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책 고담총서 13
유향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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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객이 주족에게 상국 직책의 유지방안을 일러주다

주난왕 22년(기원전 293), 위나라 장수 서무가 싸움에 패하자 서주군이 상국 주족(周足)을 진나라로 보내고자 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주족에게 이같이 말했다.
“그대는 어찌하여 군왕에게 말하기를, ‘제가 진나라로 가면 진나라와 서주의 관계는 틀림없이 악화되고 말 것입니다. 군왕의 총신들이 진나라의 신임을 얻어 서주의 상국이 될 생각으로 진나라에서 저를 헐뜯을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되면 신은 사자의 직책을 다할 수 없습니다. 저는 상국의 자리를 내놓은 뒤 사자로 가고자 하니 군왕은 곧 상국이 되고자 하는 자를 후임으로 선발토록 하십시오. 그가 상국이 되면 두 나라 관계를 고려해 헐뜯지는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러면 군왕은 진나라의 입장을 생각해 그대를 상국의 자격으로 보낼 것입니다. 그대를 사자로 보내면서 상국의 자리를 면직시키면 그대가 말한 대로 일이 잘 이뤄지면 이는 모두 그대가 성사시킨 셈이 됩니다. 설령 두 나라 관계가 악화될지라도 군왕은 그대와 관계가 좋지 않은 자들 때문이라고 생각해 그들에게 벌을 내릴 것입니다.”
「전국책(戰國策), 서주책(西周策) 중에서」


중국의 장기는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말과 상, 포와 차의 동선은 인물의 '위치'를 말하며, 한땀한땀 옮기는 선택에는 매우 다양한 전략이 들어간다. 다른 말과 함께 의각지세[犄角之勢] 를 이루기도 하고, 살을 떼어주고 뼈를 취하는 '희생전략'을 쓰기도 한다. 때로는 나의 말을, 때로는 남의 말을 이용하는 것은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각각의 말을 '대상'으로 취급하고, 그들의 욕망을 이용하는 것이다.

위의 상황은 서주의 상국 주족이 국가적 위기상황을 해결해야 하는 '특사 파견'의 임무를 앞두고 자신의 신변을 고민하고 있다. 움직이자니 국가 간의 국면에 따라 희생당할 수도 있고, 거스르자니 상국(오늘날의 총리급)이라는 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세객이 내놓은 전술은 '자신의 위치와 상대의 욕망을 이용하라'였다. 주족이 상국 신분으로 방문하는 것과 일반인 신분으로 방문하는 것은 '외교의 본질'이 다른 것이다. 하지만 진나라는 매우 강국이고 주나라는 매우 약소하다고 했을 때 주족이 진나라에 가서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모함을 받을 수 있는 상황과 정적들이 주족에 앞서 진나라의 총애를 받고자 하는 욕망을 생각할 때 주족은 이들의 욕망을 적절히 이용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세객의 진단이 주효할 수 있었던 까닭은 주족에 비해 현재의 상황을 매우 입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논리를 이름붙인다면 '세객 논리' 혹은 '권모술수의 논리학' 정도 될까. 이들의 논리가 학문적 논리보다 독특한 것은 '상황'이라는 변수를 더하기 때문이다. 플로베르의 '일물일어'를 여기 적용한다면, 한 상황에서는 최선의 행위가 있기 마련이다. 이 최선의 행위를 출력해내기 위해서는 '유익한 지수'를 담아야 한다. 혹시라도 담아야 할 지수가 빠진다면 좋은 결과물이 나올 수 없다.

우리는 동양고전이라고 하면 고리타분하거나 진부하고 교훈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것은 공맹이나 노장 등의 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외양적인 이미지에 기인한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부여한 '이미지화'에 기인한다. 하지만 교훈적이라는 '공맹유학'조차도 현실에 대한 치열한 성찰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춘추전국 이후부터 중국의 철학은 유학, 노장학, 법가(엄격한 법률)가 매우 유연하게 교류해 왔었고, 이에 대한 결정은 '유세가'들이 해왔다. 전국책에서 공맹이 언급된 부분이 3회를 넘지 않는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권모는 누군가를 속인다는 행위로 한정지어져서는 안 된다. 그러면 국가외교는 사기술이 되며, 외교관들은 사기꾼이 된다. 차라리 매우 복합적인 지수를 가지고 연산을 해내는 '실전논리학'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바둑에서 하수와 고수가 있듯이 '권모'에도 급수가 다르다. 연암 박지원의 말마따나 '열흘짜리 전략이 있는가 하면 100년도 너끈히 견디는 견고한 전략'이 있다.

암튼 텍스트 하나 올리고 나서 말도 징~허가 많이 했다. 간만에 쓰는 거니 봐주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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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 - 악의 역사 2, 초기 기독교의 전통 르네상스 라이브러리 11
제프리 버튼 러셀 지음, 김영범 옮김 / 르네상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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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없는 사탄, 사탄 없는 하느님??





- 어린 아이들의 참혹한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의로운 신이 존재함을 보여줄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가톨릭의 목적이다.


악의 정체는 그렇게 간단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악은 있고 악마는 없느냐, 악도 없고 악마도 없느냐 등등 여러 가지 물음이 가능하다.

저자는 악을 인격의 악과 도덕적인 악으로 구분한다.

인격적인 악은 그야말로 루시퍼와 타락 천사들이 결집하여 세상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은 악을 ‘방조’하는 듯 보인다.

그것은 기독교의 딜레마였다.

하느님은 세상에 사랑과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는데,

아이들을 잔혹하게 학살하고 온갖 살인과 방화가 수시로 벌어지는 것은 하느님의 조화인가.

현실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매우 혼란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선과 악, 종교와 무신론에 대해서만 정리하여도 청년에서 중년으로 중년에서 노년으로 되어버린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악은 하느님의 책임 아래 세상에 온갖 악을 퍼뜨린다. 그 악이 구석구석 미치고 거대하면 거대할수록 하느님의 ‘선’의 품격은 높아지는 것이다.

어제 아는 형과 술을 마시다가 이와 같은 이야기를 했다.

형의 부모님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아버지는 목사님이시다. 그리고 그 형 또한 신학의 길을 갈 뻔했다.

하지만 아버지와 논쟁하는 중에

“아버지, 그러면 단 5분만이라도 이런 가설을 받아들여보시죠.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칩시다. 선과 악은 무엇입니까.”형은 선과 악, 하느님과 사탄의 문제가 썩 내키지 않아서 끝내 신학으로 귀의하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생각할 때 선과 악, 하느님과 사탄은 빛과 어둠, 음과 양의 구도로 봄이 안정적이다. 그리고 그럴듯하다. 플라톤은 악을 ‘결여’의 일종이라고 하였다. 중세의 신학은 플라톤의 ‘결여 이론’으로 악의 사고를 펼친다.

나는 선악 개념을 ‘거울 이론’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나의 얼굴은 선이자 악이다. 다른 사람은 내 얼굴을 보지만 나 스스로는 얼굴을 보지 못한다. 거울을 보아야만 얼굴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내가 보지 못하는 나의 얼굴은 선이며, 내가 거울을 통해 나를 보는 얼굴은 ‘악’이다. 선과 악은 가까이 붙어 있다. 때문에 알기도 힘들다. ‘신’의 문제는 내가 볼 때는 지성 너머에 있다. 단순히 불가시적인 대상이라는 것이 아니라, ‘지성’이 가지고 있는 한계와 무게까지 다 벗어던졌을 때 ‘신’에게 도달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만약 내가 평생 거울을 통해 내 얼굴을 확인하지 않고 산다면 나는 ‘신’에 도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저자는 인격적인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가 사탄에게 보인 수난을 통해 우리들의 선이 보장받고 있다는 것이다. 악마는 아주 명확한 목적에 따라서 행동한다. 우리가 악을 보면 지레 겁먹고 배제하고 하는 순진함은 이제 벗어나야 하리라. 어떻게 본다면 ‘악’은 ‘그리스도의 수난’에 기여한 일등공신이 아니었던가. 그 옛날 유학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주공의 애첩 달기*가 그러했던 것처럼.


* 달기 : 주공의 애첩. 얼마나 사랑했던지 자신의 이름 단(旦)에 여자라는 이름을 넣어서 달(妲)이라고 했다. 은나라 주(紂)왕은 매우 사악한 군주였는데, 주공이 애첩을 보내는 미인계를 썼다. 달기는 주왕과 죽이 잘 맞아 성인의 심장을 도려내거나 기름 묻은 기둥과 솟구치는 불길을 마련하여 죄인에게 지나가게 시키는 포락지형(炮烙之刑)을 고안해 백성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게 된다. 결국 주나라 무왕은 혁명에 성공하고 일등공신 달기는 주공 단에 의해 무참히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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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6-05-05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번에 읽고 또 읽으셨나요?

승주나무 2006-05-05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번에는 데블이고 이번에는 사탄이에요. 나중에 시리즈 리뷰 쓸려구요^^

stella.K 2006-05-05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대단하세요. 전 루시퍼로 족했어요.ㅜ.ㅜ
 
세상은 한 권의 책이었다
소피 카사뉴-브루케 지음, 최애리 옮김 / 마티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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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우리에게 참으로 친근하다.
친근하다는 것은 가까이서 오래 있었다는 점도 있지만, 구석구석 사람의 손길이 미친다는 점에서 친근하다.

인쇄기가 없었을 때도 책은 있었다. 책의 발달은 인류 의지의 표현이다. 앎에 대한 전일한 의지가 인쇄기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하지만 책은 어떤 이에게는 굴레이기도 했다. 나도 책을 베껴봐서 안다. 예전에 에티카를 읽을 때 감명깊은 구절을 노트에 정서로 베꼈는데, 덕분에 한 달이 가도록 다 읽지 못했다. 그래서 나의 워드 속도가 엄청 빨라진지도 모르겠다. 
베끼는 사람, 채색하는 사람들은 일정한 틀 밖을 벗어날 수 없었다. 대개 책의 지면을 이루는 그림과 장식, 쪽표시공간, 글자 장식 등이 일관된 흐름을 보이고 있다. 게다가 성스러운 성서의 경우는 더욱 심하다. 하지만 이 안에서 장인들은 예술적 혼을 불살랐다. 그리고 책장을 돋보이게 하는 삽화와 이니셜, 장식 등은 중세만의 독특한 정취가 있다. 개구리가 뱀을 삼킨 그림을 누가 'R'로 생각하겠는가.

책이 귀한 만큼 애착도 집착도 심했다. 오죽하면 책주인이 젊은 독자에게 이와 같은 독설을 퍼부었을까.

손톱은 시꺼멓고 향수는커녕 쉬어터진 구린내를 풍기는 손으로 맘에 드는 대목에는 자국까지 내기 일쑤이다! 게다가 자기 기억을 붙들 수 없는 것을 표시한답시고, 여기저기 수북이 지푸라기를 꽂아놓는다. 책으로서는 소화시킬 도리가 없는 이 지푸라기들을 아무도 다시 뽑아버리는 이가 없으니, 그렇게 잔뜩 꽂힌ㅁ 짚북데기가 책의 아귀를 어긋나게 하고 결국에는 썩히기 시작한다.  - 67쪽

정말 경험에서 우러난 '불평'이다.
이 책은 인쇄를 할 수 없었던 시절에 사람들이 책을 읽기 위해, 책을 만들기 위해, 책을 꾸미기 위해 공들였던 시간이 기록돼 있다. 이 시절의 책은 그래도 행복했을 것 같다. 쌓여서 버려지는 책은 없었을 테니까. 
 전문 필경사가 온종일 책에 매달려 베껴도 하루에 두세 페이지밖에 쓸 수 없었다는 이야기, 대주교가 부임한 교회 도서관에 책이 달랑 5권밖에 없어서 필사실을 따로 만들고 평생 책을 베꼈지만, 20년이 흘러 퇴임하기까지 66권밖에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이야기와 오늘날과의 간극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 오랜 옛날 지식이 독점되지 않을 수 없었겠다는 푸념만 책장 언저리를 오갔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은 텍스트와 그림이 따로 논다는 느낌을 준 점과 극적 서술이나 유머가 없어서 대체로 재미가 없었다는 점이다. 정말 책을 사랑하고 책의 체취를 구석구석 느껴보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면 마지막 페이지까지 걸어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중에 혹시 책을 쓰게 될 책을 위한 교훈을 얻었다.

