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 - 실종자
레알 고부 지음, 양혜진 옮김, 프란츠 카프카 원작 / 이숲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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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삼부작 중에서 <아메리카>(실종자)가 가지고 있는 차별성


도서관에 갔다가 우연히 그래픽노블 코너에서 프란츠 카프카의 <아메리카>(실종자)를 보았다. 

몇 시간이면 읽을 분량이라 단숨에 읽었다. 

고독의 3부작 중에서 주인공이 유일하게 죽지 않는 작품이지만, 카프카의 일기와 서한을 보면 주인공을 죽일 계획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미완성 유작이기 때문에 죽지 않은 주인공의 기묘한 방랑기다. 

원작은 <실종자> 또는 <실종>으로 제목을 쓰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픽노블에서는 <아메리카>를 제목으로 썼다. 

그것은 그래픽노블에서는 미국이라는 무대를 디테일하게 살렸기 때문이다. 

아마 그래픽노블의 저자 레알 고부가 캐나다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원작에서는 아메리칸 스타일의 독일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 미국 같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원작의 제목 역시 <아메리카>였는데, 나중에 편집자가 카프카의 일기에서 <실종자>라는 제목을 발견해 고쳤다고 한다. 


<아메리카>(실종자)는 <성>과 <소송>과 분명한 차별성이 있다. <성>과 <소송>은 이미 인생의 하강곡선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미끄러지는 반면, <아메리카>(실종자)는 산 꼭대기로 올라가려다가 기슭을 따라 미끄러지고 추락하는 이야기다. 

추락의 폭이 더 크기 때문에 독자가 느끼는 충격도 더 클 수밖에 없다. 

카프카 소설의 주인공들이 겪는 운명은 '올바름의 역설'이라고 부를 만한 특성이 있는데, <아메리카>(실종자)에서는 그 점이 더욱 분명하다. <성>에서는 자신의 신분을 인정받기 위한 측량 기사의 투쟁이었고, <소송>에서는 정당한 방법으로 소송을 해서 명예를 되찾겠다는 주인공의 투쟁이었다. 두 주인공 모두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는 점에서, <아메리카>(실종자)의 다채로운 불행이 눈에 띈다. 


이 글의 제목을 '산꼭대기에서 추락하는 단단한 바위'라고 붙인 까닭은 주인공의 선택의 순간에서 자기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 올바른 선택을 한다는 점이다. 여객선에서 화부를 만나서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는가 하면, 외삼촌의 대저택에서 폴런더 씨의 초대를 받았을 때 외삼촌의 심기를 살피지 않고 이에 응한 점, 로스만이 호텔에 왔을 때 자신이 올바르다고 생각한 선택을 했고 해고를 당한다. 


카프카 주인공의 선택과 그에 따른 불행을 보면 어떻게 살아야 성공하는지 잘 알 수 있다. 어떤 선택이나 행동의 근거를 자기 자신에게 두는 경우는 어김없이 바위에 부딪친 계란 신세를 면할 수 없다. 거대한 권력과 관행과 억압의 구조를 태양으로 모시는 해바라기 같은 삶만이 성공할 수 있는 세계에서 카프카의 주인공들은 감히 태양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 자신의 양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추락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아주 엄중한 경고이자 질문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의 양심이나 판단을 근거로 행동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길을 택하지 않을 것이 명확하다는 것이다. 예쁨을 받을 대상은 어디에나 있고, 그쪽을 향해서 예쁜 짓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인생이 무척 고달파진다는 것과 같은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픽노블의 강조점


그래픽노블 <아메리카>(실종자)에서는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 필요하기 때문에 주인공과 그의 앙숙인 들라마르슈, 로스만을 축으로 전개된다. 옥시덴텔 호텔(엘레베이터 보이)에서 브루넬다의 아파트까지 그린 이야기가 작품집에서는 압권이며 카프카 작품의 특성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들라마르슈와 로스만은 퇴물 가수 브루넬다를 호구로 잡고 한몫을 챙기려고 애를 썼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는 낌새를 채자마자 브루넬다의 돈과 귀중품을 모조리 훔쳐 야반도주했다. 들라마르슈는 브루넬다의 예쁨을 받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태도다. 들라마르슈는 외삼촌처럼 성공할 것이다. 전재산을 털려서 아무것도 남지 않은 브루넬다를 마지막까지 돌봐준 것은 언제나 주인공 카를 로스만이었다. 


