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11월 7일 수요일) 저녁 5시 30분.
오후 내내 집중이 안 돼 기를 썼던 교정지를 덮어버림.
벌써 6개월째, 역시 나는 지구전에 약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음.
오늘은 약속도 없지만 좀 일찍 도망쳐야겠다고 실장님에게 말함.

8일(오늘) [고양이를 부탁해]가 종영되는 걸 알고서
어떻게든 이 영화 볼 기회를 만들어보리라 별러온 나.
오늘이 그날이다 생각함.
원래는 지난주에 종영해버리는 줄 알고 체념하고선 비디오로나 봐야지 했던 영화.
정동 스타식스에서 다행히 일주일 더 버텨줌.

삼성애니패스카드 가져가면 정동 스타식스에선 평일 영화 반값인데
빌어먹을, 인터넷 예매는 할인이 안 됨. 그냥 가서 보면 되지 하고 생각.

사무실에서 나온 시간이 5시 50분. 6시 40분까지는 시간이 모자라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이날따라 5호선이 늑장을 부림. 서대문역에서 6시 36분에 내림.
부지런히 걷다가 나중에는 뛰어서 극장에 닿은 것이 39분.
그리고 매표소 앞에 길게 늘어선 줄. 예매표 찾는 창구는 기다릴 필요 없는데,
제값 주고 예매할걸 후회도 잠깐 함.
내 차례가 된 시간이 6시 45분. 그냥 들어갈까 하다가,
영화 시작했다는 말에 8시 50분 표를 끊음.

옆 건물에 있는 맥도널드에 갔더니 김치버거 세트를 사면
아이스크림 콘이나 애플파이를 공짜로 준다 해서 얼떨결에 그렇게 함.
다 먹고 나면 배부를 테니 오래 갖고 있기 곤란한 아이스크림보다는
애플파이로 달라고 함.
유리벽 쪽에 바처럼 좌석이 늘어선 자리를 찾아 김치버거를 먹음.
김치버거라 해서 어떤가 봤더니 햄버거 사이에 김치 쪼가리 몇 개 든 것. -.-
먹으면서, 나는 조명 등등 때문에 유리창에 그림자가 져서
밖이 잘 안 보이는데 밖에서는 내가 햄버거 먹는 모습이 훤히
드러나리라는 생각을 함.

천천히 먹고 2주째 들고 다니는 [석순] 19호를 펼침.
마침, 마지막 꼭지는 영화를 보는 여성 관객의 쾌락과
페미니스트 관객, 퀴어영화에 대한 글 세 편을 묶은 것.
마지막 장을 덮으니 8시 10분.

영화관 건물로 다시 가서 로비의 작은 탁자와 의자 하나를 차지.
나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조금 어릴 것 같은 여자 하나,
한쪽에 방치된 의자 하나를 밀고 내가 앉은 탁자로 옴.
맞은편에 앉아 주섬주섬 봉지를 펼치는데
내가 봉지 밑에 깔린 신을 잡으며 "봐도 되겠지요?" 물음.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던 신문이라 여자는 물론 허락.
둘이서 신문을 나누어 보는데 여자, "같이 드세요" 하고
봉지 속의 빵을 보임. "전 방금 먹었어요" 하고 웃어줌.

8시 30분. 목이 말라 건물 안의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2개 삼.
앉았던 자리로 돌아와 하나를 앞의 그 여자에게 건네자
고마워하며 "영화 보러 오셨어요?" 하고 물음.
그렇다 했더니 "어떤 영화... [물랑루즈]요?"
"[고양이를 부탁해]요."
"아... 정말 고맙습니다."
그 여자는 [물랑루즈]를 보러 온 모양. 둘이 같은 영화를 본다면
이야기를 틀 수도 있을 텐데. 40분이 되자
"영화 잘 보세요" 하고 내가 먼저 일어섬.

그 동안 옆자리에서는 다른 여자가 40분 내내
페미니즘 영화에 대해 어떤 남자와 이야기하고 있었음.
[석순] 19호의 한 글은, [석순] 19호가 나왔을 당시
미국 흥행을 휩쓴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와
한국 극장가를 강타한 [친구]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음.
이 글은, 한국의 문화소비자층을 구성하는 비율을 봤을 때도
여성 관객의 주머니를 털지 못하면 영화는 절대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데,
[쉬리]에서 영화 속 상황을 규정하는 조건에서 희생자이면서도
공격자인 모순적인 위치로 전면에 나섰던 여성이
[공동경비구역]에서 남자들만의 세계에서 이루어진 사건에 대한
관찰자이며 기록자로 물러서더니,
[친구]에서는 노래 한 곡 부르고 사라져버린 상황에 대한
해독을 시도함.

