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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학교 푸른숲 어린이 문학 31
크리스티 조던 펜턴 외 지음, 김경희 옮김, 리즈 아미니 홈즈 그림 / 푸른숲주니어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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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에 슬금슬금 외지인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던 때, 이누이트 소녀 올레마운은 외지인들이 운영하는 학교가 너무나 궁금했다. 학교에 다녀본 언니는 그곳에 가면 머리카락도 잘라야 하고 허드렛일도 해야 하고 무릎 꿇고 회개도해야 한다고 하지만, 올레마운은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글을 배워서 스스로 책을 읽고 싶을 뿐이다. 당시에 언니가 읽어주던 책은 공교롭게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였다.

 

앨리스가 토끼를 따라 굴로 들어가고, 마시지 말라는 약을 마셔서 몸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고, 괴상한 사람들과 만나면서도 겁에 질리지 않고 모험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호기심 때문이었다. 호기심은 인간의 본성, 특히 어린이의 본성이다. 글을 배우는 일은 어떤가. 글자를 익히는 것 자체도 호기심의 대상이지만, 글자는 넓은 세상(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포함해서)을 향한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강력한 도구다. 아빠가 '외지 사람들은 살코기 보관하는 법도, 생선 다듬는 법도, 파카나 카믹(신발) 만드는 법도 가르쳐주지 않으면서 이누이트의 풍습을 버리게 한다'며 허락하지 않아도, 올레마운은 학교에 가고 싶다는 마음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다. 

 

"이 돌멩이 보이니? 이 돌멩이도 한때는 끝이 날카롭고 뾰족한 돌덩이였단다. 하지만 바닷물이 철썩철썩 때리고 또 때려서 모진 부분을 다 없애 버렸지. 이제는 그저 조그만 돌멩이에 지나지 않아. 이게 바로 외지 사람들이 학교에서 너에게 하려는 일이란다."

"하지만 아빠, 바닷물이 돌멩이 자체를 바꾼 건 아니잖아요. 게다가 전 돌멩이가 아니라 사람이에요.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요. 전 바닷가에 영원토록 처박혀 있지 않을 거예요." (19쪽)

 

가까스로 아빠의 허락을 얻어 찾아간 기숙학교는 처음부터 쌀쌀맞게, 아니 모질게 올레마운을 맞이한다.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은 물론 옷과 신발도 그들의 것을 착용하게 하고 학기 시작 전까지 고된 일을 시키며 기도를 강요한다. 이름도 바꾸고 영어만 써야 한다. 설상가상으로 가족들은 여건이 나빠져 올레마운을 보러 올 수 없고, 올레마운은 검문 때문에 사정을 솔직히 전할 수도 없다.

 

그러나 고집 센 올레마운을 미워하는 '까마귀 수녀'에게 학대를 받을수록 올레마운은 더 이누이트다워진다. 까마귀 수녀가 우스꽝스러운 스타킹을 신게 해 '뚱뚱 다리'로 놀림받게 되자, 올레마운은 아무도 모르게 스타킹을 불태워버린 것이다. 그런 올레마운을 눈여겨보고 따뜻하게 대해준 맥퀼런 수녀 덕분에 위기를 넘긴 올레마운은 마침내 집으로 돌아온다. 맥퀼런 수녀에게 선물받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품에 안고서.

 

호기심을 따라 아주 멀리까지 갔다가 꼬박 두 해를 보내고서 돌아왔다. 이제 나는 하얀 토끼를 따라 굴속으로 들어간 앨리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93쪽)

 