카프카가 자신의 전 작품에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가장 잘 드러난 장면은 외삼촌의 마지막 편지라고 생각한다. <아메리카>(실종자)의 주제의식도 잘 나타나 있어서 마지막으로 인용한다. 특히 외삼촌이 철칙으로 생각하는 '원리원칙'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에 잠기게 한다. 


친애하는 나의 조카에게


너도 확인했겠지만, 난 원리 원칙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어쩌면 그것은 주위 사람들에게나 나 자신에게나 피곤한 일일지도 모르지. 하짐나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은 바로 그 원칙들 덕분이고, 지금 와서 그것들을 어기고 싶은 마음은 없단다. 그런 연유로 나는 오늘의 사건 이후로 너를 내 집에서 내보낼 수밖에 없구나. 

내게 다시 연락할 생각은 하지 마라. 그래 봐야 소용 없다. 너는 오늘 저녁 내 선의를 저버리고 내 곁을 떠나기로 했지. 너는 평생토록 그 선택의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나는 이 소식을 전할 사람으로 나의 믿음직한 친구 그린 씨를 택했다. 그 친구가 다정한 말로 너를 달래주고, 너의 독립 생활에 길잡이가 될 만한 충고를 해줄 게다. 

사랑하는 카를 네 가족에 관해 좋은 기억은 하나도 떠올릴 수 없다니 정말 애석하구나. 네 새로운 삶에 행운이 깃들기를 빈다. 


변함없는 너의 외삼촌

에드워드 제이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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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1주기에 맞춰 국제 학술대회와 기사, 단행본이 밀려든다. 그 중에서 내 눈에 띄었던 것은 '김수영-이어령' 지상논쟁을 다뤘던 교수신문 기사였다.  (전복의 혁명아 4·19 세대, 자유주의 외치다)


김수영의 상황 인식에 대한 좋은 참고 자료는 김수영과 이어령의 논쟁이다. 그 논쟁의 핵심은 이어령이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문인들의 두려움을 엄살이라고 치부한 데 비해, 김수영은 문인들을 소시민으로 몰고 가는 사회적 조건의 억압성을 문제삼았다는 데에 있다.

「전복의 혁명아 4·19 세대, 자유주의 외치다」


신문 칼럼과 문예지 지면 등을 통해서 펼쳐졌던 지상논쟁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김수영 산문전집』에서는 세 편의 글에서 논쟁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논쟁이 펼쳐진 시기는 1968년 1월~3월 3개월 동안이다. 물론 이어령 교수의 비판에 대한 김수영 시인의 주장이기 때문에 한계는 있겠지만, 김수영 시인의 글을 통해서 쟁점을 찾을 수 있다. 글은 「지식인의 사회참여」, 「실험적인 문학과 정치적 사유」, 「<불온성>에 대한 비과학적인 억측」에서 볼 수 있다.


지난 연말에 「우리 문화의 방향」이 실린 같은 신문에 게재된 「<에비>가 지배하는 문화」(이어령)이라는 시론은, 우리나라의 문화인의 이러한 무지성과 타성을 매우 따끔하게 꼬집어준 재미있는 글이었다. 그런데 이 글은 어느 편인가 하면, 창조의 자유가 억압되는 원인을 지나치게 문화인 자신의 책임으로만 돌리고 있는 것 같은 감을 주는 것이 불쾌하다.

『김수영 산문전집』, 「지식인의 사회참여」








이어령이 근대화해 가는 자본주의의 고도한 위협의 복잡하고 거대하고 민첩하고 조용한 파괴작업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다. 그렇다고 우리나라의 문화인이 허약하고 비겁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김수영의 글에서 강조된 낱말은 '단견'과 '피상적'이라는 것인데, 젊은 비평가가 현상 진단을 진지하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의 문학이 정치 삐라의 남발 같은 인상을 주었다고 해서 그 책임이 그 당시의 정치적 자유에 있다고 생각하거나, 일부의 <문화를 정치사회의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하는 문화인>에게만 있다고 생각하고 그 폐해를 과대하게 망상하는 것은 지극히 소아병적인 단견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김수영 산문전집』, 「실험적인 문학의 자유」


그는 (중략) 해방 직후와 4.19 직후를 예로 들면서, 정치적 자유의 폭이 비교적 넓었던 시기의 문화현상을 <자유의 영역이 확보될수록 한국문예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화하여 쇠멸해 가는 이상한 역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무모한 일방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지극히 위험한 피상적인 판단이다.

