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둥 수용소 - 인간의 본성, 욕망,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실존적 보고서, 개정판
랭던 길키 지음, 이선숙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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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독 후 7년만에 다시 한 번 읽게 되었다. 두 번째 읽으면서 가장 가슴에 박힌 낱말을 꼽으라고 한다면 '이기심' 이다. 사람이 가지는 이기심의 민낯을 포용수용소인 산둥 수용소에서 적나라하게 만날 수 있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빅터 프랭클)에서 갇힌 유대인 포로들과 달리 『산둥 수용소』에 갇힌 수감자들은 신체적 자유가 비교적 보장되었고 고문이나 학대와 같은 신체적 처벌이 없었다. 2,000천명에 가까운 다국적인들이 좁디 좁은 구역안에 몸을 부대끼며 살아가야하는 고통과 제한된 식자재로 만들어진 음식을 배식받아야 하는 아픔 외에는 인간으로서 보장된 자유를 그나마 누릴 수 있는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생길 수 밖에 없는 치졸한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이 드러날 수 밖에 없다. 다같이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장소라면 수감자들 서로가 그다지 크게 실망하거나 좌절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산둥수용소』에 갇힌 다국적인들의 면면은 보면 크게 세 그룹으로 나뉜다. 중국 주재원으로 들어왔다가 일본의 침공으로 졸지에 적국 국가된 영국의 무역회사 중역들, 상인들 그룹과 국적을 초월한 카톨릭 사제들, 개신교 선교사들이 중심이 된 미국 시민들이다. 수용소 안에서 자치위원회를 구성하면서부터 그룹 간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방을 재배치하는 역할을 맡은 숙소팀에서 일하게 된 저자는 법적인 강제성이 없이 수감자들의 동의를 얻어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여러모로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학식이 뛰어나고 사회적 명망이 있을 뿐만 아니라 개신교 선교사라는 사명을 띤 사람들도 결정적인 순간에 몇 평 안되는 자신들의 가족들이 머루는 공간을 양보하기 싫어 별의별 합리적 이유를 대거나 무시하는 방법으로 방을 양보하는 제안을 거절했다고 한다. 신앙의 옷을 입었을 뿐 인간의 이기심을 드러낸 선교사들을 경험한 저자는 도덕성에 관해 최종적으로 이런 결론을 내린다.


"인간은 선해지기 너무도 어렵다. 원치 않는 이기적 행동을 하게 된다. 인간의 선함이나 도덕성은 사실이 아니다. 인간은 압박의 상황에 놓이면 자신의 소유를 사랑하게 된다. 자기가 헌신하는 대상의 안전이 위협받게 될 때 강한 불안감을 느낀다. 이기심, 편견, 부정적, 과독한 특권, 공격성은 불안전한 피조물에서 궁극적 의미와 안정성을 찾으려한 결과다. 진정한 신앙인은 의미와 안전성의 중심을 자신의 생명에 두는 대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 안에 두는 사람이다. "


따라서, 사람은 이기심이라는 보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가 필요하다.


『산둥수용소 』의 저자 랭던 길키는 수용소 경험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명장면(?)을 소개한다. 이 장면에서 서구 기독인들의 이기심을 발견한다. 어떤 장면이길래? 대략 이렇다. 


수용소 안에서 점점 먹을 식자재 공급이 줄어갈 쯤 국제적십자에서 미국인 수감자를 위한 구호 물품을 보내온다. 미국인 수감자 1인당 대략 7박스가 돌아갈 분량이다. 이듬해 봄까지 영양실조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는 물량이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나라 소속의 수감자들이다. 그들에게는 돌아갈 몫이 없다. 수용소 자치위원회에서는 모두에게 똑같이 배분하자는 의견을 제시한다. 수용소 전체 1인당 1박스 반 정도 돌아갈 분량이다. 이때 반전이 생긴다. 미국인 몇 몇이 이의를 제기한다. 미국인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똑같이 배분하는 것은 약속 위반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이기심이 드러난 명장면이다.


오늘날에도 비슷한 상황이 전개된다.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도 무상으로 배분하는 것에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는 이들이 있다. 굶주린 자에게 필요한 것이 당장 먹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게으름과 성품을 빗대어 다른 이유를 대며 반색한다. 랭던 길키는 책 중간에 이런 말을 한다.


"부와 특권을 붙들려는 필사적인 시도는 부한 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사는 공동체를 파괴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부자들의 대저택도 무너뜨릴 수 있다"


살아 있는 공동체가 세워지려면 부를 창출하고 축적하는 기술적인 능력뿐 아니라 가진 것을 궁핍한 이웃과 나누려는 도덕성과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수용소 밖에 있는 사람들은 모른다. 자신의 안전에 위기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도 모른다. 우리의 진짜 욕망과 욕구는 직업적인 옷, 도덕적인 옷으로 감춰져 있을 뿐이다. 소유욕은 끝이 없다. 기독교의 원죄 사상의 밑바탕에는 이기심이 있다. 과학기술이 진보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인간은 선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이기심으로 움직인다. 고상한 민주주의를 외치는 이들도 깊은 내면에는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 단지 신념으로 감춰져 있을 뿐이다. 신념 또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배고픔 앞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질 수 밖에 없음을 『산둥수용소 에서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필요로 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능력과 영원한 목적안에서만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이웃을 섬기는 일도 하나님이라는 절대 기준이 있기에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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