책은 보고서가 아니다. 어떤 목적을 공유하는 사람이 아닌 누군가에게 읽힐 책이라면 보고서보다는 에세이와 같은 성격이어야 할 것 같다. 책의 제작 과정, 독자들, 필경사들, 채색사 들에 대한 일관된 해설은 백과사전을 보아도 충분하지 않을까. 내가 볼 때는 백과사전에서 찾을 수 없는 내용이 이 책에는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자료뿐만 아니라 상상력까지 동원해서 그 당시의 이야기들을 복원할 수 있었다면, 나는 나의 시대와 그 시대를 즐겁게 비교하며 책을 읽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텍스트가 아니라, 그림에 의미를 둔다면 충분히 권장할 만한 책이다. 이 책에는 우리가 평생 보지 못할 책이 있다. 지금도 채색가의 혼이 살아숨쉬는 책의 한 페이지는 몇 권의 책보다 가치가 있다. 책을 베끼고 꾸미는 것은 단순노동이 아니다. 그들의 인생은 비록 몇 권의 책으로 압축되지만, 그들은 진정 '세상'이라는 책에 글을 채워넣을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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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6-03-27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예리하시네요. 처음에 별 셋이라 너무 짜다고 생각했는데, 저는 이 책에 너무 많이 흥분을 했었나 봅니다. 하나 깍을까요? 흐흐.

승주나무 2006-03-29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는 세개와 네 개 사이에서 고민했답니다. 끝내 감흥을 얻을 수 없어서.. 네 개는 줄 수 없었죠^^
 
서양 고대 전쟁사 박물관 르네상스 라이브러리 9
존 워리 지음, 임웅 옮김 / 르네상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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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크 영웅전, 헤로도토스 역사, 그리고 전쟁사 박물관


존 워리('war'자가 들어간 것으로 봐서 이 책과 매우 닮았다)의 ‘서양고대 전쟁사 박물관(이하 ’전쟁사 박물관‘)’이 어떤 특성이 있으며, 어떤 위치에 있어야 어울리는지를 보고자 할 때는 이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플루타르크 영웅전’과 ‘헤로도토스 역사’, 그리고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비교하면 명확히 드러날 것이다.

‘전쟁사 박물관’을 두 단어로 이야기하면 ‘엄밀’과 ‘종합’이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학문이라면 가지고 싶어할 만한 미덕이지만, ‘학문’을 넘어 ‘교양’으로까지 가고자 한다면 모자란 감이 없지 않다. 이 책은 ‘논문’에 가깝다. 따라서 나 같은 일반인들이 읽기에는 다소 지루하고, 난해할 수 있다. 내가 이것을 문제삼는 이유는 이 책이 ‘연구자’들을 향해서 작성되었는가에 상관없이 ‘일반 독자들’을 향해서 ‘교양’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그에 대한 모자란 감을 약간의 ‘비판’과 함께 보완하고자 하는 것이다.


역자도 후기에 밝혔듯이 이 책은 “전쟁이 일어났던 이유에 대한 정치 사회적 메커니즘이 특별히 고찰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역자는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다른 미덕들에 의해 충분히 상쇄되고도 남을 것”으로 ‘확신’까지 하고 있다. 과연 그 ‘확신’이 우리에게 납득할 만한 ‘확신’이 될까. 연구자들이 아닌 우리 일반 독자들은 전쟁이 일어났던 당대의 정치적 상황은 물론 ‘극적 전개’에 관심이 많다. 인간이 태어나서 서로 관계를 맺고 다투는 과정 안에 어떤 ‘인생의 묘’를 느끼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고 이런 아쉬움을 느낀 독자라면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권하고 싶다. ‘전쟁사 박물관’은 이 점에 대해서는 별로 기여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은 ‘연구자적 성실성’이 드러나 있다. 이것 또한 한편으로는 ‘단점’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책 안에서 ‘극적 전개를 통한 인생의 묘’를 얻고 싶기도 하지만, ‘비하인드 스토리’를 특히 듣고 싶다. 당대에 농민이나 일꾼들이 나누던 대화나 생활 양식, 풍습과 같은 일상의 소재가 ‘전쟁’이라는 극적 장치를 만나 아우러지는 ‘향연’이 특히 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전쟁’과 관련된 각국의 정치 상황이나 군사력, 작전, 무기 등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학자적 성실성’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것 역시 ‘연구자’들을 위한 배려이지만,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는 ‘인정머리 없는’ 모습일 것이다. 이 점이 아쉬운 독자라면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권한다. 이 책은 헤로도토스의 역마살과 ‘여행가 본능’에 따라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보고들은 내용을 수필처럼 편안하게 서술한 ‘기행문’에 가깝다. 따라서 체계와 엄밀성은 부족하지만, ‘이야기’가 담겨 있다.


물론 고대사에는 이런 모습만 있지는 않다. 당대에는 헤로도토스의 이런 서술 방식에 불만을 품은 학자도 있었다. 그가 바로 투키디데스로서 ‘페리클레스’의 연적이며, 유명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서술한 역사가이다. 제목에서도 느껴지겠지만, 서술방식 자체가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의도에 의해 서술되었다. 따라서 ‘학문적 엄밀성’도 갖추고 있다. ‘전쟁사 박물관’은 아마도 이 책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일반 독자가 ‘전쟁사 박물관’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을 달래기 위해서는 위에 소개한 책들을 함께 읽는 것이 좋다. 그리고 이 책을 활용하는 방법을 하나 더 권한다. 처음에는 무기나 전략 등을 세세하게 읽지 않는 것이 좋다. 전체적인 서술을 따라가다가 나중에 고대사를 정리하거나 특정 시대를 보고자 할 때 다른 서적과 함께 그 부분의 항목을 살펴보면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즉 한꺼번에 일독하기보다는 한 장 한 장 시간을 두고 보는 것이 더 흥미로운 독서법이라 하겠다. 이 책은 독특한 ‘엄밀성’을 통해 흩어져 있던 역사적 사실들을 ‘전쟁’이라는 주제로 종합해낸 역작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서두에 이야기했던 ‘엄밀’과 ‘종합’은 아무 책에서나 드러나는 미덕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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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크 영웅전 전집 1 현대지성신서 21
플루타르크 지음, 이성규 옮김 / 현대지성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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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 이 리뷰는 플루타르크 영웅전과 사마천의 사기열전을 토대로 쓰여질 '동서후기'의 기획으로 만들어졌으며, 분량이 장난이 아니므로, 긴 분량과 스크롤의 압박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사람은 읽지 마시압!!
 
 
동서열전후기-1
- 부목은 물에 젖는다 해도 침묵하지 않으리


영웅소론(英雄小論)

이 이야기는 그리스가 ‘신의 세계’에서 ‘영웅의 세계’로 넘어가는 접점부터 시작해서 역사의 시대까지 그 나라의 흥망을 결정지은 그리스와 로마의 영웅들을 되살린 열전이다.
우리들이 영웅에게 애정을 가지는 이유는 그들은 우리와 같은 연약한 인간이지만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집중해서 철옹성 같은 현실을 움직이고, 그것을 좀더 근사한 모양으로 구획해 놓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영웅들을 보면서 자신감을 가지고 내가 당면한 난관을 다시 상대한다.
영웅도 나이를 먹기 마련이다. 어렸을 적 보던 영웅은 적을 무찌르고 모험과 사랑을 쟁취한 ‘젊은 영웅’이다. 그러나 영웅은 우리 대신 신의 노여움을 혼자 감당해 역사 속에서 사라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우리와 영웅이 대결하기도 하고, 역사의 발전을 저해하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특히 영웅은 우리들에게 우상과 추종자들을 낳아 역사 발전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그가 낳은 휴브리스(hubris․오만))1)는 생전에는 타파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사후에는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영웅의 전성기는 그렇게 길지 않다.
영웅의 저변에는 역사가 있다. 역사 안에는 인물과 국면과 구조라는 것이 있는데, 인물은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를 의미하며, 국면은 당대의 대세를 의미한다. 대세는 힘있는 자에게 집중되고 영웅은 그 힘을 이용해서 세상을 구획해 나간다. 그러나 힘의 균형은 깨지기 마련이어서 대세는 다른 누군가에게 넘어가며 대세를 물려준 영웅의 최후는 인생의 무상함을 진하게 풍기기도 하고, 장렬한 감동을 선사하기도 한다. 구조는 끊임없이 변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거의 변하지 않는 ‘틀’이 있다. 예컨대 아무리 풍파가 많았던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를 통틀어 ‘살인’(혈육살인 포함)이나 ‘간통’ 같은 죄는 역사서에 언급될 정도로 흔하지 않다. 그것은 인간세계 면면히 이어지는 암묵적 계승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상관관계를 의식하고 수백 년에 걸쳐 세계를 지배한 영웅들이 있다. 그들은 ‘대세’에 좌우되지 않는다.
편의상 전자의 영웅들을 ‘열정의 영웅’, 후자의 영웅들을 ‘교화의 영웅’이라 부르기로 한다.
그리고 영웅 저변에는 반대세력이 있기 마련이다. 영웅이 반대세력을 대하는 방식과 이야기는 또 하나의 흥미거리다. 힘과 힘의 대결이 펼쳐지기도 하고, 덕성으로 교화시키거나 인내를 통해 반대세력의 반감을 무력화시키기도 한다. 혹은 반대세력들이 오히려 영웅들을 추대하는 현상도 벌어진다. 영웅들과 반대세력 간의 ‘줄다리기’는 영웅전을 이해하는 또 다른 묘미이다.
영웅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와 비슷한 현실과 난관을 겪는다. 그리고 시기심과 애욕 등의 유혹을 받기도 한다. 그들의 성공과 실패의 순간을 보고 그 각각의 이유를 곱씹어보는 것도 영웅을 대하는 예의가 될 것이다.

영웅전 1권에 나오는 영웅들은 다음과 같다.



테세우스
-인생은 모험이다.


테세우스는 사생아였다. 대개의 개국 영웅들은 사생아이거나 난생영웅(卵生英雄), 아버지가 신이라는 등 범상치 않은 출생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이유는 개국의 영웅들은 무엇보다 기득권에 대한 부정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일상적인 인간이거나 어떤 집안이라면 그 집안을 뒤엎고 국가를 세운다는 것은 ‘대륜(大倫)’에 어긋나는 일이다. 춘추시대에도 周나라를 끼고 각국이 패자(覇者)가 된 이유도 대륜 때문이다. 영웅들을 대륜에서 자유롭게 만들기 위해 출생부터 범상치 않게 설정하는 것은 오래된 이야기꾼들의 습성이다. 이에 대한 저자의 언급도 눈 여겨 볼만하다.

어떤 사람은 이 이야기가 너무나 극적이고 허구적으로 보이므로 의심하기도 한다. 하지만 운명이란 얼마나 기구한 것이며, 강대한 로마가 어떤 신성한 기원이 없었다면 오늘날과 같이 이렇게 엄청난 영광을 누리거나 이토록 위대하고 예외적인 위치에 도달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전혀 믿지 못할 이야기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이유로 유년기와 청년기는 모험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것은 그의 성격과 운명을 이해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테세우스의 할아버지는 트로이젠이라는 조그만 도시의 통치자였는데, 테세우스의 친부인 아이게우스가 받은 신탁을 지혜롭게 해석해 그의 딸과 동침시켜 테세우스를 낳게 했다. 테세우스의 영혼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피테우스의 지혜와 아이게우스의 강인한 체력, 헤라클레스의 영웅적 업적이 그것이다. 테세우스는 헤라클레스를 숭배했으며 그를 모방했다.
아버지를 찾으러 아테네를 가는 도중에 만난 악당들은 힘세고 지칠 줄 모르는 뛰어난 전사들이었으나 자신들의 뛰어난 재능을 다른 사람을 위해 선한 일에 사용할 줄 모르고, 약탈이나 악행에 이용했다. 테세우스는 헤라클레스처럼 그들을 피하지 않고 하나씩 꺾어 힘을 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악당들을 소탕하고 도찰한 아테네는 정치적으로 혼란기였다. 통치자인 아이게우스 집안은 수많은 당파의 표적이 되어 있었고, 수많은 암투와 의심 속에 도시 분위기는 흉흉했다.
때마침 크레타 섬에서 아테네에 공물을 거두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크레타의 왕자가 아테네 땅에서 살해된 것이 발단이 되어 양국은 끊임없는 전쟁 속에 고통받았으며, 아테네에는 심각한 기근과 가뭄으로 짓눌려 있었고 강물도 말라버렸다. 신탁이 전하는 바에 따라 9년마다 소년 소녀 각각 7명씩 크레타 섬에 바치는 것으로 종전협상을 했고, 아테네를 괴롭히던 재앙도 사라졌다. 테세우스는 명분상으로 아테네의 후계자가 되었지만, 반대 세력의 암술과 9년마다 귀한 자식들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아테네인의 역경을 풀어야 하는 숙제가 남겨져 있었다. 그러나 영웅들에게는 조력자가 있게 마련이다. 크레타 왕 미노스의 딸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를 사랑하여, 테세우스가 공물제를 멈추고 이제까지 바쳐왔던 젊은이들까지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도왔다.
테세우스가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그의 열정적인 모험에 있는 것은 아니다. 아테네의 ‘문제’를 해결하여 진정한 통치자의 자격을 갖추었지만, 전혀 다른 도시를 세움으로써 헬라스 인들에게 ‘전제’에 대한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테세우스가 꿈꾼 국가는 왕도 없는 민주주의 국가, 혹은 민중에 의해 통치되는 공산국가이다. 자신의 왕위를 내놓고, 오로지 군대의 지휘권과 법의 수호권만 가지며 모든 자유를 주겠다고 공언했다. 그것이 공화국이다. 귀족과 평민, 직공이라는 신분을 나누었지만, 귀족은 명예를, 농민은 이익을, 직공은 숫자에 있어서 우세하며 각 신분마다 맡은 바 임무가 정해져 있었을 뿐 상하의 구분은 없었다. 테세우스는 민주주의를 지향하여 왕위를 직접 내놓은 최초의 왕족이 되었으며, 헬라스 모든 국가 중에 아테네의 인민들이 가장 많은 사람이 가장 많은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테세우스의 인생에 있어서 도전과 전진은 ‘중독’과 같다. 그는 헤라클레스를 존경하여 그를 따라 모험을 시작했으며, 사람들의 칭찬을 좋아해 어려운 일을 자청하고 나섰다. 그러나 그러한 ‘도전’의 재료가 없으면, 개인적인 성향이 ‘도전’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테세우스에 있어서는 수많은 연애담이 그것이다. 그의 연애는 ‘유괴’를 통해 이루어진다. 트로이의 아낙소라는 여자를 유괴하였으며, 펠리보이아라는 여자와 결혼하였고, 이피클레스의 딸인 이오페와 결혼했다. 아테네로 가는 길목에서 악당 시니스를 죽이고 그의 딸들을 강탈하였으며, 아리아드네를 버렸고, 파노페우스의 딸 아이글레를 사랑하였다. 결국 50세의 나이에 어린 소녀에 지나지 않았던 라케다이몬(스파르타)의 헬레네를 납치해 민족을 전쟁의 수렁에 빠지게 했다.
인간의 열정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할만한 힘을 만들어내지만 식은 열정처럼 추한 것도 없다. 그는 결국 반대파들에 의해서 제거되고 만다. 하지만 사후에 그를 찾은 사람들에 의해 고향에 안장되어 국조(國祖)로 숭앙받는다.