『김수영 산문전집』, 「실험적인 문학의 자유」



작가의 책임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작가를 둘러싼 사회적인 구조와 억압을 소홀히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가난해진 것이 개인들의 '노오력'이 부족하고 게을렀기 때문이라는 비판과 닮았다는 점에서 나는 이어령의 탈정치성과 자기계발적 성격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김수영-이어령 논쟁은 '에비 논쟁'으로 부를 만하다


또한 이 필자는 끝머리에 가서 <우리는 그 치졸한 유아언어의 '에비'라는 상상적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다시 성인들의 냉철한 언어로 예언의 소리를 전달해야 할 시대와 대면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소설이나 시의 <예언의 소리>는 반드시 냉철할 수만은 없다.

『김수영 산문전집』, 「지식인의 사회참여」


아민 그레더 그림책 『섬』의 한 장면. 이 그림을 보면 '에비'가 생각난다



이어령은 한국 문단의 작가들이 일종의 '자기검열 기제'를 가지고 작품활동을 하면서 막연한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을 비판하면서 '에비'라는 단어를 꺼냈다.


'에비'란 말은 유아언어에 속한다. 애들이 울 때 어른들은 '에비가 온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을 사용하는 어른도, 그 말을 듣고 울음을 멈추는 애들도 '에비'가 과연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고 있다. 즉 '에비'라는 말은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명사가 아니라 막연한 두려움이며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불안, 그리고 가상적인 어떤 금제의 총칭한다.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인간들은 복면을 쓴 공포, 분위기로만 전달되는 그 위협의 금제감정에 지배되는 경우가 많다.

『김수영 산문전집』, 「지식인의 사회참여」


이어령의 '에비' 비판에 대해서 김수영은 우리들의 에비는 결코 가상적인 금제의 힘이 아니라 구체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명사이며, 가장 명확한 '금제의 힘'이라고 항변했다. 이어령의 주장에 대해서 김수영이 짜증을 내는 부분은 명확한 형태가 없다는 점이다. <질서는 위대한 예술이다>라는 언사는 '정치권력의 시정구호'로서는 알맞지만 문학의 백년의 대계를 세워야 할 전위적인 평론가가 내세울 만한 기발한 시사는 못 된다는 김수영 시인의 비판이 그러한데, 그 중 압권은 아래와 같다. 이 논쟁 과정에서 김수영은 이어령과 완전한 결별을 한 듯하다.


그는 <문학은 권력이나 정치이념의 시녀가 아니다>의 서두부터 <문학작품을 문학작품으로 읽으려 하지 않는 태도, 그것이 바로 문학을 가장 직접적으로 위협하고 있는 형편이다>라고 비난하고 있는데, 이런 비난은 누구의 어떤 발언이나 작품이나 태도에 근거를 두고 한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이런 중대한 말을 실제적인 예시도 없이 마구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혹시 그는 내가 말한 나의 발표할 수 없는 시를 가리켜서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발표할 수 없다고 한 나의 작품은 나로서는 조금도 불온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작품이다.

『김수영 산문전집』, 「<불온성>에 대한 비과학적인 억측」


그런데 이어령 씨는 <불온하다고 보여질 우려>가 있는 작품을 기관원도 단정을 내리기 전에 먼저 불온하다고 단정을 내림으로써 <불온하다고 보여질 우려>가 있는 작품이 불온하지 않게 통할 수 있는 문화풍토를 조성하자는 나의 설명을 거꾸로 되잡아서, <불온하다고 보여질 우려가 있는 작품>이 바로 <불온한 작품>이니 그런 문화풍토가 조성되면 문학이 말살된다고, 기관원이 무색할 정도의 망상을 하고 있다. 이런 망상은 문학이론으로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

