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 - 성경의 세계를 빚어낸 고대 지중해 문화권의 사회상
랜돌프 리처즈.리처드 제임스 지음, 윤상필 옮김 / 성서유니온선교회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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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는 새로운 관점, 성경은 개인에게 준 책이 아니라 공동체에게 제시한 책이다!

 

성경을 읽고 나의 삶을 적용하는 시간을 규칙적으로 했던 시절이 있었다. 대학생 선교단체에서 매일 아침 일정한 분량의 성경 본문을 읽고 삶을 나누는 '경건의 시간' 이었다. 당시 얇고 아담한 QT집을 정기 구독하며 매일 손에 들고 동아리방에 찾아가 선배의 인도하에 본문을 돌아가면서 읽고 잠시 묵상 하고 자신의 생각을 나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 생각해보면 성경 본문을 극히 개인적인 관점으로 해석한 것 같다. 당연히 적용도 개인적인 면에 치울 때가 많았다.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잠이 많았던 대학 시절 아침 일찍 시간 내어 습관적으로 모여 성경을 줄기차게 읽고 묵상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도전이라고 스스로 칭찬해 보지만 아쉬움감이 없지 않다. 30년이 지난 현재도 성경을 읽고 묵상을 한다. 때로는 바쁘다는 이유로 대충 한 번 쓱 읽어보거나 본문을 해석한 글을 읽고 지나칠 때도 많다. 하지만 성경 본문을 깊게 읽고 관련 본문도 찾아서 여러 군데 찾아 읽어보면서 성경의 본문을 최대한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 날의 삶의 적용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남달랐던 것 같다. 예전과 달라진 점은 개인적인 관점에서 적용하는 것보다 가족, 공동체, 직장, 교회, 국가 등 집단주의적인 관점에서 본문을 해석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개인주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라는 책은 책의 부제가 말해 주듯이 '성경의 세계를 빚어낸 고대 지중해 문화권의 사회상'을 토대로 성경을 읽어내는 방법에 대해 논하고 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성경을 집단주의적인 관점에서 읽어야 오독하지 않게 된다는 저자의 주장이다. 오래전 기록되었던 성경은 우리가 잘 아는바와 같이 현대의 문화적 관점으로 읽으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참 많다. 왜 죽은 형의 아내와 결혼해야 되는지, 왜 길손님들을 극진히 대접해야 되는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성경은 참 어처구니 없는 내용이구나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기록된 당시 문화와 사람들의 사고방식에서 읽어내면 현대의 사람들이 개인주의에 몰입되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성경은 족장 사람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이들은 족장의 대표들이며 가문과 식솔들을 책임지는 자리에 놓여 있었기에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는 집단을 책임지기 위한 것이었다. 집단주의적인 관점(친족, 후견, 중개)으로 성경의 이야기를 읽어내려가면 성경의 문맥을 좀 더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은 어린 아이처럼 되라고 자주 이야기하셨다. 그 이유가 뭘까? 성경을 오독하게 되면 이렇게 적용하게 된다고 한다. 어린 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을 가지라고. 그러나 성경이 씌여진 당시 시대상과 문화, 집단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순수한 마음을 가지라는 극히 개인적인 적용을 벗어나 어린 아이처럼 '낮아지라'라는 사회문화적인 메세지로 접근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권력의 시녀가 된 종교인들, 민족을 뒤로하고 집권 세력에 아첨하고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으려고 하는 권력의 추종자들처럼 사는 삶이 아니라 어린 아이처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낮아지라는 예수님의 간곡한 비유가 원래의 뜻이라고 말한다. 사실 예수님 자신이 하늘의 권력을 내려놓고 인간의 몸으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처럼 말이다. 

 

사도 바울과 베드로는 첨예하게 대립하던 부분이 있었다. 한치의 양보도 없이 의견이 팽팽했던 이유는 구원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있었다. 바울은 이방인들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반면 베드로는 유대인의 입장에서 바라보았다. 바울과 베드로 모두 집단주의적 관점에서 구원을 바라본 것이다. 개인의 구원보다는 공동체의 구원을 더 강조한 듯 싶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을 한 가족의 의미로 형제, 자매로 부른곤 한다.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그야말로 파격적인 생각이다. 개인주의를 넘어 더 세밀하게 개개인주의로 흐르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을 넘어 공동체, 공동체를 넘어 나라와 민족을 염두하라는 메세지는 부담이 되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기독교의 메세지 자체가 개인에게만 국한되었다면 기독교는 전 세계로 확산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모두가 나 중심으로 생각하고 살아갈 때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시대를 거슬러 나 외에 남을, 나를 넘어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고 섬기고 낮아지는 삶을 살 때 바로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 아닐까 적용해 본다. 