로물루스
- 쟁취하는 인생


로마라는 나라의 재치와 호전적인 기질 등은 모두 로물루스의 유산이다.
로마라는 이름은 그 땅을 발견하게 해준 ‘로마’라는 여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지만, 한 나라의 탄생은 좀더 신성하고 극적인 기원을 갖기 마련이고, 사람들은 그러한 기원을 선택한다. 로물루스는 ‘아프락사스)2)의 영웅이다. 자신들을 감싼 역경을 극복하고 그들의 조국을 떠나 전혀 새로운 국가를 형성시켰기 때문이다.
그들의 시조인 알바 왕가는 누미토르와 아물리우스 형제의 대에 이르렀는데, 두 형제는 트로이에서 가져온 황금과 보물을 두고 왕국과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기로 합의를 봤다. 누미토르가 왕국을 선택하자 아물리우스는 수많은 재물을 이용해서 누미토르의 왕국을 빼앗고 그의 딸을 평생 결혼할 수 없는 사제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누미토르의 딸은 이미 뱃속에 아이를 가지고 있었으며 종신토록 감금되는 형벌을 받았다. 태어난 아이들은 아물리우스의 명에 의해 살해될 위기에 놓였으나 그의 신하들은 차마 죽이지 못하고 강물 위에 떨어뜨렸으며 아물리우스의 돼지치기인 파우스툴루스가 몰래 그들을 길렀다.
그러던 어느날 아물리우스와 누미토르의 양치기들 사이에서 벌어진 싸움에 연루돼 동생 레무스는 누미토르의 처분을 기다리는 운명에 놓여졌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양부인 파우스툴루스는 로물루스에게 출생의 비밀을 밝히고, 누미토르는 레무스의 늠름한 체격과 충천하는 기상, 자신이 처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동요됨 없는 기개에 감탄하였고, 그의 나이를 짐작해 보니 가슴속에 떠오르는 희망을 지울 수 없어서 붙잡아두고 있었다. 로물루스는 레무스를 구하기 위해 누미토르의 요새로 맨몸으로 들어갔고, 누미토르와 사람들의 도움으로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아물리우스는 누미토르에게 전령을 보내 그들의 정체를 밝히라고 하지만, 전령 역시 정직한 사람으로 그들 형제를 도왔다. 즉 안에서는 내분을 일으키고, 아물리우스를 증오하는 시민들의 군대는 밖에서 공격하여 결국 아물리우스를 죽이고 정권을 획득했다.
그러나 두 형제는 알바에 머무르기보다는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을 이끌고 자신들이 자랐던 장소에 새로운 도시를 세우기로 하였다. 그것은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의 간절한 요구이기도 했다. 그들은 사실 노예이거나 범죄자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도시를 세운 로물루스는 군대를 조직하는데, 역사상 최초의 정형화된 군대의 모습이 여기서 갖추어졌다. 한 부대 소속의 소부대는 다른 부대와 호환이 가능하여 필요한 부대를 양도해줄 수도 있었다.
그리고 페트론과 크리엔트의 신분을 나누었는데, 페트론은 후견인이라는 의미로 항상 크리엔트들을 돌보는 것을 의무로 여기고 크리엔트들도 페트론들에 대해 반감을 품지 말고 사랑과 존경으로 대하게끔 하였다. 페트론은 곧 원로 혹은 귀족이 되지만 다른 나라와 달리 거부감이 없고, 크리엔트와 긴밀한 관계 속에 존재하는 신분이기 때문에 이 국가의 시민들은 정의와 존경이 넘쳐흘렀고 계급 투쟁 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 국가의 한 가지 고민은 아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데 있으며, 고립돼 있다는 것도 큰 문제였다.
이에 로물루스는 하나의 이벤트를 만들어 이것을 해결하였다. 즉 신의 어떤 오래된 제단을 발견했다고 소문을 내 많은 도시의 사람들을 모이게 한 다음 신호를 기점으로 그들을 습격하여 처녀들을 약탈해 가는 것이었다. 이들은 처녀들만 납치해 갔으며 이러한 강력하고 확실한 결합(혼인이라는 방식)을 이용해서 이웃 부족들과의 동맹을 공고히 한다고 변명했다.
때문에 이곳의 풍습은 아내를 존경하며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가장 많은 피해를 본 사비니 족은 라케다이몬의 후예로 강인한 민족이었으므로 로마에게 정식으로 항의하고 여자들을 돌려주고 새로운 동맹관계를 맺자고 제안했다.
로물루스는 여자를 돌려보내는 것은 거부하면서 동맹관계만 받아들이겠다고 답변하였다.
이웃 부족 중의 하나인 케니넨시아 족의 왕 아크론은 줄곧 로물루스의 업적에 질투심을 가져오던 터에 이 일을 계기로 전쟁을 일으켰다. 로물루스는 이들을 맞아 전열을 펼치고, 대장끼리 일대 일로 맞붙어서 승부를 정하자고 제안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로물루스는 이웃 부족들을 지배하였으나 지배한 부족들의 자치권을 빼앗지 않고 로마로 이주해 평등한 시민이 되도록 끌어들이는 정책을 이용해 점점 로마를 크게 만들었다.
드디어 사비니 족과 로마의 전쟁이 벌어졌으나, 전세는 난투극의 형세로 이어졌다. 두 부족 모두 엄청난 사상자를 냈으며 끝날 줄 몰랐다. 적들의 수적 기세는 맹렬했고, 로마 병사들이 달아나기 시작하며 로마는 커다란 위기에 빠졌다. 이 때 로물루스는 두 손을 높이 들고 유피테르 신께 기도하며, 달아나는 군사들을 멈추고 위험에 빠진 로마를 구해달라고 호소하였다. 이 기도에 의해 달아나던 군병들은 왕에 대한 존경심과 자신에 대한 수치감으로 달아나기를 멈추었고, 용기를 얻어 적을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격전이 재개될 즈음 형언할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전투는 끝났고 종전협상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처녀 때 납치돼 이제는 어머니, 아내가 된 여자들의 시위였다. 로물루스의 아내 헤르실리아는 호소한다.

“우리에게 무슨 죄가 있나요? 왜 우리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렇게 심한 고통을 받아야 하나요? 우리는 억울하게 폭력에 의해 붙잡혀 왔어요. 또한 형제나 부모, 친척들로부터도 그렇게 오랫동안 버림받아 왔지요. 그런데 한때는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했던 그 사람들에게 가장 가까운 인연으로 얽매어 있는 지금, 우리는 또다시 그 사람들이 위험에 빠지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고 죽는 것을 보며 울부짖어야 하나요? 우리가 처녀로 있을 때에는 구출하러 오시지도 않더니, 지금에 와서야 아내와 어머니가 된 우리를 남편과 자식들로부터 떼어가려고 하시는 건가요? 이것은 그 옛날에 우리를 버리고 돌보시지 않은 것보다 더 심한 일이에요. 저들의 사랑과 당신들의 열정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나쁘다고 해야 할까요? 만일 다른 어떤 이유로 전쟁하는 것이라면, 우리를 보아서라도 사위와 손자가 된 사람들에게만은 손을 대지 마세요. 만약 우리 때문에 전쟁을 하는 것이라면 우리를 데려가세요. 하지만 우리와 함께 당신의 사위와 손자까지 도 데리고 가세요. 우리를 부모와 형제 품으로 돌려보내셔도 좋지만 우리 남편과 자식들을 빼앗아 가진 마세요. 제발 애원하느니 이제 또다시 우리를 납치해 가지는 마세요.”


사비니 인들이 납치된 여인들의 집에 가보니 이들이 남편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결국 남편과 함께 머물고 싶은 여자는 그대로 살되, 실을 잣는 일 이외의 집안 일은 하지 말 것을 조건으로 휴전협정이 매듭지어졌다.
로물루스는 신앙심이 깊고 지혜로운 자로 모든 살인죄를 ‘형제 살해죄’라고 부르고 있고, 남편은 아내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서로를 버릴 수 없다는 법을 제정하였다. 무엇보다 가족 공동체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고, 여성의 가치를 알고 존경할 줄 알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여러 번 전쟁의 승리는 그에게 오만과 자부심에 사로잡히게 만들었으며 그것이 계기다 되어 그의 지위는 위태롭게 된다. 결정적으로 그가 전쟁으로 얻은 토지를 군인들에게 나누어주고, 베이엔테스에서 잡혀온 볼모를 원로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국으로 보낸 것이 화근이 되어, 그는 행방불명되었다. 그것이 정치적 불안을 초래하였고, 원로원들도 로물루스를 제거했다는 의혹을 씻지 못하였다.


테세우스-로물루스


테세우스는 왕족이라는 호화로운 자리를 박차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악당들을 물리쳤고, 국가의 불행을 제거해주었다. 로물루스 역시 죽음의 위기 앞에서도 꿋꿋하게 견뎌내 큰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족적은 많은 이들을 위한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거센 외압에 도전한 업적의 전유물의 성격이 강하다. 때문에 이들이 성공을 거두었을 때에는 법령을 많은 이들에 이롭게 만들어내지 못했으며 정치적으로 ‘축출’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정치적으로 실패한 데에는 상반된 이유가 있었다. 테세우스는 너무 민주적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경멸의 대상이 되었고, 로물루스는 독재자였기 때문에 백성들은 공포와 증오심이 불타올라 왕을 제거하였다. 그 두 정치형태를 보완하는 새로운 정치제도는 이 국가들에게 숙제로 남겨지게 되었다.
로물루스는 테세우스에 비해 ‘국가’라는 의미를 잘 이해했다. 국가가 어떻게 형성하고 이웃 부족과는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를 크게 만들었고, 이웃 부족들을 제압하거나 회유하는 방식을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관계’ 속의 로마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테세우스가 자신의 욕정과 ‘도전’에 이끌려 여자들을 강탈한 데 비해, 로물루스는 오로지 국가를 형성할 필요에 의해서 여자들을 납치하여 온전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두 영웅은 ‘의도’의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테세우스는 용맹스러운 영웅이었고 로물루스는 지혜로운 영웅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나라의 개국 영웅에게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우리들의 욕심이다. 개국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며 거기에는 원시적 습성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에 국가의 문물을 정비하는 일은 다음 세대에 맡겨져야 한다.