『김수영 산문전집』, 「<불온성>에 대한 비과학적인 억측



기사를 검색해 보니 김수영 시인 50주기인 2018년에 이어령 교수의 발언이 소개돼 있었다. (김수영 50주기, 이어령의 회고 “누운 자리 달랐어도 같은 꿈 꿨을 것”)


“돌이켜 보면 논쟁 과정에서 절친한 사이인 김수영 시인과 인간적으로 멀어졌던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는 이어령 교수의 발언을 미루어 보면 이 논쟁 이후로 둘 사이는 완전히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 만세>(김일성 만세 대자보 사건 관련 기사)라는 시를 세상에 내놓아도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 있는 사회를 꿈꿨던 김수영 시인으로서는 젊은 비평가 이어령의 피상적인 비판이 몹시 부당하고 불쾌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김수영과 조지 오웰의 글들을 보면서 개인적으로는 이어령의 글이 다소 한가하게 느껴진다.

김일성 만세 / 김수영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김일성만세’

韓國의 言論自由의 出發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

(-1960년 김수영 <김일성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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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3-01 19: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네가 말했던 거구나.
그런데 좀 어렵네.ㅋ

승주나무 2023-03-01 19:40   좋아요 1 | URL
그렇죠. 좀 어렵죠. 이어령이 김수영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린 건 확실한 것 같아요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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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사미 작품이 대세가 된 시대의 천연기념물


나는 수많은 선생님들로부터 두괄식으로 쓰라고 배웠고 나 또한 두괄식으로 쓰도록 가르쳤다. 수많은 정보와 생산 속도에 익숙한 요즘에는 첫 페이지, 아니 처음 몇 문장에서 승부를 보아야 하기 때문에 첫눈에 독자를 사로잡는 작품을 권장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용두사미 식의 작품들이 쏟아지고 있다. 처음 몇 장면에 모든 힘을 쓴 것 같은 작품은 당연히 오버 페이스에 걸려들어 부실한 결말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나는 두괄식 작품 대신 미괄식 작품을 신뢰하게 되었다. 세대에 걸쳐서 살아남은 문학 고전은 미괄식이 많다. 빌드업 과정은 다소 지루할 수 있지만 뿌려진 떡밥들은 가지런하게 결론을 향해 있다.(이 경우는 '떡밥 회수'가 아니라 '떡밥 수렴'이라고 보아야 한다. 떡밥들이 나름대로의 비중과 의미를 가지고 결론에 수렴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첫 50쪽(또는 첫 100쪽)에 대한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두괄식(또는 용두사미 식) 작품은 첫 50쪽이 흥미롭지만, 미괄식 작품은 첫 50쪽은 지루하고 힘들지만 인사하는 공간 또는 빌드업하는 공간이라고 감안한다. 요즘 대세인 드라마 <카지노>가 바로 빌드업에 충실한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시나리오 공부하는 사람들은 <카지노>를 보면서 많이 배운다고 한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첫 50쪽이 힘든 작품이다. 사회주의자, 빨치산이라는 현실과 불화하는(또는 현실에 부적응하는) 낯선 존재와 독자가 공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플롯은 단순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상가집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들과 아버지가 어우러진 이야기가 끌고 가는 구조이다. 어떻게 보면 『돈키호테』와도 비슷한 면이 있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돈키호테이고 어머니는 산초 판사와 비슷하다.


자네, 지리산서 멋을 뮈해 목심을 걸었능가? 민중을 위해서 아니었능가? 저이가 바로 자네가 목숨 걸고 지킬라 했던 민중이여, 민중!

『아버지의 해방일지』


벼룩을 잔뜩 몰고 온 방물장수 여자에게 방 하나를 통 크게 내주고 푸념하는 아내에게 아버지가 사회주의자, 혁명 운운하는 모습이 작가가 보기에는 어이가 없었지만 더 어이가 없었던 것은 그게 통한다는 사실이었다. 어머니는 '꼬리를 내리다 못해 죄의식에 얼굴을 붉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사상을 가지고 살고 있을까?


