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로봇과 인간이 함께 등반하는 실험에 대한 꿈을 꾸었다. 로봇은 산에 빨리 올라갈 수 있도록 최적화되어 있는데도 인간과 함께 등반하려는지 중간 중간 쉬었다. 그래서 결국 인간과 같은 속도로 정상에 올랐다. 그러니까 산에 오르는 건 효율이 아니라 감상이 우선인가? 일요일에 요 앞 공원을 산책하다가 한참 동안 청설모를 구경했는데 그게 꿈으로 나왔을까? 아니면 이게 로봇이 아니라 사실은 강아지 얘긴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잠이 깼다. 5월이 되었는데도 새해 결심인 '일찍 일어나기'에 실패하고 있다. 아무래도 그냥 그 결심을 버려야겠다.


*
















<<13.67>>은 추천하는 말에서 '일본 드라마 <파트너>가 생각나겠지만 그것보다 재미있다'고 했는데(정확한 문장은 아님), 역시 <파트너>가 생각나고 그것과 다르게 재미있었다. 추리 천재(!) 관전둬의 면면이나 그를 보는 형사들의 시선을 묘사한 대목들은 전형적이지만 사건의 짜임새가 '정성스럽다'고 느껴질 만큼 촘촘하다. 내가 수사 드라마 팬이어서 그런지 변장/배후조종/은폐 요소는 약간 짐작 가능한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하늘 아래 새 이야기는 없고, 그걸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한 것 아닐까. 홍콩의 역사를 날마다 적어두지 않고서는 이런 작품이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회와 인간과 그것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추리물.


하늘 아래 새 이야기가 없긴 하지만 스티븐 킹은 내가 이야기란 걸 난생 처음 들어보는 사람인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정신 없이 몰아친다. <<별도 없는 한밤에>>는 맨앞의 소설 <1922>가 너무 무섭고 끔찍해서 불쾌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야기에 매료된 사람은 아무 힘이 없다. 다음 이야기가 이 공포를 달래주리라 기대하면서 읽어나갈 수밖에 없다. 물론 그러려면 어쩌면 이번 이야기는 더 무서울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스스로 달래면서 읽어야 하지만. 결론을 말하자면 이 소설집은 작품 배열이 좋다. 불쾌하게 한다 → 무섭지만 견디게 한다 → 이상한 기분이 들게 한다 → 무섭게 한다. 그러면 나는 역시 도리가 없다. 무서워하면서 그의 책을 또 읽을 수밖에.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은 책의 체제를 이해하는데 약간 머리를 써야 했다. '스티븐 킹의 사계' 연작이 봄여름/가을겨울 두 권으로 나왔는데, 그중 봄여름에 해당되는 것이 이 책이고, 봄에 해당되는 소설 제목을 책 제목으로 삼았다. 어째서 '스티븐 킹의 사계 봄-여름'을 제목으로 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바로 '쇼생크 탈출'과 '스탠바이미'를 표지에 적기 위해서겠지. 그러고 보면 이 복잡한 체제를 문제 삼고 싶지 않아진다. 영화 '쇼생크 탈출'을 나는 30번쯤 보았다(과장이 아니다). 내용을 너무 잘 알아서라기보다, 그냥 영화로 간직하고 싶어서 일부러 소설은 읽지 않았다. 영화가 잘 만들어졌어도 문제(소설은 별로네?), 영화가 못 만들어졌어도 문제(나의 30번이여...)니까. 그런데 읽고 보니 소설은 소설대로 좋고, 영화는 와! 잘 만든 거였다! 소설에서 무엇을 버리거나 바꾸고 무엇을 살려서 영화로 만들지, 아주 잘 결정된 것이었다. 함께 실린 여름편 '우등생'도 재미있게 읽었다. 밝고 건강한 웃음을 간직한 채 악을 탐하는 미국 소년이라니.