리쿠르고스
- 인내가 보여줄 수 있는 힘


리쿠르고스는 권력의 의미를 깊게 이해한 사람이다. 진정한 권력은 곧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다. 세력을 잡아서 권좌에 오르지만 반대파는 언제나 서슬 퍼런 눈을 치켜 뜨기 마련이다. 반대파를 이해시키고, 나라를 하나로 통합한다는 것은 영웅도 감당하기 힘들다. 앞의 영웅들도 정적들에게 제거되지 않았던가.
리쿠르고스는 권력이 정당하게 자신에게 모아질 때까지 참아냈다. 그리고 막상 돌아온 권력으로 세상을 구획해 나갔다. 스파르타가 스파르타가 된 이유는 바로 리쿠르고스 덕분이다.
리쿠르고스는 왕족으로 장성했을 때는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다. 그의 선왕들은 무력이나 회유를 통해 백성들의 원망을 사거나 경멸을 당하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국가를 경영하기 위해서는 방법론이 서야 한다. 국민들의 요구에 휘둘리거나, 통제하기 용이하게 압박한다면 오히려 부작용을 낳는다. 이것이 당시 스파르트의 커다란 숙제였다. 이 때 스파르타의 왕인 형이 죽는다.

폴리데크테스 왕도 오래지 않아 죽고 말았으므로, 왕위 계승권은 당연히 리쿠르고스의 것이었다. 실제로 리쿠르고스는 얼마 동안 통치를 하였다. 그러나 왕비인 형수가 잉태중임을 알게 된 리쿠르고스는 즉시 왕위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만약 태어날 아기가 남자아이라면 왕비의 소생이 왕국을 계승하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자신은 오직 후견인으로서 장차 출생할 아기를 대신하여 정무를 도와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섭정을 스파르타 인들은 프로디쿠스라고 부른다.
그런데 왕비로부터 리쿠르고스에게 비밀스런 제안이 전해졌다. 자신과 결혼을 하고 리쿠르고스가 왕위에 오른다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자신의 아기를 없애버리겠다는 것이었다. 리쿠르고스는 왕비의 사악함에 몸서리를 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거절의 뜻을 비추지 않았다. 오히려 왕비에게 친근감을 표시하면서 감사와 기쁨의 뜻을 전하는 사신을 보내었다. 그러나 아기를 강제로 유산한다면 왕비의 건강을 해칠 뿐만 아니라 목숨까지도 위태롭게 될 것이라고 설득하였다. 차라리 아기가 출생하는 대로 자신이 직접 없애버리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계교를 통하여 마침내 왕비는 아기를 분만하기에 이르렀다. 왕비가 진통중이라는 소식을 들은 리쿠르고스는 사람을 보내어 옆에서 모든 일을 지켜보라고 하였다. 그리고 만약 여자아기를 낳거든 여인들에게 맡기고, 남자아기를 낳거든 자신이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든지 상관하지 말고 즉시 자기에게로 데려오라고 일렀다.
때마침 리쿠르고스가 여러 원로원들과 함께 식사하고 있을 때 왕비가 남자아기를 낳았다. 아이는 곧 식사하고 있는 리쿠르고스에게 전달되었다. 리쿠르고스는 아기를 받아 안고 둘레에 앉은 사람들에게 말했다.
“스파르타 인들이여, 그대들의 왕이 나셨소.”
말을 마친 리쿠르고스는 아기를 왕좌에 눕히고 카릴라우스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 이름의 뜻은 ‘만백성의 기쁨’이라는 뜻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리쿠르고스의 고귀하고 올바른 성품에 감탄하고 기뻐하였다.


리쿠르고스는 어린 왕을 보좌하여 정사를 돌봤지만, 정적들의 질투는 피할 수 없었다. 그들의 음모가 두려워서라기보다는 권력이 분열되면 개혁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권력에서 완전히 물러나 어린 왕이 장성하여 왕자를 둘 때까지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 맹세하고 떠난다.
현자는 어디에 가든 꼭 해야 할 일이 있는 법니다. 그것이 바로 사명이다. 여러 국가를 떠돌아다니면서 리쿠르고스는 국가가 취해야 할 점과 취하지 말아야 할 점을 정리했으며, 정계의 인사들과 현명한 탈레스 등과 교유하며 법률의 기초를 닦고 있었다.
그 무렵 답보상태인 고국의 정치상에 국민들은 점점 피로감을 느끼고 리쿠르고스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왕까지도 리쿠르고스의 정계복귀를 간절히 바랬다. 서로 원하는 바는 달랐지만, 그들은 리쿠르고스라는 공통의제에 협의를 한 것이다. 거기가 권력의 시작이었다. 리쿠르고스는 국민 전원의 지지를 받으며 전면적인 개혁에 착수할 수 있었다.
리쿠르고스가 첫번째로 실시한 일은 권력의 균형을 적절히 분화시키는 것이다. 당시 스파르타를 비롯한 헬라스의 도시들은 전제라는 정치형태를 고수하고 있었는데, 권력이 한 쪽으로 너무 몰려 있기 때문에 소모적이었으며 부담도 많았다. 특히 권력의 이양시에는 분열과 암투 속에 공론이 서기까지 오랜 시련을 겪어야 했다. 리쿠르고스는 나라의 중요한 일을 처리하는 기관인 원로원을 두었다. 원로원은 왕과 동등한 권한을 가진 기관이었다. 그것은 전제를 완화하고 안정과 평안을 가져다준다. 이는 전제와 민주의 맹점을 잘 극복한 정치제도로 평가받는다. [33번 참조]
그리스는 중용의 덕을 사랑하는 민족이다. Golden Middle(金中), 조화, 중용의 이름들이 그것을 보여준다. 특히 정치의 균형과 중용을 실현시키기 위한 노력은 그리스 전체 역사의 한 주제였다.
30인의 원로원을 구성한 리쿠르고스의 다음 개혁은 토지를 분배하는 것이다. 그는 치부(致富)가 모든 악의 근원이 될 수 있음을 알고 모든 부자들을 설득하여 국가의 토지를 모두 거둬들였다. 당시에는 무서운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리쿠르고스는 토지를 일정하게 구획하여 각 가구에 일정하게 나누어주었다. 추수철 들판에 나란히 쌓인 곡식단을 보고 이웃나라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모든 라코니아의 땅이 마치 형제들끼리 똑같이 나누어 가진 한 가족의 재산과 같이 보이는군.”

국민 모두 토지를 알맞게 나누어갖게 해준 뒤, 리쿠르고스는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즉 화폐를 대량으로 유통시킬 수 없도록 크고 무겁게 만들었다. 이 결과 국민들은 무거운 화폐를 점유하는 일이 없었고, 도둑질이나 뇌물 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결국 이 나라 안에는 부자라고 해서 가난한 사람보다 더 나을 것이 없었다. 모든 사치스러운 예술까지 금지하였기 때문에 국민들은 생활용품을 만드는데 뛰어난 예술가가 되었다. 침상, 의자, 책상, 못 같은 용품들에는 하나같이 에술적 혼이 깃들여 있었고, 국민들은 점점 실용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리쿠르고스의 세번째 개혁은 공동 식사라는 제도를 마련한 것이었다. 집에서 즐기는 사치스러운 식사를 통해 짐승처럼 구석구석 살이 찌고, 마음까지 나태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일정한 약의 식사는 불평등과 탐욕을 없애버렸다. 결국 리쿠르고스는 부자들에게서 재산만 빼앗아 간 것이 아니라 부(富)라는 개념 자체를 없애버린 것이다. 이제는 재물이 있어도 쓸 데가 없으며 허영심을 만족시킬 수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을 시행하는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부자들은 리쿠르고스를 반대하는 일당을 모아 욕을 하며 돌을 던졌다. 리쿠르고스는 목숨을 건지기 위해 신전으로 도망치지만 알칸데르라는 청년에게 얼굴을 찔려 한쪽 눈이 실명되었다.
리쿠르고스가 이룬 업적은 대단한 것이지만, 이 때의 시련을 극복한 것이야말로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 아니었나 한다. 그는 자신을 해한 젊은이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같이 살면서 자신을 가까이서 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 결과 그는 리쿠르고스의 열렬한 추앙자가 되어 온몸으로 리쿠르고스에게 돌아오는 모함을 항변했다.
한 난폭한 젊은이를 신중한 스파르타의 시민으로 바꾼 것이다. 이것은 그의 반대파로 대표되는 자의 영혼을 덕으로서 감화시키고 반발력을 무력화시킨 것임과 동시에 한 인간에 대해 이처럼 축복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신에 가까운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스파르타의 국민적 성향도 그러려니와 리쿠르고스가 만든 국가는 마치 ‘군부대’를 연상케 한다. 그가 세운 공동 식사에서 아이들은 경험 많은 국가 원로들에게 국정에 관해 배웠고, 예절에 관한 가르침을 들었다.
아이들이 일곱이 되면 나라에서 만든 단체에 들어가야 했다. 그들은 마련된 규율 속에서 함께 살며, 놀고, 배웠다. 그들 중 우두머리를 세워 어른들이 없을 때 아이들을 통솔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거친 식사와 의복으로 오랜 기간을 살아야 했으며 각자의 임무가 있었다.
우두머리는 아이들에게 노래도 시켰으며, 심사숙고해야만 하는 질문도 전져서 자연스러운 토론의 장이 마련되게 했다. 이를 통해 아이들은 정치에 관한 관심을 매우 일찍부터 가질 수 있었으며 덕이나 명예 같은 개념을 몸소 깨달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누가 정의로운 사람이며, 그의 정책은 옳았나 하는 질문에 대한 소신이 없으면 우둔하고 세상에 무관심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그들의 말과 행동을 평가하고 가르치기도 한다. 때문에 이 나라에서는 노인이 크게 공경을 받았으며, 노인에게 대항하거나 무례하게 굴면 법으로 처벌을 받았다. 노인은 어떤 젊은이든 참견하여 자신의 경험에 의해 얻은 지혜를 어떤 방법으로든 가르칠 권리가 있었다.
스파르타의 국민들은 실용적이며 단아했다. 그것은 그들이 하는 대화를 봐도 알 수 있다. 리쿠르고스는 사람들에게 짧은 몇 마디로 유용하고 흥미로운 내용을 많이 담지 못한 대화는 주고받지 못하도록 명령했으며 짧은 경구에 깊은 뜻을 담아내는 재치는 그들의 국민성이기도 했다. [이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36번을 참조할 것]
스파르타의 모든 것은 ‘애국심’ 안에 다 들어 있다. 모든 행위는 국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자기 자신과 상충될 때는 머뭇거리지 않고 국가에 헌신하도록 가르쳤다. 우리 군인들의 생활 안에는 이 시절 스파르타의 습성이 뛰어놀고 있다. 고대 국가의 현명한 제도는 이 책을 통해 전승이 되었으며, 역사상 고매한 지휘관이나 국가경영자들은 여기서 영감을 얻고 자신이 맡은 곳에 적용하려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며 규율과 전통으로 굳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군인은 리쿠르고스의 후예이다.
그러나 리쿠르고스의 이 정책을 현대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약간의 어려움이 있다. 그의 정책은 봉쇄를 전제로 한다. 현대는 세계적 스탠다드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 국가에는 불행하다. 리쿠르고스는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최고의 국가를 몇 가지의 정책 안에 담아내었으니 단연 최고의 정책이었다. 그러므로 타국의 사람들이 사유 없이 국내에 체류하는 것을 법적으로 금할 정도로 자긍심이 뛰어났다. 그것은 스파르타 국민의 자긍심이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는 뛰어나고 열악한 것들이 복잡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에 관계와 개방을 통해서 그것을 극복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시스템이다.
리쿠르고스를 직접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개인이나 일정한 조직 안에서는 훨씬 고귀한 가치를 발할 수 있다. 실제로 군 안에서는 리쿠르고스의 정신이 고스란히 광채를 발휘하고 있지 않은가.
리쿠르고스에게 발견되는 흥미로운 점은 그가 성문법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문서로 규정된 법은 법률 전문가에 의해서 이용될 수 있기 때문에 강인한 교육을 통해 젊은이들의 가슴 속에 법조문을 새겨넣었다. 그것이 훨씬 오래 유지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물루스에게 법과 교육은 같은 개념이었다. 스파르타의 독특한 국민성 덕에 그들의 법은 양자의 이해관계를 염두한 것이 아니라 참신한 스파르타인으로 태어나기 위한 법률이었다.

