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이름이 태양을 낳았다 창비시선 419
박라연 지음 / 창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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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대한 해석은 평론가의 몫이고 독자는 말놀이를 즐기면 그뿐이다. 한국어의 감각을 일깨우고 소설처럼 선명하진 않아도 나름의 이미지를 창조하며 감수성을 자극하는 정도면 충분하다. 길을 걷다 서점에 들러 박라연의 시집 표지를 보았다. 헤어진 이름이 태양을 낳았다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를 기억한다. 조금 늦은 나이에 시를 쓰기 시작한 시인의 언어는 응축된 의미보다 현란한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깊이와 넓이를 확보하는 일보다 말을 부리는 일이 더 어렵다. 생각과 표현 사이의 거리를 극복하기 위한 각자의 몸부림이 있을 테지만 박라연에겐 그 고통이 즐거워보였다. 어린 시절에 읽은 시집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이 떠올라 시간의 이편과 저편을 오갔으나 회한이 느껴지진 않았다. 시인도 독자도 딱 그만큼 세월을 견뎠을 테고 시간은 계속 흐를 테니 말이다.

 

오랜만에 읽는 박라연의 시집 서시는 시간에 대한 우리가 누린 적 있는 눈부신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이 눈부신 줄도 모르고 흘려보낸 시간들. 혹자는 그 시간 속에 있을 테지만 지나고 나야 겨우 깨닫는 그런 시간들.

 

 

아름다운 너무나

 

우리가

누린 적 있는 눈부신 시간들은

 

잠시 걸친

옷이나 구두, 가방이었을 것이나

 

눈부신

만큼 또 어쩔 수 없이 아팠을 것이나

 

한번쯤은

남루를 가릴 병풍이기도 했을 것이나

 

주인을 따라 늙어

이제

젊은 누구의 몸과 옷과

구두와 가방

아픔이 되었을 것이나

 

그 세월 사이로

새와 나비, 벌레의 시간을

날게 하거나 노래하게 하면서

 

이제 그 시간들마저

허락도

없이 데려가는 중일 것이나

 

 

시간은 인간을 옹색하게 만든다. 연륜과 혜안은 저절로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다. 세월 사이로 빠져나간 눈부신 청춘과 뜨거운 열정에 값하는 고통을 다시 경험하고 싶진 않다. 눈을 뜨고 밥을 먹고 일하고 끊임없이 또 다른 욕망에 절망하고 가진 것과 가질 수 없는 것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삶의 형태가 조금씩 다를 뿐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처구니없을 만큼 단순하고 감각적이다. 인간의 삶은 다 그러하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무너지면 사람 혹은 세상과 조금 거리를 두게 된다. 불면의 원인은 근심과 걱정이 아니다. 스트레스와 집착도 아니다. 죽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다. 잠이 들면 깨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의 증상이 불면이다.

 

 

불면이 뭐라고 생각하나?

잘 죽지 못하는 거

단번에 죽지 못하는 거

 

잠이 뭔가?

죽는 연습

 

모두가 조용히 빈틈없이 죽고 없는 시공에

혼자 남아

죽다 깨다를 반복하면 어쩌지?

 

 

잠이 죽는 연습이라면 불면은 죽음에 대한 거부 반응이다. 연습조차 거부하는 생의 집착. 과연 그런가? 박라연의 이번 시집에는 타인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세상의 모습도 감춰진 듯싶다. 귓가에 속삭이듯 보이지 않는 천사가 이야기를 건네듯 목소리가 낮다. 감정의 기복이 없고 일정한 거리를 둔 채 건조하다. 감정을 배제한 축구 해설가의 따분한 목소리처럼. 그런데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누가 썼든 시는 특히 독자마다 다른 의미로 읽히는 것이 좋다. 개별 독자의 삶이 다르고 감정과 생각이 같지 않은데 시인의 말이 똑같이 전해질리 없다. 뜨거운 봄날 도심 한복판에서 헤어진 이름이 태양을 낳았다는 문장을 보니 헤어진 이름은 떠오르지 않고 태양이 원망스러웠다.