책 뒤에는 역시나 학교에 가고 싶어 안달이 난 동생들을 위해 올레마운이 그들과 함께 다시 학교에 가는 뒷이야기가 실려 있다. 호기심 때문에 학교에 가 보았지만 역시 우리 민족이 최고다, 하는 결말이 아니라, "우리 이누이트는 고집불통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상처에 대한 회복력이 강했다."며 동생들과 동행하는 결말인 것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탄압받는 소수민족문화 이야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혜적인 시선 없이, 어린이책답게 어린이의 본성에 주목하고 주인공의 열망과 좌절, 용기와 성장에 대해 씩씩하게 써내려간 동화다. 사실을 바탕으로 하면서 이처럼 감동을 강요하지 않는 동화를 만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이 책은 실제로 원주민 기숙학교 경험을 가진 마거릿 포키악 펜턴이 며느리(!) 크리스티 조던 펜턴과 함께 쓴 것이다. 이야기가 끝난 자리에 실제 올레마운(아마도 작가?)의 옛 사진들이 실려 있어, 읽고 생각할 거리를 준다. 또 이누이트란 어떤 사람들인지, 왜 그들에게는 학교가 없었는지-추위를 견디며 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정에서 배웠으니까!), 외지 사람들이 왜 캐나나 몰렸고 어째서 그런 학교를 지었는지 설명하는 페이지도 있다. 덕분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에 대해 알게 됐다. 예를 들어 올레마운처럼 기숙학교에서 학대받던 아이들은 이누이트의 생활 감각을 잃어버리고 이누이트 사회와 외지인 양쪽 모두에게 소외받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런 이들이 용기를 내어 지난 일을 알리고, 자신들의 문화를 새로 배우면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도 그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고통받던 당사자뿐 아니라, 이제라도 거기 귀 기울이는 이들이 진정한 '다양성'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를 읽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하는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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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3-11-11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행히도 상처에 대한 회복력이 강했다. " 찡하네요. ㅠ_ㅠ 올레마운이 씩씩함을 잃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저도 어느 아이에게 맥퀄런 수녀가 되고 싶어요. ^^

네꼬 2013-11-17 23:10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이 대목이 좋았어요. 올레마운이 외지 사람들을 다 미워하기만 했다면 이해는 하더라도 속상했을 것 같거든요. 이누이트다운 저 의지!

문나잇님은 분명 그런 좋은 어른일 거예요. (수녀는 되지 마시고...)

꿀꿀페파 2013-11-18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보고갑니다!

네꼬 2013-11-25 12:52   좋아요 0 | URL
(^^) 감사합니다. 리뷰들 많이 읽으셔야 해서 힘드실 것 같아요;;
 
방학 탐구 생활 - 제14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55
김선정 지음, 김민준 그림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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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방학을 맞이한 석이는 학원에나 다니라는 아빠 말을 따르는 대신 장대한 계획을 세운다. 신 나게 놀고 잠도 자고 경비를 마련해 무인도로 떠나고 유명해진 다음 스타를 만난다는 것. 석이는 우연히 아이돌 팬클럽 운영자인 아저씨를 알게 되어 스타를 만나기도 하고, 아빠 만두 가게에서 일하고 번 돈으로 경비를 마련해 동생 호와 함께 작은 섬으로 떠난다. 그곳은 칠금도로, 만두 가게에서 일하는 한수 형네 할머니가 사시는 곳이다. 가는 길, 배에서 잘못 내리는 바람에 만난 반 친구 경성이까지 합세해 세 아이가 모험을 시작한다.

 

일단 큰소리부터 치고 수습하느라 애먹는 석이, 겁은 좀 있지만 매사에 야무진 호, 까칠한 것 같지만 속은 순한 경성이 등 세 아이는 이야기를 힘 있게 끌고 간다는 점에서 믿음직한 주인공이다. 이들을 가로막는 아빠와 부추기는 한수 형, 아이들을 귀찮아하면서도 친손자처럼 대해주는 할머니 등 어른들도 실제 모험에는 일체 간섭하지 않았다. 어린이가 모험을 떠날 때 있을 수 있는 현실적인 문제들, 이를테면 교통편과 묵을 곳 등을 얼버무리지 않고 오히려 세밀하게 묘사함으로써 거짓말 같은 모험을 ‘실제 사건’으로 만든 작가의 뚝심도 보기 좋다. 떠나기 전까지 약간 지루한 부분을 지나가고 나면 모처럼 숨통이 트이는 모험, 살이 까져 피가 나고 쫓기고 고립되고 성취하는 모험을 함께할 수 있다. 유머와 감동을 눈치 채려면 고학년 어린이들이 읽어야 하겠고, 이야기를 따라 가는 것으로 충분하다면 중학년 어린이들도 읽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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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3-11-10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글 덕분에 갑자기 떠올랐어요. 방학동안의 특별한 모험을 꿈꾸었던 어린 시절이 제게도 있었다는 걸요! ^^

네꼬 2013-11-10 20:09   좋아요 0 | URL
저로 말할 것 같으면, 모험이라면 질색하던 어린이. 어려서부터 불편한 거 딱 질색이었어요. ㅋㅋ 근데 이 책에 나오는 아이들은 그런 걸 즐겨서 귀엽고 기특했어요.
 
