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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 주식회사 ㅣ 힘찬문고 48
후루타 다루히 지음, 김정화 옮김, 윤정주 그림 / 우리교육 / 2007년 12월
평점 :
“광속보다 빠른 비행기가 나와도 사계절과 숙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지성 있는 말썽꾸러기들의 필독서 <<에밀과 탐정들>>에 나오는 말이다. 에리히 캐스트너의 이 절망적인 선언을 기쁘게 받아들인 어린이들이 있었다. 1960년대- 경제 성장이 최고의 목표인 어른들 틈바구니에서 좋은 학교로 가는 것이 어린이들의 지상과제이던 시절의 일본. 동네형이 고교 홈런왕이 되어 큰 돈을 버는 걸 보고 공부는 해서 무엇 하나 숙제는 해서 무엇 하나 한탄하던 평범한 어린이들이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회사를 열었다. 책 제목 그대로 ‘숙제 (대행) 주식회사’를 차린 것이다. 옳거니. 이것 참 말 되는 말썽이겠군. 설정도 좋은 데다 초반에 에리히 캐스트너(존경해요*_*) 얘기도 나오고, 그림도 귀엽고, 간만에 즐거운 말썽동화 좀 읽어볼까? 라고 느긋하게 드러누워 책을 읽기 시작했다면 곧 일어나 자세를 고쳐 앉아야 할 것이다. 네꼬 씨가 그랬던 것처럼.
사장은 최종 결정을 하고, 정보원은 각 반의 숙제 중 까다로운 것을 재빨리 알아 온다. 영업 사원은 고객을 섭외해 가격과 조건을 흥정하고(실로 놀랍다), 공부 잘하는 어린이는 먼저 자기 숙제를 완벽하게 한 다음 고객의 숙제를 해준다. 이건 완벽한 회사다. 월급은 토론 끝에 똑같이 나누어 갖기로 했다. (이 토론 부분에서 나는 우리 회사 노조를 떠올리면서 잠시 심각해졌다.) 가정교사하고 뭐가 달라?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만, 이 일을 안 선생님은 정확한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으면서 (어른들은 이럴 때 꼭 ‘스스로 생각해봐라.’ 이런다. 아니, 혼자 생각해서 알 것 같으면 애초에 사고를 왜 치나?) 회사를 해산하게 한다. 어린이는 돈돈하면 안 돼서 그런가? 아이들은 갸웃하지만 뭐 할 수 없지 하고 일단락 짓는다.
작가는 차근차근 이야기를 끌어가면서 점점 심오한 문제를 낸다. 옛날은 꽃을 좋아하는 아이도 닌자 수업을 받아야만 했으니까 야만적인 걸까? 공부 때문에 자살하는 어린이가 있는 지금은 야만적이지 않고? 전쟁은? 남의 나라 점령은? 그렇지만 옛날의 어떤 부분은 덜 나빠졌겠지. 대체 야만적이란 게 뭘까? 슬며시 답이 한번 나온다.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 (아멘!)
쏠쏠한 유머와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타고 슬슬 더 쎈(!) 주제가 나온다. 주산을 열심히 해서 얼른 집을 부자로 만들겠다던 생활력 강한 요시다(12세)는 존경하던 주산왕 형이 전자계산기에 밀려 일자리를 잃는 것을 보고 엄청난 충격에 휩싸이고, 아이들은 전화 연결 자동화에 반대하는 전화국 노조 전단지를 읽으며 혼란에 빠지는 것이다.
‘우리는 조합원을 희생하는 합리화에 반대한다’... 합리화가 뭐야?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아무도 분명한 뜻은 몰랐지만 뭔가 나쁜 뜻으로 쓰인 게 놀라웠다. 다케시는 합리적이라는 말을 알았다. 이 말은 대부분 좋은 뜻으로 쓰인다.....왜 전국 전화 통신 노조는 편리해지는 것에 반대할까..... 편리해지기 위해서 8,000명이 희생되어야 해. 8,000명 중에는 가족이 있는 사람도 있으니까 세 배로 잡으면 24,000명. 24,000명이나 되는 사람을 힘들게 하면서 꼭 편리해져야만 하는 걸까?---본문에서
이야기는 마지막에 이르러 상대평가의 잔학성(!)까지 고발한다. 공부는 안 하고 아이들을 괴롭히는 깡패 고헤이에게 학교 신문의 기자들이 찾아가 인터뷰를 하는데 끝내 고헤이가 털어놓는 말이 놀랍다.
“고헤이, 넌 공부를 하기만 하면 성적이 좋아질 거야.”
“그 대신 누군가는 나빠지겠지. 그리고 그 아이가 성적표를 받으면 아버지나 어머니한테 분명 혼날 거고...”---본문에서
천의무봉의 솜씨를 가진 작가는 (역시 다루히 할아버지!!) 단 한번도 성급히 나서지 않는다. 아이들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맞닥뜨리고, 각자의 처지에 따라(집안환경도 공부 수준도 장단점도 다 다르니!) 생각한 걸 털어놓고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새로운 발견은 발견대로 결과를 받아들인다. 오! 아이들은 이렇게 크는 것이다!!! 다만 이 아이들이 빛나는 것은 그냥 지나가지 않고 고민해보는 것. 그걸 입 밖으로 내는 것, 그리고 좀더 생각해보는 것이다.
사실 어른들 세계도 똑같지 않은가? 고민 없이 별 생각 없이 대충 살다 보면 이상한 대통령이 삽질을 하고 있고 거대한 기업이 시꺼먼 기름을 토해내고 북극 곰이 집을 잃지 않는가 말이다. 어린이들의 세계도 그렇다. 주어진 숙제라고 억지로 하고, 과거는 야만스러웠고 합리화는 좋은 것이고 미래에는 모두가 행복할 것인 양 가르치는 세상의 말을 대충 그런가 보다 하고 믿다 보면........ 큰일 난다. 그러고 보니 책 맨 앞장의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 알 것도 같다.
만약 네가 당근을 싫어한다면, 안 먹으면 그만이야.
하지만 숙제가 싫다면 그건 생각해볼 문제야.
왜 이 세상에 숙제가 있는지.
그리고 당근과 숙제가 어떻게 다른지도 말이야.
---본문에서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이 책은 아무래도 어린이들에게 그냥 강제로 읽히는 게 좋겠다. 눈을 부릅뜨고 읽으라고 협박하거나 되게 재미있는 말썽동화라고 거짓말을 해도 좋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읽혀야 한다. 그래, 숙제로 읽히는 게 좋겠다. 좋든 싫든 해야 하는 게 숙제라면, 기왕이면 이 책 읽고 독후감 쓰는 걸 숙제로 내주자. 억지로라도 이 복잡한 문제들을 고민하게 하자. 제발 엄마 아빠 말도 모두 믿지는 말라고 얘기해주자. 교과서에서 말하는 것, TV에서 보여주는 것, 대통령이 말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자. 어째서 대운하에 죽자고 매진하는 뇌용량 2MB 같은 대통령을 뽑으면 안 되는 건지, 어렴풋이라도 어린이들도 좀 알고 살 권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