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살을 통해 동물은 부재 지시 대상이 된다. 동물의 이름과 신체는 고기로 존재하는 동물에게는 부재하는 무엇이다 ...(중략)... 동물이라는 이름은 소비자가 고기를 먹기 전에 죽은 동물의 신체에 다시 이름을 부여하는 언어, 곧 각 부위별 명칭에는 부재하는 무엇이다. (p104)



이 책을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 기억에 되살려지는 것은, 여성에 대한 성폭력과 육식에 대한 폭력성을 대비하기에 앞서 내가 스쳐 지나쳤던 동물에 대한 기억이 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해체되기 전의 동물, 그리고 해체된 동물, 어쩌면 해체되었을 것 같은 동물.


어릴 때 키우던 개를 생각한다. 이름이 에스였지. 짧은 흰털을 가진 잡종견이었는데 영민한 녀석이었다. 답답할 때 가끔 집을 뛰쳐나갔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제 집을 찾아 돌아오고 우리가 들어가면 야단스럽지 않은 모양새로 컹컹 거리며 다가오던 개였다. 나는 지금이나 예전이나 동물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어서 아주 살갑게 대하진 않았지만, 동물이라든가 반려견이라든가 얘길 하게 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걸 보면 어릴 때 추억과 결부하여 내게 꽤 깊숙이 박혀 있는 모양이다. 그렇게 잘 지내다가 어느날 집을 나간 에스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 때 엄마가 불쑥 말씀하셨다. "어디 개장수한테 잡혀갔나보다... 에스가 우리집에 다시 안 올리가 없는데.." 그 때 내 머릿속에는 개장수라는 것과 보신탕이 바로 연결되진 않았다. 어린 마음에 개장수가 우리 에스를 잡아가서 어떻게 했을까 죽였을까 라고만 생각하고 안타까와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개장수가 데려갔다면... 버~얼써 어느 사람의 뱃속에 들어갔겠다 싶다. (으악) 내 옆에 있던 개가 누군가에게 잡혀가서 죽임을 당하고 나누어져 누군가의 뱃속으로 들어갔을 거란 생각 자체가 뭐랄까. 그냥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되고야 만다. 


그리고 나서 우리집에 새로 들어온 개는 돌이였다. 이름 한번 촌스럽게 지었다 싶지만, 이 개는 긴 갈색털이 산지사방으로 자란 그냥 잡종견이었다. 영민하지도 않았고 그냥 얌전하기만 했다. 어디 뛰쳐나가는 법도 없었고, 그 자리에서 맴맴 돌기만 하는 녀석이었다. 내 동생이 꽤나 예뻐해서 엄마가 너무 돌보기 힘들다고 작은 아빠 집에 보내버렸을 때 울고 불고 하여 다시 데려온 기억도 있다. 돌이는, 우리가 아파트로 이사를 오면서 같이 못 가게 되어 지나가던 개장수에게 팔려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잡종견이고 집에 들여 키우기도 힘든 개라 아무리 찾아도 누가 받아가겠다는 사람이 없어 결심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날 그렇게 팔려가던 돌이는, 철제 케이스에 갇혀 바깥으로 주둥이를 내민 채 우릴 쳐다보던 그 눈길을 잊을 수 없다. 슬프다고만 딱 잘라 얘기할 수 없던 그 눈빛. 알고 있었던 거지. 헤어짐과 자신의 (먹힐) 운명을. 어쩌면 내 감정이 이입되어서 더 그렇게 느꼈는 지도 모른다.... 아뭏든,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생각나는 장면이다.