 

 

 

고민,이란 친구에게 밥과 잠을 넘겨주면서

너의 허리는 얼마나 가늘어져야 했는지

두 눈은 또 얼마나 퀭해져야 했는지

 

분노와 슬픔으로 저녁을 짓고 뿌리내리던 주인들에게

감히 부탁해도 될까

 

누구의 고통이든

산 자들의 세끼들인데 화면을 확 돌려버리듯

외면하려 한 죄 용서해다오

살아서 펄떡이는 심장에서만 반짝이는 금모래빛

 

너의 빛으로 나의 내일을 뜨개질해다오

뼛속까지 휘파람 불게 해다오

 

 

봄날은 간다. 몇 번이나 다시 만날지 알 수 없지만 계절은 가고 또 다른 계절이 온다. 온도와 습도 태양의 뜨거움에 맞게 꽃도 나무도 그리고 사람도 자라고 익어간다. 봄은 기쁨과 아니라 분노와 슬픔이다. 뼛속까지 휘파람 불 일이 없으니 천연덕스럽게 해다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닌가. 시인에게 봄날이 어떠하든 잔인한(?) 4월이 가고 화려한(?) 5월도 지나가리라. 두 눈이 퀭해지는 밤을 남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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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 개정판
조나단 스위프트 지음, 신현철 옮김 / 문학수첩 / 199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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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쯤이었을까. 바닷가에 누운 걸리버를 소인국 사람들이 머리카락까지 묶어둔 장면을 본 때는. 책마다 읽어야할 적절한 시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고전도 마찬가지다. 풍자소설 걸리버 여행기는 왜 고전이 아닌 재밌는동화로 소개되었을까.

 

신현철이 번역한 걸리버 여행기(1726)391페이지 분량이다. 작은 사람들의 나라 릴리퍼트, 큰 사람들의 나라 브롭닝낵, 하늘을 나는 섬의 나라 라퓨타, 발니바르비, 럭낵, 글럽덥드립, 일본, 말들의 나라 휴이넘까지 4부로 구성된 여행기의 형식이다. 소설의 배경은 169954일부터 17151124일까지 167개월 동안이다. 실제 집필 시기는 1721~1725년으로 추정된다. 지금부터 300여 년 전 이야기다. 로빈슨 크루소(1719)과 비슷한 시기에 탄생한 걸리버는 아일랜드 태생의 정치 사상가 스위프트의 작품이다.

 

표정이 없는 얼굴, 진중한 목소리는 타인이 가볍게 대할 수 없도록 하는 좋은 방법이다. ‘진지충이라는 욕을 먹을 수도 있고 지루한 사람이라는 평가도 감수해야 한다. 반대로 웃는 얼굴 가볍게 던지는 아재 개그는 부담 없이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이지만 우습게 보거나 무례하게 대하는 부작용이 있다. 풍자정신은 다큐를 예능으로 바꾸는 태도다. 우리 문학의 전통 중 하나가 해학이다. 풍자는 해학과 조금 다르다. 스위프트는 돈키호테보다 진지하지만 풍자에 관해선 날선 칼날이다. 소설이 아니라 뛰어난 상상력이 가미된 시평時評이며 인간과 세계에 대한 철학적 반성이다. 원작의 훼손과 개작 과정이 이를 증명한다.

 

