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빈치 코드 1
댄 브라운 지음, 양선아 옮김, 이창식 번역 감수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역사는 힘의 언어로 쓰여진 박제품이다.' 현재 미국과 유럽의 역사는 기독교에 의해 쓰여진 역사이다. 그 기독교는 예수사후 4세기경 니케아종교회의를 통해 대주교들이 모여서 교황선임권과 황제선임권을 포함한 모든 정치적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지역적인 기독교사와 이면의 기독교사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조작된 것이다.  자신들에게 변함없는 부와 권력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예수를 절대화, 신격화시키는 것이 필요하였고, 그 절대자인 예수에 이르는 길은 자신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이미지를 만들어냄으로써 그들의 확고한 지위를 꿈꾸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예수가 가진 인간적인 면을 포함한 이면적인 역사는 인류의 역사에서 지워지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지워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빼앗기고 이교도라는 허울을 둘러쓰고 탄압받게 되면서 지하의 비밀조직으로 숨어들면서 그 생명을 유지해가게 된다. 다빈치 코드는 바로 이러한 기독교의 이면의 역사에 대한 코드이다.

시온수도원이라고 불리우는 기독교의 이면의 역사를 비밀리에 보존하고 전승하는 임무를 띤 비밀단체는 예수의 사랑하는 연인이자 아내였던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후 프랑스로 망명할 때 이미 예수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고, 그는 예수의 혈통을 이어가야 하는 중대한 사명을 부여받는다. 그래서 그 딸이 프랑스의 메로빙거왕조를 이루게 되고 비밀리에 그 후손을 지켜가는 것과 성배의 보존이 시온수도원의 임무가 된다.

그랜드 마스터 자크 소니에르가 기독교 극단주의 조직인 '오푸스 데이'의 행동대원 사일래스에게 살해되는 장면을 시작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소니에르가 죽어가면서 남긴 'P.S 로버트 랭던을 찾아라'는 말때문에  하버드 대학교 기호학 교수인 로버트 랭던이 사건에 연루되면서 소니에르의 손녀 소피와 함께 사건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시온수도원 비밀조직과 오푸스 데이 그리고 이를 조종하면서 성배의 비밀을 찾아 세상에 드러내려고 하는 티빙간의 성배를 쟁취하기 위한 음모와 갈등이 펼쳐진다.

이 기독교의 이면의 역사를 파헤친 다빈치 코드는 작년에 미국에서만 700만부 이상이 팔리면서 기독교의 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유럽에서 종교적 빅뱅을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내용이 대중적인 소설로 만들어질 수 있는 역사적 분위기가 이미 형성되었다는 것에 이미 이 소설의 결말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되기도 하였다. 중세만 하더라도 이런 상상력조차 허용되지 않았을 것이지만, 이미 종교적인 다원주의와 기독교 내에서의 자성적 목소리와 성서의 내용을 둘러싼 비판과 모색이 결국 종교적인 다원주의의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이러한 상황이 이젠 기독교의 바탕위에 선 국가들에서 이러한 작품을 탄생시켜내었던 것이다.

몇 번의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면서 그들은 쐐기돌의 비밀을 풀어내고 그 쐐기돌의 메세지를 따라 도착한 곳이 로슬린 성당이었고 그 곳에서 성배의 진실은 파헤쳐진다. 하지만 그토록 애타게 찾았던 성배의 진실은 없었다. "사실 시온은 성배가 결코 드러나지 않도록 유지해 왔답니다." "그것은 우리 영혼에 봉사하는 수수께끼이자 경탄이지요. 성배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배의 아름다움은 우아한 그 천성에 존재하는 거예요."

역시 그 말이 맞다. 훌륭한 결론이다. 사회적으로 본다면 기독교의 주류역사의 거짓과 기만을 들추어내는 것이 맹목적으로 기독교를 종교로 가진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줄 수 있겠지만 그래서 그들의 권력과 부가 지탱하고 있는 기반의 명분을 허물어 뜨릴 수 있겠지만, 그것은 또 다른 명분과 기반을 쌓게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본다면 내가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면 예수의 인간적인 모습이, 예수의 또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고 해서 나는 믿음을 저버릴 것인가? 나의 종교적 믿음이 형상에 치우친 것이라면 당연히 그 믿음이 깨어지겠지만 그 믿음이 진실로 예수의 참된 말씀에서 찾는 것이라면 무엇이 과연 달라지겠는가?

따라서 성배는 일반인들에게 단지 '위대한 개념'일 뿐인 것이다.

시온 수도원의 십자가는 네 다리의 길이가 같은 십자가이다. 그것은 남과 여가 하나님의 말씀아래 평등함을 의미하며 기독교의 주류의 역사가 대접받는만큼 버려진 이면의 역사도 평등하게 대접받아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편향된(물질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종교적으로든)우리들의 삶의 균형을 잡아주는 균형의 십자가를 간직해야 함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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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둔이 2005-02-04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은 근본적으로 픽션의 장치를 이용합니다. 있을 법한 이야기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소설이라는 문학의 매력입니다.

인간은 이러한 허구의 꿈과 상상력이 먹고 삽니다.

다빈치코드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 소설속의 성배입니다. 코드는 무언가의 숨김이고 드러내고 싶은 베일입니다.

그 코드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덮고 있는 베일을 걷어내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그것이 소설을 읽는 우리들 마음속의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빈치 코드...달팽이 코드는 무엇입니까?

삶은 사실이지만 또 그 속의 살아있는 허구때문에 꿈이 됩니다. 소설속의 진실을 맏고 싶은 만큼 삶은 허구 속에 허덕입니다.

진실과 허구의 게임에서 벗어나는데까지 마음의 비밀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다빈치코드가 어떻게 달핑이코드로 자리잡을 수 있는지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사회적 코드가 개인에게 내면화 되듯이 개인적인 코드가 사회를 이끌어 가게끔 하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접점에 우리가 알고 싶은 성배의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모두가 성스러운 핏줄의 후손이라는 것을 개달을 수 있을 때까지..코드는 우리들의 삶에서 살아 있습니다. 우리는 소설속의 코드를 만들고 소설속의 코드가 삶으로 튀어나와 세상에 영향을 줍니다.

인생이라는 코드는 진실과 허구 사이를 조롱하고 있습니다. 진실이 허구같고 허구가 진실같은 저마다의 코드에 속지말아야 겠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믿고 싶은 것을 진실이라고 믿고 살 뿐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본래 모습이 없는데 뚜렷한 모습으로 우리 사이에 유령처럼 떠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