 

https://blog.naver.com/bookwoods/222689628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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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조된 각인 - 우리가 교회라고 오인하는 12가지 모습 한국 교회 탐사 보고서
김형국 지음 / 비아토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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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목교회네트워크 지원센터 대표인 김형국 목사는 12개의 키워드로 한국 교회를 진단하고 있다. 기독교의 본질에서 벗어난 가짜를 진짜로 오해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 "교회는 원래 이런 겁니다" 라고 강하게 외치는 그의 목소리를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다. 김형국 목사는 기독교가 본질에서 벗어났을 때 나타나는 3개 현상을 책의 소주제로 삼았다.

 

첫째, 숨이 막히다는 거다. 교회가 사회를 걱정해야 되는데 오히려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왜 그럴까? 교회하면 숨이 헉헉 막히다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시대와 동떨어졌다는 거다. 기독교가 조선 땅에 들어왔을 때 그야말로 혁신 그 자체였다. 시대를 앞서 나가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여성의 교육을 위해 여학교를 세워갔고 의료와 복지의 사각지대를 메워 나갔다셋째, 비상식적이라는 거다. 최소한의 사회적 상식마저 지키지 않는 곳이 교회라는 점이다. 교회 안의 목회 세습, 재정 불투명, 권력화 등은 많은 사람들의 눈을 찌푸리게 하는 모습이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이렇게 생각한다면 교회의 미래는 어두울 수 밖에 없다. 뭔가 개혁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심정으로 김형국 목사는 12개의 키워드로 현실을 진단하고 기독교의 본질을 찾기 위한 조언을 서슴치 않고 제시하고 있다. 비판만 하고 행동에 옮기지 않는다면 욕 먹기 쉽상이다. 나들목교회네트워크에서부터 시작한 실천이 한국 교회 전체로 파급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위조된 각인>에서 제시한 12개의 키워드는 이렇다. 속박, 위선, 광신, 헌신, 제사 거부, 배제와 혐오, 정교분리, 남성 우위, 전도, 헌금, 이익집단, 교회 운영. 교회에 각인된 위조된 모습이 다시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본질을 헤아려 보아야 한다. 기독교의 본질은 예수께서 가르쳤던 가르침에 있다. 그 가르침은 희생과 섬김이다. 기독교가 사회에서 희생하고 섬길 때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이익 집단으로 변질되거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 될 때 예수는 없고 오직 사람이 중심이 된 종교가 될 수 밖에 없다. 기독교가 강조하는 믿음은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반대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기 위해 믿음이 필요한 거다. 다양한 상황 속에서 감사해야 한다. 가난할 때, 고통 당할 때, 병들 때 조차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이다. 

 

사회의 어두운 곳을 밝히는 빛이 되어야 하는 것이 기독교다. 부패된 곳을 정화시키는 일을 기독교가 해야 한다. 노예해방을 위해 전 생애를 바쳤던 영국의 상원의원 윌리엄 윌버포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으로 비상식적인 제도를 다시 제자리로 찾아오는데 사용했다. 윌리엄 윌버포스 혼자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의 뒤에서 기도해 주는 든든한 공동체가 있었다고 한다. '클래팜 공동체'다. 그리스도인에게 건강한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배타적인 종교로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기독교가 강조하는 '진리'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종교는 배타성을 가지고 있다. 다만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배타성은 아마도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는 꽉 막힌 사고, 융통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답답함, 자신의 종교만 강조하는 이기주의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제사 거부, 베제와 혐오로 각인된 기독교는 명예를 회복해야 할 것 같다. 기독교의 본질대로 살아간다면 기독교만큼 효를 강조하는 종교가 없다. 기독교만큼 다양성과 포용성을 갖춘 종교가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변질된 모습이 각인되어 버렸다. 김형국 목사가 제시하는 상황 속 대응 방법을 한 번 읽어보시라. 진리를 고수하되 지혜롭게 상황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전도의 핵심은 내용이지 형식이 아니다. 다른 이들을 배려하지 않는 다양한 형식의 전도는 가장 중요한 내용인 예수를 전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된다. 헌금은 우리의 모든 소유가 내 것이 아님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기독교는 현실을 벗어날 수 없다. 불의한 상황 속에서 분리되어 외딴 섬처럼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완벽하지 않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려야 한다. 변화하는 과정에 있고 성장 중에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솔직하고 정직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삶 속에서 부족한 모습 그대로 살아가되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사랑을 끝까지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기독교의 위조된 각인을 벗겨내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듯 싶다. 좁은길, 희생과 섬김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위조된 각인이 바윗돌에 새겨진 것처럼 영원히 굳어 질 수도 있다. 기독교는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 말보다 삶이 우선 되어야 한다. 