앤 여왕 시대 영국의 변방 아일랜드에서 정치적 소양이 다져진 스위프트에게 왕과 귀족, 정치와 사회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난 1세기 동안 영국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을 이야기하자, 국왕은 아주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역사라는 것이 단지 음모, 반란, 살인, 학살, 추방들의 모임에 지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것들은 탐욕, 편파, 위선, 불신, 잔인, 격분, 광기, 증오, 시기, 욕망, 악의, 야망이 만들 수 있는 가장 나쁜 결과라는 것이다.”(26, 166)는 큰 사람들의 나라를 여행할 때의 고백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혐오는 4부에서 절정을 이룬다. ‘휴이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걸리버는 인간을 닮은 야만족 야후를 보며 인간이 사는 세상을 재인식한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 이성적일 수 있는 존재일 뿐이다. ‘습관과 편견으로 가질 수 있는 힘을 매일매일 보여주는 우리의 모습은 걸리버의 여행으로 신랄하게 드러난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천공의 섬 라퓨타까지 스위프트의 상상력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인간은 보잘 것 없이 작은 존재이면서 만물의 영장으로 불릴 만큼 대단한 능력을 갖춘 존재이기도 하다. 동화적 상상력과 환상이 안내하는 스토리 자체의 즐거움은 물론 곳곳에 숨어있는 당대 사회와 인간에 대한 비판 정신은 걸리버를 특별한 존재로 만든다. 기득권에 대한 도전, 구체제에 대한 비판, 인간의 탐욕과 성정에 대한 반성은 영원한 소설의 주제다. 그것이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표현되느냐의 문제가 작가들의 고민이다. 시와 소설과 희곡이라는 전통적인 갈래 뿐 아니라 논픽션 분야의 작가와 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미룰 만큼(?) 미룬 책들이 많다. 어차피 죽을 때까지 미루다가 못 읽을 책이 더 많을 예정이다. 망설이지 말고 손을 뻗을 때다. 생각보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bon voy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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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든파티 - 영국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캐서린 맨스필드 외 지음, 김영희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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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장편소설이 주도한 나라지만 세계 문학의 중심에 우뚝 서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문학과 예술도 결국 경제력과 무관하지 않지만, 먹고 살만한 사람들의 유희에 불과하다고 할 수만은 없다. 가든 파티는 영국의 단편을 묶은 책이다. 8명의 작품 11편을 소개한다.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에 이르는 시기의 작품들이다. 빅토리아 여왕의 통치시기부터 산업혁명으로 상전벽해가 이뤄지던 시기의 단편은 영국인의 정서를 잘 담아낸다.

 

캐서린 매스필드의 가든 파티를 표제작으로 내세운 건 나머지 작가들이 장편으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기 때문일까. 찰스 디킨즈, 토머스 하디 제임스 조이스와 버지니아 울프, 도리스 레씽에 이르기까지 쟁쟁한 작가들의 단편을 모았다.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의 단편들이 비슷한 시기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세계사의 중심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느낌이라면 영국의 단편에서 다루는 주제와 이야기들은 근현대사의 중심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찰즈 디킨즈의 신호수는 열차라는 근대의 상징을 넘어 소외된 개인의 좌절과 무력감을 다룬다. 우리에게 익숙한 소설의 형식과 내용이다.

 

뿐만 아니라 토머스 하디의 오그라든 팔, 버지니어 울프의 큐 가든유품은 초창기 페미니즘 문학의 방향을 짚어보는 데 유용하다. 도리스 레씽의 지붕 위의 여자로 이어지며 시간의 간극을 읽어내기에도 좋다. 소설은 언제나 컨텍스트를 읽어내는 2차적 재미를 빼놓을 수 없다. 단순히 스토리와 유려한 문장보다 씨줄과 날줄로 얽힌 시대와 공간을 들여다 보는 재미가 적지 않다.

 

조지프 콘래드의 진보의 전초기지는 콩고의 상아 무역 담당 출장소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다. 제국주의 말단 집행자들을 통해 역사와 현실을 비판한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현실을 꿰뚫어보는 작가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어떻게 쓰느냐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쓰느냐가 내겐 더 중요한 관심사다. 대상이 동일해도 바라보는 관점은 다르다. 단편을 통해 우리가 읽어내는 것은 지나간 시대의 단면이 아니라 현재를 이룩한 과거의 아픔이다. 미래도 결국 현재의 결과일 뿐이니.

 

제임스 조이스의 애러비구름 한 점은 현대 소설을 읽는 느낌이다. 버지니어 울프와 더불어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이나 자동기술법auto-writing을 활용하며 인간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서술 방식 때문이다. 사소설, 심리소설이 주를 이루기 시작한 건 냉전 시대 이후 사회적 관심사가 개인의 문제로 귀착됐기 때문이 아니다. 언제나 소설의 중심은 인물이었다. 그 인물이 겪는 갈등에 따라 소설의 종류를 나누기도 하지만 결국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을 들여다보는 과정이 소설을 읽는 재미다.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는지 궁금한 게 아니라 선택의 이유와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궁금하다.

