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기 1 - 돌 원숭이 손오공 문지 푸른 문학
오승은 지음, 임홍빈 옮김, 김종민 그림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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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가장 자랑스러운 책 읽기는 은하영웅전설 완독과 서유기 완독이다. 

은하영웅전설은 스무 살 때 절친의 매우 강력한 권유가 있은 지 20년만에 읽은 책이었고, 

영화가 개봉된다니 반갑다. 양웬리의 캐릭터 이외에 좋은 점수를 주고 싶지 않은 책이다. 

일본 만화책 <쿠니미츠의 政>처럼 보여주려는 주제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고 편협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서유기는 최근 페이스북에서 즐독하는 한 젊은 작가가 극력 추천해서 읽게 되었다. 

내 가벼운 귀는 독서에 도움이 된다. 

서유기 10권은 내 인생책이 되었다. 

수백년 동안 집단창작했던 오래된 이야기를 괴테 같은 괴력의 작가 오승은이 독창적으로 재창조했고, 

삼장법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여러 텍스트와의 전쟁에서 정본으로 살아남았다는 점과, 

예전에 읽으려고 했던 이탁오가 깊이 관여돼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탁오의 책을 자꾸 미뤄뒀는데 <서유기>를 읽고 나서 읽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분서>는 1권만 사뒀는데 이제 2권도 구해서 제대로 읽어봐야겠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그렇게도 비난했던 작품과 극작 기법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를 이보다 통쾌하게 걷어찬 오승은 서유기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고향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손오공을 위시한 진보적이고 건강한 민중이 툭하면 여래부처와 관세음보살을 소환해 문제를 해결하고 멈출 수 없는 독설과 조롱은 도무지 성역이 없다. 불교철학과 도교철학의 본의가 건강한 민중성과 환상적인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작품 중 서유기보다 강력한 것은 못 보았다. 그뿐만 아니다. 지금까지 정치와 역사를 끌고 왔던 독서인층과 기득권, 권력자들을 삼장-국왕-관리-각종 기득권층 덩어리로 묶어 '위대한 서천행'에서 나름대로의 구실을 인정하고 있기에 서유기는 당대의 모든 계급과 주체를 망라한다. 그리고 이것들이 모조리 성장한다. 


서유기가 다른 성장소설에 비해 매우 독특한 위상을 차지하는 부분은 '모든 것의 성장'을 그려낸다는 점이다. "도가 한 자 커지면 마는 열 자 커진다"는 서유기 퀘스트의 작동 원리는 요괴도 성장하고 문제도 성장한다는 점을 아주 잘 표현했다. 우리가 읽은 대부분의 성장소설은 주인공만 성장하거나 일부분만 성장하는 데 비해, 서유기는 악도 성장한다. 점점 고도의 스테이지로 옮기며 투쟁의 수준을 높이는 방법은 전자오락 게임을 연상시킨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서유기의 플롯을 아주 잘 활용하고 있는 데 비해, 우리나라의 여러 작품들은 서유기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갈피를 못잡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지적인 토양이 서유기를 철저히 배격하는 방식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서유기가 나의 인생독서가 될 수밖에 없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제까지의 독서흐름에서 잡히지 않았던 매우 넓고 역동적인 공간에 나는 드디어 로그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서유기는 그 공간의 인증키와 같은 역할을 했다. 


일단 서유기와 인사는 했으니 앞으로 죽을 때까지 지지고 볶고 우려먹고 해야겠다. 



"젊으신 도련님이라 세상일에 철이 덜 드셨군! 도둑질하는 놈이 밝은 대낮에 손대는 것을 어디서 보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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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류 삼국지 1 - 도원에서 천하를 꿈꾸다 여류 삼국지 1
양선희 엮음 / 메디치미디어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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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쓴 삼국지


