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수요일, "관장님 잠깐 나와 보세요" 하는 직원의 말에 자료실로 갔더니 60세쯤 되신듯한 소박한 차림의 어르신 한 분이 초조하게 서 계신다. 상황을 들어보니 농민신문사에 생활 수기를 공모하려고 하는데 메일 보내는 법도 모르고, 워드도 못친다며 휘갈겨 쓴 종이 네 장을 들고 무작정 도서관으로 오신거다. 이 날 도서관 근무자는 나와 자료실 근무자 달랑 둘 뿐이었다. 나머지 직원은 코엑스에서 열리는 국제 도서전에 모두 보낸 후였다.
자료실에 근무하는 직원은 내년이 퇴임으로 워드가 느리시니 내가 도와드림이 마땅하지만 이것 저것 할일이 많아 선뜻 해드린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죄송한데 오늘 상황이 어렵습니다. 도서관 근무자가 두 명 이거든요. 자제분께 도움을 요청하거나 동네 젊은 분께 부탁하면 어떨까요?" 하고는 내 자리로 돌아왔다.
책 읽기와 서평쓰기에 관심있는 소수 인원을 대상으로한 '인문학 서평쓰기' 프로그램을 기획하는데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도와드려야 하나? 글자도 못 알아볼 네장이나 되는 분량을 치려면 오전 시간은 소비해야 하고, 인근 도서관 후배들과 점심 약속도 있는데..." 결국 불편한 마음에 도와드리러 갔더니 어르신은 20분이 지났음에도 독수리 타법으로 두 줄 치고 계셨다. "글자 지우는건 어떻게 하죠?"하며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신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사무실로 모시고 와 내 옆자리에 앉으시게 했다. "어르신 읽으세요. 제가 워드로 칠게요." 나는 1분에 400타를 치는 워드 1급의 실력으로 타닥타닥 치기 시작했다. 마치 영화 '사랑은 타이핑중'의 주인공 여자처럼. 어르신은 "제 치부를 다 들어내는 내용이라 남에게 보여주기 챙피해요. 그래서 동네 사람이나 아들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어요" 하신다.
도시에서 살다가 농촌으로 시집을 왔는데 기대 이상으로 궁핍한 살림에 많은 고생을 하셨다. 하루종일 기타만 치는 남편, 그런 아들을 두둔하는 시엄니의 시집살이를 견딘 이야기를 풀어 놓을때는 설움이 복받치셨는지 목소리가 떨리며 목이 메이신다. 기타만 치는 남편이 미워 집에 있는 여닐곱개의 기타를 모두 마당으로 내 던져 부숴 버리고는 집을 나왔는데 정작 갈 곳이 없어 논두렁 구석에 앉아 하염없이 울었다는 대목에서는 어르신의 어깨를 꼭 안아드리며 함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제는 커다란 복숭아 과수원이 있고 남편은 농사일을 열심히 하며, 교생실습중인 든든한 아들이 있다는 결론에 이르러서는 내가 다 뿌듯했다.
메일을 보내고 나니, 이렇게 훌륭한 공무원은 처음 봤다며 어디에 칭찬하면 되냐는 말씀에 뿌듯했다. 상을 타지 못해도 복숭아 한 박스 들고 오신다기에 "에이 한 박스는 되었고, 상 타면 2개만 가져 오시라"는 겸손함도 내비쳤다. 이 지역은 감곡 미백 복숭아가 유명한데 복숭아 자체가 부드러워서 손으로도 껍질을 벗길 수 있고 과즙이 줄줄 흐르는 달디단 품종이다. 안타까운 점은 가격이 꽤 비.싸.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후에 후배 둘과 샤브샤브를 먹으면서 무용담처럼 풀어 놓는데 내가 막 자랑스러워진다. 한 후배가 "관장님은 역시 멋지세요. 관장님이니까 하실수 있는 거예요" 하면서 나를 막 띄워주니 하늘을 나는 기분이다. 나 아무래도 시골 도서관 체질인가봐! 관장 체질인가? 내일 출근했는데 어르신 오셔서 다른 곳에 공모한다고 새로운 글 또 부탁하시면 어쩌지?
그나저나 시골 도서관 서비스의 끝은 어디일까?
2.
요즘 도서관의 dead space에 북카페를 만드는 재미가 쏠쏠하다. 1층 로비에 커다란 공중전화 박스가 놓여있어 거슬렸던 공간에 유아 북카페를 만들었다. 엄마가 아이에게 책 읽어줄 공간으로 저렴한 이케아 제품으로 꾸몄다. 이제 도서관은 조금씩 아기자기한 곳으로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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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새벽 1시가 넘은 시간, 보림이는 기말고사 공부를 하고 나는 알라딘에서 놀고 있다. 마치 석봉이는 글 공부를 하고 어미는 떡을 썰고 있는 그 느낌?
요즘 읽은 책은,
저지대 / 줌파 라히니 저.
어릴적 늘 함께 했던 두 형제 수바시와 우다얀, 그들의 아내 가우리 이야기. 혁명가의 삶을 살다가 비참한 죽음을 당한 우다얀, 동생의 죽음으로 천덕꾸러기가 된 가우리, 가우리와 결혼한 수바시.......그들은 평생을 동생의 그림자에 가리워져 산다. 남편과 딸을 버리고 떠난 가우리를 원망할 수도 없다. 수바시도 가우리도, 딸 벨라도 새로운 사랑을 해야만 한다.
<고종석의 문장>은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 에릭 시갈의 <러브 스토리>,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다시 읽고 싶게 한다.
"스물다섯 살에 죽은 여자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녀가 예뻤다고. 그리고 총명했다고. 그녀가 모차르트와 바흐를 사랑했다고. 그리고 비틀즈를 사랑했다고. 그리고 나를 사랑했다고"
나의 글쓰기 지침서로 삼아도 좋을 책이다. 음 좋아!
4.
사서임에도 책은 소유하고 싶다. 장바구니에 담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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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지난 목요일과 금요일에는 변산 대명리조트에서 열린 어린이청소년도서관 국제 심포지엄에 다녀왔다. 유럽 출장때 룸메이트였던 K도서관 관장과 1년에 한번씩 이 세미나에 참석한다. 영국, 독일, 터키, 미국등 세계 공공도서관의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프로그램 동향도 알 수 있고, 우리도서관에 접목할 <아름다운 이야기 엄마> 아이템도 얻을 수 있는 뜻 깊은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출장을 여행처럼!' 의 바램을 우리는 이루었다.
언뜻 제주도의 주상절리 같기도 한 채석강에는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노을공주도 있고, 강남스타일 노천 카페도 있다. 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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