그리고 극장 좌석에 앉아 새삼스레 주변을 둘러보니,
거의 대부분이 여자임. 특히 내가 앉은 줄은 가운데 앉은 나를 경계로
셋씩 같이 온 여자들 무리로 채워짐.
이들은 어떤 눈으로 어떤 영화를 보며 쾌락을 느낄까?
같은 영화를 보러 일부러 늦은 시간, 한 공간을 꽉 채운 사람들이라는
호감. 그러나 영화가 시작하고 몇 분 흘렀는데 내 앞에서 셋째 줄에
몸도 별로 낮추지 않는 채 줄줄이 들어와 앉는 사람들. 짜증남.
(아까 나도 5분 늦게 영화를 보러 들어가? 하고 잠시 망설였는데
그때 안 그러길 잘했다 생각.)

그리고 내 바로 앞자리에 아이 두 명과 같이 온 부부인 듯한 사람들.
아기 옷 때문인지 팔을 머리 위로 들었다 놨다,
또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위로 들었다 놨다,
바로 뒷자리에 앉은 사람에게는 하나하나 모두 스크린에 방해될
행동을 연속으로 함. 애가 재미없어할 게 뻔한 영화를
왜 꼭 같이 와서 보는지 이해 안 됨.
극장에서 보는 영화는 비디오와 달라 대사 하나 놓쳐도
되감아서 확인할 수 없음을 새삼스레 깨우침.
짜증스러웠으나,
문득, 이런 것들도 모두 '극장에서 영화 보기'의 일부일 거라는 생각.
그리고 부부가 영화를 같이 보고 싶은데
아이들을 맡길 데가 없어 할 수 없이 데려왔으리라 이해하려고 노력.

[고양이를 부탁해]
상영시간   110분.
각본 감독  정재은.
제작 배급  마술피리.
주연          배두나(태희), 옥지영(지영), 이요원(혜주), 이은실(비류), 은주(온조)

요즘 스무 살 여자애들이 그렇듯,
손에서 전화기를 뗄 줄 모르고 틈나는 대로 문자를 날리는 그들.

비류와 온조로 나오는 쌍둥이 여자애들은 예전에 MBC '칭찬합시다'를
이윤석, 서경석이 진행할 때 같이 나왔던, 무표정한 얼굴로
사람들을 웃긴 그 쌍둥이 여자애들. 역시, 귀여운 여자아이들이었음.

배두나가 좋음. 눈과 귀와 마음뿐 아니라 손과 발까지 열려 있는 아이 태희.
그 태희에게 딱 어울리는 배두나가 좋음.

이요원 연기 잘함. 증권사 사무실에서, 스스로 가치 있는 일을 한다고
믿기 위해 발버둥치는 여상 출신 여직원 혜주.
얄밉고 이기적이기도 하며, 깜짝 놀랄 만큼 의뭉스러운.

지영이란 아이가 이 영화에 나와서 영화가 좋아짐. 정말.
지영이 없었다면, 이 영화의 의미는 절반으로 뚝 떨어졌을 거라 생각.

영화 마지막 장면에 무식하게 큰 글자로 나오는 "GOOD BYE"가 좋은 영화.
타일이 주르륵 뒤집히는 듯하게 그래픽 처리한 크레딧도 좋음.

영화관에서 울어보기는 [개 같은 날의 오후] 이후 처음.
코미디영화 보고 울어보기는 [개 같은 날의 오후]가 처음이었고,
안 울리는 영화 보고 울어보기는 [고양이를 부탁해]가...
음... 처음은 아님...

말을 하고 싶지 않아지면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싶어지는 영화.
음, 그래, 이런 기분이 느끼고 싶어서,
아마 이 영화는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해줄 거라 생각해서 보러 왔는지도 모름.

오늘 아침 출근해서 영화감독 이름을 몰라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홈페이지(www.titicat.com : 영화에 나오는 고양이 이름이 '티티'임)에
장사가 안 돼 종영하는 이 영화 재개봉 운동에
가수 조영남이 나섰다 함. 나 이 사람,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렇다 해도, 다양성을 배양하기 위한 운동을 한다는 건 좋은 일이라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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