삼국지는 누구나 아는 작품이고, 대부분은 읽었던 작품이지만 나이가 들면 언젠가 헤어져야 하는 '전자오락실' 같은 느낌이다. 나도 꽤 많은 삼국지를 읽었다고 자부하는데, 언제부턴가 사마천의 사기가 삼국지보다 더 재미 있었다. 유명한 작가의 삼국지가 출간될 때마다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게 펼쳐보긴 하지만 역시 마음속에는 '삼국지를 읽기에 난 너무 커버렸어.' 하는 생각이 강해질 뿐이었다. 나는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다시 쓴 삼국지'를 읽었을 때 막연하게 생각했던 그 '불만'이 생생하게 펼쳐졌다. 기자 생활을 23년째 하고 있는 양선희 중앙일보 논설위원이 수 년에 걸쳐 '편작'한 <여류 삼국지>를 읽고 삼국지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여류(余流)란 편작자가 스스로가 붙인 이름으로 "스스로 삶의 방식을 탐구하고 방향을 세우고 그대로 살아간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여류 삼국지는 '내 스타일의 삼국지'라는 뜻이다. '여류 삼국지'라는 제목은 나에게 이렇게 묻는다. "너는 삼국지를 네 것으로 만들었나?" 나는 삼국지를 여러 번 반복해서 읽으면서도 내 방식으로 읽기보다는 정사에 기대고 문학작품에 기대고, 유명 작가에게 기대고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삼국지의 인물들은 나의 유비가 아니라 누군가의 유비였고, 조조 역시 다른 사람의 해석을 그냥 받아들였다. 이것은 놀라운 발견이었다. <여류 삼국지>를 읽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상에 갇혀서 삼국지를 그저 그런 작품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삼국지가 나의 것이 된다는 말이 무엇인가? 삼국지 속의 등장인물과 편견 없이 만나고 그 인물이 되어보는 것이다. 내가 특히 삼국지를 멀리하게 된 까닭은 '유비' 때문인데, 촉한정통론으로 그려진 유비의 모습은 어릴 적에는 반공사상과 맞물리면서 영웅적인 지도자로 맹신했고 반공 이데올로기가 유치하게 느껴질 즈음 유비는 가식적인 인물이 되어 있었다. 양선희 작가가 편작한 <여류 삼국지>에서 유비는 처세를 위해서 자기 속마음을 숨기고 명분을 이용할 줄 아는 인물로 그려져 있었다. 다양한 영웅들이 들고 일어섰지만 유비는 브랜드의 차별성을 강조했다. 


현덕은 명문호족도 아니고, 도적 떼로 출발하는 군벌도 아닌 그야말로 기성세대에서 찾을 수 없는 충의와 위민이라는 신개념 의군을 창설할 뜻을 내비친다. ㅡ <여류 삼국지> 1권 42쪽


유비는 끊어진 유씨 가문의 뒤를 잇는 의로운 왕족에 머무르지 않고 난세에 세상을 호령할 야심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출세의 야욕을 가지고 있는 당대의 평범한 장부'라는 묘사는 인물의 현실감을 준다. 그리고 '가문의 몰락을 방어하는 왕족'은 유비의 포지셔닝이지만 개인적 야욕과 명분이 분리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유비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가 생긴 까닭은 뜨거운 피가 흐르는 유기체로 보지 않고, 신화 내지는 화신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황건적에 대한 접근 역시 리얼리즘에 입각해서 썼다. 장정일은 아예 황건적을 중심으로 삼국지를 서술할 정도로 대중의 분노는 존중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황건적(黃巾賊)이 아니라 황건기의(黃巾起義)다. 양선희는 이 장면에서 균형감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장각은 군 전체가 알아주는 수재였으나 한나라 말기 타락한 등용제도 탓에 벼슬에 오르지 못한 울분에 찬 인재였다. ㅡ 위의 책 32쪽


<여류 삼국지>를 쓰기 위해 작가는 그 동안의 소개된 모든 삼국지를 검토하고 정사의 기록을 살펴 논리적 모순과 과도한 관념을 벗겨냈다. 이 덕분에 인물과 인물의 행동은 논리적 개연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사건의 전개 역시 매끄럽게 진행될 수 있었다. 때문에 '벤처기업'이니 하는 현대식 용어를 편작자는 맘껏 썼지만 삼국지 작품과 인물들을 침해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고고학자가 현대의 공법을 이용해 당시의 유물을 재현하고 정확히 설명한 느낌이 들어서 드디어 나도 삼국지를 재평가할 기회를 얻었다. 



