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서니 벌써 벚꽃이 날리어 쌓이기 시작했다.

봄은 아쉽게도 그 옷자락만을 길게 늘어뜨린 채 떠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천성산엔 아직 봄이 남아 있으리라."

영산대학교에서 올라가기 시작한 등산로에는 지천으로 핀 진달래가 먼저 우리를 맞는다.

바람에 쓸리는 억새풀과 저 멀리 시원하게 내다보이는 능선을 뒤로 하며 우리는 걸었다.

진달래 꽃잎을 따서 입에 넣어서 씹으니 이젠 좀 억세어져 가는 꽃의 섬유질이 씹힌다.

2000번 차를 타고 오며 들은 이정현이 '꽃잎'이란 영화에서 불렀던 그 노래가 나를 훌쩍 대학시절로 돌려 놓았다.

다시 오지 않을 그 시절과 사랑의 아련한 기억을 가슴에 품고 오르는 산길에 깊 양쪽에서 맞아준

진달래 군락은 그야말로 추억 속의 길이었다.

이제 연초록의 싹들이 자꾸만 피어나고 온 산은 초록으로 덮힐 것이다.

진달래 군락지가 끝나갈 무렵 저기서 안적암이 보인다.

안적암으로 쳐다본 산은 파스텔, 그 위로 펼쳐진 하늘은 흰구름 둥둥 떠가는 수채화...

지하철을 타고 오며 내려다본 사람들의 신은 십중팔구가 등산화였지만 영산대학교에서 안적암으로 안적암에서 노전으로 내원사로 이어지는 코스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3년만에 찾은 이 코스는 늘 내게 천성의 봄빛을 유감없이 가슴 속에 불어넣어준다.

고찰 안적암을 지나 다시 노전으로 향하는 길에는 얼레지 군락지가 있다.

사람들이 분재로 쓰기 위해 파가버려서 군락지에 피해가 많다고 한다.

그 얼레지도 사람들의 발길에 고개를 꺽이기도 하고 때로는 인적이 드문 비탈에 피어서 그 아름다움을 뽐내기도 한다.

아! 천성의 봄빛은 역시 흐르는 푸른 계곡물에 있었다.

초록빛 푸른빛 맑고 투명한 천성의 계곡을 보는 것보다 내 마음을 더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 있을까?

오늘따라 까마귀도 유난히 낮게 날아 천성의 계곡에 그 자태를 비추어본다.

5시간의 쉽지 않은 코스임에도 불구하고 정쌤의 두 아이인 경화와 석원이는 참 잘도 걷는다.

아마 봄빛에 마음이 흥겨워졌으리라.

노전 가는 중간길에 드러난 계곡에 짐을 내려놓고 정쌤이 준비해온 간단하지만 실속있는 점심을 먹는다.

계곡 물소리 뒤에서 들리고 수채화처럼 그려진 하늘엔 햇빛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계곡물에 술을 담가두고 밥과 함께 비벼먹는 봄은 우리 입안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기분좋은 취기로 우리들은 다시 길을 걷는다.

잠시 걷다가 아주 너른 바위에서 우리들은 드러누워 봄의 햇살이 주는 단잠에 잠시 빠진다.

아! 물소리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사방에서 들리는 새소리...점점 희미해져가고....

단잠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이 맛....

이 맛있는 깜박잠을 깨고 우리는 다시 천성의 계곡을 옆으로 두고 걷는다.

내원사 입구에 있는 손두부집으로...

천성산을 걸으면서 계곡을 내려오면 늘 마음 속에 이 두부집과 막걸리가 생각난다.

고소하고 입에 딱 들러붙은 두부와 봄나물 그리고 간장, 젓, 젓갈로 우리들의 소박한 저녁은 시작된다.

천성의 봄빛을 가슴에 가득 품고 돌아오는 길은 온천지 봄빛이다.

아! 이 좋은 봄날..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자림 2006-04-09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하루셨군요.
봄을 가득 느끼고 있는 사람들, 사람들 속에 어느새 비집고 들어온
새봄, 새봄의 에너지...

달팽이 2006-04-09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봄빛 가득한 우주에서 봄날의 의문이 가슴에서 씨앗을 틔웁니다.

파란여우 2006-04-10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놀이는 다 그런거고
소박한 저녁(두부, 봄나물, 젖갈)이 입에 침을 가득 물게 합니다.호호

달팽이 2006-04-10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여우님의 위장에서 나는 소리에 웃음이 슬며시 나는군요..
봄빛을 안주삼아 먹어서 더욱 좋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