‘하느님이 보기 좋았더라’

위 구절처럼 리쿠르고스의 법은 스파르타에 완전히 정착하여 자생할 수 있었다. 그것을 보는 리쿠르고스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그는 국민들이 자신이 세운 법률에서 자유롭지 못하도록 하고 명예로운 죽음을 택한다.
실제로 리쿠르고스의 법률을 500년 동안 지켜지며 조국을 그리스에서 가장 강성한 국가로 만들었으며 라산데르가 국민들에게 사치를 가르쳐 전복되기까지 오랜 시가 동안 스파르타에 축복을 내려주었다.
[40번을 참고할 것]
그의 성공은 후세의 철학자, 법률가들이 모범이 되었으며 이상국가의 표본이 되었다. 플라톤이 ‘국가’를 저술하며 리쿠르고스의 스파르타를 염두해 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누마 폼필리우스리우스
- 경건하고 숭고함 가르침


누마는 로마의 식민지였던 사비니 족이었다. 당시 헬라스 전역의 지배력을 형성한 도시는 로마였는데, 사비니족은 로마의 강력한 후원자였다. 때문에 그들도 로마의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강력하게 요구하던 차였다. 게다가 태조인 로물루스가 행방불명되고 귀족들에게 의혹이 집중되어 있었다. 정략과 음모로 혼탁한 정계에 사람들은 환멸을 느꼈으며, 당시 누마는 조용히 경건한 생활을 하며 덕성을 쌓아 널리 알려졌다. [누마의 지론과 생활에 대해서는 42번을 참고할 것] 다잇 로물루스와 함께 왕위에 올랐던 타티우스는 그의 덕성에 반하여 그를 사위로 삼으니 누마는 졸지에 왕족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예전의 생활을 버리지 않고 연로한 부친과 조용히 사색을 즐겼고, 부인인 타이아 공주 또한 이전에 누리던 화려한 생활을 청산하고 남편의 조용한 삶을 따랐다.
타티우스가 사망하자 그의 계승이 논쟁이 되었다. 로마인들과 사비니족은 고심 끝에 교대로 통치권자의 임무를 수행하였지만, 왕의 선출을 거부하고 귀족정치로 몰아가고 있다는 국민들의 의혹과 비난으로 정계는 술렁였다. 결국 선택한 제도는 두 도시가 서로의 왕을 지명하는 방식이었다. 로마인이 사비니족 중에서 왕으로 지명한 사람이 바로 누마 폼필리우스였다. 이 제안은 양측을 다 만족시키는 결정이었다.
그들은 사절을 누마에게 보내 왕위를 부탁하였다. 사절단은 누마가 흔쾌히 받아들일 것이라고 호언했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누마는 이렇게 대답한다.

제가 생각하기에, 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장군을 필요로 하는 도시에서 저 같은 사람이 왕이 된다면 정말 웃음거리밖에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신을 경배하는 일로 시간을 보내며, 정의를 사랑하고 폭력과 전쟁을 미워하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누마 역시 정계의 무상한 암투에 신물을 느끼고 정치에 입문하지 않으리라는 신념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가족들의 논리적이고 간절한 부탁과 사절단의 호소를 이기지 못해 왕위를 수락하였다. 아닌 게 아니라 만일 그가 왕위를 거부한다면 로마의 정치가 다시 대혼란속에 빠진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양 도시의 만장일치로 왕위에 올랐다. 누마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을 호전적인 로마인들의 기질을 보다 부드럽고 온순하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누마는 로물루스 시절부터 지켜오던 호위병 제도를 없앰으로써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보여줬고, 자신을 불신하는 국민이라면 더더욱 다스릴 마음이 없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분노로 일관된’ 로마인들을 경건하게 만들기는 쉽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국가적인 종교행사를 만들어 직접 사제가 되어 거행하였다. 엄숙한 종교행사에 세련되고 재미있는 여흥을 담아 로마인들이 가까이 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초자연적인 신의 현현과 영혼을 직접 목격했거나 이야기도 나누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려주어 종교적인 공포심을 심어주었다.
로물루스가 정한 로마의 수호신인 전쟁신 마르스를 침묵의 신 타기타로 정한 것도 이 때의 일이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44번을 참고할 것]그리고 피타고라스의 영향을 받아 초월적인 감각과 감성, 이성의 지고한 수련을 통해 신의 존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어, 천한 사물을 숭배하는 경향을 제거하였다. 덕분에 170년 동안 로마의 신전에는 우상이 세워지지 않았다.
이로 인해 로마인들을 ‘숭고’나 ‘경외’가 무엇인지 잘 알게 되었다.
누마의 정책 가운데 가장 칭송을 받는 것은 사람들을 직업에 따라 길드와 조합으로 나눈 것이었다. 당시 부족과 부족간에는 엄청난 대립과 분쟁이 그치지 않았다. 누마는 이것을 세밀하게 분화시키면 이러한 대결의 국면을 크게 완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누마는 사람들을 직업별로 나누어 음악가, 금은공, 목수, 상인 등이 국가를 초월해 모일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이것은 현대적인 개념으로 국가연합이 아닌 경제인 연합이나, 학술회 등으로 세계인이 만나는 장을 마련한 것이다. 오로지 순수하고 비슷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역량을 비교하고 추구하는 조직이기 때문에 분쟁이 크게 일어나지도 않는다. 그리고 국가이기주의 같은 폐단을 크게 완화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실제로 국가간의 분쟁이 일어나면 중재의 역할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달력의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누마 이전의 사람들은 달의 움직임과 해의 움직임 사이에 불일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기계적으로 율력을 제정하였다가 들쑥날쑥하게 생겨나는 오차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달은 354년 만에 1년을 채우는데 태양은 365일에 채우므로, 누마는 태음력과 태양력의 차를 11일로 산출하였다. 이 차이를 없애기 위해서 2년마다 2월달 다음에 22일을 가진 한 달을 더 두었다.
그리고 달의 이름을 제정하였는데, 앞서 언급했듯이 한해의 첫머리를 장식한 전쟁신 마르스를 기념한 ‘March'를 세번째로 옮겼고, 두 굴의 신인 ’야누아리누스‘를 해의 첫머리에 올렸다. 그 달은 두 해의 성격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비유로 첫달을 상정한 것이다. 페브루아리우스는 ‘페브루아’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것이며 정화의 달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달에는 돌아가신 조상들에게 수확한 산물을 바치며 루페르칼리아라고 하는 행사를 벌였다. 이 행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정화의식과 유사하였다. 이리하여 저쟁신은 세번째로 밀리게 되었다. 그 다음은 베누스 혹은 아프로디테의 이름에서 유래된 ‘아프릴’이었다. . 베누스에게 바쳐진 이 달의 초하룻날에 여자들은 목욕을 했다. 그리고 머리에는 화환을 둘렀다. 하지만 또 다른 주장에 따르면 아프릴의 ‘p'가 ’ph'가 아닌 까닭에 이 달의 이름이 아프로디테(Aphrodite)에서 나왔다는 설을 부인하기도 한다. 아프릴은 ‘아페리오’라는 라틴 어에서 온 이름이며, 꽃봉오리가 열리고 피어나는 봄철의 달이라는 의미라고 설명한다. 아프릴 다음 달의 이름은 ‘마이아’에서 비롯된 메이다. 마이아는 메르쿠리우스의 어머니로 오월은 그녀에게 바쳐진 달이다. 그 다음 달은 유노(Juno)에서 이름을 따온 ‘준’이다. 그 다음 달은 퀸틸리스, 섹스틸리스였으나 후에 퀸틸리스는 율리우스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폼페이를 패배시킨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을 딴 것이다. 섹스틸리스도 마찬가지로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리고 셉템베르와 옥토베르, 노벰베르 그리고 데켐베르다. 데켐베르는 ‘10’이라는 숫자를 상징하며 로마의 마지막 달로 되었는데, 로마인들이 한해를 열 달로 상정했다는 것은 이 이름에 명확히 나타나 있다.
누마 왕이 재위하는 동안에는 어떠한 전쟁이나 혁명 또는 정치적 동요도 생기지 않았으며, 왕을 시기하거나 미워하여 왕위를 빼앗으려고 한 사람도 없었다. 왕을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신이 두려워서였는지 그 덕을 앙모하여서였는지, 또는 순결한 사람을 보호하는 성스러운 은총 때문인지 로마는 경건함에 완전히 세례를 받았으며, 이웃나라들도 마찬가지로 감화되어 누마 통치기간에는 분쟁을 별로 찾아볼 수 없었다. 이를 통해 전쟁이 없이도 모든 사람들은 만족스러운 생활을 누릴 수 있으며, 전쟁 자체가 주는 스트레스와 위화감보다는 우호와 협력을 통한 공동체가 더욱 자신의 능력을 잘 발휘할 수 있는 체계임을 누마는 잘 말해주고 있다.
로마에 있는 야누스 신전에는 두 개의 문이 있었는데 로마 사람들은 그 문을 전쟁의 문이라고 부른다. 전쟁시에는 열어두고 평화시에는 닫아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이 닫혀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로마 제국이 강대해지고 점점 커지면서, 이웃의 민족들과 적들이 끊임없는 도전을 해왔기 때문에 평화로운 때가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마가 왕위에 앉아 있는 동안은, 그 문은 단 하루도 열린 적이 없이 43년 동안 내내 굳게 닫혀 있었다. 다만 누마 재위 이후에도 닫혀지게 만들지는 못하였으며, 그의 사후 지금까지 그 문은 닫힐 줄을 모르고 전사들이 드나드는 통로가 되고 있다.


리쿠르고스 - 누마 폼필리우스리우스


누마와 리쿠르고스는 교화의 영웅이다. 그들은 믿고 따르는 사람만이 법의 수호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구성원들을 설득하여 많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만족할 만한 법을 제정하였으며,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오던 스타일을 버리면 허무해지고 반발심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자신의 삶에서 자신의 생각은 최고로 옳은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그에게 친절히 더 옳은 것을 제시해 줄 수 있어야 교화가 가능하다. 이러한 점을 두 사람은 모두 알고 있었다. 다만 이들이 제정한 ‘법’은 우리가 쓰는 법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우리들의 ‘법’은 수많은 사람들의 이해가 복잡하게 결합된 ‘타협’의 의미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국가는 우리에게 약간의 ‘강제’를 요구함으로써 그보다 더 큰 자유를 주는 식이다. 그러나 이들의 법은 교육이나 교화와 거의 같은 개념이다. 더욱이 이 시대의 구성원들은 수가 별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해의 복잡한 구조를 가질 리 만무한 것이었고, 지성의 성숙도 면에서 법률가와는 수준이 달랐기 때문에 법률가들은 교육가이기도 하고 통치가이기도 했다.
스피노자는 자신의 저작에서 ‘나는 당신들의 머릿속으로 들어가서 추상적인 사고를 마치 삼각형이나 도형을 계산하는 것처럼 구획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들이 마련한 법은 국민들이 이미 가지고 있던 기질을 더욱 세밀하게 순화시킨 것에 불과하겠지만, 반듯한 밭뙈기처럼 사고와 생활에 깊숙이 침투해  하나씩 서서히 변화시켰다. 정치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이들이 어떻게 자신의 기회를 기다리며 정치적 과제를 어떤 절차에 의해서 완수해 나가는지 많은 영감을 얻을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자신의 성품으로 먼저 사람들을 압도하고 무한한 믿음을 심어주었다. 정치가는 깨끗해야 하며, 누군가 반론을 제기했을 때 묵살하면 안된다. 그리고 법률의 소비자들이 스스로 법률의 정당성을 알고 즐겁게 따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에 대한 결과도 역시 좋아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동양의 고전에서도 성인은 어떤 상황에 따라 왼쪽으로 혹은 오른쪽으로 가기도 하지만 그 지고한 정의는 같다고 말한다. 누마는 덕이 커서 왕으로 추대되었으며, 리쿠르고스는 덕이 커서 왕의 자리를 내놓았다. 이에 플루타르코스는 한마디로 이 두 사람의 인물됨을 묘사하고 있다.

정의로써 왕이 되는 것은 명예로운 것이다. 그러나 왕위를 버리고 정의를 택함도 또한 명예로운 일이다.