다시 읽은 삼국지


삼국지를 다시 읽으며 다시금 느끼게 된 것은 현재의 눈으로 삼국지를 살펴보며 지속적으로 영감을 얻을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관념이나 문헌에 치우치지 않고 중심만 잡을 수 있다면 삼국지는 별 볼 일 없던 시절부터 힘을 얻고 세를 불리는 시절까지 한 인물이나 세력의 성장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성장 과정에서 겪는 일과 이를 통해 엿볼 수 있는 생각과 행동을 나와 대비시킬 수 있다. 예컨대 절세의 미인 '초선'을 이용해 여포와 동탁을 이간질해 겨우 기회를 잡은 사도 왕윤은 허무하게 기회를 놓쳐 나라를 위기에 빠뜨리고 백성들을 끔찍한 불구덩이에 빠뜨린다. 역적 동탁과 개인적인 인연으로 슬픔을 표시한 기재 채옹을 죽인 점과 이각과 곽사가 표문으로 사죄했을 때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몰아친 점은 뼈아픈 패착이다. 천금 같은 기회를 얻었을 때 사람들은 흥분하기 쉽고 벌써 일이 이뤄진 것처럼 안절부절하다가 기회를 잃곤 한다.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취해야 할 최선의 조치만 취한 사람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책을 읽으며 나는 지금 내 앞에 순식간에 기회가 나타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나는 사도 왕윤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있을까? 유비가 서주를 단념한 일이 떠오른다. 유비는 서주 자사 도겸이 여러 번 간청해도 취하지 않고 도겸이 임종에 이르러서야 마지못해 임시로 받는둥 하더니 곧바로 여포에게 서주를 넘긴다. 불만이 가득한 형제들을 설득하는 유비의 말 속에는 기회에 대한 바른 자세가 엿보인다. 


"몸을 굽히고, 분수를 지키며, 하늘이 주신 때를 기다려야 한다. 감정에 휘말려 헛되이 목숨을 걸고 일을 도모하면 안 된다. 가장 중요한 건 살아남는 것이다. 살아남아야만 하늘도 기회를 주실 수 있다. 때를 기다리자꾸나." ㅡ 위의 책, 375쪽


축구 경기를 하다 보면 예기치 못한 상황에 기회가 넘어오는 경우가 있고, 기회가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나에게 공이 굴절되어 왔을 때 허둥대지 않고 우리 편에게 연결해 공격을 할 수 있도록 나의 역할을 다하는 사람은 기회를 잃지 않는다. 유비는 약할 때를 알았으니 강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희노애락은 반복되지만 여기에 임하는 자세는 한결같다. 고대의 영윤(令尹)이라는 인물은 세 번 재상의 벼슬에 올랐는데, 벼슬을 할 때도 기뻐하는 기색이 없고 벼슬에서 물러날 때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다고 한다. 그저 자기 일을 꿋꿋하게 할 뿐이다. 이런 독해가 가능한 이유는 역시 편작자의 의도에 있다. 인물을 중심에 두기보다는 '일'을 중심에 두며 독자가 하고 있는 일과 삼국지에서 일어나는 일을 갈마들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사도 왕윤이 기회를 얻었을 때의 사례와 유비가 기회를 얻었을 때의 일을 비교할 수 있게 하고 인물들의 행동과 이에 따른 결과들을 비교할 수 있도록 안배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 두 가지 일을 떠올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것이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한다면 좀 더 직접적인 편작자의 목소리를 들어 보자. 이각과 곽사의 일을 이야기하며 편작자는 동탁과 여포의 일을 직접 거론한다. 