누구나, 이런 기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지 않을까. 개든, 소든, 돼지든... 닭이든... 동물은 살아 숨쉬고 뛰어다니고 내 곁에 와서 몸을 부벼댈 수 있는 뜨거운 피를 가진 생명체인데 그것이 고기로 전락되는 순간, 원래의 그것은 사라진다. 내가 이 책이 정말 고마운 것은, 잊고 싶었거나 몰랐거나 그냥 지나쳤던 그 '생명과 고기 사이의' 과정을 명확히 인지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동물과 인간은 똑같이 고통을 받으며 죽는다. 당신이 자기가 기른 돼지를 잡아 먹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죽여야 했으면, 십중팔구 당신은 돼지를 죽이지 못한다. 돼지 멱따는 소리 듣기, 솟구쳐 흘러내리는 붉은 피 지켜보기, 이 광경이 무서워 엄마 뒤로 숨어버리는 아이 바라보기, 동물의 눈에서 죽음의 그림자 보기 등은 당신의 속을 뒤집어 놓는다. 그래서 당신은 돼지를 대신 잡아줄 사람을 고용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게토가 지저분하다고 비웃는 부유한 귀족들이 그 고통에 찬 비명을 들었으면, 배고픔에 서서히 죽어가는 어린아이들을 봤으면, 사람들의 사나이다움과 위엄이 교살되는 장면을 목격했으면, 살인을 계속 저지를 수 없었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들은 이런 공포를 겪을 기회가 없다... 만약 당신이 고기를 먹기 위한 동물 살해를 정당화할 수 있다면, 당신은 게토의 이런 실상도 정당화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어느 쪽도 정당화할 수 없다. (Gregory 1968, 69~70) (p110) 



그래서, 이런 구절, 조금 과하게 비교한다 싶은 이런 구절도 어느 면에선 마음에 와닿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이 책을 읽고 과연 채식주의가 될 것인가, 육식을 줄이게 될 것인가는 자신할 수 없지만, 계속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은 분명해보인다. 동물에만 그치는 내용이 아니라 그 하나하나가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억압과 해체와 소비에 대응된다는 것으로 말미암아 더 기억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고기는 늘 권력을 쥔 자가 먹었다. 유럽의 귀족 사회는 온갖 고기로 가득한 음식을 소비한 만면 노동자들은 합성 탄수화물을 소비했다. 식습관은 계급 구분을 명확히 해주며 가부장제에 기초한 구분도 확실히 한다. 2류 시민인 여성이 먹는 음식, 그러니까 채소, 과일, 곡식 등은 가부장제 문화에서 2류 식품으로 여겨진다. 육식에서 드러나는 성차별은 형식은 다르지만 계급 차별로 되풀이된다. 고기는 남자의 음식이고 육식은 남성적 행동이라는 신화가 모든 계급에 스며들어 있다. (p98)


따라서 동물권 옹호자들도 동물에게 가해지는 억압과 폭력을 묘사하기 위해 은유적으로 여성에게 적용되는 '성폭행rape'이라는 단어를 쓸 때는 주의해야 한다. 다시 말해 성폭행이라는 단어를 은유적으로 동물에 적용할 때, 우리 문화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폭행의 사회적 맥락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이런 선결 조건 없이 단지 동물 억압을 설명하려고 여성 성폭행이라는 단어에 의존하고 마는 은유적 차용은, 결국 가부장제의 근원적 폭력에 맞서지도 못할 뿐 아니라 동물 억압과 여성 억압이 서로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도 못한다. 우리의 목적은 정신과 육체를 분리하는 폭력에 맞선 저항이자 부재 지시 대상을 만들어내는 가부장제 구조의 제거다. (p139)




오늘은 여기까지. 


아직 절반 좀 넘게 읽긴 했어도, 이 책, 좋다. 내 행동에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겠고 (자신은 못하겠지만, 내 일부는 변하리라 본다) 그 전에 내 인식의 지평을 좀 더 넓혀 주는 책이다. 아울러 이 책을 읽으면서 보관함에 푱푱 담은 책들..은...아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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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리 2021-01-14 16:2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돼지고기 찌개감을 500g 사다가 김치, 청국장 끓여서
돼지고기가 아니면 이게 이렇게 맛있겠냐 같은 생각이 지금도 진심으로 들지만
이러던 것도 ˝그땐 그랬지˝ 하게 될 거 같기도 해요. 육식에 대한 관점이 결정적으로 바뀌는 때가
오고 말 거 같은.

한편 그래서 불안하기도.. ㅎㅎㅎㅎㅎㅎ
돼지고기 찌개 먹고 싶은데 아직은요.

