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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태엽 오렌지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2
앤소니 버제스 지음, 박시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4월
평점 :
부지런하게, 읽었던 모든 책에 대한 감상문을 적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소위 리뷰라는 걸 쓰기 시작한 지는 나름 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최근 한 가지 변화가 생겼습니다. 원래는 모든 감상문들을 반말(?)로 쓰다가, 얼마 전부터 이렇게 존댓말(?)로 영화를 본 후의 감상을 적어봤는데 그게 굉장히 마음이 편한 겁니다. 반말로 쓰다 보면 왠지 제가 되게 잘난체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스스로도 약간 거북할 때가 있었는데, 존댓말로 써보니까 반대의 느낌을 갖게 됐습니다. 겸손해지는 기분이랄까, 잘 모르면 모르는 대로 내가 느낀 건 느낀 대로 더 솔직한 감상이 써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독서감상문도 겸손하게 적어볼까 합니다. 그 동안은 뭘 쓰던지 그럴 듯해 보이게 멋있게 쓰고 싶은 헛된 욕심 때문에 책을 읽기만 하고 그 감상을 글로 쓰지는 않은 경우가, 게으름 때문에 못 쓴 경우 다음으로 많았습니다. 이제는 짧게라도, 멋있지 않게라도, 꼭 책을 덮은 후에는 이렇게 글로 남겨보겠습니다(낡은 결심이라 여전히 자신은 없습니다만).
저는 부끄럽지만 무언가를 사는 것으로 적지 않은 기쁨을 느끼는 자본주의 노예의 전형입니다. 그 중에서도 책을 사는 것은 언제나 기분이 좋습니다. 집에 읽지 않은 책이 가득 쌓여있어도 큰 죄책감 없이 새로 나온 책이나 읽고 싶었던 책이나 혹은 이벤트 중인 책을 삽니다. 그래서 집에서도 한 권의 책을 다 읽고 나면 다음에는 무슨 책을 읽을까 고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과거에는 반드시 한 권의 책을 다 읽은 후에 새로운 책을 시작했지만 지금은 여러 책을 동시에 읽기도 합니다. 출퇴근할 때 갖고 다니는 책으로는 너무 무겁거나 두꺼운 양장은 가급적 피하고 주로 집에서 그런 책을 읽습니다. 기차를 타고 고향에 갈 때는 가면서 다 읽어서 고향집에 책을 두고 올 수 있을 정도의 분량이 남아 있는 책을 들고 가거나 아예 돌아올 때까지 읽을 만큼 분량이 넉넉하게 남아 있는 책을 고르는 식입니다.
[시계태엽오렌지]를 사둔 게 얼마나 된 일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참 동안을 고향집 책장에 꽂혀 있었습니다. 지난 연말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러 집에 가서 작은 서점에 온 기분으로 읽을 책을 골랐는데, 그게 시계태엽오렌지였습니다.
고전들이 대개 그렇듯이 뒷표지에는 유명한 사람들의 찬사가 가득합니다. 기대를 안고 책을 읽기 시작하고는 살짝 놀랐습니다. 생각보다 우리의 주인공이 너무 거칠고 사악하더군요. 너무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을 괴롭히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앤서니 버지스가 당시 영국 십대들의 비속어들을 모아 스스로 고안해낸 nadsat이라는 언어라고 설명돼 있네요) 말을 뱉고 있었습니다. 흔히 이 작품과 함께 언급되는 호밀밭의 파수꾼이나 조지 오웰 작품 속 등장 인물들과도 사뭇 달랐습니다. 샐린저나 오웰의 작품 속 인물들은 반항하는 모습도 왠지 우아하게 느껴지는 측면이 있다고나 할까요, 반면 알렉스는 그야말로 못돼 (쳐)먹은 데다가 유치하기까지 합니다. 대개는 독자가 자신도 모르게 주인공의 심정을 이해하고 그의 편에 서게 되지만 시계태엽오렌지를 읽을 때는 차마 그러지 못합니다. 일단, 알렉스는 전혀 멋있지가 않으니까요! 클래식을 좋아하는 취향마저도 그를 더욱 사악하게 보이게 할 뿐, 전혀 우아하지가 않습니다.
전혀 멋있지도 않고 그다지 철학도 없어 보이는(물론 초반에도 선과 악에 대한 생각을 여러 차례여 걸쳐서 피력하기는 합니다만) 알렉스의 인생은, 아마 그렇기 때문에 꼬이기 시작합니다. 대부분의 영화나 소설에서 원래 이런 깡패조직(?)의 보스는 그래도 그만한 카리스마와 멋있는 점이 있어서 부하들이 적어도 그가 힘이 빠지기 전까지는 목숨 바쳐 보필하곤 하는데, 알렉스는 스스로가 보스라고 믿는 그 작은 패거리 안에서도 신임을 잃고 미움을 삽니다. 그래서 그 불행한 감옥살이를 시작하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이 책의 1부입니다.