양표는 자신이, 왕윤이 성공한 계책을 실행한다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당시는 동탁 한 사람만이 강력했으므로 약자들이 힘을 모아 꼼수로 이길 수 있었다. 하나 이각과 곽사는 엇비슷한 권력과 무력을 가진 자들이다. 둘이 맞붙으면, 고래 싸움에 새우등은 엄청나게 터져 나가게 돼 있다. 지금은 바로 황제도 왕새우 정도였다. ㅡ 위의 책 327쪽


하나의 일을 겪은 시점과 상황, 그리고 사람 등만 다를 뿐 이치는 같기 때문에 여류 삼국지의 사건들은 같은 선상에서 비교될 수 있고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 이제까지 읽었던 삼국지에서 이런 경험을 할 수 없었던 까닭은 사건에 대한 다각적이고 치열한 분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류 삼국지>를 읽는 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렇게 나는 '삼국지' 읽기에 다시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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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함께 보고 싶은 외국원작소설
화차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4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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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 김민희의, 김민희를 위한, 김민희에 의한 <화차>




 

▲ 변영주 감독이 7년만에 연출을 맡은 영화 <화차>(왼쪽), 영화의 동명원작 미스터리 소설 <화차>(오른쪽) 두 작품은 동시에 개봉과 재출간이 이루어졌다.

2월 22일 오후2시 용산CGV에서 흥미로운 영화 <화차>의 시사회에 참석했다. 극장 아래에 위치한 용산역은 영화 <화차>의 하이라이트 장면이 긴박하게 펼쳐진 상징적인 무대이기도 하다.

영화 <화차>는 결혼을 앞둔 약혼자가 전화 한 통화를 받고 갑자기 행방불명되는 사건을 추적해 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충격적인 미스터리를 다루고 있다. 변영주 감독이 7년 만에 연출한 영화로 일본의 사회파 미스터리의 대가 미야베 미유키(일명 미미 여사)의 동명 원작을 영화화한 것이다.

미미 여사의 작품이 영화화된 것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다. 원작의 완성도를 재현하기 위해 변영주 감독은 무려 3년 동안 10고에 이르는 시나리오 퇴고를 거듭하고 70여곳을 로케이션(장소 섭외)했고, 한 장소에서만 무려 30번 넘는 현장답사를 했다. 이러한 흔적이 영화에 남아 있다.

[김민희의] '이선균의'가 안 된 이유

 

이 글은 미야베 미유키의 원작 소설 <화차>(문학동네)를 읽고 두 작품을 비교하며 쓴 리뷰다. 따라서 영화가 가지는 독특한 매력을 '책'이라는 창으로 바라봤다.

<범죄와의 전쟁>이 최민식의 영화라면 <화차>는 김민희의 영화다. 미유키 원작소설 <화차>의 주인공 중에서 영화가 창조적으로 그려낸 인물은 김민희가 독보적이다. 김민희 고유의 신비롭고 몽환적인 이미지가 영화와 잘 어울릴 뿐만 아니라 김민희의 연기가 성장했다는 느낌이었다.

이선균의 영화가 되지 않는 까닭은 이선균이라는 배역 자체가 원작에서 워낙 적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원작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는 영화로서는 아무래도 원작에서 잘 다루어지지 않은 인물에 작가적 상상력을 불어넣는 데 한계가 있지 않을까 한다.



[김민희를 위한] 이선균으로서는 안타깝고 아쉬운...


사실 영화 <화차>가 이선균을 위한 작품이 될 경우의 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랑했던 여성과의 시간을 부정당했다는 것은 이선균이 추적을 끝까지 할 수 있는 동기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부분이 영화에 잘 그려지지 못했다.

드라마와 영화를 오고 간 배역이 작품에 대한 시차를 방해했다는 느낌도 든다. 이선균으로서는 여러 모로 아쉬운 대목이다.

반면 김민희는 다른 사람의 존재를 빼앗아야 하는 절박성이 충분히 설명되었다. 원작이 여주인공의 개성 넘치는 행위를 통해 적극적으로 자기변호를 하는 반면, 영화는 주인공을 타자화시킴으로써 불가피함을 납득시킨다. 김민희는 연기로서 이것을 잘 표현했다. 따라서 영화 <화차>는 김민희를 위한 작품이다.