우리나라처럼 극우 반공주의가 오랫 동안 주류였던 사회에서는 사회주의자의 '사회' 자만 나와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기 십상이다. '사회적 기업', '사회적 협동조합'조차도 빨갱이 바라보듯 했했기에 이명박 정부가 되어서야 사회적 협동조합에 관한 조례가 통과되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한 사람의 평생에 걸친 사회주의 실천과 책 한 권이라는 시간 동안 사회주의와 사회주의자에 대해서 경험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고정관념과 사회주의 알레르기를 씻어내는 시간이면서 사회주의에 대해서, 나아가 '사상'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다. 이념과 사상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을 경험했고, 연좌제가 엄존했던 수십 년의 시간 동안 '사상'은 마치 고어(古語) 또는 사어(死語) 같은 취급을 당해 왔다. 하지만 사상 없는 사람은 없으며, 사상 없이는 행동이 나올 수 없다. 누구 것을 베끼든 영향을 받든 행동은 사상을 근거로 한다.


내가 볼 때 사상은 '좋은 삶'을 상상하는 것이다. 생존하는 것과 좋은 삶을 사는 것이 충돌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좋은 삶에 대한 욕구는 생존에 대한 욕구를 이길 수가 없다. 전략차가 너무나 압도적이다. 생존에 대한 압박이 커질수록 좋은 삶에 대한 욕구는 박멸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아버지는 좋은 삶을 사수하기 위해서 생존의 압박을 힘겹게 이겨냈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좋은 삶 실천 과정에서 아버지의 온기를 받았던 사람들이 아버지의 장례식장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장례식'이라는 장치다. 장례는 가족이 주최하는 행사다. 가족 전통에서 필수적인 체계이지만 '사회주의자의 장례식'은 가족 제도와 장례 제도, 온갖 전통적인 관계의 모순이 폭발하는 뇌관처럼 작동한다.


느그 아배는 살아서도 혈육 등지고 동무들 찾아가등만 죽어서도 동무들이 먼첨이라냐!

『아버지의 해방일지』


아버지가 빨치산이 됨으로써 집안은 몰락하고 모든 가족들의 앞길은 올스톱이 될 수밖에 없었던 비통한 사연의 최대 피해자였던 작은 아버지의 외침은 그 시간의 무게감이 있기에 울림이 더 크다. 전도유망했던 작은 아버지의 팔자가 아버지로 인해서 나락으로 떨어졌고 평생을 술에 의존해 시한부 판정을 받은 이야기는 애처롭다. 하지만 애처로운 만큼 아버지의 평생 실천이 더욱 돋보인다. 물론 가족을 사회주의 제단에 제물로 바친 아버지의 행동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매일 고민하는 것은 생존 기계가 되지 않기 위한 방법을 구하는 것이고, 나아가 좋은 삶을 살기 위한 방법을 구하는 일이다. 작가의 아버지는 좋은 삶을 완성한 사람으로서 조그만 영광과 자랑스러움, 그리고 거대한 원망을 남겼다. 좋은 삶을 추구하는 사례의 극단으로서 손색이 없다. 양극단에 점을 찍으면 나의 위치가 보이기 때문에 좋다. 좋지 않은 사회에서 좋은 삶은 언제나 손해를 보지만, 바위에 계란을 던지듯 좋은 삶의 도전을 이어가지 않으면 사회는 더욱 나빠지기만 할 뿐이다. 좋은 사회는 좋은 삶의 실천이 쌓일 때 가능하다면 선택권은 나에게 있는 셈이다. 좋지 않은 사회에 편승한 삶을 살 것인지, 가시밭길을 가더라도 좋은 삶을 포기하지 않을 것인지. 참 어려운 선택임은 분명하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신이 나서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마흔 넘어서야 이해했다 - P27