 

19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시기는 그 이전의 어느 시기보다도 과학기술, 문명의 발달 속도가 눈부셨다. 눈에 보이는 변화를 따라잡을 수 없는 개인의 혼란과 아노미 상황은 근대에서 현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인간으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으로 요약될 수 있겠다. 윤리와 도덕적 가치로 판단할 수 없는 상황들, 인간 존재에 대한 혐오와 부조리, 상상을 초월하는 기술의 발달은 오늘도 계속된다.

 

돌아서면 모든 게 새롭다. 아니 낯설다. 한 순간도 머물러 있는 건 없는 것 같다. 잠시 있다 없어진다. 깜빡깜빡. 불빛이 나타났다 이내 사라지듯. 그 이전의 불빛과 밝기가 변하듯. 영국 사회의 변화는 제국주의와 산업사회로 요약될 수 없는 깊고 어두운 그림자를 남겼다. 그 화려하고 찬란한 빛(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은 그늘(좌절과 실패)이 보이지 않는다. 반성적 태도로 소설을 읽을 필요는 없지만 시대를 통찰할 수 있는 안목을 기르지 못하는 소설이라면 굳이 나무를 희생시킬 필요가 없다. 소설은 도구일 뿐, 훌륭한 작가들을 통해 읽어야 할 것은 인간의 허위의식과 폭력, 역사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이다. 철학과 역사, 과학과 예술 - 분야는 중요하지 않다. 개인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주변과 집단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그래서 남은 시간을 나는 그리고 너는 어떻게 살 것인가. 소설은 길을 안내하는 대신 있던 길을 지운다. 길이 없다면 어디로 가야할까. 선택은 잔인하다. 물론 정답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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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줘! - 스페인·라틴아메리카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후안 룰포 외 지음, 김현균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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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나 유럽이나 아니라 내겐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동경이 있다. 콜럼버스의 침략부터 신산스런 역사의 아픔을 겪은 대륙. 어느 지역보다 수준 높은 문명과 자연 조건을 갖췄으나 인류 역사의 흐름은 라틴 아메리카에게 폭력을 선물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각축장이 되어 오랜 시간 식민지로 살았을 원주민의 삶은 우리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김영하의 검은꽃에서 다뤘던 애니깽들의 이야기가 대표적인 사례다. 근현대 세계역사는 침략과 폭력으로 점철된 야만의 역사다. 그 이전보다 더욱 정교하고 가공할 대량 살상 무기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또 죽였다.

 

이렇게 생존 자체가 시급한 상황에서 예술이 들어설 자리는 많지 않다. 라틴 아메리카의 소설의 역사는 19세기 초반에야 시작되었다고 본다. 1960년대 boom’ 소설 이후 라탄아메리카 문학은 눈부신 성취를 보인다. 국가의 개념과 구별보다 라틴 아메리카 전체의 특성을 이해하는 일이 그들의 소설을 이해하는 방법이다. 지역주의와 세계주의를 함께 욕망했던 라틴 문학은 보르헤스의 책이 1년에 37권 팔리던 시절을 극복했다.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대표되는 백 년 동안의 고독만이 우리에게 친숙하다. 후안 룰포의 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줘!를 표제작으로 내세운 창비세계문학 스페인, 라틴아메리카편은 19편의 독특한 단편을 담고 있다. 익숙하지 않지만 색다른 즐거움과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우리가 배우고 익힌 소설의 문법과 다르지만 그들의 소설은 신선하다. 관점의 새로움과 표현의 자유로움이 그러하다.