[김민희에 의한] 변영주 감독의 '선택'


영화의 이야기가 김민희에 의해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애초부터 영화 등장인물들이 사라진 김민희를 추적한다는 설정이기 때문이다.

원작에서는 휴직 형사(영화는 퇴직 형사)와 그의 가족, 이웃, 추적 과정에서 만난 사연 많은 동창생, 죽은 개로부터 실마리와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이러한 자잘한 사정을 영화적으로 재구성하기에는 이야기의 전개가 너무 다양하고 풍부하다. 그래서 감독은 오로지 김민희라는 창을 통해서만 이야기를 전개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하지만 원작이 가지고 있는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정신은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화차>는 1990년대 일본의 개인 신용불량과 카드채 사태를 모티브로 다루고 있는데, 2012년의 대한민국 상황과 거의 흡사하다.

그 동안 사회활동에 깊숙이 관여한 변영주 감독이 탐낼 만한 이유가 있는 작품이다. 작품은 흔히 '의미'와 '재미'로 구분되는 경우가 많은데, <화차>의 경우는 의미와 재미가 겹치는 독특한 위상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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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2-25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김민희 연기가 눈에 별로 안 들어오던데.
아주 괜찮게 봤나 보구나.
이번에 책 함 읽어볼까 하는데 영화는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알라딘 시사회 한다고 해서 신청은 했다만 될지 모르겠어.ㅋ

승주나무 2012-02-27 13:41   좋아요 0 | URL
꼭 됐으면 좋겠어요^^원작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고 여자 주인공에 시선이 맞춰져 있어요. 소설은 교쿄, 영화는 선영(김민희 역)

프레이야 2012-03-02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미와 재미가 겹치는 독특한 위상, 이 한 마디로 '화차'가 더욱더 기대되어요.^^

승주나무 2012-03-09 02:05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 님//오랜만입니다. 요새 카피감을 키우는 중이라 ㅎㅎ
 
기술과 명예를 가진 자들의 레드 예리코 작전 - 태양의 딸을 찾아서 HGS 비밀결사대 1
조슈아 몰 지음, 강미경 옮김 / 서해문집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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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드 예리코>의 활동 무대. 중국 본토와 남중국해, 영국, 이탈리아 피렌체에 걸쳐 있다.


세계 무대와 2천년을 넘나드는 장대한 스케일

 
세계 정복을 꿈꾸는 악당들이 노리는 물질인 '태양의 딸'과 그것을 얻기 위한 열쇠인 '자이롤라베'는 기원전 326년 알렉사드로스 대왕의 인도 원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533년 과학자와 탐험가를 주축으로 결성된 폐쇄적인 HGS(명예로운 전문가 동업조합)은 자신들의 기술과 지식으로 세계에 보탬이 되고자 하였지만, 3개의 분파로 갈라지고 분파들이 악당들과 몸을 섞으면서 오히려 더욱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이제 '태양의 딸'을 통해 세계를 지배하려는 자들과, 그 음모를 막으려는 자들로 나눠지고 이 작전에 긴밀하게 간여한 더그와 레베카의 부모님과 삼촌은 사건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물론 이러한 구성은 작가에 의해서 나온 것이지만 세세한 정보들은 분명 과학적이고 역사적인 연구에 의해서 나왔다는 사실을 몇 페이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전혀 새로운 형식의 소설을 접하며 들뜬 마음으로 책장을 건너며 중간중간에 밀봉된 '기밀사항'을 긴장된 마음으로 뜯어보았다. 그리고 전투함의 구조라든지 기구의 사용법을 익히며 마치 내가 그 모험에 동참한 듯한 착각을 느꼈다.

고집스럽고 호불호가 분명하지만 쾌활하고 모험을 즐기는 두 남매 더그와 레베카는 실종된 부모님을 찾기 위해 삼촌을 찾아가는데 부모님의 실종에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뒤늦게 사실을 알아채게 되고, 자신들이 그 비밀의 한가운데로 가고 있다는 사실 역시 뒤늦게 알게 된다. 하지만 HGS 출신의 부모님들의 피를 물려받은 남매 답게 모헙을 피하지 않으며 스스로 해결방법을 찾아 예기치 못한 순간들과 적들을 물리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엉뚱한 꼬마과학자 더그가 발휘하는 기지는 번번이 나를 놀라게 만든다. 



