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는 알라딘 친구의 결혼식에 갔다. 마음의 준비를 했건만, 신부가 짐작보다도 훨씬 예뻤다. 신부의 친구들마저 예뻤다. 이제 드디어 남의 결혼 사진에서 빠질 때가 온 것 같다는 생각에 잠시 우울했으나 모처럼 공들여 한 화장이 아까워서 이번까지는 사진을 찍기로 했다. ('안 찍으면 신부가 서운해할 것 같다'는 착한 친구의 설득에 넘어간 것이기도.) 부케 받는 분이 사진 각도 만드느라 고생하신 덕분에 웃음이 넘쳤다. 그 웃음에 녹아서, 우정에 대해 생각했다. 온라인에서 알게 된 친구들, 그 중에 얼굴을 마주한 사람들, 그중에 이렇게 함께 웃을 수 있는 친구들. 고맙고 뭉클하다.


모처럼 놀러 나온 길, 남편과 나는 잔칫집 점심을 먹고 슬슬 서울 구경을 하기로 했다. 충동적으로 성북동에 갔다. 어린 시절 종종 갔던 성당과 그 골목은 그대로지만, 많이 변한 모습을 보니 감상이 새로웠다. 회상하니 기분이 좋으냐고 묻는 남편에게 "좋기도 하고 좀 안 좋기도 하고. 근데 어떻게 사람이 좋은 것만 돌아보고 살겠어요."라는 훌륭한 말을 해버렸다. 우리는 교보문고로 차를 돌렸다.


주말의 교보문고는 이상한 곳이다. 책 읽는 사람들을 미워하게 된다. 무신경하게 자리잡고 책이나 물건을 보는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나는 싫다. '사람이 머무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의도라고 들었는데 저렇게 함부로 펼쳐 보는 책들은 이제 어떻게 되나? 그런 생각도 안 할 수 없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 역시 이 순간 남을 불쾌하게 만드는 '많은 사람' 중 하나겠지, 씁쓸해졌다. "이제 교보문고 안 올래요." 내가 말하자 남편은 "아니에요. 또 오게 되면 또 와요." 한다. 현명한 사람.


명동 교자에서 칼국수를 먹었다. 세상에, 여긴 어쩜 이렇게 늘 맛있을까! 비록 면이 평소보다 퍼졌지만 진한 국물과 고소한 만두, 양념 범벅의 겉절이 김치 모든 게 맛있다. 게다가 그렇게 붐비는데도 밥 먹기에 정신 사납지는 않은 매장 운영이 마음에 쏙 든다. 가만 보면 직원들이 모두 일을 잘한다. 인원 확인 -> 좌석 또는 대기 줄 위치 배정 -> 주문과 계산 -> 음식 서빙 -> 김치와 밥 리필 이 모든 과정이 유연하다. 사람이 많다고 빨리 나가라고 눈치 주지도 않고, 급하다고 대충 서빙하는 법도 없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그릇을 치울 때도 손님 눈을 보면서 "맛있게 드셨어요?" 한다. 조그만 포스터를 보니 올해가 창업 50주년이라며 사연을 공모한단다. 진지하게 나도 내볼까 생각했다.


주말 명동이라니 사람이 얼마나 미어터질까 각오했는데 의외로 다닐 만했다. 관광객이 많아서 불편하다고들 했는데, 사실 나도 서울 관광객이니 뭐. 신중하게 샤워 퍼프를 고르는 일본 아주머니들, 알록달록한 인형 수레 앞에 멈춰서 일행을 부르는 중국인 가족, 행인을 붙잡고 메뉴판을 내밀며 "삼겹살, 김치전"을 설명하는 아주머니를 보았다. 나는 이런 활기가 좋다. "여보, 너무 재미있어요. 너무 좋아요." 더 놀고도 싶고, 추워서 차로 돌아가고도 싶어서 갈팡질팡했다. 남편은 "한 블럭만 더 걸어요." 한다. 이런 다정함이 나는 그렇게나 좋다. 동네로 돌아오는 길에 '명동이 소문만큼 막 관광객 관광객 하지 않고 놀 만 한 곳이던데, 사람들 너무 엄살이었나 봐' 하고 말하려는데 남편이 먼저 말한다. "호들갑 떠는 만큼 요란하지 않네요." 나는 그렇게나 좋다.


남대문시장 근처에서 차가 신호 대기하고 있을 때 문득, 몇 년 전의 데이트가 생각났다. 여보, 우리 그때 이쪽으로 어디어디 다녔었지, 그때 우리 막 사귀기 시작했을 땐데, 기억 난다, 얘기를 나누면서 입가가 간질간질했다. 그때 쓴 일기를 오늘 꺼내 본다.


*

지난 주말 나는



오래간만에 학교 앞 떡볶이 집에 갔고
사람이 너무 많은 유원지에서 오후를 보냈고
맛있는 맥주를 마시고
늘 좋아했던 영화를 또 보았다.
작정하고 찾아간 식당이 쉬는 날이라 다음을 기약하고
조개가 많이 들어간 칼국수를 먹었다.
소공동 골목길에 늘어선 오래된 양복점 진열장에서
새로 들어온 천과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한 나무 가구를 구경하고
명동 입구 골목 문 닫힌 ‘만물쎈타’의
구식 사진기와 라이터, 마작, 시계, 열쇠, 술병 들을 들여다보았다.
메뉴판 제목부터 철자를 틀린 길모퉁이 커피숍에서
제일 싼 커피를 시켜놓고 옛날 사진들을 오래오래 보았다.
영화관에 갔더니 보고 싶은 영화가 없어서
서점에 들러 그림책을 몇 권 읽고
감자고로케와 새우튀김을 먹고 밤공기를 쐬었다.