*


그러고 보니 전날에는 옛날 회사 동료와 싸우는 꿈을 꾸었다. 상사에게는 깍듯하고 동료에게는 이기적이어서 싫어했던 이였는데 꿈이었으니 당연히 더했다. 상사가 그에게 전화로 귀찮은 일을 지시하는 걸 나도 뻔히 들었는데, 그는 해맑은 얼굴로 내게 일을 떠넘기는 것이었다. 나는 화가 나서 마구 소리를 질렀다. 얼마 전에는 다시 대학에 가는 꿈도 꾸었다. 수업이 힘들어서 수강 취소하려고 컴퓨터를 찾아 온 학교를 헤맸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방만하게 살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충실하게 살기'가 말만큼 쉽지 않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사람은 왜 노력하고 살아야 하나? 꿈 없이 허송세월하고 싶은데, 그럴 수 있는 시간은 이미 많이 써버린 것 같다. 그래서 좀 걱정이 된다. 그래도 며칠 전에 간 삼겹살 집에서 나를 '30대 중반' 고객으로 기입해둔 것을 슬쩍 본 일은 좀 좋았다. 나 40대 초반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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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아직 저 구름처럼 느려. 이 잎에서 저 잎까지 가는 데 한참이나 걸려. 나뭇잎 사이가 아무리 가까워도 건너뛰지도 못해. 아직은 작고 어린 애벌레니까.

그래도 나중에 나비가 되면 구름처럼 하늘을 둥둥 떠다닐 거야. 이깟 나뭇잎이 대수겠어? 저 나무 끝까지 날아오를 거야.

- 김원아 『나는 3학년 2반 7번 애벌레』중에서


애벌레가 번데기를 거쳐 나비가 되는 것. 이것은 미성숙한 존재가 난관을 극복하고 성공에 이르는 스토리에서 흔히 쓰이는 은유다. 너무 흔해서일까? 애벌레에서 어린이를 연상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은데도 실제 동화에 등장한 경우는 별로 없다. 작가는 영리하게도(영리한 것은 얼마나 좋은가!) 이 빈자리를 좋은 동화로 채워 넣었다.


소재만 잘 잡은 게 아니다. 앞서 애벌레를 '미성숙한 존재'로 흔히 은유한다고 했는데, 애벌레로서는 지금 자신이 완전한 존재다. 언젠가 번데기가 되고 나비가 될 존재가 아니라, 오늘의 애벌레로서 하루를 산다. 먼저 번데기가 되고 나비가 되는 형님들을 동경하기도 하지만, 배춧잎에 모양을 내면서 재미를 찾고,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며 몽상에 잠긴다. 그리고 당장에 닥친 위험으로부터 자신의 세계를 구해낸다. 


7번 애벌레가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장면은 물론 아름답지만, 나는 그 장면 없이도 이 이야기가 많은 것을 해냈다고 생각한다. 나비가 되지 않고도 7번 애벌레는 완전한 생명이다. 어린이도 그렇다. 어른이 되기 전이라고 해서 미완성의 존재가 아닌 것이다. 누군가의 말을 조금 바꾸자면 어린이에게는 오늘까지가 평생의 삶이다.


작은 판형에 그림이 많고 귀여우며 문장이 단순하다. '첫읽기책'이라는 시리즈 의도에 비해서는 이야기가 긴 편이지만, 이 시리즈로 나온 책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든다. 작가의 첫 책이라는 점도 반갑다. 상 이름 그대로, '좋은 어린이 책'.



+ 함께 읽는다면









꼬마 애벌레 말캉이 1, 2 (황경택 만화)

궁금한 건 못 참고, 심심한 건 더 못참는 애벌레 얘기.

깜짝 놀랄 만큼 뻔뻔하다는 게 웃음의 포인트인데

읽다 보면 은근히 감동을 받는다.

초등 1학년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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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작은 마을에서 자란 스기노는 일상을 살면서도 '시선을 딴 데 두는' 사람이었다. 스기노는 열두 살이 넘어서도 어린애처럼 엉뚱한 짓을 하곤 했다. 멸종한 바닷새에게 편지를 담은 유리병을 띄우기도 하고 교실의 뜯긴 마룻바닥 아래 콩나무를 심기도 했다. 두 손 놓고 자전거 타기나 공중그네를 연습하는 소녀였으니 서커스에 빠지는 것도 당연했다. 여학교를 졸업하고 진로를 정해야 했을 때도 마술사나 선원이 되고 싶어 했다. 결국 병든 부모를 돌보고 결혼해 가정을 꾸리느라 고향 마을에 정착해 살면서도 그런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것, 위험한 것에 끌리던 그녀는 결국 마술사에게 매혹되어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젊은 남편과 어린 두 아이를 남겨 두고서.


