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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의 길잡이, 리영희
강준만 편저 / 개마고원 / 2004년 4월
평점 :
절판
한국현대사의 그 많은 굴곡과 늪의 역사를 지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던 것은 허상과 이데올로기였다.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그러한 온갖 우상숭배와 이데올로기에 맞서 자신의 개인적 삶을 바쳤던 한국현대사의 산 증인이 있다면 바로 이 사람일 것이다. 그 거대하고 두려운 독재권력의 횡포에 맞서 젊은 열정을 넘어서 "역사"라고 하는 말을 젊은이들의 가슴 속에 심어주었던 사람도 바로 그였을 것이다. 무릇 역사는 독재가 생기면 거기에 맞서 인권과 민주주의를 찾기 위한 수많은 민중들의 운동이 일어나게 마련이지만 그러한 필연적인 현상들 이면에 이렇듯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모든 것을 바쳐 진실을 외쳤던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존재했음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그리고 그 역사적 현장의 정점에 리영희 선생님은 그렇게 우뚝 서 계셨던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끝나기도 전에 이렇게 그의 생애를 다룬 이야기가 책으로 만들어지는 예는 그리 흔하지 않다. 그것은 리영희 선생님이 한국 현대사의 전개에 있어서 그 흐름과 같이했고, 우리 현대사의 왜곡과 갈림길에서 또 다른 길을 제시했던 선구적이고 모범적이었던 삶이 가진 중요성과 의미가 크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 시대의 걸출한 논객이라고 할 수 있는 강준만 교수마저도 자신의 의견제시를 많이 자제하고 될 수 있는 한 선생님의 육성을 많이 담아내려고 했던 노력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책이었다.
한국사의 어떤 시대에서도 자신의 지식인으로서의 소임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점, 수많은 자료 조사와 실증적인 연구를 통하여 자신의 글 한 줄도 함부로 자신의 상상력으로 내뱉지 않았다는 점, 항상 민족과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는 동시에 그 민족과 국가를 구성하는 다수 민중의 처지를 마음 속에서 놓치지 않았다는 점, 자신이 가진 많은 영향력과 권위에도 불구하고 늘 증명된 진실 앞에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용기와 진실을 수용하려는 자세는 한 사람의 이름없는 사회과학도인 내가 마음 깊이 배우고 존경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내 서재에 꽂혀 있는 그의 책이 아쉽게도 한 권 밖에 없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책. 그는 우리 나라의 현대사에서 우상과 이데올로기로 인해 극단적으로 잘못된 선택의 순간에 늘 반대의 견해를 제시함으로써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균형잡히게 했다는 점에서 그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우리 현실도 크게 변화된 바가 없다. 시장과 세계화와 자본자유화의 움직임의 목소리만 우측 날개가 되어 세상을 뒤덮는 곳에서 그 문제점과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는 좌측의 날개 또한 존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선생님을 민족주의자니 인간주의자니 반반공주의자니 하는 여러 가지 주의자로 규정하기보다는 그의 이론과 실천 이면에 한 세상에 주어진 자신의 삶을 수용하며 열심히 살려고 했던 삶의 자세를 나는 배우고 싶다. 자신의 몸과 가정을 넘어서 민족과 민중과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고 나아가 북한의 동포와 베트남의 민중과 미국의 참된 길을 생각하는 제한없는 사랑과 인류애가 나는 존경스러운 것이다. 선생님이 언젠가 말했듯이 전환기의 굴곡의 한국 역사에서 자신의 몫을 최선을 다해 한 후에 이제 후학들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고 겸허히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공부를 하겠다는 말씀이 내 가슴에 와닿는다.
치열하고 희생적이었던 자신의 한 인생을 가볍게 훌훌 털어버리고 자신에게 덧씌워진 명예와 권위와 자존심을 떨쳐버리고 자신의 내면을 비추어 밝혀서 마지막의 인생을 정리하고 자신의 떠날 자리를 보는 혜안이 나로하여금 더욱 그를 존경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