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이여, 오라 - 아룬다티 로이 정치평론
아룬다티 로이 지음, 박혜영 옮김 / 녹색평론사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인도 사회에서의 댐 건설이 가장 밑바닥의 선량한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는 것임을 목격한 이후에는 그녀는 자신이 본 것을 쓸 뿐이고, 자신이 할 일이란 그저 자기의 "아픈 눈을 뜨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또 그녀는 작년 미국에서 발표했던 글쓰기의 연설문에서 " 나의 경우처럼 평화롭다고 추정되는 상황 가운데에서 한 작가가 불행하게도 조용한 전쟁에 마주치게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일단 그것을 보고 나면, 그걸 안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본 다음에는 입다물고 조용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발설하는 것만큼이나 정치적이 행동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 그녀의 말에서 그녀는 확실히 그녀가 의도했건 안했건간에 그것이 정치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것을 이해한 것이다.

  그녀의 사진이 책장 앞에 실려 있다. 뭔가를 호기심과 의문을 가지고 응시하고 있는 저 눈빛 속에 인도에 대한 세상에 대한 그리고 세계화의 흐름 밑에 숨은 정치적 논리와 경제적 논리를 보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를 보면서 얼마 전에 읽은 암베드카르가 생각이 났다. 인도 불가촉천민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쳤던 인도 민중해방의 아버지. 자신에게 주어진 작가로서의 명성과 성공의 길을 접어두고 이미 알아버린 사실에 대해 양심이 지시하는 대로의 삶을 선택한 용기는 자신의 삶이 그렇게 이끔으로써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기도 했다.

  아직도 많은 카스트제도의 구습과 불가촉천민과 여성에 대한 차별이 지워지지 않는 인도 사회에서 그녀는 홀어머니와 함께 자라오면서 당당하고 행복하게 사는 법을 스스로 터득하였는지도 모른다. 전근대와 근대 그리고 현대라고 하는 수세기가 공존하고 있는 인도사회에서 그녀는 시간의 흐름을 관통하면서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민중들의 삶과 처지에 눈을 떴고, 더 나아가 민중들의 되물림된 가난과 압제와 착취와 희생 위에서 피에 절은 고기를 뜯는 재벌과 권력자 그리고 미국 사회의 관료, 정치인, 군산복합체의 기업가들의 모습이 보였을 것이다.

  그저 평범한 눈으로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거기서 욕설과 고함이 튀어나오고 잠시후엔 나의 머리를 내리치는 망치가 튀어나오고 총과 폭탄 미사일 등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기 위한 기계들이 튀어나올때 우리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노암 촘스키나 하워드 진에게서 이미 보았듯이 소수의 권력자의 번영 위에 뿌려진 다수 민주의 피로 자라는 기형적인 민주주의에서 '민'자엔 '그들에게 시민은 없다'라는 말이다.

  미국은 나쁜가? 인도는 나쁜가? 아니 국민들의 의사 대변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소수 돼지들의 뱃속만을 생각하는 그들의 행정부와 정치인 기업인 권력자들이 문제의 핵이다. 이미 권력과 부에 맛을 들여 자신도 어쩌지 못하고 몸집만 키워가는 그들의 눈에 돈과 권력 아닌 것은 모두 없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에는 아랍인들이 없고 '이라크의 자유'에서는 이라크의 국민들이 없었다. 심지어 권력자들의 눈에는 자신들의 국민들도 안중에 없다. 그래서 유대인들을 배신한 유대인들이 권력을 잡고, 국민을 배신한 정권이 자신의 국민을 학살한다.