할아버지의 방 미세기 고학년 도서관 7
남찬숙 지음, 홍정선 그림 / 미세기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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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동화작가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동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동화작가가 하는 말이니까, '동화'작가가 하는 말이니까 독자들이 당연히 믿어줄 거라는 전제로 무책임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자신은 순수한데 세상은 그렇지 않은 듯, 혼자 정의의 수호자가 될 때도 있다. 낯부끄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 책에 실린 작품, 「착한 아이」에서는 달랐다.

 

동화작가인 '나는' 남편의 사업이 잘 안 풀리는 바람에 어린 시절 살던 동네로 집을 좁혀 이사 왔다. 그리고 딸 지원을 위해 이웃들과 친해지려고 노력하던 어느 날, 아파트 아줌마들 사이에도 왕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민주 엄마가 피곤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민주 모녀를 집 안에 들이지만, 우악스러운 민주와 눈치 없는 민주 엄마는 은근히 나의 신경을 긁는다. 그보다 곤란한 것은 민주 엄마가 옆에 붙어 있으니 다른 엄마들이 외면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나는 민주 엄마가 바로 어린 시절 친구였던 미순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고 정신이 멍해진다.

 

어린 시절 형편이 어렵고 입성이 바르지 못했던 미순은 아이들 사이의 왕따였다. 전학생이었던 나는 잠깐 미순과 친하게 지냈지만, 인기 있는 아이들 그룹에 초대받아 그들과 어울리면서 미순을 멀리 했다. 그런데 나는 유복한 아이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고, 빚쟁이들이 집에 찾아와 난동을 부리던 날 미순에게 그 모습을 보이고는 수치심을 느낀다. '미순이 같은 아이한테 동정을 받다니.' 나는 미순에게 못된 말을 내뱉고 얼마 뒤 다시 학교를 옮겼던 것이다.

 

동화작가도 아니고 '지원 엄마'도 아닌, '김민경'인 나는 다시 한번 어린 시절과 같은 갈등에 놓인다. 왠지 나를 불편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과도 친해질 수 없게 하는 왕따 친구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삼십여 년의 시간이 흘러 많은 것이 달라진 것 같지만, 사실 많은 것이 그대로다. 나는 딸이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는 이유로 다시 한번 문을 닫아 걸려고 하지만, 오래전 혼자 중얼거렸던 말이 다시 떠오른다. '누군가는 착한 아이가 돼 주겠지. 그게 꼭 나일 필요는 없어.' 그리고 이번엔 미순이와 친구가 되는데 꼭 착한 사람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며, 놀이터에 혼자 앉은 미순의 딸에게 다가간다.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얘들아, 나는 지금 민주 손을 꼭 잡고 어릴 적 내 친구 미순이에게 가고 있단다."

 

엄마뻘인 주인공이 지난 날 풀지 못한 매듭으로 갈등하는 장면을 독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모르긴 해도 이 솔직한 고백에 용기를 얻는 어린이가 적지 않을 것 같다. 왕따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 남은 문제,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는 그 숙제는 어른이 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미순을 다시 외면할 수도 있었지만, 더 도망치지 않고 문제에 직면하기로 한다.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딸에게 묵은 갈등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어렸을 때보다 더욱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가 민주, 어떤 의미에서 어린 미순에게 손을 내미는 장면에서 나는 오래간만에 희망이라는 것을 느꼈다.   

 

이 책은 고학년 어린이들이 읽을 만한 동화집으로, 세 편의 중편이 실려 있다. 표제작 「할아버지의 방」은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추억하는 손녀 이야기로, 구성은 다소 단순하지만 낡아가는 큰 집과 텅 빈 방이 할아버지에 대한 아름다운 은유로 읽힌다. 「비엔, 엄마의 이름」은 베트남인 엄마가 십 년만에 친정에 가는 일화를 그렸는데, 엄마를 수동적인 인물로 그린 것은 마음에 걸리지만 아이가 당당하게 엄마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점은 좋았다. 조금 냉정한 것 같지만 그만큼 정직하게, 조금 감상적인 것 같지만 그만큼 따뜻하게 세상을 보려고 한 작가의 노력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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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3-11-10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에 남은 문제,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는 그 숙제는 어른이 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찔려요. 찔려요. 찔려요. ㅠ_ㅠ 제게도 가시처럼 남아있는 숙제가 있네요. ㅠ_ㅠ

네꼬 2013-11-10 20:10   좋아요 0 | URL
우앙... 맞아요. 찔려요. ㅠㅠ 그게 참 어떻게 안 되지요.