플루타르코스는 두 사람을 비교하며 리쿠르고스를 약간 우위에 놓은 듯이 보인다. 왜냐하면 리쿠르고스의 법이 더욱 깊고 치밀한 지배력을 형성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실제로 리쿠르고스의 법이 오랫동안 지속된 것은 교육의 덕이다. 리쿠르고스의 법은 출산에서부터 시작해서 유아기, 유년기, 청년기에 모두 닿아 있으며, 이들의 행동방식까지 관심이 미치고 있었다. 이에 비해 누마는 그의 생전에만 지배력을 형성했으며, 호전적인 로마인의 기질을 잠시 눌러놓았을 뿐이었다. 뿌리부터 의도된 교육과 법률, 행동, 생활방식의 교화는 건전한 시민을 만들고, 그것이 국가력을 형성한다.
그것은 스파르타인과 로마인의 기질 차를 의미하기도 한다. 출산 문제로 예를 든다면, 리쿠르고스는 보다 양질의 종자 결합을 통해 건강하고 강력한 국가의 ‘원소’가 되기를 바랬다. 한 개인은 ‘국가’라는 지상 과제 안에 평생 헌신해야 하며, 그것이 그의 긍지가 되어야 한다. 때문에 아내를 좋은 친구와 사귀게 하여 아내는 친구가 원하는 건강한 자식을 낳아주었고, 그것이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는 시작부터 여성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기 때문에 ‘부부’라는 도덕적 개념이 더욱 강조되었다. 자식의 교육 역시 아버지의 재량으로 통제가 가능했지만, 스파르타는 언제나 ‘공동식탁’ 안에서만 교육할 수 있었을 뿐 그 외의 사교육은 엄격히 통제되었다. 우리들이 이 두 도시의 스타일을 보면서 취해야 할 것은 한 도시의 정치스타일이 아니라 적시적소에 두 스타일을 활용하는 것이다. 개인의 생활방식이나 국가보다 작은 공동체 안, 혹은 국가나 국가공동체 안에 두 사람의 정책은 활용의 폭이 적지 않다.
누마에게서 발견되는 흥미로운 점은 일개 이방인(식민지인)으로서 왕위에 올랐다는 점이다. 더욱이 왕위에 오른 후에는 나라의 모든 틀을 바꾸어놓으면서도 오직 설득과 타협으로만 개혁을 실행하였다. 또한 한번도 화합을 이루어보지 못한 도시를, 무력이나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지혜와 정의의 힘으로만 다스려 마침내 화합과 조화를 이루어놓았으니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누마가 리쿠르고스에 비해 세력의 후광이 전혀 없는 황무지에서 이룬 성과 치고는 대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인을 비롯한 현대인에게는 누마가 더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보다 인간적이란 점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누마에게 더욱 애정이 간다.

솔론
-철학적 법률가, 인간적 철학자


솔론은 상인 출신이다. 때문에 그는 사유재산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으며, 상인이 얻는 이득은 위험을 담보로 한 보상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이와 같은 성향 덕분에 그리스 사회가 극도의 빈익빈 부익부로 양분되었을 때에도 양쪽을 중재하여 귀중한 법률을 제정할 수 있었다.

이보다 그가 정책의 일선에서 노련한 균형감각을 유지하게 된 데는 친구들의 영향이 적지 않다. 정책의 입안자인 직업 때문에 자문을 구할 지지층이 항상 필요했던 그는 현명한 친구를 여럿 알고 있었으나 개중에는 그를 이용하는 악덕 상인들도 있었다.

아나카르시스는 법률가 솔론의 초창기에 교유하기 시작한 친구로 그에게 법률의 맹점을 지적해준 친구다. 즉, 법이란 마치 거미줄과 같아, 사소한 범죄난 힘없는 사람은 걸려들지만 권세 있는 부자들은 오히려 그 그물을 찢어버리기 일쑤라는 것이다. 솔론은 양쪽 모두를 감안해 만든 법률이니 깨뜨리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모두에게 이로울 것이라고 친구를 설득했다. 하지만 결과는 아나카르시스가 생각한 대로 되었다. [54번을 참조할 것]
솔론은 독신주의자 탈레스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탈레스는 그에 대해 아무 변명도 하지 않았으나, 후에 솔론이 여행하는 중에 자식이 죽은 것처럼 꾸밈으로써, 결혼이나 가족은 그 사람의 순수한 사유 활동을 결정적으로 흔들어 놓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사실 철학자를 비롯해서 여러 저자들 중에 독신주의가 많은 까닭은 ‘지적 활동에 대한 욕구’가 ‘번식의 욕구’보다 월등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솔론은 철학가이면서 현실정치에 깊숙이 참여하였는데, 그러한 경력이 그의 정책 입안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당시의 중대 사안이었던 외교적 문제와 국내 정계의 투쟁을 현명하게 처리한 후 솔론은 확고한 입지를 가지고 본격적인 정책 작업을 수행했다. [56번 참조]
당시의 아테네 정체는 여러 지방의 파벌 형성으로 국론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즉, 민주주의와 과두정치, 혹은 중간 형태의 정체가 각 부족의 이해와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극단적 전제로 기울어질 위기도 잠재해 있었다.
무엇보다 현재 우리의 실업문제처럼 당시에도 채권자들에게 몸을 저당잡혀 노예가 되거나 자식을 팔거나 해외도피하는 사람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결국 그들이 단결하며 아테네는 혁명의 정국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 때 양쪽의 분쟁을 해결할 사람으로 솔론이 적극 추천되었으며 그 결과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그가 집정관으로 선출되기 전 한 말은 양편의 이해와 염원에 부합해 환영을 받았다.

“모든 일이 공평할 때 전쟁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나아가 사람들은 솔론을 왕으로 추대하기까지 하였으나, 스스로의 소신을 접고 전제로 일변하고 싶지 않았던 까닭에 솔론은 왕위 대신 법전만을 선택하였다.
솔론이 정계에서 발휘한 능력중 하나는 나쁜 말도 부드럽게 완화하여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처럼 양극의 불만이 팽배한 상황에서 양쪽 모두를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어느 한쪽에는 불리하기 마련인 정책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솔론의 이 능력은 빛나는 힘을 발휘했다. [이에 관해서는 57번 참조]
솔론이 처음으로 시행한 법률은 남아 있는 부채를 탕감 또는 경감해주고 앞으로는 누구도 자신의 몸을 담보로 거래할 수 없도록 법률을 정한 것이다. 이 때 솔론은 내가 아는 한 최초로 ‘환율의 가치’를 발견한 사람이다. 이전에는 73드라크마로 통용ㅇ되던 1파운드를 100드라크마로 바꿈으로써, 지불하는 돈의 액수는 같은 것이지만 채무자에게는 이익을 주고, 채권자들도 크게 손해를 입히지 않음으로써 민감한 사안을 유유히 통과시켰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되었으며 본국으로 돌아와 자신의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솔론의 친구 중에는 현명한 조언자도 있지만 그의 정치 인생의 사망까지 위협한 친구들도 있었다. 그가 위의 정책을 입안할 때 조언을 구했던 친구들은 그가 이 법률을 시행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많은 돈을 차용하여 토지를 대량으로 매입했다. 이러한 파렴치한 농단 행위로 솔론은 크게 신임을 잃었으나 곧 오해를 풀었으며 친구들은 대대로 ‘크레오코피다이(사기꾼)’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살아야 했다.
정치의 중요 부문에 ‘시민’들을 참여시킨 점은 후에 호민관 제도의 중요한 밑바탕이 되었다. 솔론은 수입을 가진 사람들을 4등급으로 나눠 각 등급에 맞게 정책 권리를 할당하였으며, 그리스 정치와 법률의 기본적 토대가 된 배심원 제도는 현대까지 유용하게 빚을 지고 있다.
역사에도 해석자가 있듯이 법률도 시대에 따라 변천해야 하며 해석하는 사람들이 그 시대의 법률을 현실에 맞게 유동화시킨다. 이러한 의도로 솔론은 고의로 법조문을 애매하게 만들어 여러 가지 해석의 여지를 남겨 두었다. 말은 만들고 사용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뜻을 생산할 수 있으나 커다란 틀은 변하지 않는다. 때문에 ‘법조문’도 ‘해석자’들도 위협의 위험에서 자유롭게 된다. 현대에 이를 강력히 이용한 사람은 ‘링컨’이다. 단순명료한 법률을 강력한 정치의지로 해석하여 여러 사람을 설득시킨 끝에 링컨은 ‘강한 미국’을 만들어냈다.
이 외에도 솔론은 인간적이고 문학적인 법률을 제정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정변이 일어났을 때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고 방관한 사람에게 정치의 자격을 박탈한 법이 그러하고, 고인이 된 사람에게 비난을 금지한 것도 고매한 그의 인격을 드러내었으며 여러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이제껏 모은 사유재산을 자신의 권리에 맞게 양도할 수 있는 상속권도 솔론이 만들었으나 질병이나 아내의 요청, 혹은 위협에 의해 작성된 유서는 무효가 된다는 조항도 재미있다. 또한 사생아는 아버지를 부양할 의무가 없다는 법률은 건강한 가정의 적이며 쾌락만을 위한 삶의 단면을 꾸짖은 법률이다. 그에게서 태어난 자식의 출생 자체가 자식에게는 수치가 되지 않겠느냐고 덧붙인 저자의 설명도 재미있다.
법률의 제정이라는 것은 사회 구성인의 긴밀한 이해관계를 꿰뚫어야 하며 오랜 인내를 통한 설득 작업 끝에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이들의 관심과 이해 조직의 압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때문에 법률이 일단 서고 난 후에 법률가들이 많은 의뢰인을 뿌리치는 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진나라의 토대를 마련한 상앙은 법률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사람을 무겁게 벌함으로써 법률의 권위를 신장시켜 부국강병을 이루었으며, 솔론은 그들을 피해 달아남으로써 그들 스스로 법률에 적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달아나면서 솔론이 남긴 말이 있다.

큰일을 할 때에는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어렵다.

솔론은 법률가이기 이전에 철학가이다. 때문에 그는 인간의 삶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어떻게 사는 삶이 현명한 삶인가는 일생 일대의 물음이다. 말년에 크로이소스를 방문한 이야기는 인생과 운명의 묘한 의미를 깨달은 말년 철학자의 완숙미가 깊이 담겼으므로 전문을 인용함으로써 솔론의 이야기를 접고자 한다.

솔론은 크라이소스의 초대에 응하여 사르디스를 방문하였다. 그 당시에 솔론의 처지는 산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처음으로 바다를 구경하게 되면, 강을 만날 때마다 그것이 바다인가 하면서 생각하는 것과 같았다. 솔론은 호화로운 궁중으로 들어가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았다. 그들은 모두 값진 옷을 입고 시종과 호위병을 거느리고 으스대면서 배회를 하고 있었다. 솔론은 그들의 모습을 보고 그들이 모두 왕인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드디어 솔론은 정중한 안내를 받으면서 왕을 만나게 되었다. 보석과 값진 채색의 옷, 금, 패물 등으로 치장을 한 모양이 실로 황홀하였다. 그러나 솔론은 왕을 만나면서도 아무런 느낌을 나타내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그 광경에 대해서도 솔론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솔론이 자신의 모습을 보고 반드시 크게 놀랄 것이라고 짐작하였던 왕은 몹시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솔론은 이러한 속된 허식을 경멸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였다. 그러자 왕은 궁중의 모든 보물들을 솔론에게 구경시켜 주라고 명령하였다. 솔론은 왕의 모습을 보면서 왕이 어떤 위인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궁중의 진귀한 보물은 솔론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모든 보물을 보여준 다음에 왕은 다시 솔론을 불렀다. 솔로닝 들어왔을 때 크로이소스 왕은 이 세상에서 자기만큼이나 행복한 사람을 보았던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솔론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코로이소스 왕보다 아테네에서 살고 있는 텔루스라는 사람이 더욱 행복하게 보인다. 텔루스는 어진 사람으로 좋은 아들들을 남겼으며 나라를 위하여 영광스럽게 전사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로이소스 왕은 솔론의 말을 들으면서 이렇게 생각하였다. ‘행복을 금과 은으로 측정하지 않고 한낱 사사로운 사람의 생애와 죽음을 자기의 커다란 권세와 왕국보다 낫다고 하는 것을 보니, 솔론은 마음이 이상하게 비틀린 사람이구나.’
그러나 크로이소스 왕은 다시 한 번 물어보았다. 텔루스를 제외한다면 자기보다 더욱 행복한 사람이 이 세상에 있느냐고 말했던 것이다. 솔론은 두 사람이 있다고 대답하면서 이렇게 설명하였다. 그렇다. 클레비오스와 비톤이 있다. 그들은 형제로서 서로를 지극히 사랑하였으며 어머니에 대한 효성도 대단하였다. 어머니가 타고 있던 수레를 끄는 소들이 너무 느리게 걸었으므로, 클레오비스와 비톤은 직접 멍에를 메고 끌어서 어머니를 헤라 신전으로 모셨다. 모든 시민들이 칭송을 하면서 그들을 자랑으로 삼고 제물을 바치면서 축배를 들었다. 그들은 이러한 영광을 누리면서 오래도록 살다가 아무런 고통도 없이 죽음을 맞이하였다.
크로이소스 왕은 화를 내면서 물어보았다.
“그렇다면 나는 행복한 사람 가운데 들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아첨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더 이상 왕의 노여움을 사고 싶지 않았던 솔론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대왕님, 그리스 사람들은 하늘의 은총을 그렇게 많이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하는 바도 작고 웅장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중용을 지키면서 운명의 변천이 기구함을 보고, 현재 자기가 가진 것을 자랑으로 삼거나 다른 사람의 행운을 부러워하지도 않습니다. 미리 알 수 없는 앞날은 많은 괴상한 일을 감추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편안하고 안락하게 죽음을 맞이한 사람만을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살아 있어서 신의 계시와 운명의 장난을 모면하지 못하는 사람의 행복을 축하하는 것은, 경주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선수의 머리에 승리의 관을 얹어주고 승리자라고 선포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아직까지도 분명하게 정해지지 않고 있으므로 언제 뒤집어질지 모릅니다.”
솔론은 이러한 말을 남기면서 그곳을 떠났다. 솔론의 좋은 충고를 받아들일 줄 모르는 크로이소스 왕은 대로하였다.
유명한 우화 작가였던 이솝도 크로이소스 왕의 초대를 받아서 사르디스로 찾아왔던 적이 있었다. 이솝은 사르디스에서 머무는 동안 크로이소스 왕의 은총을 받았다. 이솝은 푸대접을 받는 것을 보고 이렇게 조언하였다.
“솔론, 크로이소스 왕을 대할 때에는 차라리 말을 하지 않거나, 왕이 듣고자 하는 말만 듣도록 하십시오.”
솔론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말을 하지 않거나 이로운 말만 해야 합니다.”
그 당시 크로이소스 왕은 솔론을 경멸하고 있었다. 하지만 크로이소스 왕이 키루스에서 패전하여 수도를 빼앗기게 되었을 때에는 사정이 달라지게 되었다. 마침내 페르시아 군대와 키루스가 입석한 자리에서 크로이소스 왕은 화형을 당하게 되었다. 크로이소스는 세 번이나 소리를 높여서 솔론의 이름을 간절하게 불렀다. 크루스는 그 일을 보면서 이상하다고 생각하였다. 키루스는 크로이소스 왕에게 사람을 보내서, 과연 솔론이 어떤 사람이기에 죽임을 당하게 되는 궁지에 몰린 사람이 간절하게 부르느냐고 물어보았다. 크로이소스 왕은 하나도 숨기지 않고 사실대로 이야기를 하였다.
“솔론은 그리스의 철학자입니다. 나는 솔론을 일부러 초대해서 만났던 일이 있습니다. 솔론의 현명한 말을 듣고 내가 모르는 바를 배우기 위하여 초대한 것이 아니라 나의 재산을 보여주면서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 생각하니, 재산이라는 것은 가지고 있는 동안의 행복보다는 잃어버렸을 때의 불행이 더욱 큽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가 하면, 재산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 내가 즐긴 것이라고는 실속 없는 소문뿐이었습니다. 지금 그것을 잃어버린 나는 이러한 고생과 불행을 겪고 있습니다. 모든 일이 그저 후회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런데 솔론은 나의 이러한 운명을 미리 알고, 올바로 살아가라고 가르치면서 일시의 부귀로 오만하지 말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이 말을 전해들었던 키루스는 크로이소스 왕보다 현명한 사람이었으므로, 솔론의 말이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크로이소스 왕은 어쩌면 자신의 거울이었던 것이다. 키루스는 크로이소스 왕을 자유롭게 풀어주고 일생 동안 후하게 대접하였다. 그러므로 솔론은 한 마디의 현명한 말로 크로이소스 왕의 생명을 구해주고, 키루스 왕에게는 커다란 교훈을 안겨주었다.



