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방 미세기 고학년 도서관 7
남찬숙 지음, 홍정선 그림 / 미세기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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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동화작가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동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동화작가가 하는 말이니까, '동화'작가가 하는 말이니까 독자들이 당연히 믿어줄 거라는 전제로 무책임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자신은 순수한데 세상은 그렇지 않은 듯, 혼자 정의의 수호자가 될 때도 있다. 낯부끄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 책에 실린 작품, 「착한 아이」에서는 달랐다.

 

동화작가인 '나는' 남편의 사업이 잘 안 풀리는 바람에 어린 시절 살던 동네로 집을 좁혀 이사 왔다. 그리고 딸 지원을 위해 이웃들과 친해지려고 노력하던 어느 날, 아파트 아줌마들 사이에도 왕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민주 엄마가 피곤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민주 모녀를 집 안에 들이지만, 우악스러운 민주와 눈치 없는 민주 엄마는 은근히 나의 신경을 긁는다. 그보다 곤란한 것은 민주 엄마가 옆에 붙어 있으니 다른 엄마들이 외면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나는 민주 엄마가 바로 어린 시절 친구였던 미순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고 정신이 멍해진다.

 

어린 시절 형편이 어렵고 입성이 바르지 못했던 미순은 아이들 사이의 왕따였다. 전학생이었던 나는 잠깐 미순과 친하게 지냈지만, 인기 있는 아이들 그룹에 초대받아 그들과 어울리면서 미순을 멀리 했다. 그런데 나는 유복한 아이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고, 빚쟁이들이 집에 찾아와 난동을 부리던 날 미순에게 그 모습을 보이고는 수치심을 느낀다. '미순이 같은 아이한테 동정을 받다니.' 나는 미순에게 못된 말을 내뱉고 얼마 뒤 다시 학교를 옮겼던 것이다.

 

동화작가도 아니고 '지원 엄마'도 아닌, '김민경'인 나는 다시 한번 어린 시절과 같은 갈등에 놓인다. 왠지 나를 불편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과도 친해질 수 없게 하는 왕따 친구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삼십여 년의 시간이 흘러 많은 것이 달라진 것 같지만, 사실 많은 것이 그대로다. 나는 딸이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는 이유로 다시 한번 문을 닫아 걸려고 하지만, 오래전 혼자 중얼거렸던 말이 다시 떠오른다. '누군가는 착한 아이가 돼 주겠지. 그게 꼭 나일 필요는 없어.' 그리고 이번엔 미순이와 친구가 되는데 꼭 착한 사람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며, 놀이터에 혼자 앉은 미순의 딸에게 다가간다.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얘들아, 나는 지금 민주 손을 꼭 잡고 어릴 적 내 친구 미순이에게 가고 있단다."

 

엄마뻘인 주인공이 지난 날 풀지 못한 매듭으로 갈등하는 장면을 독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모르긴 해도 이 솔직한 고백에 용기를 얻는 어린이가 적지 않을 것 같다. 왕따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 남은 문제,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는 그 숙제는 어른이 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미순을 다시 외면할 수도 있었지만, 더 도망치지 않고 문제에 직면하기로 한다.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딸에게 묵은 갈등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어렸을 때보다 더욱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가 민주, 어떤 의미에서 어린 미순에게 손을 내미는 장면에서 나는 오래간만에 희망이라는 것을 느꼈다.   

 

이 책은 고학년 어린이들이 읽을 만한 동화집으로, 세 편의 중편이 실려 있다. 표제작 「할아버지의 방」은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추억하는 손녀 이야기로, 구성은 다소 단순하지만 낡아가는 큰 집과 텅 빈 방이 할아버지에 대한 아름다운 은유로 읽힌다. 「비엔, 엄마의 이름」은 베트남인 엄마가 십 년만에 친정에 가는 일화를 그렸는데, 엄마를 수동적인 인물로 그린 것은 마음에 걸리지만 아이가 당당하게 엄마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점은 좋았다. 조금 냉정한 것 같지만 그만큼 정직하게, 조금 감상적인 것 같지만 그만큼 따뜻하게 세상을 보려고 한 작가의 노력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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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3-11-10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에 남은 문제,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는 그 숙제는 어른이 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찔려요. 찔려요. 찔려요. ㅠ_ㅠ 제게도 가시처럼 남아있는 숙제가 있네요. ㅠ_ㅠ

네꼬 2013-11-10 20:10   좋아요 0 | URL
우앙... 맞아요. 찔려요. ㅠㅠ 그게 참 어떻게 안 되지요.

저는 이 작품에서 어른 주인공이 그걸 고백하고 이제라도 풀려고 해서 좋더라고요. 어른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동화 중에서도 탁월한 작품이라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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