저는 이 작품에서 어른 주인공이 그걸 고백하고 이제라도 풀려고 해서 좋더라고요. 어른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동화 중에서도 탁월한 작품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 이웃 이야기 동화는 내 친구 65
필리파 피어스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고경숙 그림 / 논장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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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2학년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열 때문에 처음으로 조퇴를 했다. 나는 집에 가는 길이 너무 낯설어서 놀랐다. 그게 지금 나다니는 어린이가 나밖에 없기 때문이란 걸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왠지 잘못을 저지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한편 이상하게도, 누군가 너 왜 밖에 나와 있니, 물어봐주었으면 했다. 저 조퇴한 거예요, 선생님이 가도 된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나는 눈치가 보이는 동시에 당당했던 것이다. 몸에는 기운이 없고 머리에 찬 바람이 꽉 찬 것처럼 눈과 코가 매웠다. 산동네에 있는 집까지 가는 길은 당연히 그날 더욱 멀었다. 집에 가려면 긴 계단 두 개를 거쳐야 했는데, 첫 계단을 다 오른 다음 나는 꼭대기에 걸터 앉아 여태 온 길을 바라보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시간도 풍경도 낯설었고, 너무 아픈데 혼자 있었다. 그 사실이 무서웠고, 이상하게도 뿌듯했다.

 

이 책에 실린 단편동화들은 그런 이상한 순간들을 기록했다. 「목초지에 있던 나무」에서 리키네 옆집 목초지에는 거대한 고목이 있다. 너무 당연한 풍경이어서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는데 굵은 가지들이 불시에 떨어지자 사람들은 나무를 베기로 한다. 제 방 창문 밖으로 언제나 나무가 있는 풍경을 보아온 리키는 나무가 없는 목초지는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나무가 쓰러지는 광경은 볼만 할 것 같아서, 평소 어울리고 싶었던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결국 사내아이 여섯은 어쩌다 직접 이 나무를 쓰러뜨리게 된다. 어른들에게 꾸중을 듣고 몸살까지 나지만 아이들은 뿌듯해하고 저녁엔 몰래 자기들이 쓰러뜨린 나무 위에 나란히 서서 승리의 노래도 부른다. 리키는 바람대로 친구 패거리에 든다. 여기에서 이야기가 끝났다면 평범하게 좋은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리키는 '지옥의 벌채꾼' 패거리가 된 것을 기뻐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가 자신이 흘린 눈물 때문에 잠이 깬다. 까닭 모를 슬픔이 그를 깨운 것이다. 리키는 아마 나무를 쓰러뜨린 개선 장군이 된 기쁨만큼 나무에 연민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삶에 대한 감각이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악동들과 어울려 노래를 부르는 것도 삶이고, 고목이 쓰러지는 것도 삶이라는 것을 언젠가 불현듯 깨달을지도 모른다.

 

도시에 사는 사촌동생을 위해 조개를 잡아 임시로 가두었지만, 바닥을 파고드는 조개를 보면서 왠지 놓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댄(「프레시」), 어렵게 나선 작은 모험에 이웃집 동생을 달고 가면서 혼자 있고 싶은 마음과 동생을 챙기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는 팻(「운 좋은 아이」)도 그런 갈등을 겪는다. 아이들은 나름대로 선택을 하고 그에 따른 결과를 담담히 받아들인다. 어쩐지 쓸쓸해 보인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다. 다시는 물 밖으로 나가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과 싸우면서 얻은 양철 상자를 벽난로 위에 두고 "나는 양철 상자를 죽을 때까지 간직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 백 살까지는 거뜬히 살 것 같다"고 자랑스러워하는 '나'(「다시 물 위로」)를 보라. 이 아이는 결코 물에 들어갈 때와 같은 아이가 아니다.

 

골목 끝 계단에 걸터앉아 현기증을 느꼈던 어린 날 한 순간은 오래도록 내 기억에 남아 있다. 그때는 설명할 방법을 몰랐지만 아마 나는 고독했던 것 같다.  그 시간과 공간을 짧으나마 오롯이 혼자 차지했다는 자부심 때문일까? 어떤 교훈을 주는 것도, 달콤한 추억을 남긴 것도 아닌데 그때가 떠오를 때면 이상하게도 조그마한 용기가 생긴다. 『우리 이웃 이야기』가 일깨우는 고독도 그런 종류의 것이다. 섬세한 문장을 침착하게 따라 읽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어린이나 어른 누구나 읽어도 좋을 걸작 단편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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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11-05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좋은 리뷰다. 나는 앞으로 동화는 안 읽고 네꼬님의 동화 리뷰만 읽고 살아도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아마 백 살까지는 거뜬히 살 것 같아요.