식구들 사이에서 외할머니는 빨래를 널다 떨어지는 사고로 돌아가신 것으로만 되어 있었다. 외할머니, 즉 스기노에 얽힌 비밀을 알아낸 것은 이제 열두 살인 후코다. 여름방학을 보내러 시골 외할아버지 댁에 갔다가 빨래 널 때 쓰는 2층의 문이 신비한 정원으로 연결되는 문이라는 것을 발견하면서 젊은 시절 행방불명된 외할머니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후코 역시 정원에 매혹되어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질 뻔하는데, '온기 어린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외친 친구 덕분에 위험에서 벗어난다. <<시계 언덕의 집>> 이야기다.















고백하자면 나는 이 책을 읽기가 힘들었다. 바닷가 마을의 평화로운 정경이 공들여 묘사된 것은 나처럼 인내심이 적은 독자에게는 힘든 코스였다. 스기노뿐 아니라 여러 마을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러시아 문물에 대한 얘기도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비밀의 문은 금방 찾았는데, 문 안쪽에서 신나게 모험하는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는 것도 의아했다. 후코가 이 정원의 진짜 주인일 것이라고 짐작한 매력적인 소녀 마리카의 정체를 밝히는 것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


이렇게 전반적으로 거의 지루하다고 할 작품인데도 내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읽은 것은 작가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결국은 속이 시원해지거나 웃음이 나거나 마음이 따뜻해지거나 할 것이라고 기대한 것이다. 그래서 후코의 외할머니가 미지의 것을 동경하다 행방불명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는 내가 잘못 읽은 줄 알았다. 외할머니를 되찾는 것도 아니고, 그 죽음 혹은 행방불명을 위로하지도 않는다니. 냉정하다. 작가에 대해 배신감마저 들었다.


다카도노 호코는 <<꼬마 할머니의 비밀>>에서 어려지는 옷을 발명한 할머니들이 모험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때 할머니들은 어린이의 몸이 되어서 갖가지 문제를 겪고 해결해나면서 '어린이다움'의 힘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진지한 씨와 유령 선생>>은 빡빡하게 살던 진지한 씨가 유령과 마주하면서 일상이 풍요로워지는 이야기였다. 달리 말하자면 환상이 느긋함을 준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유독 스기노에게는 이렇게 가혹할까. 그건 지금 후코가 어른이 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번 여름) 후코는 그 속에서 지금까지 느끼지 못한 해방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에게 딱 들어맞는 환경 속에서 홀로 경험하는 세계, 그것이 가져다주는 해방감. 마치 어른이 된 것 같았다. 그동안은 어른이 되는 걸 두려워했지만 어른이란 건 어쩌면 부모의 자식이나 가족의 한 구성원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으로만 존재하여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른이 된다는 건 두렵기는커녕 아주 멋진 일이었다." (211-212쪽) 


방학 동안 느끼는 해방감은 어른이 된 느낌으로 혼동될 수 있지만, 이어지는 대목에서 후코가 할 수 없이 방학 숙제를 하는 것처럼 아직 완전히 주어진 것이 아니다. 아니 어른이 된다는 것은 해방감과는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마법에 기댈 수도 없고, 환상에 빠져 현실을 잊을 수도 없다. 단지 '허락되지 않은 것' 정도가 아니라, '위험한 것'이다. 차갑게 들리지만 그 점을 알게 하는 것이 정말 후코를 위하는 길인지 모른다. 판타지는 이상으로서 우리 머리 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위험한 나락이 될 수 있다. 외할머니는 끝내 현실에 발을 딛지 못해 추락했고, 외할아버지와 엄마, 외삼촌은 그로 인해 괴로운 날들을 보내야 했다.


"그런 사람은 언젠가 분명 초원의 끝까지 달려가서 바늘 산에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움의 대가, 그것은 너무나도 비쌌던 것입니다." (272쪽)


후코와 함께 비밀을 풀어가던 친구 에이스케는 그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후코가 환상에 빠져 추락하려 할 때 온힘을 다해 그녀를 부른다. 후코가 떨어지면 안 된다는 강한 의지를 찾은 것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 온기와 힘이 담긴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환상이 아니라 사람에게 의지해서 헤쳐나가야 하는 것이다, 현실이란.


