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박경리 시집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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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학교 만기 4년 꽉 채우고 떠나게 돼서 참 홀가분하다.

지역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겠지만 내가 머물고 있는 지역은 교감이 한 학교에 근무할 수 있는 기간은 4년이 최대다. 4년을 채우면 무조건 자리를 비워 주어야 한다.

이곳으로 처음 발령받아 올 때에는 1년만 근무하고 집 근처로 가야지 마음먹었다. 집에서 근무지까지 50킬로미터 걸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막상 근무하다 보니 정이 생기고 오기가 생기고 그러다 보니 학교 만기를 채우고 말았다.

새로 오는 교감님은 신규 교감이다. 나도 그랬던 시절이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어제 그제 새로 발령 난 학교에 다녀왔다. 새로 발령받아 오신 교장님과 선생님들, 교직원분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새 학년도 교육과정을 협의했다.

이틀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서 그런지 집에 와서 일찍 뻗었다. 에너지를 많이 소모했나 보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나도 모르게 신경을 무척 썼나 보다. 교감인데 뭘 신경 쓸 게 있을까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점점 새로운 곳에 가는 것이 힘들다. 젊었을 때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지금은 익숙한 곳이 좋다.

오늘부터 2월 말까지 지금 있는 학교에서 해야 할 일들을 잘 마무리해야 한다. 선생님들 호봉도 승급 처리해야 되고 내부 계획, 채용 업무, 보고 공문도 처리해야 된다. 유종의 미를 잘 거둘 수 있도록 처신을 잘해야겠다. 떠나고 간 자리가 아름다울 수 있도록 말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처럼 새로 오시는 교감님을 위해 버리고 갈 것은 깨끗하게 잊고 치우고 가야겠다. 박경리 유고 시집을 읽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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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에게 희망을 (무선) 생각하는 숲 6
트리나 폴러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주니어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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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오시는 선생님들 명단이 발표되었다. 우리 학교에 오시는 분들 개인 연락처를 소속 학교 교감님들에게 요청했다. 다음 주에 있을 교육과정 디자인하기(새 학기 준비를 위한 교직원 협의)를 준비하기 위해 원하는 학년, 업무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기 위함이다. 기존에 계시는 선생님들에게는 이미 개인 의사를 받아 놓은 상태였다.

서로 조율하고 조정하기 위해 사전 작업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되어 일일이 전화를 드렸고 혹시 시간이 되어 학교로 오실 수 있는 분들은 방문 요청을 드렸고 사정이 여의치 않은 분들은 최대한 전화로 선생님들의 의사를 여쭈어보았다.

물론 나는 이분들과 함께 근무하지 않는다. 새로운 교감님과 함께 근무할 분들이지만 기존에 있는 교감으로 최대한 내가 할 역할을 해야 될 것 같아 완성된 초안을 만든다는 심정으로 오전부터 오후까지 만남과 대화를 가졌다. 감사하게도 흔쾌히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말씀해 주셨고 양보할 것들은 과감히 내려놓아 주셨다.

일이라는 것이 그렇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면 좋겠지만 사람이 모여 하는 일들이라 자신에게 맞지 않는 학년과 일들이 주어질 수 있다. 때로는 속상함을 말씀해 주시기도 하지만 다 이해가 된다. 사람마다 생각과 특성이 다양하기에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요구할 수 있다. 교감이 해야 할 역할은 선생님들의 의견을 꾹 참고 경청하는 일이다. 무슨 말씀이든 들어 드리는 일이다. 그리고 나중에 학교의 여러 가지 상황을 말씀드리고 양해를 구한다. 웬만하면 모두 인격적인 분들이라 수용해 주신다. 우리 선생님들이 최고다.

퇴근 뒤 저녁 시간에 짬을 내어 서재에 꽂혀 있는 『꽃들에게 희망을』을 펼쳐보면 나는 과연 '학교에게 희망을'을 안겨드리는 교감인지, '선생님들에게 희망'으로 다가가는 교감인지 생각하게 된다. 뭔지 모르고 남들이 모두 꼭대기로 올라가니까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정상을 향해 가는 애벌레들의 여정을 보며 혹시나 나도 나만의 개인적 욕심을 이루기 위해 주변을 돌아보기보다 정상만을 보고 향해가고 있지 않는지 돌아본다.

이제는 주변을 돌아볼 때다. 선생님과 교직원들에게 품을 내어 드려야 할 위치다.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조심조심 내려가야 할 때다. 목에 힘줄 나이가 아니다. 다음 주면 나도 새로운 학교, 새로운 교직원을 만나며 인사를 드려야 한다. 그쪽 학교에 가서 학년 조정, 업무 분장을 위한 회의를 진행해야 한다.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는 것이 힘들지만 참 재미있다. 보람이 있다. 사람을 더 잘 알아가게 된다. 교감이니까 많은 교직원들을 만날 수 있다. 참 좋다. 교감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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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렁크 (리마스터판)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김려령 지음 / 창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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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으로 생긴 여러 다른 모양의 삶을 비난하거나 정죄하고 싶지 않다. 단편적인 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기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여러 요소로 얽혀 있다. 

