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골짜기 - 위대한 청교도의 샘에서 길어 낸 기도 모음집
아서 베넷 지음, 김동완 옮김 / 복있는사람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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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있는 기도는 영혼을 울린다. 얕은 기도는 틀에 박힌 듯 화려한 수사와 형용어구로 사람의 귀를 자극할 수는 있을지언정 하나님의 귀에는 결코 다다를 수 없다. 깊이 있는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었던 청교도들이 남긴 기도의 골짜기에서 울려 펴진 기도문을 발췌하여 독자들에게 소개한 『기도의 골짜기 』는 눈으로 읽어서만 될 일이 아니다. 목소리를 내어 입을 내뱉고 귀로 들으면서 마음을 다해 함께 기도해야 하는 책이다. 문자로 적힌 기도책이긴 하지만 사람 없는 골방에 들어가 육성으로 읽어내려가면 기도문이 내 기도가 되며, 내 기도의 질이 확연히 달라짐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신앙의 칼을 갈고 닦는 방법 중에 하나는 신앙에 귀감이 되는 모델을 정해 보고 배우는 것이 있다. 기도의 본을 청교도들이 남긴 기도문에서 찾기를 권한다. 순금같이 오염없는 기도문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간절함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강해져야 한다. 부와 지위와 권력으로 강한 척을 할 것이 아니다.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로 강해져야 한다. 세상이 두려워할 정도로 기도의 골짜기로 들어가야 한다. 기도의 시간이 줄어들고 기도의 질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앞선 신앙의 선배들이 남긴 주옥같은 기도문들이 있다. 주저리 주저리 떠드는 주문이 아니다. 믿음이 담보된 행함을 유도하는 기도문이다.


집에서 직장까지 걸어서 출퇴근한다. 편도 20여분 거리다. 아파트 단지에서 조금 걸어나오면 한적한 숲길이 펼쳐진다. 20여분 정도 걸으면서 『기도의 골짜기 』에 담긴 기도문을 소리 내어 읽는다. 내가 직접 기도하는 것처럼 말이다. 간혹 주변에 걸어다니는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이상하게 날 쳐다볼 수 있겠다. 하지만 괜챦다. 약간 목소리 톤을 낮추면 된다. 사람이 지나가면 또다시 목소리를 높인다. 아침 오후 출퇴근하면서 꽤 많은 청교도들이 남긴 기도문을 소리내어 읽어 간다. 벌써 400쪽 중에 절반 가까이 읽어갔다. 숨길 수 없는 나의 죄성과 부끄러움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솔직하게 드려지는 기도문이 곧 나의 기도임을 고백한다. 미처 깨닫지 못한 죄를 알게 된다. 깊이 있는 기도문이기에 생각지도 못한 내 속의 추악함이 드러난다. 회개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은 내 맘을 콕 찌른 기도문이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어서, 재산과 가족과 교회와 나 자신을 주님의 뜻대로 사용하고, 나와 내 모든 소유로 주님을 영광스럽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안이 공허할 때는, 의무인 듯 그리스도께 달려가서 그분의 충만하심을 내 것처럼 소유하고 누려야 하며


내 힘으로 얻은 복이 우상이 되어 무엇보다 해로우니, 소유가 오히려 악이요 거두어 가심이 오히려 선입니다.


내게 주신 물질을 소중히 여기되 교만과 사치의 도구가 아니요, 나를 부양하고 청지기 직분을 감당하는 수단으로 여기게 하소서.


내게는 모든 일에서 나의 명성을 확인하려는 은밀한 동기가 있습니다.


주옥같은 영혼을 울리는 기도문을 직접 만나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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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확신 - 당신이 구원받았음을 어떻게 확실히 알 수 있는가?
J. D. 그리어 지음, 장혜영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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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승점 앞에서 흐지부지되는 믿음은 처음부터 결함이 있었다"


한번 받은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말하는 것은 부정확하지 않다. 다만 불충분할 뿐이다. 한번 구원받았다면 언제나 구원받을 것이라는 점과 구원받은 자들은 자신의 믿음 안에서 끝까지 인내할 것이라는 점은 모두 사실이다.


구원은 한순간에 일어나고 한번 구원 받은 사람은 영원히 구원받는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믿음의 고백을 마지막까지 유지해야 한다. 구원을 위해 회개와 믿음이 필요하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많은 것에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신을 죽음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다. 자기 삶의 통제권을 죽이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꿈을 죽이는 것이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예수님에게 내려 놓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구원의 확신이 있을 때 가능하다.