<레드 예리코>의 3대 미덕

나는 다빈치 코드를 읽지 않았다. 해리 포터 시리즈, 다빈치 코드 등 영국적 상상력과 위트가 풍부한 소설들을 읽기에는 나의 독서 목록표가 너무 완고해서 그런지 모르겠다. 그러다가 우연히 <레드 예리코 작전>이라는 책을 만났다. 이 책을 읽고 내가 영국 소설들을 너무 만만하게 보지 않았나 하는 죄책감까지 들었다. 영국인들의 상상력에 경의를 표한다.

<레드 예리코>는 우선 성실하다. 어떻게 구상하고 어떻게 디자인했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텍스트의 흐름에 맞게 신문기사와 방의 구조도, 장치의 사용방법 등을 면밀히 기록해 놓았다. 특히 선박에 대한 정보 등 전문적인 분야에서 공부를 많이 한 듯하다. <작은 것들의 신>이라는 데뷔작으로 영국의 권위 있는 <부커상>을 수상하면서 일약 세계적인 스타가 된 아룬다티 로이는 그 후로 단 한권의 소설도 발표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핵실험, 대형댐 건설 프로젝트, 다국적 기업의 행태를 고발하는 정치칼럼을 쓰면서 댐에 관한 기술서, 토목공학에 관한 실무적인 책들을 수없이 공부하며 정치칼럼가로서 다시 한번 태어난다.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기술이나 물리 등에 대해서 소홀히 생각하거나 가볍게 생각하기 쉬운데, 작가가 그런 지식을 갖고 있고 열정적으로 그런 지식을 흡수한다는 것은 분명 뛰어난 자질임이 분명하다. 나는 이렇게 많은 참고문헌이 소용된 소설책은 처음 본다. (책의 말미에 보면 이 책을 만들기 위해 사용한 참고문헌의 목록이 가득 채워져 있다)

레드 예리코의 구성은 더그와 레베카라는 똑똑하고 까칠하며 고집스러운 남매가 실종된 부모님을 찾아나서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예기치 못한 모험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전개가 급격하기 때문에 긴장감을 늦출 수 없지만, 두 아이의 일기장과 스케치를 통해서 장면들을 환기해 준다. 소설의 내래이션인 셈이다. 소설이 흘러가면서 캐릭터들은 성장을 거듭한다. 성장을 거듭할수록 적들도 더 강해진다. 전형적인 게임의 원리이지만, 생각하는 캐릭터라는 점에서 생동감 있다. 레베카의 캐릭터는 더그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눈에 띄지 않지만 이 책이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캐릭터 부분도 흥미를 줄 것이다.

캐릭터들의 생생한 대화와 행동은 이 작품의 맛을 더해준다. 특히 악당에 대한 묘사에서 작가는 경지에 이룬 것 같다. 그 중에서 악당 성팟에 대한 묘사는 얼굴을 찡그릴 정도로 '못됐다'. 성팟은 자신의 요새 주위를 호위하는 무장 경비병을 300명 거느리고 있는데, 그들의 얼굴에 직접 V자 표시를 새겨 넣었다. 그 표시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 같은 것인데 이 표시를 한 이유는 누군가 부하들을 자청하며 요새로 숨어드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다. 만약 성팟의 부하로 변신해 침입하고자 한다면 우선 V자 표시를 해야 하는데, 그것마저도 성팟이 직접 한 것이기 때문에 부하를 가장하는 것이란 불가능하다. 이처럼 <레드 예리코>에 묘사된 악당은 용의주도하면서도 끔찍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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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아침이슬 셰익스피어 전집 1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정환 옮김 / 아침이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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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의 위기에서 '고전'을 펼쳐야 하는 이유