후코는 이제 일상으로 돌아오지만 그때 문을 열고 본 세계의 아름다움과 위험을 잊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보니 나도 마음이 풀리고 안심이 된다. 다시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정도가 아니라 작가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작가는 이제 좀 컸다고 환상의 세계를 잊으면 안 돼, 하고 독자를 묶어두지 않는다. 오히려 머무르려는 독자를 등떠밀어 삶으로 내보낸다. 그렇다면 이제 환상의 세계는 사라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 후코가 추락할 뻔했던 2층의 문 밖으로 떨어진 회중시계는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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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죄수

송경동




천상병시문학상을 받는 날

오전엔 또 벌 받을 일 있어

서울중앙법원 재판정에 서 있었다


한편에서는 정의인 게

한편에서는 불법, 다행히

벌금 삼백만원에 상금 오백만원

정의가 일부 승소했다


신동엽문학상을 받게 됐다는

소식을 들은 날 오후엔

드디어 체포영장이 발부됐다는

벅찬 소식을 전해 들었다


상 받는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닌 듯 종일 부끄러운데

벌 받는 자리는 혼자여도

한없이 뿌듯하고 떳떳해지니


부디 내가 더 많은 소환장과

체포영장과 구속영장의 주인이 되기를

어떤 위대한 시보다

더 넓고 큰 죄를 짓기를 마다하지 않기를























*


읽으면서 눈물이 솟았는데, 옮겨 적으면서  결국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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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에는 알라딘 친구의 결혼식에 갔다. 마음의 준비를 했건만, 신부가 짐작보다도 훨씬 예뻤다. 신부의 친구들마저 예뻤다. 이제 드디어 남의 결혼 사진에서 빠질 때가 온 것 같다는 생각에 잠시 우울했으나 모처럼 공들여 한 화장이 아까워서 이번까지는 사진을 찍기로 했다. ('안 찍으면 신부가 서운해할 것 같다'는 착한 친구의 설득에 넘어간 것이기도.) 부케 받는 분이 사진 각도 만드느라 고생하신 덕분에 웃음이 넘쳤다. 그 웃음에 녹아서, 우정에 대해 생각했다. 온라인에서 알게 된 친구들, 그 중에 얼굴을 마주한 사람들, 그중에 이렇게 함께 웃을 수 있는 친구들. 고맙고 뭉클하다.


모처럼 놀러 나온 길, 남편과 나는 잔칫집 점심을 먹고 슬슬 서울 구경을 하기로 했다. 충동적으로 성북동에 갔다. 어린 시절 종종 갔던 성당과 그 골목은 그대로지만, 많이 변한 모습을 보니 감상이 새로웠다. 회상하니 기분이 좋으냐고 묻는 남편에게 "좋기도 하고 좀 안 좋기도 하고. 근데 어떻게 사람이 좋은 것만 돌아보고 살겠어요."라는 훌륭한 말을 해버렸다. 우리는 교보문고로 차를 돌렸다.


주말의 교보문고는 이상한 곳이다. 책 읽는 사람들을 미워하게 된다. 무신경하게 자리잡고 책이나 물건을 보는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나는 싫다. '사람이 머무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의도라고 들었는데 저렇게 함부로 펼쳐 보는 책들은 이제 어떻게 되나? 그런 생각도 안 할 수 없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 역시 이 순간 남을 불쾌하게 만드는 '많은 사람' 중 하나겠지, 씁쓸해졌다. "이제 교보문고 안 올래요." 내가 말하자 남편은 "아니에요. 또 오게 되면 또 와요." 한다. 현명한 사람.


명동 교자에서 칼국수를 먹었다. 세상에, 여긴 어쩜 이렇게 늘 맛있을까! 비록 면이 평소보다 퍼졌지만 진한 국물과 고소한 만두, 양념 범벅의 겉절이 김치 모든 게 맛있다. 게다가 그렇게 붐비는데도 밥 먹기에 정신 사납지는 않은 매장 운영이 마음에 쏙 든다. 가만 보면 직원들이 모두 일을 잘한다. 인원 확인 -> 좌석 또는 대기 줄 위치 배정 -> 주문과 계산 -> 음식 서빙 -> 김치와 밥 리필 이 모든 과정이 유연하다. 사람이 많다고 빨리 나가라고 눈치 주지도 않고, 급하다고 대충 서빙하는 법도 없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그릇을 치울 때도 손님 눈을 보면서 "맛있게 드셨어요?" 한다. 조그만 포스터를 보니 올해가 창업 50주년이라며 사연을 공모한단다. 진지하게 나도 내볼까 생각했다.