종교는 행위를 바꾸라고 명령하지만 마음은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은 마음속을 깊숙이 침투해 뒤틀린 본성을 변화시킨다.


과거 어느 순간의 결정으로 지금 어떻게 살고 있든지 자신이 영원히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확실하게 '그럴 수 없다'라고 말해야 한다.


구원의 확신은 회개와 믿음이 전제되어 행동의 변화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구원 받은 사람의 삶의 변화를 요구한다. 야고보서가 그렇듯이 구원의 한 순간 감정으로 확신을 얻는다는 것은 진실에서 벗어난 것이다. 입으로 시인하였다면 삶의 변화가 후속적으로 뒤따르는 것이 자연적 결과다. 구원의 확신의 결과는 성령의 열매로 나타난다. 구원 받은 사람이 끝까지 경주를 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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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어떻게 해야 할까? - 처음 신앙을 가진 초신자를 위한 아주 쉬운 기도서! How Book Series 1
이대희 지음 / 브니엘출판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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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자를 위한 기도 입문서라고 하지만 기도의 본질을 정확히 말해 주는 기도 지침서라고 본다. 모든 종교에는 기도가 있다. 기독교 뿐만 아니라 이슬람교, 불교, 기타 여러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기도를 드린다. 우리 조상들은 정화수 한 그릇을 떠 놓고 자식들을 위해 기도를 드리곤 했다. 지금도 깊은 산 속이나 마을 한 어귀에 우둑커니 서 있는 정자나무에는 기도를 드리기 위해 타다 만 초들이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듯 사람들 마음 속에는 신을 향한 갈망이 있다. 아니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신이라고 하는 대상을 향해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거나 자신의 소원을 성취해 주기를 바라는 이에게 정성을 다해 기도를 드린다.


하지만 기독교와 기타 종교의 기도는 엄연히 차이가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기도의 목적에 있다. 자신을 위하거나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기도가 기타 종교인들이 드리는 기도라고 본다면 기독교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한 것이 기도다. 따라서, '내'가 중심이 되는 기도가 아닌 '하나님'이 중심이 되고 '나'를 버리는 기도가 기독교의 온전한 기도 목적이다. 내가 잘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기도가 그리스도인이 드리는 기도이다. 자칫 '기도' 가 아니라 '주문' 이되는 기도가 있다. 인격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우상'께 드리는 기도는 '주문'이 될 수밖에 없다. 우상은 결국 내가 만든 신에 불과하다. 어떤 사람에게는 돈이 우상이 되고, 권력이 우상이 된다. 자식이 우상이 되고 외모가 우상이 된다. 돈과 권력과 자식과 외모를 추구하는 기도는 '주문' 불과한 것이 된다.


"이방인들의 기도는 자기를 위해 존재한다"


저자는 기도의 필요성을 책 속에 담아냈다. 언제 어디서든지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걸어가든지 누워 있든지 말이다. 교회에서든 직장에서든 기도하라고 말한다. 기도하는 방법도 성경에 근거하여 조언한다. 성경 속 인물이 기도했던 것처럼 기도의 본을 따라 기도하면 어느새 자신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기도는 항상 말씀이 근거가 되어야 한다. 중언부언하는 기도, 형식적인 기도, 자신만을 위한 기도가 되지 않기 위해 말씀을 묵상한 뒤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야 한다. 큰 소리로 부르짖든 잠잠히 읊조리든 손을 들고 기도하든 고개를 파묵고 기도하든 기도의 모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도하려는 마음이 더 아름다운 것이다.


기도는 습관이다!


기도에 대해 아무리 지식적으로 많이 알고 있더라도 행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기도의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꾸준히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습관이 필요하다. 자신과의 싸움이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결국 자기 힘으로 살아가겠다는 얘기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 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이다. 과연 기도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새벽에 기도하는 사람은 달콤한 잠과 싸워 이긴 사람이다. 전날 밤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 먹고 싶은 욕구를 모두 이겨낸 사람이다. 새벽에 일어나기 위해 자신의 삶의 초점을 새벽에 맞춘 사람이다. 하루 이틀 기도하다보면 어느새 습관이 자신을 기도자로 이끌 것이다.


기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성령께서 도우시는 것이다!