작은아버지는 평생 형이라는 고삐에 묶인 소였다. 그 고삐가 풀렸다. 이제 작은 아버지는 어떻게 살까? - P41

바위는 서늘하고 살구나무 늙은 입사귀는 바람에 살랑이고 그 틈으로 잔햇살이 너울거리고, 소설이나 읽다가 단잠에 빠져들기 좋았다. - P204

미국과 싸워 지고 반역자가 된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미국과 싸워 이긴 베트남 여인이 찾아왔다. - P234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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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3-02-19 1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삶에 대한 욕구는 생존에 대한 욕구를 이길 수가 없다.] 이 말씀이 지금의 사회를 관통한다고 생각됩니다.
마음은 언제나 인간다움을 추구하지만, 생계앞에 굴복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참 고통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승주나무 2023-02-19 19:23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요즘 저를 괴롭히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좋은 삶의 욕구와 생존의 욕구를 조화시키는 것은 양자택일을 피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 같습니다. 저는 능력부족으로 항상 양자택일로 빠지곤 합니다. 좋은 책은 좋은 친구를 부른다고 하는데,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고 이렇게 생각을 남긴 덕분에 좋은 친구를 알게 되었네요. 이 맛에 알라딘을 하는 것 같아요. 댓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필경사 바틀비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허먼 멜빌 지음, 공진호 옮김,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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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드라마 <직장의 신> 짤을 볼 때마다 소설 <필경사 바틀비>가 생각나고, 

소설 <필경사 바틀비>를 읽을 때마다 이 드라마가 생각난다. 


바틀비는 '거절의 신'이기 때문에 거절의 이미지로 다가갔을 때 공감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거절 잘해?"


참석한 중학생들은 모두 거절을 잘 못 한다. 거절도 훈련이 필요하다는 말에 공감했다. 


"거절 당해본 적 있어?"


의외로 거절은 많이 안 당해봤던 것 같다. 거절의 범위를 넓힌다면 이력서를 수십 통 썼는데 번번이 낙방하거나 수십 군데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는데 거절당하거나 일상의 세세한 상황과 거절들의 사례를 들자 이제야 뭔가 떠오른 표정들이다. 덕분에 거절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 근육을 좀 키워야한다는 말도 잘 녹아들었다. 


중학생들과 쟁점을 모았더니 이렇게 나왔다. 


(1) 바틀비가 구치소로 가는 것을 내버려둔 변호사는 옳지 않다 (A) 

(2) 바틀비가 사무실에 기거한다는 사실을 숨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A) 

(3) 바틀비가 자신이 꼭 해야 하는 일을 거절했을 때 주인공은 양보를 해줬는데 좀 더 단호한 조치를 취했어야 하지 않았나? (C) 

(4) 바틀비가 필경 업무만 전담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다 VS 부당하다 ★★ (B)

(5) 사장이 바틀비를 너무 오냐오냐했다 VS 바틀비를 인간적으로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 (B)

(6) 바틀비도 이제는 과거를 잊고 어느 정도 현실과 타협해야 한다 (D)


4번과 5번이 호응을 많이 받아서 그 주제 가지고 토론을 했다. 질문도 함께 모았는데, 아이들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었다. 


(1) : 바틀비가 왜 사람들의 말을 거절했을까? (왜 고립됐을까?)

(2) 바틀비는 왜 주인공의 부탁을 거절했을까? 

(3) 바틀비는 주인공이 자신의 집에서 생활하자고 한 제안을 왜 거절했을까?

(4) 바틀비가 그렇게 행동한 것이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쳤는지 아닌지?

(5) 바틀비가 중간에 자신이 필경사 하는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시력 말고도 뭔가 있지 않을까? 

(6) 바틀비는 왜 거절왕이 되었을까? 


토론을 하면서 사장에 대한 비판이 많았고, 바틀비의 행동에 대한 비판도 많았다. 하지만 <필경사 바틀비>의 경우는 독특성을 감안해야 하는데, 그 독특성이라는 것은 비판과 토론이 제한된다는 점이다. 바틀비는 역대급 캐릭터인 만큼 배달 불능 우편물(Dead Letter) 담당으로 일하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해고당했다는 것밖에 알려진 것이 없고, 그마저도 소문으로 처리되었다. 그러니까 바틀비는 이해의 대상이지 비판이나 토론의 대상이 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바틀비가 다른 행동으 할 여지가 있다면 그로 인해 비판하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우리는 바틀비의 행동을 이해하기 바쁘다. 사장에 대한 비판도 이런 이유 때문에 제한될 수밖에 없다. 사장은 단지 사람 좋은 변호사로서 불편한 이야기를 하기 싫어하는 전형적인 생활인이다. 바틀비가 사장에게 한 행동을 생각한다면 사장은 거의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것도 소설에서나 가능한 대응이지 현실에서는 곧바로 112행이 아니겠는가?