주말 명동이라니 사람이 얼마나 미어터질까 각오했는데 의외로 다닐 만했다. 관광객이 많아서 불편하다고들 했는데, 사실 나도 서울 관광객이니 뭐. 신중하게 샤워 퍼프를 고르는 일본 아주머니들, 알록달록한 인형 수레 앞에 멈춰서 일행을 부르는 중국인 가족, 행인을 붙잡고 메뉴판을 내밀며 "삼겹살, 김치전"을 설명하는 아주머니를 보았다. 나는 이런 활기가 좋다. "여보, 너무 재미있어요. 너무 좋아요." 더 놀고도 싶고, 추워서 차로 돌아가고도 싶어서 갈팡질팡했다. 남편은 "한 블럭만 더 걸어요." 한다. 이런 다정함이 나는 그렇게나 좋다. 동네로 돌아오는 길에 '명동이 소문만큼 막 관광객 관광객 하지 않고 놀 만 한 곳이던데, 사람들 너무 엄살이었나 봐' 하고 말하려는데 남편이 먼저 말한다. "호들갑 떠는 만큼 요란하지 않네요." 나는 그렇게나 좋다.


남대문시장 근처에서 차가 신호 대기하고 있을 때 문득, 몇 년 전의 데이트가 생각났다. 여보, 우리 그때 이쪽으로 어디어디 다녔었지, 그때 우리 막 사귀기 시작했을 땐데, 기억 난다, 얘기를 나누면서 입가가 간질간질했다. 그때 쓴 일기를 오늘 꺼내 본다.


*

지난 주말 나는



오래간만에 학교 앞 떡볶이 집에 갔고
사람이 너무 많은 유원지에서 오후를 보냈고
맛있는 맥주를 마시고
늘 좋아했던 영화를 또 보았다.
작정하고 찾아간 식당이 쉬는 날이라 다음을 기약하고
조개가 많이 들어간 칼국수를 먹었다.
소공동 골목길에 늘어선 오래된 양복점 진열장에서
새로 들어온 천과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한 나무 가구를 구경하고
명동 입구 골목 문 닫힌 ‘만물쎈타’의
구식 사진기와 라이터, 마작, 시계, 열쇠, 술병 들을 들여다보았다.
메뉴판 제목부터 철자를 틀린 길모퉁이 커피숍에서
제일 싼 커피를 시켜놓고 옛날 사진들을 오래오래 보았다.
영화관에 갔더니 보고 싶은 영화가 없어서
서점에 들러 그림책을 몇 권 읽고
감자고로케와 새우튀김을 먹고 밤공기를 쐬었다.

 

이 모든 일들을
둘이서 했다. 
 


*



오늘은 다른 날보다 일찍 일어나서 소고기 미역국을 끓이고 새 밥을 했다.

다정하고 똑똑하고 재미있는 남편, 생일 축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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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2-22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함께 생일축하합니다! :)

네꼬 2016-02-22 12:16   좋아요 0 | URL
으헤헤 감사합니다. (점심시간인데 왜 댓글이!)

다락방 2016-02-22 12:17   좋아요 0 | URL
저는 후발대에요. 좀 이따가 점심 먹으러 갈거에요. 배가 고파서 돌아버릴 것 같아요!!

네꼬 2016-02-22 12:20   좋아요 0 | URL
어 그러게, 배고플 것 같아서 내가 다 초조..

다락방 2016-02-22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저는 네꼬님이 좋은것처럼
네꼬님 글도 참 좋아요!
(댓글 폭탄!!)

네꼬 2016-02-22 12:20   좋아요 0 | URL
하트 폭탄 (ㄲ ㅑ )

무해한모리군 2016-02-22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네꼬님 행복했겠다~

네꼬 2016-02-23 16:54   좋아요 0 | URL
으흐흐흐흐 (최대한 음흉하게 웃어 보았어요.)

