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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 무위당 장일순을 기리는 생명의 이야기
무위당을 기리는 모임 엮음 / 녹색평론사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며칠 전 비가 조금 내리던 날 아침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몸이 찌푸둥해서 산행이라도 하자는 것이었다. 그 며칠 전에 보면서 언제 금정산 산행 한번 가자는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바로 출발하기로 했다. 남문으로 올라가서 동문을 거쳐 북문으로 걸으면서 산아래에서 강한 바람을 타고 올라오는 차가운 안개들이 우리의 온몸을 스쳐갔다. 범어사에 들러서 경내를 구경하고 내려오다가 간단히 막걸리와 파전을 시켜놓고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하다가 무위당 선생이야기가 나왔다. 우리는 서둘러 술잔을 비웠고 서점으로 갔다.
친구에게 '노자이야기'라는 책을 선물하면서 이 책을 함께 샀다. 장일순 선생님의 책인줄 알았으면 이미 사야했을테지만 이 책은 선생님의 육성보다는 사후 10년을 기리는 자리에서 선생님을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묶여있는 것이어서 주저했었다. 하지만 선생님의 뜻과 정신이 씨앗이 되어 우리 사회에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가 궁금했고, 무엇보다 장일순 선생님의 책을 본 것도 벌써 두 해가 다되어가서 다시 그 분의 책을 들고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사람을 대할 때 현실의 사람이든 역사적인 인물이든 그 사람의 사회적인 지위나 업적이 무엇이었나를 보게 되기 보다는 그 사람이 살았던 삶의 지향점이 무엇이었는가를 보게 되었다. 그 사람의 정신은 무엇에 바탕했고 그가 가졌던 사상이나 삶의 기준이 무엇이었나에 더욱 귀가 열리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장일순 선생님은 겉으로 드러나는 사회적 활동과 지위를 가지지 않으셨지만 유교와 불교와 기독교를 관통해서 하나로 소통하는 깨달음에 뜻을 두셨고, 그것을 통해 많은 사회적 운동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방향잡으시고 인도하셨다.
신협, 생협운동과 한살림운동이 선생님에게서 비롯되었고, 독재시대의 반독재투쟁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실천하셨다. 그리고 해월 최시형 선생의 사상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동학사상을 재조명했던 점들은 사회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던 일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선생님의 뜻은 깊은 진리를 향한 길을 걷는 것에 있었지 자신의 명예나 학문적이고 사회적인 성취에 있지 아니하였다. 그러했기 때문에 지학순 주교님이나 리영희 선생님. 김지하 선생님, 이현주 목사님, 이철수 씨, 이반 씨 등의 여러 사람들에게 그 사상과 철학의 씨앗을 뿌릴 수 있었으리라.
선생님의 삶을 기리는 모임이 결성이 되었다. 하지만 선생님의 살았던 외형의 흔적을 쫓는 것이 아니라면 될 수 있으면 소박하게 선생님의 정신과 사상을 되살려내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것이 선생님이 살면서 도달하려했던 마음의 중지가 아닐까? 위무위라는 도덕경의 말처럼 하는일 없으면서 안하는일 없게 사는 것을 추구하셨던 분, 스스로 일속자라 하여 자신을 겸손하게 하면서도 그 작은 것 속에 온 우주를 담아내었던 삶, 그리하여 삶의 깊은 지혜 속에서 나오는 삶에 대한 소요유의 자세가 난을 그리는 것으로 드러나지 않았을까?
논리적으로만 치밀하여 옳고 그름을 따져서 사는데 익숙해져 있는 나를 돌아보게 한다. 단순하면서도 보다 넓게 삶을 포용하는 자세와 말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선생님의 삶을 보면서 나는 늘 부끄러움을 느낀다. 옛 성현들의 글이 항상 자신을 제대로 보고 내면적 성찰을 통해 성장하라는 격언을 선생님에게서 산 증인으로 배우게 된다. 선생님의 씨앗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피어날지 궁금해진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서 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은 간절하지만 원래 대량화되다보면 그 깊은 뜻이 희석화되기 쉬운 법이다. 선생님과 인연되는 사람들이 소수일지라도 그 뜻을 최대한 살려내면서 사는 삶을 살 수 있는 몇 몇의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것이 더욱 좋으리라고 생각이 든다.
선생님의 표연란을 책을 넘겨가면서 마지막으로 들여다본다. 난의 기품이 서려있으면서도 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있다. 그 바람 속에서 난은 미세하게 흔들린다. 난의 기운이 강하면 바람을 살릴 수 없고, 바람이 세면 난의 기운이 살지 못한다. 이 둘을 묘하게도 살려낸 선생님의 표연란에서 바람처럼 잡을 수 없는 그의 삶과 정신을 가늠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