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류시화 지음 / 더숲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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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급함은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조급함은 후회의 지름길이다. 편견은 관계를 단절시키고 비판은 대화를 중단시킨다. 교감으로 산다는 것은 욕 얻어먹는다고 생각해야 편하다. 완벽한 사람이 없듯이 일개의 교감 한 사람이 학교의 수많은 일들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에는 실수가 있고 과오로 남는 일이 부지기수다. 수학 공식처럼 딱 떨어지는 문제라 할지라도 공식에 문제 삼는 경우가 사람 사는 세상에 비일비재하다.

잘 마무리된 것 같은 학부모 민원도 다음날이 되면 억울하다고 경직된 얼굴로 찾아오는 다른 편의 학부모가 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부분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한다. 학교가 잘 대책을 세우라고 한다. 정답이 없는 문제를 던진다. 그렇다고 해서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이번에는 학교를 상대로 문제를 제기할 판이다. 원론적인 답변을 하는 선에서 마무리를 하지만 대화의 대부분은 속상한 점을 다독거리며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라는 말처럼 우리 어른들이 한 발자국씩 멀찍이서 기다려는 주는 마음을 갖자는 식으로 위로의 말을 건넨다.

학기가 시작되고 네 번째 민원 접수다. 해답이 없는 민원이다. 화가 난 감정을 받아주는 것이 전부이고 학교로써는 좀 더 관심을 가지겠다는 말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이다. 사실 이런 말을 해 주고 싶다.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류시화 시인의 말처럼 삶은 설명을 듣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고 외부 상황에 대한 지나친 해석으로 내면의 전투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일은 인간 심리의 흔한 측면이다. 축복 blessing이라는 말은 프랑스어 '상처 입다 blesser '와 어원이 같다고 한다. 축복을 셀 때 상처를 빼고 세지 말아야 할 이유다. 파도가 후려친다는 것은 새로운 삶을 살 때라는 뜻이며 시도와 모험을 가로막는 것을 제거해야만 낡은 삶을 뒤엎을 수 있다. 교감으로 산다는 것도 편안한 삶을 살겠다는 생각은 애당초 갖지 말아야 한다. 교감의 삶이 상투화된다는 것은 자신을 절벽으로 밀어내는 것과 동일하다.

무엇을 보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보는가, 무엇을 듣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듣는가, 무엇을 느끼는가 아니라 어떻게 느끼는가가 교감의 삶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단단하게, 노련하게.

나는 교감의 일상을 매일 글로 남기고 있다. 마라톤 선수가 달리기가 쉬워서 달리는 것이 아니듯 글쓰기가 쉬워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계속 글을 쓰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글을 잘 써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계속 글을 쓰기 때문에 쓰게 된다.

교감으로 사는 삶이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알겠는가. 나 자신도 모를 때가 많다. 힘든 순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날도 있다. 좋은지 나쁜지 판단하기보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내려고 노력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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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망으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 일기 쓰는 세 여자의 오늘을 자세히 사랑하는 법
천선란.윤혜은.윤소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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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삶을 공개한다는 것은 무척 큰 용기가 필요하다. 남녀의 차이가 없겠지만 섬세하고 좀 더 개인 사생활을 보장받고 싶은 쪽은 여자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작가의 삶을 살고 있고 편집자의 삶을 살고 있는 공통점을 소유한 세 사람이 '일기'라는 공통분모로 함께 자신의 삶을 오픈한다는 것이 참신한 아이디어인 것 같다. 일기를 공유하고 삶을 나누는 사이라... 팟개스트는 나에게 친근한 채널은 아니지만 이미 '일기떨기'라는 방송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그들이 책으로도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태세다.  

 

힘들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젊은 독자들에게 위안이 되는 글들을 넌지시 던지고 있다. 글을 쓴 이들은 자신의 삶을 수다 떨듯이 내뱉은 말들이라고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공감으로, 위로로, 도전으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싶다. 나도 저자들처럼 일기를 공개하고 있지만 최소한의 방어막을 치고 있다. 누군가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는 내용은 숨기거나 멀찍이 돌아서 쓴다. 그나마 공개된 곳에 글을 쓴다는 나름의 용기를 스스로 자랑하고 있지만 이 책의 저자들만큼은 과감성이 떨어진다. 

 

최근 일기로 글감으로 하는 책들이 쏠쏠하게 눈에 띈다. 김난희 작가의 스타벅스 일기로 비슷한 유형의 책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역사에서 일기는 글의 단골 소재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순신의 난중일기, 조선 왕들의 은밀한 일기라 할 수 있는 승정원일기 등 일기는 극히 개인적인 글이지만 동시에 많은 독자들에게 관심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교사 시절 학급을 운영하면서 학급 일기를 함께 쓰도록 한 적이 있다. 한 권의 공책을 준비해서 학급이라는 공통 주제로 모든 아이들이 자유롭게 돌아가면서 쓰는 일기를 추구한 적이 있다. 지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지만 학급 일기를 통해 나름 공통분모를 만들고 학급 공동체를 만들어갔던 추억이 있다. 