트렁크 안에 모두 담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트렁크 안에 불편한 것들을 담아 눈앞에 치워버린들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트렁크 안 내용물들을 조금씩 정리해 갈 수 있는 용기와 위로와 안정이 우리의 내면에 가득 채워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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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 (반양장) - 제13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96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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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의 문제는 미안함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합병증처럼 번진다는 데에 있다. 자괴감, 자책감, 우울감, 나를 방어하기 위한 무의식은 나 자신에 대한 분노를 금세 타인에 대한 분노로 옮겨 가게 했다" _247쪽

권위와 권위적인 것이 엄연히 다르듯이 죄와 죄책감은 구분되어야 한다. 양심이나 도리에 어긋난 행위, 잘못이나 허물로 인하여 벌을 받을 만한 일을 죄라고 한다면 죄책감은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는 마음이다.

『유원』 소설 속 주인공 유원은 저지른 잘못이 없는 아이였다. 단지 화재 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는 과정에서 발생한 결과로 인해 오랫동안 미안함과 자책감, 자신을 도와준 이들에 대한 분노를 느낄 뿐이다. 문제는 그 죄책감이 합병증을 동반하여 민감한 시기에 더욱더 목을 죄는 것처럼 옭아맨다는 사실이다.

죄책감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유대감을 든든했던 가족의 상실이 가장 큰 이유가 될 수 있다. 마치 자신 때문에 모든 결과가 일어난 것처럼 스스로를 자책하고 극심한 우울감에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 소설 속 유원이네 가족도 마찬가지다. 혼자 살아남은 유원이라도 잘 키워야겠다는 심정으로 부모는 모든 시름을 이겨낼 대상으로 유원으로 삼고 유원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각오로 살아간다.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결국 사고에 대한 원인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곁에서 도와주는 이들이 있어야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죄책감의 사실 유무를 떠나 감정을 그대로 받아주는 든든한 지지자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주변의 많은 청소년들이 가족 안에서 겪는 여러 가지 상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학교도 이런 문제에 대해 다양한 각도로 종합적으로 지원하지만 결국은 문제의 원인과 자신은 별개라는 것을 스스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작가는 젊음에도 불구하고 상실의 아픔이 죄책감으로 자리 잡고 삶 전체를 움직이고 있는 청소년의 심리를 예리하게 분석하고 해결점까지 제시하고 있는 점이 혀를 두르게 할 만큼 작품성이 돋보인다. 작품의 깊이는 결코 나이와 비례하는 것이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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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어 어른을 위한 동화 2
안도현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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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오래된 책을 폈다.

문학동네에서 1996년에 발간한 책인데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은 2003년에 인쇄된 제2판이다. 20년도 더 된 책이다. 세월 따라 종이도 빛바래질 터인데 아직도 멀쩡하다. 인쇄된 글자는 요즘 책 보다 크기가 작은 편이다. 마치 신간을 펴듯이 설레는 마음으로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다 보니 어느새 뚝딱 읽어버렸다.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쓰여 있다. 맞는 말이다. 어른일수록 동화와 친숙해져야 한다.

안도현 작가는 우리에게 익숙한 대상으로 글을 맛깔스럽게 잘 쓰셨던 것 같다. 이번 책 연어도 마찬가지다. 강물을 힘차게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를 우리의 인생에 빗대어 의미를 잘 전달한 것 같다. 인생의 의미가 뭐냐고 많이들 묻고 생각한다. 연어에게 인생은 알을 낳는 일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터인데 작가는 더 깊숙이 들어간다. 알을 낳는 행위보다 알을 낳기 위해 바다를 지나 강물로 회귀하는 과정, 알을 낳기 위해 목숨을 건 움직임이 인생의 참 의미라고 이야기한다.

더불어 연어를 품고 있는 강물 또한 연어의 인생을 더 값지게 하는 배경과도 같은 존재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누구든지 주인공으로 살고 싶지만 주인공이 있기까지는 누군가는 그의 뒷바라지, 배경이 되어주어야 한다. 연어가 다시 연어로 태어나기까지 그들의 알을 품어주고 자라게 해 주는 강물이 진정한 의미에서 참 인생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연어나 강물이나 공통점은 모두 잊히는 존재라는 점이다. 흘러가야 새로운 물이 흐르고 죽어야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듯이 잊히지 않는 존재는 새로움을 잉태할 수 없음을 자연을 통해 깨닫게 된다. 울긋불긋 예쁜 단풍도 잊혀야 새로운 잎이 태어나듯이 말이다. 인생은 영원하지 않다. 지금 살아가는 이 순간도 흐르는 물처럼 지나가지만 그래야지만 새로운 시간을 맞이할 수 있는 것처럼 흘러가는 세월을 붙잡을 수 없다고 아쉬워하기보다 새로움을 위한 물러섬에 익숙해져야 할 때를 잊지 말아야겠다.

오래된 책은 숙성된 발효식품처럼 읽기만 해도 인생의 진한 향기가 전해온다. 갓 담은 김치도 신선한 맛이 일품이지만 오래된 김치일수록 진한 국물을 우려낼 수 있다. 오래된 책이 그렇다. 진한 인생을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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