기도의 거장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이야기한다. 기도는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하시는 거라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절대 필요하다. 내 생각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의지하여 성령님의 도우심을 얻으며 기도해야 한다. 생각지도 못한 기도를 하게 된다.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된다. 성령님께서 도우시는 증거다. 우리는 살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기도가 시들해졌을 때 기도에 동기를 부여하자. 『기도, 어떻게 해야 할까? 』로 다시 한번 기도의 끈을 단단히 묶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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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계시며 응답하시는 하나님
김남준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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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가장 큰 효용성은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192쪽)


성경에서는 질서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질서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고,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를 배우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결국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질서를 찾을 수 없습니다. 말씀은 질서와 무척 관련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면 점점 무질서해 지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권위주의를 타파하는 것은 좋지만 권위 자체를 경시하는 것은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집니다. 사람의 직위나 경력, 재산이나 힘에 의해 생기는 것이 권위가 아닙니다. 혹 '권위'를 자신이 노력한 결과의 대가로 생각해서 무소불위의 권위를 남용하는 사례가 종종 회자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권위'는 겸손을 동반하고 자신에게 부여해 준 권위의 근원이 하나님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목욕하는 물이 더럽다고 목욕물에 앉아 있는 아기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 권위주의가 구시대의 산물이라고 '권위'마저도 버릴려고 한다면 우리 사회는 무질서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절대 권위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진정한 권위자는 하나님이며 우리는 다만 권위를 위임받은 것 뿐입니다. 책임감을 가지고 겸손하게 권위를 행사해야 합니다. 공동체를 위해, 다른 이들을 위해 섬기는 마음으로 권위를 사용해야 합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한 처분권을 쥐고 있는 주인입니다" (25쪽)


하나님은 주인입니다. 종은 주인의 처분을 그저 따를 따름입니다. 종이 이래랴 저래랴 할 수 없습니다. 순종해야할 의무가 종에게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한 처분권을 주고 있는 분이 하나님을 인정할 때 우리 인생의 질서를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 되려고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우리 모두가 경험해봐서 아는 일이지만 교만으로 이르게 됩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야 직성이 풀립니다. 잠시 잠깐은 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생살이가 그렇게 순탄하지만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임을 고백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기도입니다. 기도란,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고 하나님의 뜻대로 내 욕망을 죽여가는 시도이며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럴수밖에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니까요.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 사람이 가진 비전, 능력, 장점보다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는지, 전적으로 즉각적인 순종을 하는지 관심있게 보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기도생활은 얕은 물에서 첨벙거리는 것 같습니다"(137)


바쁘다고 해서 기도하는 것을 게을리하다면 그것은 삶의 우선순위가 바뀐 것입니다. 바빠서 기도할 수 없다면 차라리 바쁜 일을 손에서 정리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의 위대한 대가들은 기도하는 일을 우선순위로 여겼습니다. 바쁘다고 해서 대충 기도하는 것을 중언부언한다고 표현합니다. 형식만 갖춘 기도 행위인거죠. 그러나 형식적인 기도에는 어떤 힘도 있을 수 없습니다. 자아만족일 뿐입니다. 기도는 깊은 물 속이 되어야 합니다. 얕은 물에서 첨벙거리는 일은 아이들 장난에 불과합니다. 깊은 물 속에서 생사를 걸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저부터 반성이 되는 대목입니다. 형식적인 기도, 위선적인 기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가 제 기도생활이었습니다. 이제 기도에 목숨을 걸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은 거기에 계셔서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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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둥 수용소 - 인간의 본성, 욕망,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실존적 보고서, 개정판
랭던 길키 지음, 이선숙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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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독 후 7년만에 다시 한 번 읽게 되었다. 두 번째 읽으면서 가장 가슴에 박힌 낱말을 꼽으라고 한다면 '이기심' 이다. 사람이 가지는 이기심의 민낯을 포용수용소인 산둥 수용소에서 적나라하게 만날 수 있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빅터 프랭클)에서 갇힌 유대인 포로들과 달리 『산둥 수용소』에 갇힌 수감자들은 신체적 자유가 비교적 보장되었고 고문이나 학대와 같은 신체적 처벌이 없었다. 2,000천명에 가까운 다국적인들이 좁디 좁은 구역안에 몸을 부대끼며 살아가야하는 고통과 제한된 식자재로 만들어진 음식을 배식받아야 하는 아픔 외에는 인간으로서 보장된 자유를 그나마 누릴 수 있는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생길 수 밖에 없는 치졸한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이 드러날 수 밖에 없다. 다같이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장소라면 수감자들 서로가 그다지 크게 실망하거나 좌절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산둥수용소』에 갇힌 다국적인들의 면면은 보면 크게 세 그룹으로 나뉜다. 중국 주재원으로 들어왔다가 일본의 침공으로 졸지에 적국 국가된 영국의 무역회사 중역들, 상인들 그룹과 국적을 초월한 카톨릭 사제들, 개신교 선교사들이 중심이 된 미국 시민들이다. 수용소 안에서 자치위원회를 구성하면서부터 그룹 간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방을 재배치하는 역할을 맡은 숙소팀에서 일하게 된 저자는 법적인 강제성이 없이 수감자들의 동의를 얻어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여러모로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학식이 뛰어나고 사회적 명망이 있을 뿐만 아니라 개신교 선교사라는 사명을 띤 사람들도 결정적인 순간에 몇 평 안되는 자신들의 가족들이 머루는 공간을 양보하기 싫어 별의별 합리적 이유를 대거나 무시하는 방법으로 방을 양보하는 제안을 거절했다고 한다. 신앙의 옷을 입었을 뿐 인간의 이기심을 드러낸 선교사들을 경험한 저자는 도덕성에 관해 최종적으로 이런 결론을 내린다.