 

<이창수의 독서 향기> https://www.youtube.com/watch?v=MlxeVb-MYtk&t=44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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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모세 - 믿음의 여정에서 마주하는 열일곱 가지 풍경들
김영봉 지음 / 복있는사람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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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 <십계> 영화로도 많이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성경에서는 그를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겸손한 사람이라고 말한다.(민수기 12장 3절 : 모세로 말하자면,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겸손한 사람이다) 남자 아이를 학살하라는 이집트 바로의 명령 속에 모세는 살아남아 공주의 양자로 입적되고 40년 간 특권을 누린다. 살인 혐의를 받고 왕궁에서 도피하여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간 목자로 살아간다. 호렙 산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400백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로 40년 간 살다가 죽는다. 여기에서 지도자의 삶을 살았던 모세를 눈여겨 본다. 

 

"상관하지 않아도 될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아파할 줄 아는 마음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가장 필요했습니다" (53쪽)

 

지도자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상대방의 고통을 볼 수 있는 눈과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한다. 학교에서 교감의 역할 중 하나가 교직원들을 돌아보는 일이 되면 좋겠다. 교직원도 사람이다. 가정이 있고 자녀가 있고 부모에게는 귀한 자녀일 수 있다. 살다가 보면 고통이 없는 삶이 어디있겠는가. 그 아픔과 고통을 털어 놓고 위로 받을 수 있는 곳이 학교라면 좋지 않을까. 행정적인 일만 처리하는 교감이 아니라 교직원들의 아픔을 마음으로 공감해 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지도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지도자는 누군가가 인정해 줄 때 의미가 있다. 힘들 때 도와주는 교감, 부담스러운 업무를 대신 처리해 주는 교감, 어려움이 있을 때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는 교감이 된다면 진정한 지도자라고 할 수 있겠다.

 

"한 공동체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온갖 오해와 비난과 모욕에 노출되는 일입니다. 그런 상처를 견디고 극복할 수 있어야 비로소 지도자로서 소임을 다할 수 있습니다" (59쪽)

 

교감은 욕 먹는 자리일 수 밖에 없다. 껄끄러운 일을 부탁해야 할 때도 있고,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해야 할 때도 있다. 복무에 관해서는 어떻든 결재라인이 있는 위치라 때로는 갑과 을의 위치에 있을 수 있기에 '온갖 오해와 비난과 모욕' 에 노출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칭찬과 인정을 받으면 좋겠지만 때로는 교직원들에게 오해와 비난을 받더라도 씩씩되지 않고 그것 조차도 극복해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더 단단한 지도자가 되지 않을까 싶다. 다양한 학교 구성원들의 필요를 듣고 반영하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고 비난 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은 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나. '교감, 못 해 먹겠다' 

 

 

"고통받는 자녀가 부모에게 가장 마음 쓰이는 것처럼, 전능하신 하나님도 이 땅의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가장 마음 쓰십니다" (107쪽), "주변을 돌아보며 밀려나고 뒤쳐진 사람들, 불의한 제도에 희생당한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109쪽) "내가 차별당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164쪽)

 

학교 구성원 중에 희생당하는 사람이 누가 있는지 돌아보라는 얘기다. 불의한 제도 때문에 알게 모르게 고통 받는 구성원이 있다면 제일 우선순위에 두고 마음을 써야 한다그렇기 때문에 바쁜 가운데에서도 하루의 일과를 돌아보며 '주변을 돌아보는 일'은 무척 중요한 일인 것 같다. 소외 받는 구성원이 없는지, 뒤쳐져 있는 구성원은 없는지 교감은 촉각을 세우고 돌아보아야 한다. 물론 몸이 두 개라도 할 수 없을만큼 바쁠 때도 분명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가 보다. 