 

우리도 저자들처럼 자신과 비슷한 취미를 가지고 있는 분들과 함께 일기 형식을 빌려와 함께 나눔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수다 떨듯이 일기를 함께 써 내려가면 나름의 힐링 포인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숨 막힐 정도로 폐쇄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 시대에 일기로 생각과 삶을 공유한다는 것은 아마도 혁신적인 아이디어일 것 같다. 일기를 함께 공유할 친구를 찾아보면 의외로 많지 않을까? 나처럼 교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도 교감의 생활을 글로 적고 공유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함께 친구를 맺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다 보면 생각지도 못하는 성장을 맛볼 수 있을 것 같다.  

 

책 제목처럼 엉망이지만 열심히 살고 있는 부분들을 서로 격려하고 응원하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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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벅스 일기
권남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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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쓰기의 새로운 지평을 연 권남희 작가. 일기를 이렇게 재미나게도 쓸 수 있구나. 매일 똑같은 하루의 일상을 매일 새롭게 맞이하듯이 써 내려간 일기를 보면 큰 도전을 받는다. 올해 3월부터 블로그에 일기를 쓰고 있다. 매일 말이다. 그런데 말이 매일이지 단조로운 직장 생활에서 꾸준히 써 내려간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터의 반경도 제한되어 있다. 변화보다는 늘 변함없는 일터의 공간이다. 가끔 민원, 학교폭력, 선생님들의 생각지 못한 돌출 행동들이 일어나지만 자주 있는 일도 아니다. 머리를 쥐어짜면서 글을 쓰다 보니 글 자체가 매우 무미건조하다. 재미난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권남희 작가의 일기글은 상상을 초월한다. 어떻게 단조로운 움직임 속에서도 풍부한 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책을 번역하는 일, 치매 걸린 어머님을 찾아가는 일, 가끔 딸과 통화하고 여행 가는 일 외에는 그다지 다채로운 일상이 그려지지 않는다. 그녀의 일터도 고정적이다. 스타벅스. 같은 장소에 거의 일정한 시각에 출근하듯이 방문하는 스타벅스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그녀는 아무것도 새로울 것 없는 일상의 삶을 변화무쌍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처럼 풀어낸다. 그녀의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젊은이들의 취향에 맞는 스타벅스 음료 메뉴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스타벅스 음료들을 그녀는 매일 별스티커를 모으는 재미로 신제품을 비롯한 특별한 메뉴들을 과감 없이 선택해서 맛을 본다. 아니 맛을 감상한다. 사실 음료를 마시기 위해 스타벅스를 가기보다는 일을 하기 위해 간 것인데 언젠가부터는 새로운 메뉴를 고르는 재미로 스타벅스를 찾는 사람이 되었다. 일기의 시작도 초보자들을 위해서 스타벅스 음료의 종류들을 제안하듯이 쓰고 있다.  

 

스타벅스에서 만나는 이름 모를 사람들의 동태와 이야기들을 듣고 일기로 옮겨 쓴다. 기록자가 아니라 그날 들은 인상적인 사람의 모습이나 이야기들을 주관적인 판단 아래 기억에 오랫동안 남는 부분들을 작가의 시선으로 기록한다. 스타벅스 일기의 주제는 대부분 스타벅스에서 만난 사람들이며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 이야기들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만 잘 관찰하더라도 글 한 편 뚝딱 지을 수 있나 보다. 사람들의 이야기만 잘 경청하더라도 하루하루 일기 소재거리를 찾을 수 있나 보다. 글이라는 것은 결국 사람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사람 곁에서 사람을 주의 깊게 바라보면 글이 써지고 만들어진다.  

 

나도 매일 일기 쓰는 일을 억지로 하지 말아야겠다. 쓸 거리가 없다고 맥 빠지 말아야겠다. 쓸 거리는 주변에 널렸다. 일터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만 잘 관찰하더라도 그게 글이다.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만 잘 듣고 메모해 두면 그게 문장이 되고 일기가 된다. 나는 권남희 작가와는 다르게 스타벅스 음료들을 소개하지 않고 내가 읽었던 책들을 그날의 일기 주제와 연관 지어 소개한다. 나만의 일기의 특징이다.  

남의 일기를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별한 일기를 읽을 수 있어 좋았다. 일기의 새로운 면을 볼 수 있어 참 많은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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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을유세계문학전집 105
알베르 카뮈 지음, 김진하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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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뫼르소는 끝내 사형 선고를 받는다. 끔찍한 단두대를 연상할 정도로 죽음의 목전에 이른 그는 감옥 안에서 자신의 최후를 머릿속에 그린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습관은 감옥 생활에서 기인한다. 감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단순하다. 활동 반경도 제한적이다. 자유가 엄격히 제한된 곳에서 그나마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만큼 자유로운 일은 없다. 엎어지면 코 닿은 비좁은 감옥이지만 생각의 나래를 펴면 반나절을 움직일 수 있다. 평소에는 그냥 지나칠 사소한 사물도 감옥 생활 안에서는 현미경으로 바라보듯 아주 촘촘히 생각해 낼 수 있다. 그래야만 감옥 생활을 버틸 수 있다. 