 

하지만 소설이 담고 있는 서민들의 삶은 여기나 저기나 거기나 마찬가지다. 기차와 철도로 상징되는 근대화는 라틴 아메리카도 다르지 않다. 삐닌과 로사가 키우던 늙은 소 꼬르데라가 팔려가고 오빠 삐닌 마저 전쟁터로 떠나는 내용의 단편 안녕, 꼬르데라!우리 농촌 근대 소설과 유사하다. 이밖에도 이그나시오 알데꼬아의 영 산체스, 아우구스또 몬떼로소의 일식,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거대한 날개가 달린 상늙은이, 이사벨 아옌데의 두 마디 말이 인상적이다.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는 이야기의 힘은 거대한 대륙 라틴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단 하나의 특징이 될 수 없지만 익숙한 영미문학에서 느낄 수 없는 그들의 욕망과 상상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그는 가난한 여자에게 예쁘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생각했다. 좋은 직업은 물론 심지어 성공적인 결혼에 이르기까지 여자의 삶을 향상시킬 모든 가능성은 미모에 달려 있었다. 못생기고 가난한 여자는 가난하고 힘없는 남자에 비견되었다. - 이그나시오 알데꼬아, 영 산체스중에서, 47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생의 부조리를 짚어내는 말과 글은 아프다. 시류에 영합해서 손가락질을 하거나 티 나지 않게 군중 속에 묻어가는 일은 삶의 지혜일까. 문학은 현실을 분석하는 대신 그 뒤에 숨은 욕망을 들춰낸다. 집단 무의식이 아니라 개별적 인간을 들여다본다. 그 인물이 한 시대 특정 사회의 욕망을 구현하든 보편적 인간의 일반적 속성을 드러내든!

 

책읽기는 대부분의 경우, 돌아가며 한 문장씩 낭독하는 집단적 행위가 아니라면 지독하게 이기적인 행위다. 자신과의 대면을 언제나 두려운 일이 아닐까.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이야기에 반영된, 등장인물을 통해, 현실적 자아를 확인하는 과정은 고통스럽다. 그곳이 21세기 대한민국이든 19세기 라틴 아메리카든!

 

단편소설로 세계 여행 중이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여행은 물리적 이동과 다르다. 이제 유럽으로 건너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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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신화
닐 게이먼 지음, 박선령 옮김 / 나무의철학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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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쩔 수 없이 이야기에 매료되는 존재다. 스토리텔링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마케팅에서 수학교육에 이르기까지 활용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서사의 힘은 강하다. 기억을 강화하고 마음을 움직인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모든 이야기는 끊임없이 반복과 변조를 이어간다. 인간의 공포와 상상력이 빚어낸 신화는 모든 이야기의 원형이다. 이야기는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태초에 빛이 있었을까. 그 빛은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됐을까. 밤과 낮은 어떻게 시작되었고 태양과 달과 별은 누가 만들었을까. 종교가 발명되기 전에도 질문하는 인간은 어디에나 있었을 터.

 

닐 게이먼이 쓴 북유럽 신화는 원초적인 궁금증에 대해 무한상상력을 즐길 수 있는 책이다.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땅도, 하늘도, 별도, 달도 없고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형체도 모양도 없는 안개 세상과 언제나 활활 불타오르는 불의 세상뿐이었다.’는 문장을 읽고 잠시 생각했다. 이 신화는 현대과학의 이론과 일치하지 않는가! 상상이 과학을 앞서가는 일이 빈번하다. 이성의 눈을 감고 현실을 떠나기 위해 이보다 더 좋은 책은 없을 듯하다.

 

북유럽 신화는 다른 지역의 신화처럼 권위와 신성성을 부여한다. 신들의 이야기니 당연하겠지만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세계다. 이그드라실과 아홉 개의 세상은 규모부터 남다르다. 그 중에서 아스가르드에 사는 에시르 신족과 바니르 신족이 주인공이다. 신들의 아버지 오딘, 천둥의 신 토르, 불의 화신 로키가 이야기의 중심 축이다. 절대 망치 묠니르를 든 토르는 여전히 영화의 주인공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하다. 모든 신화가 그러하듯 지역적 특색이 신화의 배경을 이룬다. 거인들의 땅 요툰헤임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이야기에 매료되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러나 신화는 상징이며 알레고리다. 이야기 자체의 재미로도 충분하지만 신화는 현실을 재해석하며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이 가능하다. ‘시인의 꿀술이야기에 대한 해석이다.

