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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파행 - 13억 중국인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시인 백거이
백거이 지음, 오세주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한 사람이 있다. 젊은 엘리트 관료로서 세상에 자신의 유교적 이상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속세의 때묻은 관리들의 질시와 비판 속에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고 변방으로 물러나와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자 했던 한 시인이 있다. 세상의 잘못에 대한 풍자와 과중한 세금과 아전의 착취와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의 비애와 연민을 노래하기도 했던 그는 세상에 대한 민중에 대한 따뜻한 사랑을 가슴에 품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삶의 어떠한 모습에 처해있던 그 삶을 즐기고 삶 속에서 참된 진리를 추구하였던 구도자였다.
또 한 사람이 있다. 1200여년의 세월이 흘러 강줄기도 바뀌고 풍경도 바뀌고 마을도 바뀐 그 곳에서 1200년 전의 한 시인이 남겼던 시의 산맥을 거닐면서 오늘의 삶을 돌아다보는 그는 '장한가'와 '비파행'에서 가슴아린 삶의 애절함을 공유하고 '산 속에 숨어사는 선비'와 '술잔을 앞에 놓고'에서 할 일없는 삶 속에서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향해 매진하는 구도자를 본다. 또한 그는 솔 숲에서 햇볕을 받고 살기 위해 옆으로 가지를 칠 겨를이 없는 쭉쭉 뻗은 고송의 삶보다 어느 들판에 홀로 자라 이리 저리 가지 뻗으며 한가로이 햇살을 마시며 자라는 어디에 쓸모가 없는 그런 노송의 모습을 본다.
인생의 좌절이 참된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에너지로 바뀌는 순간 그 좌절마저도 삶의 깨달음의 과정이 된다. 그리고 그 깨달음 속에는 좌절이 좌절이 아니요 기쁨은 기쁨이 아니다. 삶은 삶이 아니요 죽음은 죽음이 아니다. 달팽이 뿔 위에서 무슨일을 다투는가. 부싯돌 번쩍이듯 찰나에 맡긴 이 몸. 부귀는 부귀대로 빈천은 빈천대로 즐기리. 입을 벌려 웃지 못하면 그가 곧 바보라네. 이미 그는 삶의 의미를 깨달아버린 이다. 그의 삶이 이러했기에 국가에 나가서도 다시 자연으로 돌아와서도 그의 이상을 세웠어도 그 이상이 좌절되었어도 그것은 그에게 있어 지푸라기의 남김도 없었으리라.
남자에게 버림받고 설움과 기다림의 오랜 삶을 살면서 비파를 끌어안고 선율을 고르는 여인의 삶... 그 비파의 선율엔 이미 그녀의 인생이 모두 담겨져 있지 않았을까? 자신의 서럽고도 우여곡절이 많았던 인생여정이 비파의 선율을 따라 흘러가고 선율 그 자체가 자신이 되었을 때는 이미 그에게 삶의 희노애락이 자신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는 비수가 아니라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는 한 편의 파노라마가 아니었을까? 애틋함은 애틋함대로 설움은 설움대로 시의 선율을 타고 가슴에 잦아들지만 그 감정이 나를 해치지 아니하니 이것이 애이불비 낙이불음이 아니던가?
사람은 진리를 향해있고 그 진리는 사람에게 열려 있다. 삶의 기나긴 하지만 짧은 과정을 거쳐 우리가 도달하는 땅에서 우리는 어제 흘렸던 눈물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될런지도 모른다. 비바람이 불고 태풍이 닥쳐 쓰러진 나무들과 강한 바람이 할퀸 풀들도 또 다른 봄을 맞아 무성하게 돋아나듯이 삶을 지나며 느끼는 상실감과 상처가 나에게서 무한한 것을 만들어내게 될 것임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