을 만들어가기도 한다.

 

그렇다면 작가에게는 어떤 덕목이 필요할까? 세상에 대한 예민한 촉수, 철들지 않는 여린 감수성, 대상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 좋은 작가의 작품은 재밌는 이야기로 독자의 눈을 사로잡기보다 책장을 덮고 시간이 지나도 오래 여운이 남는 울림을 준다. 김연수의 소설 원더보이를 읽고나서 며칠이 지났고 그의 소설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다가 김연수라는 작가에 대해 문득 떠오른 생각들이다. 장난기 어린 표정과 예리한 눈빛, 시인의 감수성과 깊은 사색이 만들어낸 문장들은 독자들을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빨아들인다.

 

스토리 위주의 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지나치게 요설적인 부분이 없지 않으나 그의 소설을 계속 읽게 만드는 힘은 여전히 김연수 특유의 감성과 그 감성이 빚어내는 발랄한 상상력이다. 세상에 대해 다소 시니컬한 표정으로 킬킬거리는듯한 사춘기 소년의 언어가 드러나기도 하고 인간의 삶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세계에 대한 진지한 호기심이 묻어나기도 하는 원더보이

김연수의 말대로 매순간 삶이 놀라움으로 가득 차기를.’(87) 바란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똑같은 하루하루를 견뎌낼 수 있을까. 이 지루한 세상을 버텨낼 수 있을까. 그래서 어쨌든 우리는 모두 한 번 죽을거야. 하지만, 여러 번 살아. 영원히 존재하기 위해서’(91) 같은 문장에 밑줄 그으며 삶의 허무에 대해 한번쯤 멍한 눈길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반공이 국시(國是)였던 시절을 기억하는가. 원더보이는 마친 윤대성의 <출세기>처럼 낯설지만은 않은 우리 주변의 이야기일 수 있다. 자신이 꿈꾸고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우리는 주변 상황과 시선으로 인해 거추장스런 누더기를 걸칠 때도 있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할 때도 있다. 원더보이는 어느 날 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새로운 삶이 펼쳐진다. 차라리 외면하고 싶은 현실과 마주하면서 제 힘으로는 한발짝도 움직이기 힘든 삶의 올가미를 경험해 본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원더보이에게 공감을 보낼 것이다. 이 소설은 단순히 지나간 시간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삶의 불가해함에 대해 엄살을 떠는 것도 아니다. 읽는 사람이 걸어온 길과 켜켜이 쌓아온 시간의 결에 따라 다양한 층위를 드러낼 수 있는 소설이다.

 

많은 사람에게 폭넓은 사랑을 받는 소설과 특정한 매니아층을 거느린 소설, 어느 쪽이 더 행복한 작가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모든 소설을 두 가지로 분류할 수도 없고 김연수가 어느 쪽이냐고 묻는 것도 무의미할 수도 있다. 다만 지금까지 읽어온 김연수의 소설과 원더보이가 특별히 구별되지는 않는다. 전작에서 보여준 문장과 패턴, 문제의식과 소설의 방법들이 다시 한 번 그의 색깔을 내는데 기여하고 있지만 또 다른 변화와 새로움을 간절히 소망하는 독자들에게는 조금 아쉬움을 남긴다.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외로울 뿐이라는 박두진의 <도봉>이 떠오른 것은 김연수 소설의 바탕이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즐겁고 행복한 삶을 꿈꾸는 것 또한 얼마나 허망한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열망,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대한 도전,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상상력 그리고 내 삶에 대한 겸손함. 이 모든 것들이 보여주는 세계가 소설이라면 김연수는 여전히 이제 시작에 불과한 소설가가 아닌가. 그의 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무한하지 않은가. 그래서 그는 여전히 이렇게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뤄질 가능성이 없는 몽상들, 두 눈을 뜨고 바라보는 꿈들, 문장으로 만들 수 있을 뿐 아무런 현실성도 없는 소망들. - 119

 

12033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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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 소리 창비시선 340
문인수 지음 / 창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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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도 시는 존재한다고 믿는다. 오규원이 말년에 발표한 시들이 적절한 예가 될지 모르겠지만 두두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인간의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도 시는 언제나 그 자리를 지켜왔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해본 사람은 안다. 인간 언어의 한계를. 그 절절한 마음과 터질 듯한 두근거림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 역도 성립한다. 감당할 수 없는 절망과 고통을 말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언어의 한계는 사유의 한계이고 앎의 범위가 내 존재의 범위라고 생각해 본적 있는가. 아니면 그것을 부정할 만한 논리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가. 그도 아니면 시의 힘, 언어의 세계가 가진 해석의 틀을 고민해 본 적이 있는가.