아무개 2016-02-22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정하고 똑똑하고 재미있는 남편이라니..
최고의 찬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네꼬 2016-02-23 16:55   좋아요 0 | URL
헤헤 제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이렇게... (팔불출)

뽈따구 2016-02-22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모든 일들을
둘이서 했다

와... 감동적이에요. ♡

네꼬 2016-02-23 16:56   좋아요 0 | URL
혼자 해도 좋겠지만 저는 둘이 해서 더 좋았어요.
지금 생각해도 좋아요. 하트 감사합니다. 넙죽.

치니 2016-02-22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앙 간질간질, 저처럼 무미건조한 사람까지 녹아내리게 만드는, 어쩜 이렇게 글을 사랑스럽게 쓰실까요, 우리 네꼬님은. :)
혹시라도 남편 분이 이 글 보신다면 또 얼마나 기분이 좋으실까요. :)

네꼬 2016-02-23 16:57   좋아요 0 | URL
치니님이 간질간질이라고 쓴 거 보니까 제가 녹는걸요. (이상하다?)
그저 왈왈 합니다. 활활 왈왈

비로그인 2016-02-22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먼저 생일 축하드리고요. 일기를 맛깔나게 잘 쓰셨네요. 약간만 다듬어면 시도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편의 시로 만들어 보세요. *^

네꼬 2016-02-23 17:07   좋아요 0 | URL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시 쓸 생각은 없지만... (^^)

서니데이 2016-02-22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 오늘 대보름입니다.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네꼬 2016-02-23 16:59   좋아요 0 | URL
구름에 가렸지만 보름 잘 보냈습니다. 추웠어요.
서니데이님, 어서 봄이 왔으면 좋겠네요!

moonnight 2016-02-23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네꼬님 남편분 생일 축하드려요!!!! 여보라고 부르는 우리 네꼬님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만 제 볼이 빨개집니다. (주책 죄송 ㅠ_ㅠ;;;) 이 모든 일들을 둘이서 했다. 에서 저도 그만 녹아내림. ㅠ_ㅠ(또 주책 죄송 ㅠ_ㅠ;;;;)


그나저나, 많은 사람들이 교보문고 칭찬을 할 때 출판사 분이 쓴 기사를 읽었어요. 네꼬님 말씀하신 대로, 무신경하게 펼쳐보고 헌책이 되어버린 책들에 대해서는 서점이 책임지지 않는다고. 반품이 되어 출판사로 되돌아오는 그 많은 책들에 대해 마음아파 하시는 글이어서 저도 사람이 머무는 공간을 만든다는 명목하에 출판사에는 손해를 강요하게 되는 형국이라 마음이 너무 안 좋았어요. ㅠ_ㅠ;;;

네꼬 2016-02-24 16:22   좋아요 0 | URL
헤헤 축하 감사합니다. 주책은 제가 주책이죠;;; (이건 확실함..)

겉으로는 서점이 통 크게 독자에게 쏘는 것 같은 인상인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지요. 돈도 돈이지만 저 책들의 운명이 걱정돼요. 그런만큼 모두들 살살 보면 좋을 텐데 그게 그렇질 않아서 마음이 그랬어요. 힝. 공감해주시는 문나잇님 고맙습니다.

웽스북스 2016-02-29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와주셔서 넘 감사해요!!! 네꼬님이 쓴 글을 읽으며 저도 마음의 위로를 받고...!! ^^
제가 피부관리를 안받아서 네꼬님한테 혼날 각오 단단히 하고 있었는데 예쁘다고 해주셔서 얼마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지!!!! (청담동 만세!)

결혼을 하니까 네꼬님 글에도 등장하고 좋군요!!!!! 사진 찍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네꼬남을 못봐서 ㅠㅠ 서운 ㅠㅠ
그래도 결혼식 오신 김에 두분 데이트도 하셨다니 또 막 좋고 그렇습니다!!! ㅋㅋㅋㅋ

네꼬 2016-03-04 13:35   좋아요 0 | URL
웬디님, 다시 한번 축하해요. 즐겁게 건강하게 오래오래 그러시길요! (^^)
전 이제 가족 외 결혼 사진은 찍지 않겠어요... ... 안 찍을 거야.. ..
덕분에 데이트도 즐거웠습니다. 봄은 사랑의 계절. (응?)

2016-03-01 2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04 1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