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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트릴로지 박스세트 - 본 아이덴티티 + 본 슈프리머시 + 본 얼티메이텀 (4disc)
폴 그린그래스 외 감독, 맷 데이먼 출연 / 유니버설픽쳐스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참 바쁘다. 이건 본이 아니고 내 얘기다. 나하고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보통 1년에 6~8회 정도 무척 바쁜 시기를 맞는데, 나는 이번 2월에 그중 세 번을 겪게 생겼다. 직장인이 '바쁘다' 하는 게 자랑은 아니다. (아니, 일을 너무 못하는 것 같잖아!) 그러니 허풍이 아니다. 하루 종일 해야 할 일들을 속으로 쏘트하는 것만도 일이다. 남들보다 일찍 출근하고 특별히 늦게 퇴근하는데도 잠자리에 들 때나 아침에 이를 닦을 때나 참 어디 전화해야지, 아차 내가 메일 보냈나? 아니 그 사람은 왜 연락이 안돼? 머릿속이 돌솥비빔밥.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아니 방금 한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도 알 수 없는 날들이다.
말도 못하게 바쁘다. 이건 본 이야기다. 제이슨 본, 혹은 존 마이클 케인, 아니 (진짜 이름) 데이빗 웹. 바다에서 반쯤 죽은 상태로 건져진 그는 아주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내 이름은? 난 어디 살지? 내가 왜 바다에? 내 등엔 왜 총알들이? 그는 기억을 잃었다. 알아낼 게 너무 많아서 돌아버릴 지경인데 누군가 공격하면 자기도 모르게 척척 막아내고 3초만에 두 사람을 제압한다(내가 재봤다). 정신 차리고 보면 사람들은 옆에 쓰러져 있고 빼앗은 총을 장전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는 깜짝 놀라 총을 버리고 도망친다. 스스로가 두려운 것이다.
고도로 훈련된 특수요원 본, 암살할 아저씨가 아이들과 함께 있는 걸 보는 바람에 임무에 실패하고(앗, 스포일러예요) 총을 맞은 다음, 목숨을 건진 대신 기억을 잃고 적이 누구인지 모르는 싸움을 시작한다. 그는 너무 바쁘다. "지금 본에게 지시를 내리는 건 누구지?" "그 자신이죠." 영화의 대사가 의미심장하다. 그는 자신에게 명령을 내린다. 뇌에서부터 손톱끝까지 그 자신이 하나의 지휘체계다. 잘못된 명령을 내린 적도 없고 불복한 적도 없다.
미친 달리기를 시작하기 전, 숨을 고르는 의미에서 스스로에게 상을 주기로 하고, 지난 주말 내내 본 씨 이야기 3종 세트와 함께 보냈다. 영화가 개봉할 때마다 보아왔지만, DVD로 다시 보는데도 맹세컨대 단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았다. 담백하다 못해 똑 떨어지는 게 얄밉기까지 한 배경 음악과 효과음과, 편집자가 '내가 좋아하는 건 다 버리고 오로지 팩트만 갖고 말하리' 결심하고 일한 듯 깨끗하게 오려진 화면. 특히 "본 얼티메이텀"에서 창문을 깨고 뛰어드는 장면은 다섯 번을 다시 돌려 보았는데 다섯 번 다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기름기 제로'가 감정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황홀한 경험이 이 세 편의 영화에 있었다.
내가 사랑한 것은 맷 데이먼의 무표정이었다. "무표정"을 연출한 무표정이 아니라,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는 무표정이었다. 내가 사랑한 것은 제이슨 본의 군더더기 없는(영어엔 군더더기란 단어가 없나?) 액션, 무엇보다 너무나 '그럴 만도 한' 싸움 씬이었다. 1편에서는 볼펜으로, 2편에서는 잡지로, 3편에서는 수건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그의 기술에 나는 사랑을 넘어 경외감을 품었다. 하지만 내가 가장 사랑한 것은 데이빗 웹의 머쓱한 표정이었다. 미친 자동차 추격씬 끝에, 사람 잡는 격투씬 끝에 그가 짓는 창피한 표정을 나는 너무나 사랑했다.
코멘터리를 보니, 얼티메이텀 감독 아저씨의 말이 콱 좋다. 본의 격투 씬은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끝없는 리허설의 결과죠. 모든 액션에 목적이 있어요. 하지만 나는 폭력을 미화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폭력은 추하니까요. 본이 그런 (폭력을 쓰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 아름다운 영화같으니.
바빴던 그는 연인을 얻었고, 연인을 잃었고, 동료가 떠났고 친구를 얻는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달리는 본, 스스로 내린 명령에 어떤 의심도 품지 않는 그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질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자신이 누구인지, 아니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 본은 씨리즈 첫 장면에서 그랬듯 마지막 장면에서도 물 위에 떠있다. 죽은 듯이 떠있던 그가 유유히 헤엄을 시작하는 순간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다시 태어났군요, 본 씨.
바쁜 것은 잘 견뎌내면 된다. 네꼬 씨, 그대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왜 바쁜가,이다. 어느 날 내가 똑똑한 고양이가 되어 스스로 명령체계를 수립하는 날이 와도 이 질문을 잊어선 안된다, 나는 누구지? 어떤 고양이지? 때로는 질문이 모든 것을 가르쳐주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