셰계 금융위기로 촉발된 한국경제의 위기조짐을 두고 혹자는 제2의 IMF라고 일컫기도 한다. 이번 위기는 단지 규모만의 위기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와 물신주의에 묻혀 있던 인간의 가치와 삶의 방식 등 근본적인 반성을 하게 만들기 충분하다. 이에 맞춰 CEO들의 인문학강좌 열풍이 언론에 소개돼 화제다. 금융위기의 한복판에서 위태로운 처지에 몰린 증권회사의 한 간부는 "월가의 금융위기가 우리나라에도 곧 닥치겠지만 10년 전 외환위기때와는 다르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며 수강신청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시사IN 58호)
하지만 '근본적인 반성'이라는 것은 쉽게 도달할 수 없는 경지다. 우리들은 자신의 앞가림하기에도 바쁘기 때문에 맘 편히 앉아서 사유하기가 쉽지 않다. 깊이 사유하고 반성하기 위해서는 선각자의 가르침이나 고전의 진수에 의지해야 한다. 우리는 사색적 생활이라는 오랜 전통을 이어오고 있었던 민족이었지만, 언제부턴가 사유의 밑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고전 읽는 사람이 없어졌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떤 고전을 읽어야 할지에서부터 생각이 막히지만, 나는 셰익스피어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불안정하고 허무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운명과 감정을 낱낱이 드러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굳건한 지위는 협잡군은 얕은 속임수 앞에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복수의 감정은 또다른 비극을 불러온다. 진정어린 사랑과 곧은 충성심도 머뭇거림과 편견 앞에서는 맥을 못 춘다. 셰익스피어의 불행한 인물들은 우리들의 삶을 지나칠 정도로 명명백백히 고발한다. 불편할 정도로.


▲ 햄릿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미쳐버린 오필리아가 물속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 이것은 4막 7장에 나오는 장면이다. 존 에버렛 밀레이의 그림 


배신, 맹목적 복수심, 광기의 이름은 '햄릿'

삼촌(클로디어스 왕)의 존속 시해로 허무하게 아버지를 잃게 된 햄릿은 아버지 유령에 의해 사건의 전모를 알아차리고 살인사건과 동일한 설정의 연극 초연에서 삼촌 왕이 당황하는 것을 보고 실상을 모조리 알게 된다. 하지만 어머니에 대한 배신과 분노는 삼촌의 그것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맙소사, 하느님은 최상의 코미디 작가지! 사람이 유쾌하지 않을 수가 있나? 봐, 내 어머니가 얼마나 명랑해 보이는지, 아버지가 죽은 지 두 시간도 안 돼서 말야.
- <햄릿>(아침이슬), 100쪽

동양적으로 표현하자면 '남편에 대한 탈상이 끝나기도 전에' 어머니 거트루드 왕비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지만 "네 영혼이 네 어머니께 어떤 벌도 획책하지 말 것. 그녀는 하늘에 맡길 것"(햄릿, 45쪽)라는 아버지 유령의 충고 때문가 햄릿으로 하여금 불 같은 증오를 표현하는 것을 막아세웠다. 햄릿이 왕비의 내실에 숨어 염탐하던 클로디어스의 충복이자 햄릿의 연인 오필리아의 아버지 폴로니어스를 죽인 사건이 있고부터 국면은 급격히 악화되고 운명의 잔인한 장난이 시작된다.

맹목적 복수심에 사로잡힌 햄릿을 열렬히 사랑했던 오필리아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상처를 입게 되고 사랑과 가족을 잃은 슬픔에 자살하고 만다. 이로 인해 오필리아의 오빠이자 폴로니어스의 아들인 레어트스의 복수심은 극에 달하고 클로디어스 왕은 이를 이용해 햄릿을 죽일 계획을 세운다. <햄릿>에서 가장 슬픈 대목은 햄릿의 맹목적인 복수심이 불러낸 또다른 살인과 복수, 사랑의 좌절이다. 가혹한 운명의 장난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레어트스와 햄릿, 클로디어스 왕, 거트루드 왕비가 모두 죽고 나서야 종국에 다다른다. 이 모두 삼촌인 클로디어스 왕이 불러낸 비극이지만, 사실 아버지 왕의 죽음은 이들의 가혹한 운명에 비하면 사소하기까지 하다.