 

"우리의 경험과 사회적 편견에 휘둘리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문제의 원인을 보도록 힘써야 합니다" (160쪽)

 

지도자는 때로는 자신의 경험으로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다. 교감도 마찬가지다. 간혹 선입견으로 직원들을 판단할 수도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갈등이 생겼을 경우 감정에 치우치기 보다 냉철한 이성을 작동해야 할 때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

 

"내 마음은 나의 사유지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사용하는 공유지입니다" (192쪽)

 

성을 지키는 것보다 마음을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한다. 마음을 지킬 수 있는 사람,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진정한 용사다. 교감은 마음 내키는대로 말해서는 안 된다. 교감은 공인이다. 마음은 얼굴로 드러난다. 분노는 감출 수 없다. 학교 구성원들 중에 교감의 영향력은 남다를 수 있다. 때로는 마음이 내키지 않더라도 해야 되는 경우도 발생한다. 공적인 일에서만큼은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어야겠다.

 

"높은 자리에 오래 앉아 있다 보면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싶은 유혹에 이끌린다는 것입니다" (199쪽)

 

교감의 지위가 높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초중등교육법에 나온 교감의 권한은 학교장 부재 시 권한을 대행할 수 있다라고 나와 있다. 학교장 부재 시가 아니더라도 중요한 일에 책임을 지는 결정을 할 수 있기에 지위의 높고 낮음을 떠나서 영향력이 크다고 할 수 있겠다. 권한을 남용할 수 있는 역할이 아니겠지만 그래도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변질될 수 있기에 자신을 컨트롤해 줄 수 있는 제어장치가 반드시 필요하다. 

 

"내 주장을 절대적인 것으로 내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내 의견과 다르다고 싸우려 할 이유도 없습니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합의할 수 있는 타협점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209쪽)

 

학교 안에서 교감이 주장을 할 만한 사안도 많지 않다. 어찌보면 거의 없다고 봐야겠다. 학교 구성원들의 의견을 조율하고 합의안을 끌어내는 퍼실리테이터의 역할로 바뀌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첨예한 사안에 대해서는 의견 대립이 있을 수 있다. 그럴 때 지혜로운 대화법은 고집을 피우거나 쌈닭처럼 행동하지 말라는 말이다. 목소리 높이는 사람이 지는거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려는 마음 가짐이 중요한 것 같다. 요즘은 갑질도 주의해야겠지만 을질도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그는 그 자리를 섬기는 자리로 받아들였습니다" (264쪽)

 

4백만 백성을 이끄는 최고 지도자 모세는 자신의 역할을 섬기는 자리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사회의 어떤 조직이든 지도자들이 섬기는 자세와 마인드로 직임에 충실한다면 직장 내 괴롭힘, 분열과 갈등이 최소화되지 않을까 싶다. 섬기는 것은 희생이 뒤따른다. 단순히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퍼포먼스가 아니기에 삶 속에서 일관되게 행해져야 한다. 섬기는 것은 훈련이 필요하다. 겸손의 표현이다. 지도자가 겸손하다는 것은 행동에서 드러난다. 교감의 역할은 섬기는거다. 학생, 학부모, 지역사회, 교직원, 학교장 등 학교 구성원들을 섬기는 자리가 교감의 자리다. 누리는 자리가 아니다. 자랑하는 자리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힘든 역할이 교감이 역할이다. 

 

 

 

 

<이창수의 독서 향기> https://www.youtube.com/watch?v=MlxeVb-MYtk&t=44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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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풍요 - 돈 음식 몸 시간 장소 그리고 그리스도인
월터 브루그만 지음, 정성묵 옮김 / 한국장로교출판사(한장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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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풍요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완전한 풍요는 탐욕적인 풍요와 거리를 둔다. 

완전한 풍요는 인간이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누릴 수 있다. 

 

저자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철저히 배격한다. 영적인 것과 물질적 인것은 분리될 수 없다. 영적인 것이 물질적인 것에 우선하는 것도 아니다. 둘이 함께 가야 한다. 말씀과 기도, 찬양으로 하나님을 예배함과 동시에 돈과 음식, 몸과 시간, 장소를 공동체 정신으로 개인의 탐욕의 도구로 전락되지 않도록 파수꾼이 되어야 한다.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동떨어져 살아갈 수 없다. 물질적인 것을 관리하고 다스리며 기독교의 정신을 세상 속에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 저자는 이것을 성숙한 물질성을 지닌 그리스도인이라고 표현한다. 우리 사회의 친숙한 언어로 표현한다면 성숙한 시민성으로도 나타낼 수 있겠다. 