 

이 모든 일들을
둘이서 했다. 
 


*



오늘은 다른 날보다 일찍 일어나서 소고기 미역국을 끓이고 새 밥을 했다.

다정하고 똑똑하고 재미있는 남편, 생일 축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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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2-22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함께 생일축하합니다! :)

네꼬 2016-02-22 12:16   좋아요 0 | URL
으헤헤 감사합니다. (점심시간인데 왜 댓글이!)

다락방 2016-02-22 12:17   좋아요 0 | URL
저는 후발대에요. 좀 이따가 점심 먹으러 갈거에요. 배가 고파서 돌아버릴 것 같아요!!

네꼬 2016-02-22 12:20   좋아요 0 | URL
어 그러게, 배고플 것 같아서 내가 다 초조..

다락방 2016-02-22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저는 네꼬님이 좋은것처럼
네꼬님 글도 참 좋아요!
(댓글 폭탄!!)

네꼬 2016-02-22 12:20   좋아요 0 | URL
하트 폭탄 (ㄲ ㅑ )

무해한모리군 2016-02-22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네꼬님 행복했겠다~

네꼬 2016-02-23 16:54   좋아요 0 | URL
으흐흐흐흐 (최대한 음흉하게 웃어 보았어요.)

아무개 2016-02-22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정하고 똑똑하고 재미있는 남편이라니..
최고의 찬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네꼬 2016-02-23 16:55   좋아요 0 | URL
헤헤 제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이렇게... (팔불출)

뽈따구 2016-02-22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모든 일들을
둘이서 했다

와... 감동적이에요. ♡

네꼬 2016-02-23 16:56   좋아요 0 | URL
혼자 해도 좋겠지만 저는 둘이 해서 더 좋았어요.
지금 생각해도 좋아요. 하트 감사합니다. 넙죽.

치니 2016-02-22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앙 간질간질, 저처럼 무미건조한 사람까지 녹아내리게 만드는, 어쩜 이렇게 글을 사랑스럽게 쓰실까요, 우리 네꼬님은. :)
혹시라도 남편 분이 이 글 보신다면 또 얼마나 기분이 좋으실까요. :)

네꼬 2016-02-23 16:57   좋아요 0 | URL
치니님이 간질간질이라고 쓴 거 보니까 제가 녹는걸요. (이상하다?)
그저 왈왈 합니다. 활활 왈왈

비로그인 2016-02-22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먼저 생일 축하드리고요. 일기를 맛깔나게 잘 쓰셨네요. 약간만 다듬어면 시도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편의 시로 만들어 보세요. *^

네꼬 2016-02-23 17:07   좋아요 0 | URL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시 쓸 생각은 없지만... (^^)

서니데이 2016-02-22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 오늘 대보름입니다.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네꼬 2016-02-23 16:59   좋아요 0 | URL
구름에 가렸지만 보름 잘 보냈습니다. 추웠어요.
서니데이님, 어서 봄이 왔으면 좋겠네요!

moonnight 2016-02-23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네꼬님 남편분 생일 축하드려요!!!! 여보라고 부르는 우리 네꼬님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만 제 볼이 빨개집니다. (주책 죄송 ㅠ_ㅠ;;;) 이 모든 일들을 둘이서 했다. 에서 저도 그만 녹아내림. ㅠ_ㅠ(또 주책 죄송 ㅠ_ㅠ;;;;)


그나저나, 많은 사람들이 교보문고 칭찬을 할 때 출판사 분이 쓴 기사를 읽었어요. 네꼬님 말씀하신 대로, 무신경하게 펼쳐보고 헌책이 되어버린 책들에 대해서는 서점이 책임지지 않는다고. 반품이 되어 출판사로 되돌아오는 그 많은 책들에 대해 마음아파 하시는 글이어서 저도 사람이 머무는 공간을 만든다는 명목하에 출판사에는 손해를 강요하게 되는 형국이라 마음이 너무 안 좋았어요. ㅠ_ㅠ;;;

네꼬 2016-02-24 16:22   좋아요 0 | URL
헤헤 축하 감사합니다. 주책은 제가 주책이죠;;; (이건 확실함..)

겉으로는 서점이 통 크게 독자에게 쏘는 것 같은 인상인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지요. 돈도 돈이지만 저 책들의 운명이 걱정돼요. 그런만큼 모두들 살살 보면 좋을 텐데 그게 그렇질 않아서 마음이 그랬어요. 힝. 공감해주시는 문나잇님 고맙습니다.

웽스북스 2016-02-29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와주셔서 넘 감사해요!!! 네꼬님이 쓴 글을 읽으며 저도 마음의 위로를 받고...!! ^^
제가 피부관리를 안받아서 네꼬님한테 혼날 각오 단단히 하고 있었는데 예쁘다고 해주셔서 얼마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지!!!! (청담동 만세!)

결혼을 하니까 네꼬님 글에도 등장하고 좋군요!!!!! 사진 찍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네꼬남을 못봐서 ㅠㅠ 서운 ㅠㅠ
그래도 결혼식 오신 김에 두분 데이트도 하셨다니 또 막 좋고 그렇습니다!!! ㅋㅋㅋㅋ

네꼬 2016-03-04 13:35   좋아요 0 | URL
웬디님, 다시 한번 축하해요. 즐겁게 건강하게 오래오래 그러시길요! (^^)
전 이제 가족 외 결혼 사진은 찍지 않겠어요... ... 안 찍을 거야.. ..
덕분에 데이트도 즐거웠습니다. 봄은 사랑의 계절. (응?)

2016-03-01 2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04 1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