고민 끝에 우리는 소설 속에서 다시 소설을 써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배달 불능 우편물을 취급할 당시 바틀비는 전쟁으로 인해서 수신이 불가능해진 사례를 주로 접수했을 것이고, 그 중에서는 바틀비에게 정신적 충격을 주었던 사례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을 것이고, 이 모든 불행한 죽음과 반드시 전해져야 하는 사랑의 메시지가 이렇게나 많이 소멸된 것은 우리가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한 번의 인생인데 군 징집이라든지, 무리한 공격 명령이라든지, 여러 가지 사정들 떄문에 거절할 수 없이 죽음의 종창역으로 끌려가버린 인생들을 보면서 바틀비는 거절하는 방법을 필사적으로 연마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 결과를 불쌍한 우리 변호사 사장님한테 시전한 것은 아닐까?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또 다시 '이해'와 관련되는데, 독자가 바틀비를 이해하는 폭의 차이에 따라서 이야기가 달라지기도 하지만, 등장인물들이 바틀비를 이해하는 폭 역시 천차만별이다. 등장인물들에게도 바틀비는 무척 혼란스러운 인물인 것이다. 

예순살 먹은 영국인 터키는 상식과 상례에 의거한 요구가 정당했다고 사장을 옹호했고, 니퍼트는 바틀비를 당장 해고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너트는 바틀비 씨가 살쪽 돌았다고 보았다. 바틀비의 거절이 더 심해지자 터키는 바틀비의 눈탱이를 밤탱이로 만들어놓아야겠다며 달려들 기세였고, 니퍼트는 바틀비의 행동이 확실히 비정상적이긴 하지만 지나가는 변덕일지 모르겠다고 관대하게 태도를 바꾼다. 왜냐하면 니퍼트가 맥주에 살짝 취했기 떄문이다. 나는 바틀비가 법률사무소로 온 것은 불행했던 삶 중에서 약간의 쉼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변호사가 바틀비를 완전히 이해했다면 소설은 전혀 다른 결말로 갔을 수도 있었는지도 모른다. 변호사는 바틀비를 반만 이해함으로써, 그러니까 상식의 눈으로 바틀비를 바라봄으로서 불행한 결말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본다면 바틀비가 불행한 최후를 맞이한 데는 변호사의 책임도 약간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수업을 위해서 인물행동분석표를 만들어 봤다. 단편이니까 이 정도지 장편이라면 여러 장 나왔을 듯. 장편이면 이런 표를 안 만들지. 중학생들과 토론 수업 한 번 하겠다고 이런 노가다를... 내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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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의 도시 - 전쟁의 바다를 건너온 아이들의 아이들의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홍지흔 지음 / 책상통신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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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작가님이 직접 보내주신 책을 얼른 읽고 쓴 것입니다.



초등학생들과 제주4.3 이야기를 하면서 생각한 것은 슬픈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너무 상세하고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게 과연 옳은가 하는 의문이었다. 그렇다고 그런 부분을 최소화하면 감성적인 이야기가 되고 본의 아니게 축소와 왜곡이 될 것 같아서 몇 년 동안 뚜렷한 결론도 없이 고민만 했다. 제주의 초등학교 선생님들도 매년 4월만 되면 이 부분 때문에 고민에 잠기는데, 아! 좀 있으면 4월이다. 나는 고심 끝에 논어의 도청도설(道聽塗說,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한다는 뜻)을 원칙으로 삼았다. 제주4.3을 해석하고 꺼낼 만큼 숙성된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한국전쟁에 대해서 같은 고민과 어쩌면 도청도설의 원칙에 유의하지 않았나 착각이 들 정도의 만화 작가를 발견했다.

홍지흔 작가의 한국전쟁 만화 『건너온 사람들』은 작가 어머니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어린이의 시선으로 그렸기 때문에 참신하고 좋았다. 대개 어른들이 옛날 이야기처럼 들려주는 한국전쟁 이야기를 어린이가 해주는 책은 좀처럼 만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후속작인 『사이의 도시』가 나왔다. 『건너온 사람들』이 거제도 피난 이전까지의 이야기였다면, 『사이의 도시』는 거제도 생활에서부터 시작해서 부산에 정착할 때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특히 나는 부제로 써도 될 것 같은 이 말이 참 맘에 들었다.