 

그날 이후 우리는 언어로 마법을 부리는 사람들, 즉 시와 전설을 만들고 이야기를 자아낼 수 있는 사람은 시의 꿀술을 맛본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훌륭한 시를 들으면 그들이 오딘의 선물을 맛봤다고들 말한다.

보라, 이것이 시의 꿀술과 그것이 세상에 전해지게 된 방법에 관한 이이갸기다. 불명예스러운 행동과 속임수, 살인과 사기가 가득한 이야기.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다. 말해줄 이야기가 하나 더 있는데, 비위가 약한 사람은 다음 이야기로 건너뛰기 바란다.

독수리의 모습을 한 최고신이 통에 거의 다다랐을 때, 주퉁은 그의 바로 뒤까지 따라와 있었다. 오딘은 꿀술 일부를 엉덩이로 내보내 고약한 냄새가 나는 꿀술 물방귀를 주퉁의 얼굴에 뿜어냈다. 그리고 인해 거인의 눈이 보이지 않게 되어 더 이상 오딘의 뒤를 쫓지 못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오딘의 엉덩이에서 나온 꿀술을 마시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엉터리 시인이 바보 같은 직유와 이상한 각운으로 가득한 형편없는 시를 읊는 걸 들을 때면, 그가 어떤 꿀술을 마셨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 155

 

예술의 속성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모험담을 닐 게이먼이 이렇게 해석한 것일까. 시인 뿐 아니라 글을 쓰는 모든 사람에게 가하는 일침이다. 시의 꿀술을 맛본 사람들의 그늘진 욕망을 들춰내는 이야기다. 이밖에도 신들의 보물’, ‘토르의 거인 나라 여행’, ‘게르드와 프레이 이야기등 라그나로크에 이르는 천지창조에서 신들의 몰락에 이르는 과정에서 재미는 물론 교양이라는 덤까지 얻는다.

 

세상이 시작되기 전부터 신들에게 최후의 운명이 닥칠 때까지 인간이 설 자리는 없었다. 오딘과 빌리와 베가 의지와 지성과 추진력을 주고 인간의 형상을 짓고 물푸레나무라는 뜻의 아스크Ask’와 느릅나무라는 뜻의 엠블라Embla’를 만들었다. 아스크와 엠블라는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고 어머니다. 우리 모두의 조상이다. 그리고 미드가르드라는 안전 지역에 살게 되었다. 거인과 괴물과 황무지에 도사린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곳에 인간이 산다. 지금도 여전히.

 

하지만 신들의 바람과 달리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은 미드가르드조차 지옥으로 만들었다. 지금 우리는 오딘과 벨과 베가 태초에 만든 형상으로 살고 있지 않다. 그것이 저 지구 반대편 북쪽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라서 단지 재미로만 읽힌다면 곤란하다. 온라인 게임을 이해하기 위한 방편도, 영화를 재밌게 볼 수 있는 도구는 더더욱 아니다. 북유럽 신화는 또 다른 세계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상상력의 원천이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다.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오만한 인간에게는 겸손을, 미드가르드를 지옥으로 만드는 인간에게는 경고를, 라그나로크를 잊은 자에게는 성찰을 촉구하는 듯하다.

 

생명생명에 대한 갈망으로 출발한 인간은 이제 더 이상 게임 속의 이야기로만 북유럽 신화를 받아들이지 않아야 할 때다. 재미로 시작한 북유럽 신화는 언제나 그렇듯 우울한 자기 반성으로 끝났다. 신들의 최후가 결말이 아니었어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그래도 게임은 계속된다. ‘그리고, 게임은 다시 시작된다.’(298)

 

수르트의 불은 세계수를 건드리지 못하는데, 이그드라실의 몸통에 인간 두 명이 안전하게 몸을 숨기고 있어. 여자의 이름은 생명이고 남자의 이름은 생명에 대한 갈망이지. 그들의 후손이 지상에서 살게 될 거야. 이건 끝이 아냐. 끝은 없어. 그저 옛 시대의 종말일 뿐이지. 그리고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기도 하고. 죽음 뒤에는 항상 부활이 따라와. 넌 패한 거야.”(헤임달이 로키에게 한 말) - 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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