네꼬 2013-11-05 23:26   좋아요 0 | URL
ㅎㅎㅎ 동화책도 읽어요! 같이 백 살까지? ㅋㅋㅋ

레와 2013-11-05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에게 고독이라는 말이 어울리나 잠깐 생각했어요.
어울리고 안 어울리고를 떠나 아이들이 고독이라는 감정을 모를꺼라 지레 짐작한 어설픈 어른이 저였어요. 네꼬님. 분명 나도 그 비슷한 감정을 알았을텐데 말이에요.

음.. 어제 '수퍼맨이 돌아왔다'라는 프로를 봤는데요. 거기 배우 장현성과 두 아들이 나와요. 하루를 마감하는 의미로 아빠가 두 아들을 데리고 술을 마셔요. 본인은 맥주 큰아들(11살)은 오렌지 쥬스 작은 아들(7살)은 요구르트. 아빠가 아들들한테 물어요. '지금까지 인생에서 가장 기뼜을 때가 언제야? 그리고 가장 슬펐을때는?'

저는 이 질문을 아빠가 아이들한테 했다는게 신선(당황스러움이 포함된 어색함에 좀 더 가까움.ㅋ) 한거에요! 아빠가 아이들을 단순히 아이로 대하는게 아니라 사람으로 대하는구나.. 나라면 열살 된 아이한테 저런 질문은 안 했을것 같은데..
단순히 '아이니깐 어리니깐 이런건 몰라도 돼' 또는 '이건 모르겠지' 라는 선을 그어놓고 어른 흉내를 내고 있는 제 자신이 보이면서 아후 부끄러운거에요.ㅎㅎㅎㅎ;;;;

어렸을 땐 제가 이렇게 어설픈 어른이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ㅋㅋㅋㅋㅋㅋ;;

네꼬 2013-11-05 23:29   좋아요 0 | URL
어떤 철학자는 레와님, 아이들이 고독해야 자란다고 했대요. 고독한 시간이 있어야 생각도 하고 그런다고요. 저도 그땐 몰랐죠. 나중에도 몰랐고, 지금에야 어렴풋이 그때 그 기분이 그런 거였나 짐작해요.

와, 제가 이 책 읽으면서 생각한 게, 레와님이 하신 말씀이랑 비슷한데, 글에 녹여지지 않아서 묻어 두었어요. 아이들을 낮잡아보지 않고 한 인격으로 존중한 동화들이거든요. 레와님 똑똑하다 어떻게 알았지? 그러니까 부끄러우실 거 하나 없어요. 완전 똘똘하고 야무진 레와님. 자꾸 반성해서 자꾸 더 훌륭해지는 레와님!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창비시선 369
권혁웅 지음 / 창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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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완 감독의 영화 "아라한 장풍 대작전"은 내가 반복해서 본 영화 중 하나다. 특히 윤소이가 정말 무술 같은 걸 배우는 게 가능한가 묻는 류승범한테 일상 속 숨은 도인들을 보여주는 장면을 좋아한다. 거의 자기 키만 한 짐을 머리에 이고 양손 놓고 유유히 걷는 사람, 손가락 사이에 구두를 수십 켤레 끼고 지나가는 사람, 냉장고쯤 번쩍 들어 이삿짐 트럭에 싣는 사람. 눈을 크게 뜨고 보라, 세상에 고수가 얼마나 많은가. 권혁웅 시집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를 읽는 동안 그 장면이 떠올랐다. 시집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눈을 크게 뜨고 보라. 시가 없는 삶이 어디 있나.

 

시가 있는 삶은 그럼 무엇인가. 시계 방향을 따라가면 죽음을 맞이하니, 반시계 방향으로 고스톱을 치며 "힘을 합쳐 시간에 저항하는" 동네 할머니들의 삶이다(고스톱 치는 순서는 왜 왼쪽인가). "현세와 통하는 스위치를 화끈하게 내려버린" 취객이 "다시 직립 인간이 되지는 않겠다는 듯이 / 부장 앞에서 목이 굽은 인간으로 / 진화하지 않겠다는 듯이" 수평으로 편안하게 누워 있는 시간이다(봄밤). "이자는 필요 없으니 원금만 돌려다오" 청춘을 달라고 격렬하게 외치는 주부들의 노랫소리다(주부노래교실). "불굴의 의지로 최선을 다해 망가지는" 아들을 애타게 기다려도 "말 거는 전화는 경찰서에서만" 오는 어미들의 삶이다(호랑이가 온다2). 심지어, 음식에 단번에 앉기 쑥스러워 끈끈이 위에 잠시 앉으려다 영원히 붙잡히는 파리의 짝사랑이다(짝사랑). 모두의 삶에 시가 있다. 그것을 시인은 부지런히, 엄숙하게 받아 적는다. 엄숙하게.