  세계화와 자본 논리에 대항한 그녀의 삶은 우리에게 가만히 있는 것도 하나의 정치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패스트푸드 음식에 대한 불매운동과 반전운동 군산복합체에 대한 불매운동 나아가 개개인에게 주어진 정치적 선택의 권리가 책임의식하에 이뤄지도록 하는 일, 그래서 소수의 권력자와 눈먼 미친개에게 주어진 권력을 다시 의식있는 개개인의 손으로 돌려야 한다는 점, 그러기 위해 자신의 일상생활에서도 부귀와 권력과 명성에 대한 욕망을 떨쳐버리는 삶을 살 것 등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의 삶으로 보여준다. '명성은 자꾸만 내 뒤에 매달려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깡통꾸러미와 같다."는 말처럼 언젠가 떨어져나가고 그곳에 마음이 들러붙은 정도만큼 반드시 잃게 될 때 가지는 상실감의 크기를 느끼게 된다. 그것을 겪어야만 아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이 그런 삶을 피해가는 것도 참다운 민주주의를 손에 쥐기 위한 방법이자 행복하게 사는 길이다.

  "마인드는 세계적으로 실천은 지역적으로"라고 했던가. 그녀가 인도의 댐건설반대운동에서 보여준 많은 노력과 용기가 인도에서 삶의 터전을 빼앗긴 자들에게는 희망이요 빛이다. 자신의 집에서 물이 가슴까지 차오르는 것을 견디며 댐건설과 함께 죽겠다는 의지와 숲을 떠나서는 삶의 아무런 보장과 희망도 없는 그들에게 인도정부와 거대한 다국적 기업 인도의 상류층과 중산층의 위협을 온전히 자신의 몸으로써 막아내며 생명을 연장해가는 그들에게 민주주의란 무엇일까? 그들에게는 없는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한 과정에 아룬다티 로이는 캄캄한 세상에 하나의 빛처럼 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드리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참다운 민주주의는 희망이요 꿈이요 사랑인 것이다. 남들에게 빼앗긴 내 권리를 찾는 것만이 아니라 나를 넘어서 타인에 대한 관용과 사랑과 공존을 위한 빛인 것이다. 그 '민'은 그래서 확장된 '나'가 '온인류'로 나아간 것이며 '온생명'과 '온우주'로 나아간 것이다. 다시 그녀의 사진을 본다. 그녀의 눈빛엔 호기심과 의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진 것이 없어 생존의 위협아래 놓인 민중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말없이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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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8-27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셨군요^^
아룬다티 로이의 글을 읽으면서 몰랐던 부분 많이 알게 되었지만
무엇보다 저는 민족주의가 자칫하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도 깨달았답니다.
책에 이런 말이 나오죠. 부시1세가 한 무책임한 말요,
"나는 그 어떤 것이 사실이라해도 내가 알 바 아니다"..
이게 미국의 민족주의로 대변된다니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모릅니다.

달팽이 2005-08-27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렇죠 임지현 교수의 '오만과 편견'에 보면 심지어 일제치하에서의 우리의 민족주의도 일본이 서양에 대립하기 위한 대동아공영주의랑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고 보는 견해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간디가 말하는 민족주의(민족애?)는 좀 다르게 받아들여지더군요.
보통의 민족주의 하면 타민족에 대한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는데 간디는 그런 배타성이나 폐쇄성이 없거든요. 그런면에서 마음과 의식이 품고 있는 어떤 생각이 나에게서 수신하고 가족 사회 민족 국가 세계 온우주로 열려 나가는 곳에서 막히는 바가 없어야 하고 그런 면에서 불교나 타 종교의 본래 취지, 동양사상이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점을 준다고 생각해요.
가족이기주의 집단이기주의 계급이기주의 민족이기주의 지역이기주의 국가이기주의 기업이기주의....무엇이든 막히는 순간 그 그은 선 밖의 존재들에 대해서는 배타적이거든요...
세계화나 세계화의 경제적 정치적 본질에 대한 책은 많은데 인도사회의 구체적 사안에서 시작하여 그 유려한 문체로 세계화와 정치의식까지로 나아가 더구나 자신의 삶도 일관성있게 살아가는 당당한 인도여성을 만난 것이 님의 덕입니다.
읽으면서 문득 파란여우님의 당당함(있다면..)과도 비슷한 빛깔이 스치는군요...

파란여우 2005-08-27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저에게는 당돌함과 무대뽀가 있지요.^^
당당함은 제 과제입니다. 무거워지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