 

뫼르소의 사형 선고는 억울한 면이 많다. 고의적인 살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방인이기에 법정에서의 판정도 불리할 수밖에 없다. 그가 어울렸던 이들 모두 이방인이다. 실질적인 외국인이다. 프랑스 국적으로 살아가지만 옛 식민지 알제리가 고향이라는 이유만으로 파리지앵이 될 수 없었다. 피부색으로 억양으로 살아가는 방식으로 차별을 받아야 하는 이방인들은 결국 자신의 생사를 결정지을 법정에서도 소외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임을 그는 알았다. 결국 항소를 포기하고 만다. 

 

저자 알베르 카뮈도 알제리 출신의 이방인이었다. 그도 프랑스에서 살면서 뫼르소와 같은 소외를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법정에서 검사는 온갖 이유를 들이대며 뫼르소의 살인을 극악무도한 범죄로 몰아세운다. 심지어 그의 어머니의 죽음까지도 그의 성품과 행동에서 기인했다고 둘러댄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마치 가난한 사람들은 못 배운 사람들이라는 등식으로 연결 지어 그들의 행동마저도 불순하게 바라보는 시각이 없지 않다. 이방인이라고 모두 범죄 유발자가 아닐진대 본토 프랑스의 가진 자들은 그들을 악의 축이라는 편견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았나 싶다.

 

출신지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하나의 행동을 보고 사람 전체를 평가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오늘날 이방인은 소외받는 자들이 아닐까. 가난한 자, 병든 자, 실직자, 외국인 노동자, 독거노인, 힘 약한 어린이와 여자들. 이방인을 품는 사회적 분위기, 법 앞에는 누구나 소명 기회를 평등하게 가질 수 있는 법 체계가 정의가 구현된 사회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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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 을유세계문학전집 64
샬럿 브론테 지음, 조애리 옮김 / 을유문화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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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나이로 해봤자 열아홉 아가씨임에도 그녀의 생각과 행동은 참 사려 깊다. 본인도 부모를 잃고 고아와 다름없이 자라 눈칫밥 먹으며 친척집에 전전긍긍하다가 쫓겨나다시피 한 기숙학교에서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고 수료 후 다시 기숙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청소년 시기를 보낸다. 그뿐인가. 조금 더 대우가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가정집 교사로 자청해서 들어간 뒤 성실성과 선함을 인정받지만 이룰 수 없는 사랑임을 알고 자진해서 포기한다. 그리고 다시 거지와 다를 바 없는 행인으로 돌아다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가까스로 만난 먼 친척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이어간다. 

 

여기까지만 하더라도 그녀의 삶은 기구한 운명일 수밖에 없구나라고 독자들이 생각할 수 있겠다. 반전의 장면이 등장하는 곳은 이야기의 중반 이후부터다. 제인 에어의 먼 친척이 2만 파운드가 되는 거금을 그녀 이름으로 상속하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자 그녀는 졸지에 거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지만 그것마저도 자신이 걸인이었을 때 목숨을 구해 준 사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고 자신은 5천 파운드만 받게 된다. 순탄하게 인생이 진행되겠거니 하지만 사촌 오빠의 끈질긴 구애로 잠시 마음이 흔들리긴 하지만 십 대 후반의 제인 에어는 나이에 맞지 않는 명확한 판단력으로 이 또한 거절하고 정처 없는 곳으로 다시 발길을 옮긴다.  

 

이야기의 결론은 다행스럽게도 해피 엔딩으로 마쳐지기에 한숨을 돌린다. 한때 가정집 교사로 들어간 곳에서 그 집주인과 열애를 했던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하며 수소문 끝에 사랑했던 이의 거처를 알게 되고 불의의 사고로 시력을 잃고 장애를 입은 옛 정인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며 사랑의 결실을 맺는다.  

 

700여 쪽의 상당한 분량의 스토리에다가 영국을 배경으로 한 19세기의 정서가 묻어 있는 소설임을 감안하고 읽더라도 오늘날 독자들에게 감동과 도전을 주는 지점은 아마도 자본주의와 외모 지상주의를 최고의 우선 가치로 삼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삶을 살아가는 제인 에어의 삶이 양심에 경종을 울려주고 있지 않나 싶다. 십 대 후반의 아가씨가 냉철하게 시대의 흐름을 좇지 않고 자신의 삶의 가치를 고수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이를 떠나 그녀가 고생한 삶의 흔적에서 얻어낸 결과의 반응이라고 본다.  

 

상황에 손바닥 뒤집히듯이 자신의 가치관을 내팽개치는 사람들과 달리 자신이 옳다고 여겨지는 가치를 오랜 시간 동안 숙련의 시간을 통해 단련한 뒤 시험과 유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결단하는 의지를 제인 에어를 통해 보게 된다.  

 

고전은 한 인물을 통해 변하지 않아야 할 가치를 독자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준다. 

고전은 본질을 잃어버린 종교에 대해서도 실날하게 비판하며 종교 본연의 기능을 되돌아보게 해 준다.

고전은 사람 내면의 다양한 감정과 갈등들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을 이해하도록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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