 

애인은 토막난 순대처럼 운다

권혁웅 

 

 

지금 애인의 울음은 변비 비슷해서 두시간째

끊겼다 이어졌다 한다

몸 안을 지나는 긴 울음통이 토막 나 있다

신의주찹쌀순대 2층, 순댓국을 앞에 두고

애인의 눈물은 간을 맞추고 있다

그는 눌린 머리고기처럼 얼굴을 눌러

눈물을 짜낸다

새우젓이 짜부라진 그의 눈을 흉내낸다

나는 당면처럼 미끄럽게 지나간

시간의 다발을 생각하고

마음이 선지처럼 붉어진다 다 잘게 썰린

옛날 일이다

연애의 길고 구부정한 구절양장을 지나는 동안

우리는 빨래판에 치댄 표정이 되었지

융털 촘촘한 세월이었다고 하기엔

뭔가가 빠져 있다

지금 마늘과 깍두기만 먹고 견딘다 해도

동굴 같은 내장 같은

애인의 목구멍을 다시 채워줄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버릇처럼 애인의 얼굴을 만지려다 만다

휴지를 든 손이 변비 앞에서 멈칫하고 만다  

 

 

시집 속의 삶들이 우리를 웃게 하지만 결코 우습게 보이지 않은 것은 시인이 연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이의 삶에는 눈물이 핑 돌지만 결코 그가 불쌍하지 않은 것은 시인이 그의 삶을 존경하기 때문일 것이다. 울고 웃고 쓰러지고 버티면서 장하게도 살아남는 것이 삶이라고 시집은 웅변한다. 재미있는 소설을 읽을 때처럼, 첫 시를 읽고는 앉은자리에서 마지막 시까지 읽었다. 좋아서 표시해둔 부분은 아직 하나도 인용하지 못했는데, 이 글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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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3-10-21 0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시가 없는 삶, 시가 없는 순간이 없군요.^^ 동감되는 것 같아요.
요즘 저는 시에 좀 더 꽂히는데요.
그래서인지 이 시도, 연애의 치졸함과 지난함도 왠지 더 와닿네요.
삶이 연애랑 닮은 것도 같고.
"시간의 다발을 생각하고 마음이 선지처럼 붉어진다"
참 좋은 계절에 좋은 시집 한 권 맛보고 가요^^
행복한 하루하루 보내시길요^^

네꼬 2013-10-28 15:33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안녕하세요? 이 시집은 별다른 마음가짐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마음에 들어서 이야기 책 읽듯 다 읽어 버렸어요. 뜨끈뜨끈하고 재밌고, 또 사실 좀 귀여운 시집이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지금 프레이야님 앞에서 시집 어쩌고 하고 있는 건가요? 제가 지금 번데기 앞에서 인상 쓰고 있는 건가요?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_-;; )

아무개 2013-10-21 0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번째 단락에 인용구들이 참 ....그렇네요.
그래서
장바구니로 쏙~

시 없는 삶이 어디있을까만은
아직도 제게 시는 사는것 만큼 쉽지 않네요.

네꼬 2013-10-28 15:34   좋아요 0 | URL
아무개님. 우왕 '시는 사는 것만틈 쉽지 않다'니 시적이군요!
이 시집은 (위에도 썼지만) 재미있고 따뜻한 책이었어요.
저도 시를 잘 모르는데(동지!) 좋아하면서 읽을 수 있었어요. 추천추천.

치니 2013-10-21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도, 글도, 참 좋아서 가슴이 벅차요.

네꼬 2013-10-28 15:36   좋아요 0 | URL
치니님! 으왕 이런 사랑이라니! (부끄러움 모르고 이런 칭찬을 덥석 받습니다.) 치니님, 저랑 남편이랑 다, 두리 보고 싶어요. (제가 "나 제주도에 아는 개 있다?" 하고 자랑해두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