"인간은 선해지기 너무도 어렵다. 원치 않는 이기적 행동을 하게 된다. 인간의 선함이나 도덕성은 사실이 아니다. 인간은 압박의 상황에 놓이면 자신의 소유를 사랑하게 된다. 자기가 헌신하는 대상의 안전이 위협받게 될 때 강한 불안감을 느낀다. 이기심, 편견, 부정적, 과독한 특권, 공격성은 불안전한 피조물에서 궁극적 의미와 안정성을 찾으려한 결과다. 진정한 신앙인은 의미와 안전성의 중심을 자신의 생명에 두는 대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 안에 두는 사람이다. "


따라서, 사람은 이기심이라는 보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가 필요하다.


『산둥수용소 』의 저자 랭던 길키는 수용소 경험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명장면(?)을 소개한다. 이 장면에서 서구 기독인들의 이기심을 발견한다. 어떤 장면이길래? 대략 이렇다. 


수용소 안에서 점점 먹을 식자재 공급이 줄어갈 쯤 국제적십자에서 미국인 수감자를 위한 구호 물품을 보내온다. 미국인 수감자 1인당 대략 7박스가 돌아갈 분량이다. 이듬해 봄까지 영양실조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는 물량이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나라 소속의 수감자들이다. 그들에게는 돌아갈 몫이 없다. 수용소 자치위원회에서는 모두에게 똑같이 배분하자는 의견을 제시한다. 수용소 전체 1인당 1박스 반 정도 돌아갈 분량이다. 이때 반전이 생긴다. 미국인 몇 몇이 이의를 제기한다. 미국인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똑같이 배분하는 것은 약속 위반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이기심이 드러난 명장면이다.


오늘날에도 비슷한 상황이 전개된다.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도 무상으로 배분하는 것에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는 이들이 있다. 굶주린 자에게 필요한 것이 당장 먹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게으름과 성품을 빗대어 다른 이유를 대며 반색한다. 랭던 길키는 책 중간에 이런 말을 한다.


"부와 특권을 붙들려는 필사적인 시도는 부한 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사는 공동체를 파괴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부자들의 대저택도 무너뜨릴 수 있다"


살아 있는 공동체가 세워지려면 부를 창출하고 축적하는 기술적인 능력뿐 아니라 가진 것을 궁핍한 이웃과 나누려는 도덕성과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수용소 밖에 있는 사람들은 모른다. 자신의 안전에 위기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도 모른다. 우리의 진짜 욕망과 욕구는 직업적인 옷, 도덕적인 옷으로 감춰져 있을 뿐이다. 소유욕은 끝이 없다. 기독교의 원죄 사상의 밑바탕에는 이기심이 있다. 과학기술이 진보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인간은 선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이기심으로 움직인다. 고상한 민주주의를 외치는 이들도 깊은 내면에는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 단지 신념으로 감춰져 있을 뿐이다. 신념 또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배고픔 앞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질 수 밖에 없음을 『산둥수용소 에서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필요로 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능력과 영원한 목적안에서만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이웃을 섬기는 일도 하나님이라는 절대 기준이 있기에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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