 

성숙한 물질성을 표현하는 5가지 요소는 이렇다. 돈, 음식, 몸, 시간, 장소. 이것은 현대 사회를 대표하는 물직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이 다섯 가지는 그리스도인에게나 비그리스도에게나 모두 동일하게 영향을 끼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5가지 물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이것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정체성이 드러난다. 개인의 탐욕의 수단으로 여긴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구별성이 없는 것나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 이것들을 어떻게 여기며 사용해야 할까? 

 

소비 VS 나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누가 얼마나 소비를 많이 하느냐에 따라 계층이 구분되어 진다. 더 많이 소유하고 소비해야 상위계층이다. 반면 빈곤과 기아에 시달리며 최소한의 소비조차 할 수 없는 이들이 더 많이 나타나고 있다. 자본이 신이 되어 돈으로 할 수 없는 일이 없는 세상이 되어 버린 시대에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소비관은 어때야 할까? 돈은 소비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나눔을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 수입의 목적은 개인의 유익이 아니라 공동체를 세워가는 것이 되어야 한다. 소비를 위한 투기, 탐욕과 자기 과시를 위한 저축은 돈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 된다. 세상 속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구별된 물질관이다. 

 

소비 VS 분배

 

가정형농업과 산업형 농업의 차이점은 잉여 생산물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달려 있다. 가정형 농업은 주어진 땅에서 먹고살만큼 경쟁할 이유 없이 환경을 훼손하지 않은 상태에서 먹거리를 생산한다. 반면 산업형 농업은 이윤이 목적이기에 잉여 농산물이 생기더라도 분배를 염두해 두지 않는다. 잉여물을 남겨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의 정신일진대 현대 사회의 산업형 농업은 철저히 개인 이기주의로 무장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은 음식의 원천이 곧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알고 자족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웃과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한다. 

 

책임감 있는 자기 관리

 

성경에서는 몸에 만큼은 철저하게 대조한다. 육체의 일이냐, 성령의 열매냐로. 책임감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건강한 영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당연히 개인의 영역을 넘어 공동의 영역에 우리의 몸을 사용할 수 있도록 권면한다. 연약한 지체가 있다면 그들을 위해 당여히 몸으로 섬겨야 한다. 노화와 죽음에 대한 생각도 대조된다. 억지로 젊음을 유지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은 결국 부활의 기대를 감소시키는 일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은 불멸의 존재가 아니다.

 

안식은 저항이다!

 

1년 365일 24시간 내내 온라인에 연결되어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안식은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다. 앞으로 어떨께 될 지 모르는 세상 속에서 안식을 누린다는 것은 멍청하기 짝이 없는 행위로 보여질 수 있다. 정신없이 살아가는 우리 사회에 느리게 살아가려는 안식은 자기 이익을 위해 불철주야 달음박질하는 사람들에 비해 뒤쳐질 수 있는 위험 요소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에 달려있다

 

이웃과 함께 거주하는 삶

 

이웃과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은 경쟁하는 삶이 아니다. 나눔이 있는 삶이다. 공익을 위해 기꺼이 나누는 삶이다.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삶이다. 나만의 경계를 짓고 침범하는 이웃들을 고발하는 삶이 아니라 우리의 공간을 내주고 함께 가는 삶이다. 땅의 소유주는 마지막 거주자가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사람들과 연결되어 어 있고 과거의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다. 장소는 성취가 아니라 선물이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에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끝으로 저자는 성숙한 물질성(시민성)을 드러내는 돈과 음식, 몸과 시간, 장소를 이웃에게 공의와 정의로, 은총과 긍휼, 진실로 실천하는 일이 완전한 풍요에 이르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이창수의 독서 향기> https://www.youtube.com/watch?v=MlxeVb-MYtk&t=44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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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이 불편한 예배 - 환대와 우정을 나누는 예배 공동체
김재우 지음 / 이레서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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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즐거이 받으시는 예배란 무엇일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이면 교회에 출석하여 하나님께 예배한다. 새벽에도 수요일에도 교회마다 정해 놓은 시간에 출석하여 예배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인가 아닌가이다. 모두 진심으로 예배한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염두해 두어야 하지 않을까.