포플리콜라
-전제에서 지켜낸 평화로운 민주정과 시민의 권리


포플리콜라는 발레리우스의 명예로운 별명이다. 곧 ‘백성을 사랑하는 이’라는 뜻이다. 때문에 여기서 발레리우스와 포플리콜라는 동의어가 되므로 상황에 맞게 표현할 것이다.
난항하던 당시의 정체에 타르퀴니우스 스페르부스라는 악당이 부당한 방법으로 왕위를 찬탈했다. 백성들과 정치가들도 그를 미워했지만 이웃 강대국의 힘을 업고 있는 터라 아직 손을 쓰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루크레티아의 자살이 계기가 돼, 브루투스는 발레리우스와 시민들의 전적인 호응에 힘입어 전체를 공화제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시민들은 힘이 한 곳으로 집중되는 정체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터라, 두 명의 집정관을 선출했는데, 한 명은 혁명의 지도자 브르투스였으나, 다른 한 명은 안타깝게도 폭군에게 직접 피해를 입은 루크레티아의 남편 콜라티누스가 선정되었다.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패배한 발레리우스가 절망한 나머지 로마의 정국을 점복할 유력한 인물로 의심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전제의 영향력이 남아 있는 로마에서 추방된 전왕은 복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으며 우군을 은밀히 확보하였다. 불행히도 그의 우군의 선봉에는 집정관 브루투스의 두 아들도 있었다.
다행히 이들의 음모를 지켜보단 빈디키우스라는 시종에 의해 단서가 포착돼 이 일을 조기에 수습할 수 있었는데, 이 때 발레리우스의 일처리는 놀라울 정도로 재빨랐다. 그리고 이 사건의 처리를 두고 행동한 브루투스의 의연하면서도 냉정한 선택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두 집정관이 소란을 가라앉힌 다음, 발레리우스의 명령으로 반디키우스가 끌려 나와서 고소 내용을 반복하고 편지 내용이 밝혀지자, 피의자들은 변명 한 마디 할 수가 없었다. 모두들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몇 명이 브루투스를 편하게 해줄 요량으로 국외 추방을 언급했고 콜라티누스가 눈물을 흘리고 발레리우스가 침묵을 지키자 자비가 베풀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브루투스는 두 아들의 이름을 차례로 부르며 말했다.
“그래, 티투스, 그래, 티베리웃,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다는 말이냐?”
그는 이렇게 세 번이나 물어보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는 형리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내 직분은 끝났으니 너희들의 몫이 남아 있을 뿐이다.”
형리들은 곧장 두 청년에게 달려들어 옷을 벗기고 손을 뒤로 묶은 뒤 몽둥이로 닥치는 대로 때렸다. 다른 사람들은 그 처참한 광경을 차마 지켜보지 못했으나, 브루투스느 고개를 돌리기는커녕 불쌍하다는 표정조차 짓지 않은 채 엄격한 얼굴로 자리를 지켰다. 마침내 형리들이 아들들을 땅에 쓰러뜨린 다음 도끼로 목을 잘랐다. 브루투스는 다른 죄인들에 대한 문제는 동료 집정관인 콜라티누스더러 처리하라고 일임하고서 포룸을 나왔다.


이러한 행동에 대해 저자도 쉽게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생각의 여지를 남기는 말을 한다.

우리는 이 행동을 높이 칭송할 수도 있고 강력히 비난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의 위대한 성품이 자신의 슬픔을 극복하도록 한 것일 수도 있으나, 설움이 너무 커서 마음이 목석이 되어버린 것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의 신속한 조치로 발레리우스는 집정관에 선출되었으며,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해 정력적인 활동을 펼친다. 이 때 폐왕과 브루투스의 반감이 폭발해 무서운 전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한편 집권한 발레리우스는 왕과 대등한 권력을 갖고 있던 집정관의 권위를 많은 부분 국민들에게 되돌려 주었다. 이 때 솔론의 배심원 제도 등 많은 정치적 권리를 분배함으로써 세력의 균형을 가져왔다. 이에 따른 상징적인 조치로, 호위병들이 가지고 다니는 장대 끝의 도끼를 없애게 하였으며, 장대 또한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숙이게 함으로써 시민들이 바로 공화국의 근본임을 명백히 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상위의 정치적 농간’을 방지하는 여러 가지 법률을 제정했다. 첫째, 집정관의 판결에 불복하는 자는 누구든지 국민들에게 상소할 수 있게 했고, 둘째, 국민의 동의 없이 공직을 강탈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게 했고 셋째, 빈궁한 자들의 세금을 감면하여 그들이 생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평상시에 집정관에게 불복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그에 대한 법령도 만들었는데, 이 법령은 귀족보다는 일반 국민에게 유리하도록 만든 것이다. .한편 국가를 위협하는 극악한 범죄에 한해서는 선조치 후 평가받을 수 있도록 법적으로 보장해주었다. 살해자는 나중에 그 사람의 국가 위협의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만 보이면 무죄가 되었는데, 음모자들이 선수를 쳐서 법을 전복하고 법률의 제어를 받을 수 없는 것을 방비하기 위해서였다.
당시에 법률을 시행하고 대외정책이나 국가사업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세금 부과가 불가피하였는데, 발레리우스는 세금을 관리할 관료를 선발하여 위탁하였고, 신성한 신전을 국고로 지정함으로써 공정한 세금이 집행될 수 있도록 하였고, 재산 정도에 따라 유동적으로 세금을 부과하여 사람들은 불만 없이 납부하였다.
포플리콜라의 정치 인생에서 포르센나와의 관계는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또한 라틴 인과 사비니 인의 연합군과의 대결 국면을 전쟁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해결한 것은 그의 빛나는 업적이라 할 수 있다. 포르센나에는 현명한 암살자를 파견함으로써 그 나라 군주 앞에 로마의 기개를 보여주었고, 그로 인해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그리고 연합군의 내부적 갈등을 이용해 중요 인사를 포섭함으로써 전쟁을 지연시켰으며 분쟁의 대부분을 해소하였다. 뿐만 아니라 남은 적국과 대결할 때는 다양한 정보와 치밀한 작전을 구사함으로써 많은 피해를 겪지 않고서도 어려운 국면들을 모두 해결하였고, 대외 관계에서 로마의 우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때문에 그의 임종시에는 모든 시민이 만장일치로 일정금의 조의금을 내기도 하였으며, 그의 죽음이 측근이 아닌 온국민의 슬픔이 된 것은 그가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포플리콜라와 솔론의 비교


이 세상 내 떠나는 날,
친구들의 한숨과 설움을 받기가 나의 소원이니,


위의 시구와 앞에 소개한 솔론의 소박한 소망은 바로 포플리콜라를 가리킨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가장 현명한 사람은 솔론이며, 가장 행복한 사람은 포플리콜라였다고 술회하였다. 솔론의 평생 소원이 포플리콜라의 일생을 두고 실현되었으며, 포플리콜라의 빛나는 정치적 업적은 솔론의 법률을 채택함으로써 가능했다.

솔론의 평판은 포플리콜라를 능가해 왕으로까지 추대받을 정도였으나, 포플리콜라는 어렵게 얻은 권위를 유용하게 활용한 데 더욱 빛이 난다. 전제의 위협으로부터 민주정을 온전히 지켜냈으며 시민들의 권위를 신장한 것은 권력을 현명한 분화라는 측면에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때문에 포플리콜라는 ‘기반’을 마련한 정치가였다고 할 수 있으며, 솔론은 ‘가능성을 제공한’ 정치가이자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포플리콜라는 자신의 의지를 백일하에 드러내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직접적으로 대중을 설득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공론을 위협하는 타르퀴니우스를 몰아내고 그 동조자들을 색출하는 힘겨운 작업 끝에 민주정은 마침내 자리를 잡게 된다. 그는 용기와 끈기와 박력을 요구하는 일에 있어서 그는 과감하게 행동했으며 평화적인 협상과 설득과 양보가 필요한 경우 역시 능숙한 솜씨를 보여준 조화로운 사람이었다. 현명한 정치가는 모든 일에 있어서 가장 적합한 행동을 취한다는 저자의 말처럼 솔론이 고심하며 가다듬은 법률을 힘있게 실천함으로써 포플리콜라는 솔론과 함께 승리자가 되었다.


테미스토클레스
-영광스런 아테네의 복권


소피의 세계라는 책을 애독한 사람이라면 아래의 구절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기원전 5세기 초반, 아테에 인들이 페르시아 인들과 맞서 싸운 끔찍한 전쟁이 있었다. 페르시아 전쟁이라고들 하지. 기원전 480년에는 페르시아 왕 크세륵세스가 아테네를 약탈하고, 아크로폴리스의 옛 목조 건축물을 모조리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러나 아테네인들은 그 이듬해에 페르시아 병사들을 무찌르고, 아테네의 황금 시대를 열었지.그리고 아크로폴리스를 다시 축조하였다. 그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당당하고 아름답게 말이다. 그리고 이 때부터 이곳은 오직 신전만이 있는 성역이 되었지. 바로 이 시기에 소크라테스가 거리와 장터를 두루 돌아다니며 아테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던 것이다.