아무도 죽지 않고

아무도 다치지 않고

아무와도

헤어지지 않는

전쟁 이야기

『사이의 도시』


한국전쟁을 어릴 적 시선 그대로 만화로 옮겨 온 『건너온 사람들』과 『사이의 도시』. 홍지흔 작가의 어머니의 실제 이야기를 토대로 만든 만화.



하지만 아무도 죽지 않고 다치지 않는 이야기라고 해서 미화하거나 축소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자극적인 장면에 가려졌던 서늘한 현실을 꿰뚫는다고나 할까? 작가 어머니의 피난 생활 기억에서 되살린 대화 중 유난히 인상적인 대목을 옮겨적어 봤다.


인민군에게 끌려갈까 봐 남쪽으로 피해 왔는데 이번엔 방위군이라니...

『사이의 도시』


아들을 징집당해 어두워진 부모의 대화를 보니 '곰도 무섭고 범도 무서운 세상'이라는 제주4.3 당시의 유행어가 떠올랐다. 낮에는 군인과 경찰들에게 시달리고, 밤에는 무장대에게 시달린 당시 제주인들의 심정을 담은 말이다.


아이들이 '집에 돌아가면'이란 말을 하지 않게 된 게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네요.

『사이의 도시』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는 당시 할 법한 말들이었지만 묘하게 정곡을 찌르는 면이 있다. 경복이는 이북에 있을 때 고등어를 질리게 먹어서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피난 오고 나서 고등어를 끝까지 안 먹고 남긴 한 할아버지를 보면서 분개한다. 그렇다고 식성이 완전 바뀐 것은 아니지만 고등어를 바라보는 시선이 완전히 바뀐 것은 사실이다.


훈련병들은 밥 안 줘요?

죽지 않을 만큼만 줘. 아냐, 조만간 진짜로 굶어 죽을지도 모르지.

『사이의 도시』


피란민들의 임시 숙소로 사용하고 있는 폐교가 국민방위군의 훈련소로 사용하게 되자 "전시 상황이니 군인 훈련이 더 먼저지, 어쩌겠습니까." 하고 급히 묵을 곳을 찾아서 뿔뿔이 흩어지는 사람들의 번고롭고 고단한 피난생활이 보이는가 하면, 배고픈 훈련병이 엄마가 준 떡을 먹다가 군인에게 발각돼 엄마 보는 앞에서 개처럼 매맞고 질질 끌려가는 모습은 만화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감정일 것이다. 그 장면이 오래도록 남았다.


문학은 형상화의 예술이다. 작가가 주제넘게 상황을 설명하려 해서도 안 되고 오로지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말하게 하는 것이라면, 홍지흔 작가의 두 만화 『건너온 사람들』과 『사이의 도시』는 작위적인 장면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만화를 통해서 한국전쟁을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에게 어쩌면 '너무 작은 이야기'라는 아쉬움이 느껴질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압축한다는 것과 절제한다는 것은 감정을 지뢰처럼 숨기고 있기 때문에, 담담한 문장과 컷들을 보면서 갑자기 감정이 터져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편안한 장면도 긴장하면서 보게 되는 게 이 만화의 가장 큰 매력인 것 같다.



홍지흔 작가님 잘 읽었습니다.

아무도 죽지 않고
아무도 다치지 않고

아무와도
헤어지지 않는
전쟁 이야기 - P37

"왜 우는지 이유나 알자. 내가 돈 너무 늦게 주고 기다리게 해서 화났어? 응?"
"대답이. 말이.. 안 나와요. 이유가 너무 많아서." - P136

"어쩌나... 하필 오늘따라 양이 부족했는지 남은 쌀이 이것뿐이구나."
"오늘따라는 무슨, 항상 부족하게 배당이 오잖아요. 분명 위에서 누군가 떼먹고들 있는 거야."
"거 애들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를..." - P154

"아이들이 ‘집에 돌아가면’이란 말을 하지 않게 된 게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네요." -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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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2-15 13: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그림 잘 그렸다!!
그러고 보면 은근 셀럽이야. 잘 보여야겠어.ㅎㅎ

승주나무 2023-02-15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저도 황송해서 죽는 줄 알았답니다 ㅎㅎㅎ 셀럽은 무슨 ㅎ