 

저자는 미국 이민자로 조지아주에서 다민족 예배 예술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조지아주만 하더라도 40개국이 넘는 곳에서 이민자들이 정착하는 곳이라고 한다. 다민족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이민자들 대부분이 난민들이라고 한다.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에서 각종 어려움을 딛고 미국에 정착한 사람들이다. 저자는 자신의 집을 오픈하여 이민자들과 예배를 한다. 토요일 저녁 시간에 음식을 각자 준비해 와서 식탁 교제로 예배를 시작한다. 자정이 넘어서야 끝나는 예배지만 모두가 환대와 우정을 경험한다고 한다. 저자가 생각하는 예배란 무엇일까? 

 

크게 두 가지로 다민족 이민자들과 예배한 한 사례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누구를 예배할 것인가?  그리고 누구와 예배할 것인가? 에 초점을 맞춘다. 예배의 본질보다 형식을 강조할 때 누구를 예배하는지 간과하는 경우가 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 교단 수가 4만개가 넘는다고 한다. 예배의 형식에 따라 분열되거나 분화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배의 본질은 예배의 형식이 다르더라도 달라질 수 없는 본질적인 개념이다. 2시간 넘게 춤을 춰야 예배한다고 생각하는 민족도 있다. 틀에 짜인 순서와 고요한 분위기를 선호하는 민족도 있다. 민족마다 예배하는 방식이 다른 것이지 예배의 대상이 다른 것이 아니다. 신생국가인 남수단에 가서 예배할 때 저자는 소수 부족의 언어로 찬양하며 예배할 때 분열된 부족들이 서로 연합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누구를 예배할 것인가? 에 초점을 맞춘다면 젊은이를 위해 어르신들이 예배의 형식을 양보할 수 있을 것이고 반대로 어르신들을 위해 젊은이들이 맞춰갈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방식이든 예배하는 대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와 예배할 것인가? 는 다민족 다문화 사회에서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부분인 것 같다. 우리나라도 이주노동자들이 많이 들어오고 있다. 선교를 생각하면 예전 같았으면 무조건 나가는 선교를 생각했지만 이제는 우리나라도 들어온 해외 이주민들을 환대와 우정으로 대하면서 그들과 함께 예배를 해야 할 때가 이른 것이다. 피부색과 언어와 문화가 같은 사람들끼리 예배하는 것이 당연히 편하다. 그러나 기꺼이 불편하더라도 예배는 해야 한다. 언어가 다르더라도, 문화가 다르더라도 예배를 함께 할 수 있다. 그에 따른 불편함은 당연히 감수해야 한다. 예수님이 그러셨다.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사마리아에 직접 찾아가서 천대받는 여인과 우물가에서 예배를 했다. 에어컨이 없더라도 예배할 수 있어야 한다. 번듯한 시설이 없더라도 우물가에서 예배했듯이 우리도 시간과 장소를 구분하지 않고 예배해야 한다. 기꺼이 불편한 예배라도 예배의 대상은 변함이 없다

 

예배하는 장소가 교회일 수도 있지만 우리 각자의 생활 처소, 직장일 수도 있다. 누구와 예배할 것인가? 가족들, 직장 동료들, 환대와 우정이 필요한 이들이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 됨은 다양성 안에서 일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59쪽)

 

성경은 획일화를 말하지 않는다. 통일된 문화, 통일된 방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예배하는 것이 아름다움이다. 문화적 감수성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게 요구되는 것은 우리의 시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예배의 스타일도 존중해야 한다. 우리의 것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에 기반한 예배를 기꺼이 인정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반응하는 공동체 예배를 반복해서 강조한다. 공동체 예배가 없는 개인 예배, 또는 개인이 사라져 버린 공동체 예배는 온전한 예배가 아니다" (69쪽)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방법 중 하나는 한 사람을 위해, 오직 내 앞에 있는 한 영혼을 위해, 그와 함께하는 그 순간에 내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것이다" (147쪽)

 

공동체와 함께 예배하는 것, 한 사람을 위해 기꺼이 내 시간과 물질과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은 기꺼이 불편한 예배다. 하지만 하나님은 기꺼이 불편한 예배를 원하신다!

 

"우리는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멈추어 서야 한다" (151쪽)

 

<이창수의 독서 향기> https://www.youtube.com/watch?v=MlxeVb-MYtk&t=44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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