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살림에 매달 거금 6000원이나 내면서 캐치온(유료 영화 채널)을 보고 있다. 예전에 시청료 6개월 무료 행사할 때 옆지기가 코넷을 해지하고 냉큼 신청해버렸다. 당시엔 인터넷은 다 직장에서 하니까 집에 통신선 연결할 돈으로 영화 보자, 뭐 이런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내가 집에서 일하게 되어 예전의 코넷보다 훨씬 비싼 하나로통신을 깔고도 계~속 캐치온을 본다. 시간 없을 땐 한 달 가도록 제대로 영화 한 편 보지 못해, 그 돈이면 차라리 필요할 때 비디오를 빌려다 보는 게 이익이다 싶으면서도, 웬만한 개봉 영화는 6개월이나 1년쯤 뒤에 거반 틀어주고, 때로는 소식 둔한 내가 듣도 보도 못했지만 우연히 보고 나니 본전 뽑은 것 같은 작품을 보여주어, 그 맛에 끊지 못한다.
오늘 본 영화도 아마 캐치온이 아니었으면 보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스웨덴 영화인데, Invisible로 번역된 원제는 Den Osynlige라고 한다. osynlige라는 말이 아마 invisible이란 뜻인가 보다. "스웨덴판 식스센스"라고 광고하던데, 미국식 미스터리(혹은 스릴러) 영화와는 분위기가 아주 다르다. 식스센스는 보지 않았지만 막판에 그 인간이 귀신이더라 하는 반전이 있는 건 아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런 뒤통수를 치는 반전...(이 아주 없지는 않다. 하지만 식스센스와 같은 건 아니다)...보다는, 곧 세상을 떠날 영혼이 자신을 해친 이를 이해하게 되고, 해친 이는 그 영혼을 돕게 되는 감동이 있다. 그 과정을 보여주는 두 아이가 예뻐져서 그만 울고 말았다.
해친 아이, 아넬리는 털모자를 쓰고 목깃을 세워 눈만 내놓은 차림으로 나온다. 그렇게 자신을 꽁꽁 숨기고서(하필이면 이 더운 날 그런 차림을 보자니 아주 갑갑했다. ^^;), 도대체 쟤는 뭐야, 왜 저래? 싶은 행동을 한다. 다친 아이, 니클라스는 그런 아넬리를 미워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화가 아넬리를 조금씩 보여주다가, 아넬리가 비로소 모자를 벗고 머리를 늘어뜨리는 순간, 니클라스는 아넬리를 "미운 행동 덩어리"가 아니라 "감정과 생각이 있는 한 여자 아이"로 보게 된다.
영혼에 대한 예의...라는 말이 떠올랐다. 우리 민속신앙에서도 사람이 죽은 뒤 49일 동안엔 집을 떠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49재를 올리는 거란다. 실제로 넋이 있든지 없든지, 산 사람이 실컷 슬퍼할 시간을 주고, 또 슬픔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풍속일 텐데, 만약 신체에서 분리되는 영혼이 있다면 그 시간에 죽은 넋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미련을 털어버릴 것이다. 그동안 세상을 떠난 이에 대해 내가 예의를 갖추었는지 돌아본다. 제대로 한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아프다.
니클라스와 아넬리
보면서 이런 것도 생각했다. 스웨덴에도 작가가 되고 싶은 자식의 꿈을 가로막고 돈 잘 버는 직업을 위해 진학을 강요하는 어머니가 있구나, 친자식만 사랑하는 계모와 마음의 눈이 먼 아버지 때문에 버려지는(집에서 쫓겨난다는 게 아니라 정서적으로) 아이가 있구나, 학교에서 삥뜯는 불량청소년, 교사가 포기하는 학생이 있구나.
2002년 작품이고, 아마 우리나라에서도 개봉했던 모양이다. DVD로도 나오고. 감독은 두 사람, Simon Sandquist(시몬 산드퀴스트?)와 Joel Bergvall(요엘 베리발? 외래어표기법에 따르면 이렇게 쓰는 게 맞는 것 같은데. --;). 니클라스 연기를 한 배우는 Gustaf Skarsgard(구스타프 스카르스게르드, 이름 끝 gard의 a에 움라우트가 붙은 것 같았다. 그러면 스웨덴어는 "에"로 쓴다), 아넬리 연기를 한 배우는 Tuva Novotny(투바 노보트뉘). "매츠 월스"라는 사람이 쓴 소설이 원작인데, 소설과는 분위기나 전개 방향이 많이 다르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