2부는 알렉스가 감옥에서 보낸 한 철을 다룹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루도비코 치료를 자진해서 받게 됩니다. 좋아하는 클래식도 마음껏 들을 수 없고 나쁜 짓도 마음껏 할 수 없어서 갑갑한 알렉스는 감형에 혹해서 루도비코 치료의 마루타가 되기로 합니다. 이 치료법은 일반적인 교화와는 달리 나쁜 생각을 하거나 나쁜 짓을 보게 되면 구역질이 나거나 몸에 고통을 느끼도록 하는 일종의 세뇌입니다. 알렉스는 선해진 것이 아니라, 마치 종소리만 울려도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길들여진 겁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알렉스의 루도비코 치료를 반대하는 유일한 사람은 신부입니다. 세상의 신부님들이 으레 그렇듯, 인간은 원래 선하다고 생각하고 또 선함이 내재돼 있다고 믿고 싶어합니다. 영악한 알렉스는 이런 신부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는지를 압니다. 듣고 싶은 음악도 실컷 듣고 말입니다. 알렉스가 원래는 선하다고 신부님은 속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결국 그의 믿음이 일부는 맞는 것도 같습니다. 그래서 앤서니 버지스가 정말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정확하게 딱 떨어지는 결말로 나온다기보다, 독자들에게 생각할 여지와 갈등을 남기기도 합니다.
3부는 소위 기계적교화를 마친 알렉스가 시계태엽오렌지가 되어 사회에 나온 후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감옥에서 기계가 되는 동안 직업을 갖고 평범한 사회인이 된(척 하는) 옛 친구들도 만나고 과거에 못된 짓을 했던 사람들도 만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 지는 대충 짐작이 가능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알렉스는 보복을 당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응하기보다는 그저 당하고 있는 편이 편합니다.
이렇게 기계적으로 억지로 선해진 상태로 이야기가 막을 내린다면 재미가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알렉스는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준 사람 덕(?)에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올 수 있게 됩니다. 잠시 알렉스는 신이 납니다. 그런데 막상 다시 악마로 돌아갈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자 알렉스는 그런 것들이 이제 조금 귀찮아집니다. 돈도 모으고 싶고 혼자만의 시간도 갖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이전의 시간과 자신의 모습들을 ‘청춘’이라 이름 붙입니다.
엄마가 싫어하는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엄마가 싫어하는 염색과 파마를 하고, 화를 내시던 엄마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냥 좀 놔두면 안 되냐고, 어차피 나이가 더 들면 하라고 해도 안 할 거라고 말입니다. 이 책의 결말은 이런 느낌입니다.
그런데 정말 알렉스도 그럴까요? 그랬을까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기본적으로 타인의 고통에 동정이나 연민을 갖기는커녕 즐거움을 느끼던 알렉스가 단순히 나이가 들고 철이 들면 이 모든 나쁜 짓을 관두고 평범한 어른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렇다면 결과적으로는 이 모든 일이 있었기 때문에 알렉스는 철이 들었다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된 걸까요.
과거에 조지 오웰의 책을 읽고 섬뜩한 예언가 같다고 쓴 적이 있는데, 앤서니 버지스도 그렇습니다. 실제로 아동성범죄자를 대상으로 한 화학적 거세가 실제로 행해지거나 도입을 두고 논란이 이는 사회를 우리는 살고 있으니까요. 물론 화학적 거세와 루도비코 치료법이 서로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이 소설이 등장할 당시에만 해도 루도비코 치료법은 일종의 상상력의 산물이었다면 화학적 거세는 실제로 가능한 ‘과학기술’이 됐습니다. 그래서 소설을 읽으며 느꼈던 혼란과 고민은 이제 실제로 반드시 한 번씩은 거쳐야 할 마음의 짐이 됐습니다.
나쁜 일을 하는 ‘사람’과 또 그 나쁜 사람 때문에 아무 잘못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나쁜 일을 당해야 하는 ‘사람’, 또 현재는 나쁘지만 앞으로 철이 들지도 모르는 사람과 철이 들지도 모르지만 점점 더 나빠질 수도 있는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구분하고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저는 비겁해서 나쁜 놈들은 무조건 똑같이 보복해줘야 해, 어떻게 해서도 다시는 그런 일을 못하게 해야 해, 라고 큰 소리로 외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나쁜 놈은 나중에 착한 사람이 될지언정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단지, 결코 100% 합의로 만들어질 수는 없을 그 방식과 정도에 대해서는 좀 더 많이 고민해봐야겠죠. 아, 역시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