붕붕툐툐 2021-01-14 16:35   좋아요 3 | URL
돼지고기가 아니면 이렇게 맛있겠냐에서 공감을 안할 수가 없네요~ㅋㅋㅋㅋㅋ

비연 2021-01-14 20:26   좋아요 1 | URL
아.. 정말 딜레마에요. ㅜㅜ 돼지고기 찌개라고 하니 뭔가 확 당기는..
근데 <육식의 성정치>가 절 쳐다보고 있고..
관점이 결정적으로(!) 바뀌게 될 때 다른 선택이 가능하지 않을까... 라고 위안.. (먼산;;)

붕붕툐툐 2021-01-14 16: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현대사회는 푸른 풀밭에서 뛰어놀던(실제야 어쨌든) 소, 돼지, 닭이 어떻게 우리 식탁에 오르는지 그 과정을 지우려고 무척 애쓰고 있죠.. 아는 분 딸이 어린 시절 시골에서 닭 잡는 모습을 보고, ˝꼬꼬 불쌍해..... 맛있겠다.˝ 했다는 얘기가 떠오르네요..

비연 2021-01-14 20:27   좋아요 1 | URL
푸하하. 불쌍해.. 에 이어 맛있겠다..가 나와서 빵터짐... ^^
어쩌면 우리가 잊고 있는 과정들이, 그러니까 의식 속에서 생략된 과정들이 너무나 많은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 책 읽는 내내 제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다시금 회의하게 되는...

청아 2021-01-14 17: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애덤스 책 읽고 ‘프랑켄슈타인‘ 다시 보게됐어요! 여성작가의 소설인줄도 몰랐구요.저도 푱푱 담아갑니다 ㅋㅋ

다락방 2021-01-14 17:26   좋아요 4 | URL
프랑켄슈타인은 진짜 엄청 재미있어요, 미미님! 제가 그걸 2017년엔가 읽었는데, 그 해 읽은 최고의 소설이라고 페이퍼 썼던 기억이 납니다. ㅎㅎ

청아 2021-01-14 17:36   좋아요 2 | URL
어머 페이퍼 찾았음요! 1년에 한권 읽을 수 있음 이 책이라니 저 또 조급해집니다!!

다락방 2021-01-14 17:43   좋아요 3 | URL
아니, 찾아보실거라 생각했다면 제가 링크 드릴걸 그랬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미님이 프랑켄슈타인 읽으시면 어떤 감상을 들려주실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꺅 >.<

비연 2021-01-14 20:28   좋아요 2 | URL
저도 예전에 다락방님이 쓰신 <프랑켄슈타인> 관련 글, 기억나요...
한번 읽어봐야지 할 정도로 뽐뿌질 막 느끼게 하는 페이퍼였는데^^

미미님. 푱푱~ 자꾸 하시면..ㅋㅋㅋ 어느 새 보관함이 그득... 자꾸만 사게 되는 스스로를 발견... 흠냐.

다락방 2021-01-14 17: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밑줄 그은게 겹치네요, 비연님. 아마도 겹칠 수밖에 없을 것 같긴 하지만 말예요.
언급하신 것처럼 내 인식의 지평을 좀 더 넓혀주는 책이라서 읽기에 신나고 흥분되는가 봅니다. 업튼 싱클레어의 정글은 절판이라 번역본을 구할 수가 없어 아쉬워요 ㅠㅠ

비연 2021-01-14 20:30   좋아요 1 | URL
아 그런가요? ㅎㅎ 비슷한 데가 좋았던 모양이네요.

<정글>은 번역본을 구할 수 없길래.. 세상에. 이 책은 왜 절판이 된 것이야..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원서를 보관함에 담긴 했는데.. 그냥 번역본이 다시 나와주십사.. 하는 게 솔직한 심정 ㅜ

han22598 2021-01-14 22: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엉뚱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잡아먹을 동물을 짐승이라고 따로 구별해서 이름을 붙였나 봅니다. 슬픈 이름 짐승 ㅠ

비연 2021-01-15 01:55   좋아요 1 | URL
짐승.. 그럴 수도. 그런 짐승이란 단어가 인간에게 적용될 때는 반대 입장이 되는 게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syo 2021-01-15 00: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멍뭉이 이야기만 나오면 높아지는 나의 집중력.....

비연 2021-01-15 01:48   좋아요 1 | URL
역시나 멍뭉 하면 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