플라톤은 일생에 행운이 따라 그 시절 아테네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최고의 전성 시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이 기반 안에서 플라톤의 정신이 온전히 깨어날 수 있었다. 이렇게 아테네의 찬란한 역사는 테미스토클레스-페리클레스-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까지 연결돼 능력을 뽐낸다. 우리는 위의 구절에서 잠시 속도를 멈추고 아테네가 어떻게 페르시아라는 대국의 침략으로부터 강토를 지켜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테미스토클레스는 대단한 야심가이다. 그를 대단한 야심가라고 부르는 이유는 개인의 야심을 넘어서 도시 전체의 시민들에게 야심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분위기는 전쟁에 익숙해서 이웃나라의 강대국이 침입을 하면 헬라스 내의 도시들이 모여서 연합군을 결성한다. 아테네나 로마, 라케다이몬(스파르타) 같은 강대국이 주도적인 지위를 갖고 합심하여 적을 몰아내는 것이다. 페르시아는 그 중에서도 가장 강한 이방민족이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연합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지는 않았으나 조국을 설득하고 연합군을 결합시켜 마침내 페르시아 왕 크세륵세스의 야심을 꺾어놓기에 이른다.
여기서 철학사를 잠시 상기시킨다면 이 시대에 번성했던 사조는 우주가 아니라 인간이었고, 삶이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좀더 실무적이고 변호에 능하고 상대방을 설득하거나 ‘절차에 맞게’ 정적을 추방하는 능력은 그의 정신 깊숙이 소피스트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현실정치와 국제관계에 정통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설득술의 달인이자, 뇌물이나 속임수와 음모를 주로 사용했으나, 우리가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의 이러한 방책이 그의 개인적인 영광과 국가의 번영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명쾌하게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정적 아리스티데스를 추방한 것은 획득한 정권으로 국가를 더욱 부강시키기 위함이었으며, 지명도가 있는 인물에게 뇌물을 주어 정계를 떠나게 한 것도 그 인물됨이 국가를 기울게 하기에 충분할 만큼 덕망이 없었기 때문이며, 연합군 사령관에게 뇌물을 제공한 것도 사령관의 소인적 기질을 독려하고 전선을 계속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군량미가 떨어졌을 때 담당장교를 참살해 원성을 무마한 조조처럼 테미스토클레스도 중요한 의식물품이 분실되었다는 핑계로 전군의 소지품을 뒤져 충분한 군비를 확충한 것은 그가 카멜레온처럼 국면에 대응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한낱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님은 그가 이뤄낸 결과가 증명해주며, 그와 겨뤘던 페르시아의 왕 크세륵세스가 증명해준다.

당시 페르시아와 연합군 전력은 다윗과 골리앗보다 못한 것이었다. 대군으로 이뤄진 전열을 보고 지레 겁을 먹어 사령관과 병사들이 달아날 생각부터 품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전장에서나 상대도 안되는 전세를 대등하게 만들어 놓고, 지는 게임을 이기는 게임으로 만드는 장군들이 있었다. 제갈량이 그러했고, 나폴레옹이 그러했고, 테미스토클레스가 그러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대군과 싸울 때 적은 우군의 장점인 게릴라 공격과 측면이나 지형을 적절히 이용한 작전은 효과가 있고, 대군의 불리한 점, 즉 이동의 불편함이나, 국지전, 군량의 보급 등을 끊임없이 공략한다면 어떤 전쟁이든지 대등한 입장에서 전선을 유리하게 끌고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리고 치밀한 심리 전술로 달아나는 우군을 잡아두었으며 적군을 울타리로 활용하였다. 그리고 상대방의 전투력을 약화시켜 평정심을 갖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크세륵세스는 월등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허겁지겁 후퇴하기에 이른다. 때문에 저자도 ‘용기로 적을 누르고 지혜로 우군을 누르도록 설득함으로써 아테네 사람들에게 큰 영광을 안겨주었다’고 술회했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아테네 군이 페르시아군과 대치하고 있는 동안 약속된 연합군의 원군은 오지 않았다. 절망에 빠진 아테네를 보면 테미스토클레스는 과감한 결정을 내린다. 즉 아테네의 모든 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고 적군과 담판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한 번 잃은 영광을 되찾기는 어려운 법이다. 시민들은 당연히 그의 결정을 꺼려 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지혜주머니에서 한 가지 꾀가 튀어나온 것은 이때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신탁을 끌어들였다. 아테네 신의 신탁은 살라미스 섬으로 거처를 옮기고 나무로 만든 성에 의지해 오래된 영광에 또 하나의 영광을 덧붙일 수 있다고 했다. 나무로 만든 성은 곧 배를 뜻한다. 누마 폼필리우스의 축복에 의해서인지 신탁의 힘에 이끌려서인지 사람들은 그의 결정에 동조했고, 비장한 대이동이 전개되었다.

아테네 시민들이 도시를 비워둔 채 배를 타고 떠나는 광경은 처량하면서도 칭찬할 만했다. 노부모와 어린 자식들이 울부짖는 걸 보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사전에 미리 가족들을 타국으로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움직일 기력조차 없어서 아테네에 남겨진 늙은이들의 신세는 가련하기 그지없었다. 집에서 기르던 짐승들조차도 바닷가까지 달려나와 주인을 따라가고 싶어하며 짖어대었는데 그 모습 역시 애처로웠다. 페리클레스의 부친 크산티포스가 기르던 개는 도저히 주인과 떨어질 수 없었던지 바다에 뛰어들어 주인이 탄 배를 따라 헤엄쳐서 살라미스 섬까지 도착한 순간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그 곳에는 지금도 ‘개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여기서 대단히 중요한(이 영운전에서도 중요한) 대목에 이르는데, 그것은 추방된 정적 아리스티데스가 돌아온 일이었다. 그는 정치적으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국을 위해 돌아왔으며 거기에는 테미스토클레스의 교섭도 일조했다. 아리스티데스는 가장 중요한 지점에서 결정적인 조언을 함으로써 승리의 조언자가 된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연합군 사령관을 설득하는 장면도 백미의 하나이다.

에우리비아데스는 그의 본국 스파르타의 위신에 힘입어 연합함대의 총사령관이 되었으나, 위험이 닥치면 지레 겁을 먹는 사람이었다. 그는 지상군이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이스트무스로 후퇴하기를 원하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이 제안에 반대하였다. 그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긴 것은 바로 이때였다.
“올림픽 경기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출발하는 사람은 채찍질을 당합니다.”
에우리비아데스가 위와 같은 말을 하였을 때, 테미스토클레스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러나 뒤에서 아물거리는 사람에게 승리의 관을 씌워주지도 않더군요.”
에우리비아데스가 지휘봉을 치켜들고 내리칠 기세를 보이자, 테미스토클레스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때리시오. 그러나 이 말만은 들어주시오.”
에우리비아데스는 그의 온유한 성격에 놀라며 한 번 말해보라고 하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더욱 간곡히 그를 설득했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사람이 나서서 말하기를, 잃어버릴 집도 고향도 없는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다른 사람더러 고향을 버리라고 하느냐고 말하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그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답답한 사람아, 우리 아테네 사람들은 집도 성도 모두 버렸소. 생명도 영혼도 없는 한갓 재산을 지키려다 노예가 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그러나 우리의 도시는 그리스에 있는 그 어느 도시보다 더 훌륭하오. 그것은 우리의 배 200척으로 이루어진 도시오. 당신이 원한다면 그 배는 당신 나라를 지켜줄 것이오. 그러나 만일 당신들이 전과 같이 우리를 배반하고 줄행랑을 놓는다면 그리스 사람들 중 오로지 아테네 사람들만이 소중한 영토와 자유가 넘치는 도시를 차지할 수 있을 뿐, 당신네들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오.”

이렇게 연합군을 설득시켜 전선을 유지하고, 적왕에게 거짓 정보를 흘려 아테네 군을 전면 포위하도록 하였다. 이 사실을 가장 먼저 아테네 막사에 알려온 것은 아리스티데스로 그의 조언으로 아테네군은 도주를 단념하고 필사적으로 대항하였다. 지형과 기후, 국면과 속임수 등으로 적군을 제압하는 테미스토클레스의 능력은 앞에서도 보였다. 전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아테네 군은 대등한 위치에서 교묘히 적을 압박해 승리를 눈앞에 두었다. 여기서 적군의 퇴로를 끊고 압살하느냐 퇴군을 부추기느냐를 놓고 테미스토클레스는 고심하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아리스티데스에게 적군을 압살하리라는 의견을 슬쩍 떠보았으나 아리스티데스의 판단은 달랐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전쟁을 값비싼 여가선용 정도로 생각하는 페르시아 왕과 싸웠소. 그러나 만일 그를 그리스에 가두어 버림으로써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는다면, 그는 곧 황금양산 밑에서 뛰쳐나와 지략을 다하여 몸소 작전을 지휘할 것이오. 그는 단호한 자세로 자신의 과오를 수정해나갈 것이며 모든 현명한 충고를 받아들일 것이오. 테미스토클레스, 이러한 일은 우리에게 조금도 이로울 것이 없소. 그러므로 이미 만들어놓은 다리를 끊을 것이 아니라 되도록 그와 같은 것을 하나 더 만들어 그들이 가능한 한 빨리 유럽에서 빠져나가도록 해야 하오.”


이에 아테네 군은 전력을 다해 페르시아의 대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는데, 거기에는 테미스토클레스의 거짓 밀서도 일조를 하였다.

“그리스 군은 해전에서 이긴 기세를 타고 헬레스폰트로 배를 몰고 가서 거기 있는 부교를 끊어버릴 계획이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는 대왕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이 사실을 알려드리는 바이니 대왕께서는 속히 그 다리를 건너 대왕의 영토로 돌아가시라고 하오. 그 동안 이 사람은 그리스 군 연합함대가 지체하도록 시간을 벌어드리겠소.”


이렇게 해서 아테네는 옛 영광을 되찾음과 동시에 국제적인 질서에서도 가장 유리한 고지에 올랐다. 그러나 이러한 시련 후에는 반드시 그에 대한 견제와 시기심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위기가 지난 후 테미스토클레스는 정치적으로 코너에 몰렸으며 결국 퇴각투표를 통해 추방되고 만다. 질투의 경제학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sup>3)</sup> 테미스토클레스의 체념 섞인 독백은 인생의 무상함을 깨우쳐 준다.


아테네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지도 칭찬하지도 않으며 그저 쥐방울나무 취급을 할 뿐이라, 날씨가 사나울 때는 그 그늘 밑에서 피신하지만 날씨가 좋아지면 곧 잎을 따고 가지를 쳐버린다

이는 동양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영웅이 전성기 시절에는 집안에 수천면의 문객이 모여들지만 그가 영락한 후에는 마당 앞에 새그물을 놓아도 될 정도라고 불평하였다. 이것은 동서양 영웅들의 공통된 불만사항인 것 같다. 하지만 대세가 이러한데 어떠하랴. 인간성을 탓할 수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외로운 처지에서 빛과 함께 일어난 것처럼 빛을 거두는 운명을 탓하는 꼴 아니겠는가.
추방된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로 가게 되는데, 페르시아 왕은 호걸한 사람이어서 자신을 좌절시킨 이 영웅을 영웅답게 대접한다. 그리고 그의 곁에서 조국을 침략하도록 책동하지만 테미스토클레스는 ‘죽음의 화답’을 그에게 전할 뿐이었다. 후세에 이보다 더 젊은 나이에 추방된 사람들은 정말로 창을 거꾸로 쥐어 조국을 절망으로 빠뜨리기도 하지만, 이 영웅 1세대들은 힘겹게 일으킨 영광을 다시 전복시킬 수는 결코 없었다. 차라리 자신의 운명을 조용히 끝내는 편을 택했다. 이러한 특성이 영웅 1세대의 공통적인 특성이며 이들 중에는 조금만 손쓰면 나라를 뒤집어 놓을 수 있었던 상황이 많았을 테지만, 이러한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그들이 내린 결정을 보고 있으면 참으로 국가라는 것을 자신의 힘으로 일으키는 것은 긍지를 갖게 하는 일이지만, 국가에 손해를 끼치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며 해서는 안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이들의 선택 이면에 풍기는 향취가 너무도 애절하여 코끝이 찡해 온다.



주)
1) 휴브리스
그리스어로 '신의 영역까지 침범하려는 오만'을 뜻하며, 과거에 성공한 사람이 자기 능력과 방법론을 우상화하여 과하는 오류. 역사를 바꾸는 데 성공한 창조적 소수가 그 성공으로 교만해지고, 지적․도덕적 균형을 상실하며 판단력까지 잃게 되어 역사의 역동성을 저해한다는 의미로 역사학자 토인비가 채택한 용어.
2) 아프락사스
헤르만 헤세가 고안한 용어로, 새가 알을 깨고 세상에 나타나듯이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과감히 부수고 새롭게 태어난다는 의미
3) 질투의 경제학
부자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걷어야 한다는 '분배의 정의'는 사실 '질투'의 다른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는 일본의 경제학자 다케우치 야스오 교수의 지적. 여기서는 정당한 정치적 제도를 통해 영웅을 추방하지만, 그 이면에는 영광에 대한 질투와 좌절된 영광에 대한 질투와 좌절된 영웅을 보는 쾌감이 추잡하게 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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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2-12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테세우스까지만 읽고 일단 물러납니다.^^

승주나무 2006-02-12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저도 얼른 7권까지 끝내려 하는데.. 써내기도 참 힘들군요..사기열전도 봐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