▲ 햄릿의 맹목적 복수심은 또다른 불행한 복수심을 낳았다. 아버지 왕을 잃은 햄릿으로 인해 사랑하는 아버지와 여동생을 잃은 레어트스가 결투하는 장면.


맹목적 신념, 절망 앞에 사라지는 삶의 가치

<햄릿>의 상황은 우리네 인생사에서 똑같이 재현될 수는 없겠지만, 그 이치만은 고스란히 다가온다. 경제성장이라는 맹목적 목표에 사로잡혀 결코 버려서는 안 되는 삶의 가치와 인간의 존엄을 '사소한 희생량'으로 치부해버렸던 근래의 모습이나, 상대방에 대한 비방과 맹목적 공격은 옳은 주장도 쉽게 묵살해 버린다. 미군정, 독재 시절에 이미 사라졌어야 할 색깔론은 2008년 대한민국에서 더욱 찬란한 색깔옷으로 갈아입고 '좌파척결'이라는 치맛자락을 휘두른다.
당당한 사회의 일원인 시민들은 세상을 변화시키기보다는 패배감에 젖어 있고, 삶을 포기한 극단적인 선택인 자살사례는 너무 흔해서 뉴스에도 소개되지 않는다. 

<햄릿>이 절박한 우리 삶의 단면에서 가르침을 줄 수 있는 것은 좌절과 불행에 대한 카타르시스에 머무르지 않는다. <햄릿>에서 보이는 불행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아버지 왕의 불행을 첫 번째 불행이라고 한다면, 복수에 사로잡힌 햄릿이 불러낸 불행은 두 번째 불행이다. 첫 번째 불행은 피할 수 없었지만, 두 번째 불행은 피할 수 있었다. 이것이 <햄릿> 비극의 핵심이다. 어려운 경제상황, 말도 안 되는 정치적 탄압, 날마다 나를 괴롭히는 좌절과 공포는 피하기 어려운 불행일 수도 있지만, 이후에 만나게 되는 자살과 패배감 등의 불행은 피할 수 있는 불행이다. 누구나 불우한 순간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 다음의 불행을 자초하느냐 마느냐는 순전히 본인의 몫으로 남는다.


▲ 이번에 새로 번역된 김정환의 <셰익스피어> 작품 5편은 번역자가 오랫동안 숙원했던 작업으로 극작가 셰익스피어의 집필의도와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온전히 드러내 보인 것 같다. 실제로 번역 문장 한줄 한줄에 번역자의 고뇌를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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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8-10-27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인문학 강좌... 가격 보셨나염? 1200만원... 헐~~~~~~
요즘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읽고있는데, 데이비드덴비란 영화비평가가 콜럼비아 대학에 가서 청강하는 이야깁니다. 무료 청강과 1200 만원의 간극이란...

승주나무 2008-10-30 11:39   좋아요 0 | URL
아~ 그렇게 비싼 거였군요.
하기야 그런 분들은 1억원이라도 내셔야 프로그램도 좋아지고,
사회에도 도움이 되겠죠.. 모처럼 의미 있는 데 돈 쓰는 기분 아닙니까^^

드팀전 2008-10-29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시사in> 기사를 봤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해악은 돈을 벌기 위해서 철학을 하는 자들이다.' 라는 말이 있더군요.CEO들이 그렇게 되질 않길 나이브하게 기대해봅니다. <햄릿>같은 경우는 개인적으로는 정신분석학적 비평들이 흥미롭더군요. 오랫동안 무대 위에서 연출되고 또는 텍스트로 해석되었으니까 이런 다양함이 <햄릿>을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습니다.

승주나무 2008-10-30 11:40   좋아요 0 | URL
네~ 저도 햄릿을 그냥 콤플렉스 수준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는데, 원전을 살펴보니 햄릿의 인간상에는 분석할 수 있는 요소가 매우 많았습니다.

햄릿의 직관과 고뇌에 대해서만 살펴보려고 해도~~ 어휴~~
이번에 운 좋게 뮤지컬 햄릿에 당첨됐는데.. 후기를 곧 올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