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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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가장 가혹한 올가미에 불과하다. 단 한 순간도 시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현대인에게 분절적인 개념의 시간 단위가 편리한 것만은 아니다. 시간은 자연의 흐름을 불연속적으로 잘라내고 구분짓고 규정한다. 따라서 모든 것은 측정할 수 있는 것이 되고 수량화, 계량화 된다. 우리의 삶도 그럴 수 있을까?

철학의 제문제는 체계를 바탕으로 한다. 모든 것을 분석하고 개념화하는 것이 철학의 임무는 아니지만 세계의 본질과 인간의 삶에 대한 명쾌한 해석이 철학의 임무는 아닐까. 윤리학에서 그것이 옳고 그름을 따지고 선악의 가치 판단을 논하기 전에 인간의 문제를 명료화하려는 노력은 우리가 철학에게 기대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학은 ‘대중성’을 바탕으로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읽고 공감할 수 없다면 그것을 위대한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극단적인 예를 들어 단 한 권만 팔린, 가장 훌륭한 문학 작품은 상상하기 어렵다. 예술성과 대중성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래 사랑받는 스테디셀러가 우리 시대의 고전이 되는 것은 자명한 논리이다.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모태로 수많은 책들이 확대 재생산되었다. 프랑스의 철학적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원작을 뛰어넘을 만한 현대적 의미의 고전으로 꼽을 만하다. 문학의 보편성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비판한다. 또한 인간의 삶에 대한 폭넓은 사유와 세계를 통찰할 수 있는 눈을 제공한다. 철학적 책읽기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의 독서가 될 수 없음을 웅변하는 이 책은 단순히 고전의 재해석이나 현대적 각색이 아니라 풍부한 울림을 주는 정교한 구조물과 같다.

그것은 무인도라고 하는 본질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 사이의 갈등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환경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 자아와 타자의 문제 등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고민에 빠지는 수많은 문제들의 본질을 탐구하는 소설이기 때문에 이 소설은 읽을 만하다. 이 소설은 한 문장의 완결성과 문장과 문장 사이의 긴장감이 일반적 의미의 소설과 차이를 느끼게 한다. 사건 위주의 스토리 전개가 구성의 골격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버지니아호의 좌초로 무인도에서 깨어난 로빈슨의 사유가 이 책의 흐름을 주도하기 때문이다. 정신을 집중하고 작가의 말에 몰입하지 않으면 흐름을 놓치고 망망대해를 표류할 수도 있지만, 천천히 그의 말과 로빈슨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형언할 수 없는 삶의 본질적인 문제들과 만나게 된다. 나는 누구이며 삶이란 무엇인가.

1711년 4년 4개월 만에 태평양의 마스아티에라에서 셀커크가 발견된 후, 다이엘 디포는 1659년 9월 30일부터 1686년까지 28년 2개월 10일 동안 대서양의 카리브 해의 어느 섬에 사는 로빈슨을 탄생시킨다. 이에 비해 투르니에는 1759년 9월 30일부터 1787년까지 28년 2개월 19일 동안 태평양의 스페란차 섬에 로빈슨을 살게 한다. 원작에서 프라이데이가 이 책에서는 주인고으로 전면에 나선다. ‘방드르디’는 금요일이라는 뜻의 ‘프라이데이’의 프랑스어 이름이다. 로빈슨과 방드르디가 살아가는 스페란차의 섬의 실질적인 주인은 로빈슨이라기보다 ‘방드르디’이다. 영국 백인이며 독실한 기독교인 로빈슨에게 섬에 도착한 이후 시간은 오로지 과거만을 의미할 뿐이다.

오직 과거만이 중요한 존재와 가치를 가지는 것이었다. 현재는 추억의 샘, 과거의 생산 공장 정도의 가치밖에 없었다. 산다는 것은 오직 그 값진 과거의 자산을 늘리기 위해서만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고는 마침내 죽음이 오는 것이었다. - 49쪽

무인도가 아니더라도 인간의 삶은 과거의 자산을 늘려가는 과정일 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누구에게나 죽음의 순간이 온다. 그렇다면 인간의 삶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단초를 얻을 수 있다. 꿈과 고독 사이의 내밀한 통로를 찾아 헤매는 것이 인간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로빈슨은 피부색이 다른 원주민 방드르디를 극적으로 구해낸다. 죽음의 순간의 생명의 은인을 만난 방드르디는 로빈슨의 노예가 되지만 둘 만의 섬에서 그는 결코 노예가 아니다. 피부색과 종교, 언어와 삶의 방식이 극단적이었던 둘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시선과 해석이 이 책을 읽는 이유이다. 김화영의 해설대로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타자의 부재가 로빈슨의 행동, 사고, 지각에 끼치는 영향’이 이 작품의 철학적 주제라고 할 수 있겠다.

로빈슨이 아니라 방드르디가 이 책의 제목이 된 것은 단순히 원작의 전복이 아니라 ‘타자’를 중심에 놓는 방식의 삶에 대한 성찰이다. 주관적이고 배타적인 ‘자아’ 중심의 세계관이 아니라 ‘타자’를 통한 내 삶에 대한 반성을 의미한다. 유연하고 상대적인 처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 방식의 패러다임을 전환을 촉구하는 듯하다.

1장부터 12장까지 각 장들의 내용과 의미는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수수께끼로 던져 두어도 좋으리라. 책 전체의 흐름을 분석해 놓은 김화영의 해설을 꼼꼼하게 읽어보는 것은 이 책의 내용을 충분히 음미한 후에 할 일이다. 어쨌든 11장에서 ‘화이트버드호’의 등장으로 인해 마지막 반전이 일어난다. 자신의 배가 난파된 후 스페란차에 도착한 후 2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는 인간의 시간을 알게 된 로빈슨의 반응은 선장과 화이트버드호에서 식사를 한 후 느끼는 감정만큼이나 충격적이다.

로빈슨이 볼 때 악(惡)은 그보다 훨씬 더 깊은 데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그 사람들 모두가 열에 들뜬 듯이 추구하는 것으로 보이는 여러 가지 목적의 어쩔 수 없는 상대적 성격이 바로 악의 바탕이라 비판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목적을 추구하고 있었고, 그 목적이란 어떤 획득, 어떤 부(富), 어떤 만족 따위였다. - 304쪽

로빈슨과 방드르디의 선택은 반전 영화의 결말처럼 남겨두자. ‘죄디(목요일)’로 거슬러가는 시간의 역행은 무엇을 의미하며 로빈슨의 선택은 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정답은 없다. 다만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던지는 미셸 투르니에의 실존적인 질문들은 긴 여운을 남기며 ‘시간’과 ‘타자’와 ‘삶’의 의미를 성찰하게 한다.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라고.


10123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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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12-31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준비해두었지만 아직 읽지 못하고 있는 책인데 리뷰를 보니 빨리 읽고 싶어집니다.
2010년의 마지막날이네요. 새해에도 좋은 책 많이 읽으시고 행복하세요.

sceptic 2011-01-06 22:29   좋아요 0 | URL
답이 늦었습니다. 반딧불이님도 새해 건강하시고 복 많이 지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