 

작은 점 하나 - 이시영

 

가장 적게 먹고

적게 일하며

느티나무 가지에 깃을 묻고 잠든 새는

하늘을 차고 오를 때 하얀 새똥을

지상에 남긴다

거대한 구두 발자국이 막 닿기 전

아침 햇살에 잠깐 보석처럼 반짝이며 응결하는

보도블록 위의 작은 눈부신 점 하나

 

머리가 희끗한 두 시인이 붉으레한 얼굴로 앉아있는 테이블에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시집에 친필을 받는 일은 존경의 마음이라기보다 수많은 시간과 고민의 결과물에 대한 아름다운 찬사라고 하겠다. 이시영의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와 문인수의 적막 소리는 그렇게 내게 왔고 오랜만에 가슴을 적셨다. 오규원은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두 시인은 자신의 시와 서로의 시를 낭송하며 독자들의 가슴을 적시고 또 적셨다.

 

이 메마른 시대에 무슨 시 따위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메마른 시대에 시가 아니면 무엇을 읽는단 말인가. 눈물이 날 것 같아 끝까지 낭송을 꺼린 이시영의 어머니 생각은 문인수의 하관과 짝을 이룬다.

 

어머니 생각 - 이시영

어머니 앓아누워 도로 아기 되셨을 때

우리 부부 출근할 때나 외출할 때

문간방 안쪽 문고리에 어머니 손목 묶어두고 나갔네

우리 어머니 빈집에 갇혀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돌아와 문 앞에서 쓸어내렸던 수많은 가슴들이여

아가 아가 우리 아가 자장자장 우리 아가

나 자장가 불러드리며 손목에 묶인 매듭 풀어드리면

장난감처럼 엎질러진 밥그릇이며 국그릇 앞에서

풀린 손 내밀며 방싯방싯 좋아하시던 어머니

하루종일 이 세상을 혼자 견딘 손목이 빨갛게 부어 있었네

하관 - 문인수

이제, 다시는 그 무엇으로도 피어나지 마세요. 지금, 어머니를 심는 중……

 

창비 시선 340권과 341권으로 나란히 시집을 출간한 것도 두 시인에게는 억겁의 인연이 아니겠는가. 고등학생 때 이미 전남일보로 등단하고 대학에 입학한 한 시인의 에피소드를 듣고 며칠 후 이성부 시인의 부음을 신문을 통해 듣는 우연처럼 두 시인의 시 낭송회가 기막힌 우연은 아니었을까.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이야 비할 데 없겠지만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은 또 다른 방식으로 전하고 있다.

 

어느 문창과 여학생의 질문처럼 시인에게는 어떻게 시가 다가가는 걸까.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몸부림치는 게 아니라 이렇게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스며드는가.

 

저녁에 - 이시영

 

마른 나뭇잎 하나를 몸에서 내려놓고

이 가을 은행나무는 우주의 중심을 새로 잡느라고

아주 잠시 기우뚱거리다

 

인물에 대한 이야기 현실에 대한 고통과 아픔의 결을 살려낼 줄 아는 이시영의 시와 소멸하는 것들, 죽음에 대한 다양한 성찰을 길어올릴 줄 아는 문인수의 두 편의 시가 또 하나의 짝으로 읽힌다.

 

() - 이시영

 

강한 거센 빗줄기 사이로 어떤 뼈아픈 후회가 달려오누나

그때 내가 그 앞에서 조금 더 겸허했더라면

산 증거, 혼잣말 - 문인수

, 딸아야, 일어나!

그 엄마는 오늘 아침에 또

스물두살 아이의 방을 바라 큰 소리를 질렀다.

……

풀썩, 그 엄마의 무릎을 꺾는

, 죽음의 팔힘.

, , 죽었지……

 

태어나는 모든 것들은 사라진다. 다가오는 모든 것이 전부 떠나가듯이. 이 순간, 이 하루가 송곳처럼 예리하게 우리의 생을 찌른다. 오늘 우리의 생은 어떠했던가. 무엇을 바라 그렇게 치열하게 내달렸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는 자각 후의 짧은 생.

 

최첨단은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너무 빠른 속도로 뒤에 여백을 남기는 것은 아닐까. 슬픔도 기쁨도 걷어내고 자연스럽게 스러져가는 까무룩한 소실점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죽음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루를 살아봐도 인생을 알 수 없고 더욱이 내일은 짐작조차 불가능하다. 늘어지게 잠이나 자야겠다. 그 다음은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지 않은가.

 

최첨단

 

그래, 그것은 어느 순간 죽는 자의 몫이겠다.

그 누구도, 하느님도 따로 한 봉지 챙겨 온전히 갖지 못한 하루가 갔다.

꽃이 피거나 말거나, 시들거나 말거나 또 하루가 갔다.

한 삽 한 삽 퍼 던져 이제 막 무덤을 다 지은 흙처럼

새 길게 날아가 찍은 겨자씨만한 소실점, 서쪽을 찌르며 까무룩 묻혀버린 허공처럼

하루가 갔다. 그러고 보니 참 송곳 끝 같은 이 느낌, 또 어디 싹트는

미물 같다. 눈에 안 보일 정도로 첨예하다.

 

120302-02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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